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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봄의 성 (4)


 아롈은 건물을 훑어보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듯했다. 말단 성직자란 새벽녘 종달새보다 부지런하게 일어나야 하는 족속들이다. 누군가 살고 있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도 없고, 벽에 커다란 금이 가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포도 덩굴이 타고 자랄 수 있도록 꽂아둔 막대기들이 비뚜름하게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새벽 기도라도 하러 오신 겁니까?"

물으면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세시안은 빈말로라도 독실한 신도라고 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로렌 황족으로서 모범이 되기 위해 주일마다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 앉아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미사 시간에 간간이 졸았고, 아롈과 단 둘만 있을 때에는 식전 기도를 빼먹었다.

"그럴 리가요."

역시. 아롈은 불퉁하게 물었다.

"그럼 무슨 죄라도 지으셨습니까?"

세시안은 빙긋 웃었다.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런 새벽에 아렐르를 끌고 올 만큼 큰 죄를 짓지는 않았는데요."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로."

"잠시만요."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뚜껑을 닫았다가 하늘을 한 번 보고 다시 열었다. 그럴 때마다 바다거북 등딱지로 만든 뚜껑이 딱딱 소리를 냈다. 아롈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맷부리에 사슴뿔을 형상화한 금빛 수가 반짝였다. 모자부터 신발까지, 한눈에 봐도 고심해서 골라 치장했을 것이 분명한 의상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코트와 바지는 평소에 즐겨입는 차분한 녹갈색이었지만 코트 안에 받쳐입은 조끼가 공작새 꼬리깃처럼 반들거리는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그 위에 금실로 가득 수를 놓고 군데군데 자잘한 진주를 달아 아주 화려해보였다. 저 천은 분명 올 봄에 유행하기 시작한 재질이었다. 크리스틴이 뽐내듯 입고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대체 언제 맞췄을까. 지난 겨울, 아롈만큼이나 그도 바빴다. 시아버지는 건강이 많이 나아진 듯했으나 아들에게 지워놓은 짐을 조금도 다시 가져가지 않았다. 부부가 나란히 밤을 새는 날이 이어졌다.

옷이라면 정의관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본인이 사치스러운 성품은 아니라해도 세시안은 로렌의 세르였다. 성장할 만한 입성은 얼마든지 갖추고 있었고 그 중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도 많았다. 그런데 굳이 새 옷을 살 필요가 있었을까.

"새 옷은 무슨 일로 맞추셨습니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예?"

"쉿."

다섯 번째로 시계를 확인한 세시안은 아롈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줄래요?"

"무슨 일이십니까?"

"묻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아롈은 한숨을 삼켰다. 어째 일어난 뒤부터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세시안은 아롈의 손등에 다시 한 번 입맞추고는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무심코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그의 어깨 너머로 저 멀리 벨망 경이 보였다. 벨망 경은 언덕 아래에서 말 세 마리를 거느린 채 서 있었다. 말은 세 마리 모두 색이 달라서 어두운데도 눈에 띄었다. 벨망 경이 타고 온 검은 말, 아롈이 타고 온 갈색 말, 그리고 세시안이 타고 온 백마.

옷만 새 것인 줄 알았더니 말도 새 말이었다. 세시안은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키워온 애마는 없었지만 몇몇 말을 돌려타곤 했다. 승마 실력이 아주 뛰어난 편이 아니었으므로 순한 말을 주로 탔다. 대부분 서부 혈통의 갈색 말이었다. 저렇게 얼룩 없는 흰 색에 몸집 좋은 동부산 말은 드문데.

잠깐, 백마?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잘 보일 걸 그랬지요.

아.

불현듯 달콤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롈은 눈을 깜빡였다. 향긋한 장미처럼 소중한 기억이었으나, 장미 꽃다발 속에 감춘 듯 묻혀 있던 기억이기도 했다. 꽃송이를 헤치고 기억을 뽑아올리자 구애의 말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옷도 신경 써서 입고, 말도 새하얀 백마로 타고 오고…….

뒤늦게 알아챘다. 그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여기는 기억에 남아있던 바로 그 장소, 처음 만났던 수도원은 아니었다. 크리스틴이 몸을 의탁하던 그곳에 비하면 이곳은 그야말로 아담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러나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할 만 한 요소는 전부 갖추었다. 언덕, 흰 수도원, 포도밭.

그리고 여명.

세시안의 등 뒤로 샛노란 빛이 번졌다. 두근거렸다.

예전에 무심코 말한 적이 있었다. 나른하게 땀 밴 몸을 끌어안은 채로, 혹은 서류를 들여다보며 왼손으로 왼손을 잡은 채로, 시답잖은 잡담부터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까지 대중없이 쏟아내던 어느 날에. 처음 만났던 날에 하루 종일 걱정하고 후회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멍청하게 대처해서 다시 하고 싶었다. 혹시 첫 만남부터 밉보인 건 아닌가 해서 아침을 넘기지 못 해서 데운 술 한 모금으로 대체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줘야지!

