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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2)


 센 궁의 대회의는 일곱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그 말은 앙투안이 아롈의 뒤에 서서 레몬색 뒤통수를 꼬박 일곱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는 뜻이었다. 미리 흐름을 짜맞추어 놓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화는 격렬했다. 연회 시간이 가까워졌으나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아롈은 시녀들과 여성 휴게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앞에 서서 대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발의 시녀 하나가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어라, 클레르 양, 오늘의 태양이 숙녀분의 얼굴에 뜬 것 같군요?"

같이 근무를 서고 있던 생-제맹 경이 추파를 던졌다. 그의 말에 앙투안은 간신히 시녀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클레르, 클레르 드 뤼시용. 저번에 아롈에게 어마어마하게 혼났던 그 시녀였다.

"생-제맹 경. 별 건 아니에요, 그저."

"오, 부디 가스통이라고 부르세요, 마드모아젤."

손등에 키스하며 바친 아부에 클레르 드 뤼시용은 귀를 살짝 붉히고는 '저까짓 게 무슨 아가씨 씩이나'라고 중얼거렸다.

"예, 가스통, 그저 마담께서 칭찬을 해주셨어요! 처음에는 부족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시키신 일은 아주 잘 처리했다고요. 귀걸이도 빼주셨는걸요."

그러고보니 금발 사이로 흔들리는 귀걸이는 아롈이 오늘 하고 나온 마노 귀걸이였다. 클레르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너무 좋아요. 마담께서는 의외로 상냥하신 분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간 저를 미워하시는 줄 알았지 뭐예요. 다 제 착각이었나봐요."

"클레르 양을 미워할 분이 이 이블린에 있기는 할까요. 이렇게나 아름다우신데요."

"어머나, 가스통 경도 참."

생-제맹 경은 바닥에 침 웅덩이라도 고이지 않을까 염려될 기세로 클레르에게 아부를 던졌다. 그 아부를 숙녀답게 적절히 받아주던 그녀는 앙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멘 공작 ​전​하​.​.​.​.​.​.​?​"​

"발루아 경으로 충분합니다, 뤼시용 양."

"그럼 발루아 경. 전하께서 찾으세요. 들어가 보세요. 잔느 양과 라루에트 양이 함께 있어요."

시녀가 함께 있다는 말은 문을 완전히 닫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앙투안은 휴게실에 발을 들였다. 센 궁은 오래된 곳이라 실내 장식도 다소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바닥은 요즘 유행하는 대리석이 아니라 붉은 기 도는 마호가니였다. 그의 구둣발이 채 세 번 소리내기도 전에,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군, 클라리 경."

"죄송합니다."

늦은 것은 앙투안이 아니라 클레르의 잘못이었으나, 앙투안은 순순히 죄송하다 빌었다. 아롈은 신경질적으로 앤이 건네주는 차가운 과즙을 들이키고는 수건을 받아 젖은 손을 닦고 있었다. 그는 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작년, 성당에서의 그 민망했던 사건 이후 아롈은 몇 번 앤과 앙투안을 붙여놓으려 시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앤이 무어라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헤어졌다고 받아들인 듯했다. 어색한 기운이 취기처럼 올라왔다.

쟌느라는 이름의 시녀가 부치는 부챗바람을 가만히 맞고 있던 아롈은 화를 내리누르듯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경, 축하해주지."

무척이나 뜬금없는 말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해할 수 없어 되묻자 아롈은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들어서 알겠지만, 경이 근무표를 새로 짤 필요가 없어졌노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렇습니까."

결국 배탈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부리나케 기사단 사무실이 있는 별관으로 달려가 주먹구구로 구두 전달한 근무표를 서면에 옮기고, 아직 짜이지 않은 부분은 적당히 메꾼 바로 그 근무표를 떠올려보았다. 그놈의 서류를 어찌나 급하게 작성했던지 나중에는 끝자락에 잉크방울이 얼룩져, 아롈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 근무표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릴까.

아롈은 미간을 문지르더니 한숨을 삼켰다.

"경, 설마 졸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다 듣고 있었습니다만."

앙투안은 말끝을 흐리면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다.

오늘의 주제는 종려 가지 기사단이었다. 이름이며 예복, 정복 같은 요식적인 것은 쉽게 통과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호위 범위였다. 앙투안은 미리 세시안에게 경고를 들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크게 번졌다.

황제의 여성 편력이 그 시발점이었다.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요 이 년 편애하던 창녀 출신의 공식 정부에게 흥미가 식었는지 새 여자를 골랐다.

