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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봄의 성 (6)


 입술이 덮였다.

 눈 한 번 깜빡하기도 전에. 발끈하여 토해낸 숨이 채 식기도 전에.

 아직 봄인데 뜨거웠다. 손목을 잡은 손도, 허리를 끌어안은 팔도, 삼킬 듯이 빨아들이는 입술도. 유치한 입씨름을 하는 사이 해는 이미 높이 떠올라 사위가 환했다. 눈을 뜨고 있으니 고스란히 보였다. 녹음 같은 눈에 어른거리는 욕망이. 숨을 들이킬 때마다 불덩이 같은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아롈은 채 입맞춤을 돌려주지도 못하고 홀린 듯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저런 얼굴을 할 때는 항상 뱃속이 간질거리며 충족감이 넘실넘실 차올랐다. 문장으로 써놓은 듯 명징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해. 

 사랑. 아버지가 헬레네에게 주었고, 사샤가 나탈리야에게 주었고, 아마 고모가 귀천상혼한 고모부에게 받았을, 그런 '사랑'. 코시카 황족으로 태어난 이들조차 명예와 지위를 버리게 만드는 간절한 감정. 다른 사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듯 타오르는 시선이 쏟아져내려 눈이 부셨다. 매끈한 이마부터 손가락 끝까지 몸 속을 도는 피가 따끈하게 달아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갉아먹듯 아롈에게 다정했으나 그것은 타고난 천성에 더해 그의 불우한 과거가 만든 다정함이었다. 아롈은 그 다정함에 반하여 갈구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그 때의 세시안은 아롈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롈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아내 자리에 와 앉았더라면 그런 다정함을 똑같이 베풀어주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맞대듯 비비고 있던 입술이 슬며시 올라갔다. 세시안은 고작 아롈이 부른 이름 한 토막에 이렇게 무너져내렸다. 아롈은 세시안에게 이렇게나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이 된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애정. 이 사람이 있는 한 아롈은 다시 홀로 버려질 일이 없다. 맹목적인 신뢰가 가져다주는 황홀함이 신주처럼 달콤했다. 아롈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시험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험이란 확신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아롈은 사랑의 영속성과 완전무결함을 믿는 소녀였다. 아롈이 아는 '사랑'은 결코 버려지거나 변색하여 시드는 것이 아니었다. 죽는 순간까지 가슴에 파묻히는 것, 그런 사랑만을 보고 자라 동경했다. 아롈은 세시안이 자신에게 주는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순간 그 감정은 순수하고 완벽해졌다. 만약이라는 말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긴 입맞춤이 어느 순간 끝이 났다. 마주 물었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면서 폐가 익은 것처럼 가쁜 숨이 뿜어져나왔다. 숨결이 젖은 입술에 달라붙었다. 

 "이제 제 차례인가요?"

 "예."

 대체 무슨 말을 준비해왔을까. 숨을 고르는 사이, 세시안은 허리를 안은 손을 놓고는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랐다. 그 때의 세시안은 아롈의 손등을 높이 들어올려 입술에 가져갔다. 대공가의 후계자인 미셸이나 필리프조차도 아롈에게 예를 표할 때에는 무릎을 꿇거나, 하다못해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 그러나 그는 로렌 황제의 하나 뿐인 후계자. 동등한 신분인 아롈에게 허리 숙이지 않는다. 무릎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손등에 입맞추었다. 남성이 신분 대등한 여성 앞에서 무릎 꿇을 이유는 몇 없다.

 "Елена."

 아무런 경칭 없이 아롈을 옐레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세시안을 세시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만큼이나 드물었다. 실제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서명하면서 문자로 보는 것은 익숙했고, 스스로 소개할 때나 옆에서 시중인이 대신 소개의 말을 할 때 듣는 것도 익숙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리는 이름은 지독하게 낯설었다.
 