그래서인지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아롈은 빠르게 스스로의 모습을 점검해보았다. 성장도 하지 않았고, 머리도 단출하게 올렸으나 예전 그 밤을 샌 몰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충분히 잤고, 깨끗한 외출복을 입었고, 옅게나마 화장도 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대답이겠지. 그 때의 대화는 너무나도 단출해서 아무리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라도 고스란히 외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안녕하세요. 세시안입니다. 아롈입니다.

어떤 대답이 좋을까? 코시카의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입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에는 아직 성교회 세례를 받지 않았고, 아롈은 정교회 신자였다. 그럼 선택지가 '코시카의 옐레나 ​파​블​로​브​나​입​니​다​'​와​ '아롈입니다' 둘 밖에 남지 않았다. 아,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도 할까? 이건 남자가 먼저 하는 말이던가? 상투적이지만 남편의 놀이를 망쳐버리지 않을 법한 적당한 인사 몇 가지가 물망에 올랐다. 마침내 우선 옐레나 파블로브나로 소개하고 아롈이라 불러달라 덧붙이려고 마음먹었을 때, 사뭇 비장한 얼굴을 한 그가 아롈의 앞에 다다랐다. 마치 처음 만난 양.

이 자리에는 '세르'라고 인사해줄 루이 앙투안이 없었다. 새로 창설한 기사단의 부단장-아무리 황제의 사생아라고 해도 공식적 행정직을 거쳐보지 않은 그에게 대뜸 단장 자리를 줄 수는 없었다-으로 잠정 임명된 그는 이블린에서 인선을 돕고 있었다. 아롈은 잠시 고민하다가 '숙녀답게' 생긋 웃으며 먼저 묻기로 했다.

"누구십니까?"

​"​З​д​р​а​в​с​т​в​у​й​т​е​(​안​녕​하​세​요​)​?​"​

말이 충돌했다. 세시안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놀란 것은 아롈도 마찬가지였다.

한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써왔던 모국어였지만, 일 년 가까이 들을 일이 없었으므로. 발음은 서투르고 억양도 이상했지만, 분명 코시카와 그 근방 속국에서 사용하는 북쪽 캬트 어였다. 아롈은 미간을 문질렀다. 세시안은 페란토는 모국어에 가깝게 구사했고, 동부 레온어와 중부 듀츠 어도 수준급으로 할 줄 알았으나 캬트 어 실력은 바닥이었다. 어릴 적 교양으로 잠시 배웠다고는 하지만 키릴 문자조차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아롈은 그에게 캬트 어를 가르친 적이 없었다.

"Моя ​п​р​е​к​р​а​с​н​а​я​ ​л​е​д​и​(​아​름​다​우​신​ 아가씨)."

세시안 쪽의 대답이 빨랐다. 아롈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여기서 캬트 어로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갈리아 어로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남편의 캬트 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종잡기 어려웠다. 캬트 어로 대답하면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나? 과찬이십니다 따위의 겸양의 말까지 공부해왔을까? 고민하는 사이 세시안은 서투른 연극배우처럼 준비해온 말을 신중하게 읊었다.

"Меня зовут ceсиан(저는 세시안이라고 합니다)."

아롈은 감동을 깨트리지 않으려 볼 안쪽을 힘껏 깨물었다. 울림이 깊은 목소리는 서투른 이국의 말을 읊는 도중에도 아주 근사했지만, 그 어휘 수준이 심각하게 떨어진 탓이었다. 물론 처음 만난 날 그가 건넨 인사는 저 수준이 맞았다. 하지만 그 때의 그는 이토록 치장하고 있지도,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긴장하고 있지도 않았다. 미사여구로 치장한 시라도 읊어야 어울릴 법한 태도로 저런 단출한 자기 소개라니.

웃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지면 캬트 어 선생을 탓하라고 해야지. 입술이 씰룩거렸다. 대답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터져버릴 것 같아 아롈은 배에 힘을 잔뜩 주고 빠르게 인사했다.

"Я, Елена Павловна Киена(옐레나 파블로브나 키예나입니다)."

"Могу ли я сказать, что вы настолько ​о​с​л​е​п​и​т​е​л​ь​н​о​ красивы, и этот жалкий человек влюбился в вас(눈부시게 아름다우신 탓에, 이 가엾은 사내는 그만 당신께 반하고 말았답니다)."

"풋."

입을 가렸지만 늦었다.

"시, 실례, 푸후훗."

언제나 그렇듯 외국어로 쓰여진 부분은 번역기입니다. 
조금 더 그럴듯하게 낭만적으로 써보려고 며칠간 노력했고 엎고 또 엎었는데 이게 최선이네요. 연참하고 싶었는데 실패했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안으로 다음편 써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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