외전. 봄의 성 (3)
-저는 아렐르가 조금 더 어깨에 힘을 뺐으면 좋겠어요.
지난 겨울밤이었다. 아롈은 핏발이 선 눈으로 서류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기실 그 종이쪼가리에 적힌 내용은 그리 고민해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겨울이 되어 커튼을 전체적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벽지 색도 바꿀 것인가, 바꿀 것이라면 어떤 색으로 바꿀 것인가 적어놓은 견적에 불과했다. 그 때 아롈의 머릿속은 전쟁 이야기로 꽉 차있었다.
대 웨데나 전쟁, 아니 코시카-웨데나 전쟁이 벌어졌다가 끝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받았다. 폐주의 누이들이 시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어머니가 그 시체를 웨데나에 보냈다는 말도 들었다.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참담함과 불안함이 물방울처럼 끓어올랐다.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했다. 진정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두려움, 폐주의 누이들과 아롈 자신의 위치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무엇이 다를까 하는 자조, 이미 약속을 받았으니 설마 죽기야 하겠느냐는 불안.
그리고 죄책감과 미안함과 후회.
폐주의 누이들이 시체가 되었다면, 숙청도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롈은 코시카 무관의 인사 이동에 대해서 자세히 묻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확실한 일이었다. 행정의 유지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갈아치울 수는 없겠지. 그러나
아롈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롈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의 뜻이고, 황실의 푸른 피를 따라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였다. 패배의 책임은 그들 역시 공평하게 짊어져야 할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미안한 것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세시안이 아롈의 미간을 누르듯이 문질렀다. 그제야 아롈은 그의 존재를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눈 안쪽이 시리듯이 아팠다. 살고 싶은 이유 중 가장 묵직한 것이 사람의 형상으로 눈에 박혔다. 그가 아롈의 오른손을 끌어다 입 맞추었다.
펜을 든 손날이 잉크가 묻어 새카맸다. 종이를 보니 이미 마친 계산을 하고 또 해서 엉망이었다. 허탈했다.
-잠깐 쉬었다가 할까요?
그는 아롈의 뒤로 돌아와 큼지막한 손으로 어깨를 쥐었다. 엄지가 어깨뼈 아래를 꾹 눌렀다. 품위 없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악!
-힘 빼요.
-아픕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면 당연히 아프지요.
아롈은 몸을 웅크리고 끙끙거렸다. 세시안은 솜씨 좋게 특별히 아픈 부분만을 골라서 손을 움직였다.
그 말은 그 때 나온 말이었다.
-저는 아렐르가 조금 더 어깨에 힘을 뺐으면 좋겠어요.
아롈은 한순간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힘을 빼느냐고 짜증을 낼 뻔 했다가, 이내 함의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부드러운 설명이 이어졌다.
모든 일에 전부 최선을 다하고 경계하며 걱정할 수는 없다고.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할 수도 없고, 혼자 끌어안을 수도 없다고.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생각하자고.
-제가 옆에 있을 테니, 같이 생각해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젖혔다. 멍하니 거꾸로 뒤집힌 얼굴을 바라보다가 품위 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몸을 똑바로 세웠다. 몸을 돌려 등받이를 잡고 의자에 올라앉았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다. 신기하게도 안심되었다. 아롈은 조그맣게 속삭였다.
-하지만 걱정됩니다.
-저는 걱정되는 게 아니라 무서운데요.
그가 흐릿하게 웃으며 아롈을 끌어안았다. 아롈은 그의 박동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세시안은 아롈을 놓으며 손가락으로 붉은색 천을 짚었다.
-그러니까, 벽지는 이 색으로 할까요?
아무렇게나 고른 색이었으나 실제로 도배해 보니 상아색 커튼과 어울려 묵직하게 예뻤다.
아롈은 그림자를 다시 한 번 노려보았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수는 없다. 고작 그림자에 이렇게 완고하게 구는 것은 심력의 낭비다. 남편이라면 분명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무섭지만 하찮은 것에 일일이 맞서 싸울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아롈은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며 발을 내디뎠다.
아롈은 분명 세시안이 아롈보다 여러 모로 세상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도무지 그의 유연한 태도나 사교성을 모방할 수 없었다. 설령 다소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이것이 아롈의 방식이었다.
스스로에 발소리에 놀라서 어깨가 크게 들썩였고, 그 때마다 일그러지는 그림자에 한층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걸음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숨이 막혔다. 걸음은 점점 빨라져 나중에는 숫제 굴러내려오는 것에 가깝게 달리게 되었다.
"하아. 하아."
이윽고 계단을 전부 내려와 넓은 복도로 나오자 참았던 숨이 터져나왔다.
아롈은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을 전부 내려왔다. 그림자는 더이상 무섭게 앞을 가로막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아롈의 등 뒤에 있었다.
손에 든 촛대를 꾹 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관자놀이까지 맥박이 치고, 손끝까지 붉은 피가 돌아 짜릿했다. 무척 사소한 일이었지만, 승리는 승리였다. 공포는 고양감으로 바뀌어 아롈을 꽉 채웠다.
"아렐르?"