 그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어렸다. 아롈은 그 다음에 나올 말을 삼 초 빠르게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번개처럼 예상한 그 말이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ты выйдешь за меня(저와 혼인해 주시겠어요)?"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쾅 내려앉은 듯했다.

 상황극을 빼고 생각한다면 이미 결혼한 남편이 열렬히 입맞추다 말고 다시금 청혼하는 셈이고, 상황극을 생각하면 이제 막 통성명한 남자가 다짜고짜 아름다우셔서 반했다며 초면에 청혼하는 셈이다. 이상하고, 어색하고, 우습다. 웃어야 하는데, 오히려 몸을 데우고 있는 열이 회오리처럼 치솟았다. 뿌옇게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아렐르가 가장 익숙한 말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깨끗하게 올려 흘러내린 잔머리도 없건만 괜히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다가 귓불이 뜨거워서 흠칫 놀랐다.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페란토로 해도 괜찮았을 테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하고 싶었어요. 긍정적인 대답을 원하니까요."

 "거절할 리 없잖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요?"

 "그야."

 멈칫했다. 지금이 어떤 설정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처음 만난 사이로 가정한다면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미간에 저도 모르게 주름이 잡혔다. 아롈은 항상 순발력이 약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어떤 설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느냐고 따져 묻는 것도 이상하다. 

 "첫눈에 반해서?"

 쿡. 세시안이 웃었다. 아롈은 그의 웃음에 힘입어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첫눈에 반한 사이라곤 해도 다짜고짜 그렇게 입맞추시면 안 됩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래서 책임을 지고 청혼한 것 아닌가요."

 "로렌은 입맞춤 한 번 하면 청혼해야 하는 정숙한 곳이었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짐짓 눈까지 동그랗게 뜨며 던진 농담이건만 대답이 재깍 나오지 않았다. 세시안은 고개를 숙여 아롈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재미가 없었나. 머쓱해졌다. 스스로가 재치 넘치는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보아도 그리 받아치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아롈이 민망해져 무슨 말이라도 다시 꺼내보려던 참에, 뒤늦은 대답이 나왔다.

 "그럴 리가요."

 그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

 "입맞춤은 그저 핑계일 뿐, 그저 제가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러는 거랍니다."

 항상 듣는 말이나 놀라울 정도로 무거운 말이었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 지금이 봄이라는 것을 알듯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한편으로는 버거웠다. 아롈이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은 고작 반쪽 뿐이었으므로. 설령 애정을 ​잃​어​버​릴​지​라​도​-​상​상​만​ 했는데도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결코 아버지가, 오라비가 했듯이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아롈이 스스로를 정의한 본질인 동시에 끝끝내 애정이 잠식하지 못하여 한 조각 남은 집착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울어 있는 마음의 저울이 가엾은 나머지 아롈은 몸을 낮추어 그의 앞에 따라 앉았다. 그리 아끼는 옷도 아니니 풀물이 들어도 상관 없었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쥐어주고 싶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곰처럼 오라비가 하나 있습니다."

 "큰일이로군요. 귀한 여동생에게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장갑이라도 던지실까요?"

 "그 오빠는 제가 여덟 살 때 집을 나갔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조금 미안해졌다. 이번 말은 아롈이 생각해도 받아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롈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라비를 찾아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는 미안하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그런 세시안을 보며 아롈은 언뜻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되돌리고 싶었던 시간은 일 년 전 이 날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아롈은 일 년 전 이 날에도 머리를 틀어올리고 있었다. 코시카에서 필리프를 대리신랑으로 삼아 결혼식을 올려, 이미 유부녀였으니까. 그러니 일 년 전의 세시안은 아롈에게 청혼할 이유가 없다. 첫눈에 반했다 어쩌고 하는 말이라면 몰라도 왜 청혼을 하지?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아롈이 아닌 스스로에게 주고 싶었던 걸까. 망설이다 방향을 틀어버린 걸까?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였다해도 그는 끝내 아롈에게 물었다. 저와 혼인해주시겠어요? 어쩔 수 없이 팔려온 상황이 아니라, 스스로 사내를 고를 수 있는 처지였더라도 저랑 혼인해주시겠어요? 곱씹어보니 그 말은 숫제 애원에 가까웠다.

 -저를 선택해 줄래요?

 비가 아주 많이 오던 어느 가을날 새벽, 벽난로가 타오르던 응접실에서 꼭 그렇게 간절했던 것처럼. 자기를 용서해달라는, 폭우 뒤의 절벽처럼 드러난 날것의 진심.

 아롈은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드세요. 남쪽 나라에서 오신 황자님."

 "아렐르, 저는."

 "쉿." 

 입술에 손가락을 대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리자면 저는 여덟 살 이전에나 지금이나 뽀뽀에 약합니다."

 오른손 반지에 박힌 남주석이 가늘게 떨렸다. 아롈이 떠는 것이 아니다. 아롈의 손을 받쳐든 세시안의 손이 떨리는 것이다. 아롈은 떨리는 그 손 아래에 왼손을 받치곤 속삭였다. 

 "무서운 오라비한테 흠씬 두들겨맞아도 괜찮다는 남자가 찾아와 뺨에 입맞췄다면 지금처럼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짧게 웃었다. 목이 메어 있었다.

 "그 나이 숙녀분께 반했다고 청혼하는 건 너무 파렴치하지 않은가요? 두들겨맞는 거라면 감당하겠지만 칼을 맞을 것 같은데요."

 "그건 알아서 감당하고 기다리셔야 할 바 아니겠습니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어찌 보면 거짓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아롈을 처음으로 흔들고 기대를 품게 한 것은 약혼반지와 함께 있던 '당신의 세시안'이라는 말이었다. 불안하기만 했던 마음에 기대와 설렘이 깃든 지 일 년이 지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싹을 틔웠다. 메마르게 서걱거리던 마음에 사람 하나쯤 들여놓을 그늘이 생긴 것이다. 혹여 불균형하면 어떤가. 둘은 적법한 부부고 세시안은 아롈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코시카 기밀 사항이 의미없어질 때까지 정치에는 끼어들지 않으면 시험받을 일은 없다. 애정과 명예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낮추어 꿇어앉은 무릎처럼 대등하게 사랑하여 같이 살아나가면 그만.

 아롈은 '만약'이라는 말을 혀끝에 대고 굴렸다. 만약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나는 그 때도 이 사람을 사랑했을까? 손가락이 뺨에서 미끄러졌다가 다시 올라가 검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대답은 긍정이었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사샤가 도망친 다음 만났더라도 세시안과 결혼하기로 선택했을까? 그 가정에 대한 답이 못내 미안한 나머지 기울어있는 저울 위에 추를 올리듯 물었다.

 "그 때에도 저랑 ​혼​인​해​주​시​겠​습​니​까​?​"​

 "영광이군요."

 "그리고 잊을까봐 말씀드리자면 아까의 대답은 '네'랍니다."

 세시안은 봄빛이 난만한 새벽빛 아래 흔들리는 들꽃을 몇 가닥 뽑더니 순식간에 고리 모양으로 엮어 아롈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화관을 엮을 때에도 생각했지만 꼭 마술 같은 솜씨였다. 어차피 둘 모두에게 금전이란 차고 넘치도록 흔해서 어지간한 보석은 그리 귀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손닿는 곳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흔한 보석반지보다야 풀꽃 반지가 더 희소했다. 너무 아까워 책 속에라도 끼워넣으면 곱게 마를까 들여다보는데 그가 조심스레 턱을 받쳐올리곤 키스했다. 바보. 뺨이라고 했는데.

 타박하는 대신 순순히 눈을 감아주었다.

 하늘이 맑은데 웬 봄비가 내리는지.
그저께 올린 줄 알았는데 안 올라가 있더라고요. 뒤늦게 확인해서 올립니다. 감정선 흐름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나중에 고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P.S. 세시안 회귀엔딩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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