따뜻한 음성이 아롈을 불렀다. 어두운 복도에 세시안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는 아롈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웬일로 내려왔어요?"
아롈은 빠르게 걸어가 그에게 안겼다.
"아렐르?"
그는 자연스레 아롈을 끌어안고는 머리카락이며 등을 쓸어내렸다. 긴장이 풀리자 절로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래.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고개를 쳐들고 저항한들, 그래서 심력이 소모되면 뭐 어떻단 말인가?
-제가 옆에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아롈은 괜찮았다.
"대체 어딜 가려고 이러십니까?"
동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아롈은 성문 앞에 준비된 말에 올라타면서 툴툴거렸다.
-일어나세요.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
-공주가 아닙니다.
-알겠어요. 잠자는 숲속의 여대공 전하. 일어나셔서 저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한 시간 전, 세시안이 아롈을 깨웠다. 실컷 어리광을 부리느라 늦게 잠든 아롈은 눈을 뜨기도 힘겨워했다. 침대 옆 협탁을 손으로 더듬거려 시계를 찾았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정확히 새벽 네 시 십 분 전이었다. 숙면을 방해받은 아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연인을 노려보았다.
-성이 습격이라도 당한 겁니까?
-그건 아니고요.
-아니면 가장 신실하신 두 분 폐하께서 돌아오라고 하십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아니면 부고라도 왔습니까?
-적어도 저희가 아는 사람 중에는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최소한 세 시간은 지난 뒤에 깨우십시오!
신경질을 내고 팩 돌아누웠다. 그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부탁했다.
-미안해요. 아렐르가 한 번만 양보해주면 안 될까요?
그가 아롈의 뺨을 쓸어내렸다. 아롈은 이질적인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의 복장을 알아보았다. 그는 침의 차림이 아니라 모자부터 장갑까지 갖추어 성장하고 있었다. 소매 끝이며 옷단에 금실로 수를 놓고, 크라바트를 카메오로 고정하여 어딘가의 연회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법했다. 남자가 준비하는 데에 여자보다 시간이 적게 걸린다고는 해도 꽤 오랜 시간 공들였을 것이 분명한 차림이었다.
세시안은 사슴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이불을 움켜쥔 손을 들어올려 손가락 끄트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손끝이 화끈거렸다.
-제게는 꽤 의미 있는 일이라서요.
아롈은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항상 수면부족으로 힘겨워하는 그가 아롈보다 먼저 일어나는 날은 드물었다. 그 말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꼭 지금 일어나야 합니까?
-그래야 시간이 맞을 것 같은데요.
-저도 성장해야 합니까?
-아뇨. 아렐르는 편하게 입도록 해요.
아롈은 별일이 아니면 가만 있지 않겠노라고 투덜거리며 일어나 앤을 불렀다. 앤은 눈곱도 떼지 못하고 달려와 아롈의 얼굴을 씻기고 외출복을 입혔다. 그 동안 아롈은 졸다가 세 번쯤 고꾸라질 뻔했다.
그렇게 옷을 걸치고 나와보니 이 시간, 바깥은 아직 동도 트지 않아 새벽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밤이었다. 치장에 제법 시간을 쏟았는데도.
어둠 속에서 세시안이 빙긋 웃었다. 그의 뒤에는 호위 겸 시종으로 데려온 벨망 경이 역시 말을 타고 있었다. 무장을 하지 않은 부부와는 달리 그는 등에 총을 매고, 말 안장에 검을 비스듬히 매달아놓았다.
"가보면 안다니까요?"
"정말, 꼭 이 시간이어야 합니까?"
"네. 미안하군요."
아롈은 한숨을 삼키며 미간을 문질렀다. 고개를 숙이자 잔머리가 뺨을 간질였다. 화장은커녕 머리 손질을 제대로 할 시간도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은 엉덩이를 넘겨 허벅지까지 닿는 길이였다. 이블린에서는 두세 명이 동시에 붙어 손질하는 게 보통이니만큼, 제대로 된 모양은 애초에 무리였다. 대충 세갈래로 땋아 둥글게 말아 틀어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갈까요?"
세시안은 자신의 말을 몰아 앞으로 가볍게 달려나갔다. 아롈은 그의 뒤를 따라 박차를 가했고, 벨망 경이 따랐다. 덤불조차 별로 없는 평탄한 평원이었으므로 어둠 속에서 말을 달리는 일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약 반 시간 정도 달리자, 저 멀리 아슴푸레하게 새벽빛이 밝아왔다. 일출 직전의 파르스름한 빛 아래로 언덕 하나가 나타났다. 세시안은 언덕 아래에서 말을 멈추고 내렸다. 아롈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이 곳은."
세시안은 그와 아롈의 말 고삐를 벨망 경에게 넘기고는 아롈의 뺨에 입맞추었다.
"같이 올라가 주겠어요?"
아롈은 그의 손을 잡고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서도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위가 점차 밝아지며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덩굴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꽂아놓은 가느다란 나무막대기들, 여리게 뱅글뱅글 회전하는 식물의 줄기, 넓적한 이파리. 그리고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십자가.
포도밭이 딸린 작은 수도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