보랏빛 눈의 비올레트는 오베르뉴 기수가문인 부아쟁 가문의 사생아로, 본래 이블린에 발조차 붙이지 못할 신분이었으나 오베르뉴 대공의 후의를 입어 이블린에 들어왔다. 황제는 비올레트를 본 그 날로 침실에 데리고 들어갔다.

고위 귀족의 정부를 꿈꾸는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 비올레트 역시 공식적으로는 유부녀 신분이었으므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비올레트는 큼지막한 눈과 덧니가 눈에 띄는 미인으로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황제는 비올레트의 남편에게 대번에 후작 작위를 내려주었다. 그러니 백작 가문의 사생아 따위가 하룻밤에 후작부인이 된 것이다. 순한 성격의 공식 정부는 악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총애를 잃었다. 조만간 시골 성으로 내려가게 되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부란 그토록 하잘것없는 자리였다.

차기 공식 정부를 손에 쥐었다고 믿은 오베르뉴는 황제의 공식 정부도 종려 가지 기사단에게 호위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샤를루아 공작, 보르디의 필리프는 종려 가지 기사단의 창설만으로도 꽤 많은 후광을 입었다는 듯, 오베르뉴의 주장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 의외로 반대한 것은 오를레앙이었다. 대신 현 황후의 제부이자 사촌형제이자 사돈 되는 오를레앙 대공은 꽤나 격렬하게 반대했다. 황후와 그 딸과 며느리의 격이 어떻게 정부 따위와 같아질 수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칼레가 격을 다르게 하는 것은 호위 기사의 수를 다르게 하면 그만이라는 의견을 냈고, 나바르가 결혼한 딸은 딸이 아니냐고 물으며 논의가 한창 심화되었다. 휴식이 선언된 것은 막 부르고뉴 대공이 처음으로 발언을 한 직후였다.

"끝나기 직전, 부르고뉴 대공이 오베르뉴 쪽에 붙지 않았나. 나바르 대공의 얼굴이 볼 만 하던데."

확실히, 그랬다. 아롈은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리라는 듯 앙투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 충고 하나 하지. 경의 지위에 걸맞는 관심을 가지는 게 경에게도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니었더라도 깊이 생각해보게."

"예."

망신이 부끄러워 귀까지 붉게 물들었다. 아롈은 과즙 대신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물었다.

"아델라이드 선 황후 폐하의 가문이 칼레인 건 알고 있나?"

"예."

아델라이드 선 황후는 앙투안의 할머니 되는 사람이었다.

"황후 폐하의 가문인 오를레앙은 황후와 공식 정부가 비슷한 대우를 받는 것에 반발했지. 그런데 왜 칼레는 오베르뉴의 편을 들었겠나?"

"그게 왜 편을 든..... 아, 이해했습니다."

"다행이군. 바로 그저께 일이 있으니 칼레로서는 갚아주고 싶겠지."

그저께라면. 앙투안은 힘겹게 지난 일을 더듬었다. 아롈은 굉장히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는 듯이 굴었으나 앙투안으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저께라면 아롈이 유난히 예뻐서 내내 홀린 듯이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연둣빛 눈이 마침내 짜증으로 치켜올라갈 때쯤 간신히 생각해냈다. 칼레가 주장한 해군 규모가 감축되었던 것 같다. 오를레앙이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도 같았다. 입 밖으로 멍청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에 비해 나바르는 공식 정부는 아무래도 관심이 없고, 결혼한 마담이 호위 범위에 포함되는지 안 되는지만 관심이 있잖나. 현 폐하는 누이가 없으시지만 전 나바르 대공비는 루이 조제프 폐하의 누나니까."

"그리고, 부르고뉴 대공비는 마담 오거스틴이고요."

앙투안은 간신히 '전하'라는 말을 혀끝에서 떼어냈다. 아롈이 오거스틴보다 지위가 높았으므로 로렌에서 통용되는 압존법에 의하면 아롈에게 오거스틴을 높여서는 안 된다.

"그래. 그러니 부르고뉴 대공은 선택을 해야 했지. 오를레앙을 견제하든가, 결혼한 마담을 같이 높여서 지위를 챙기든가. 물론 정부는 인정하지 않고 현 마담의 기혼인 딸은 인정하는 것이 그에게는 최선이겠지만 다른 대공들이 그리 되도록 놔두지는 않을 테고."

"이해했습니다."

"오를레앙도 마담 리젤로트를 가지고 있지. 그러니 부르고뉴와 한 배를 탈 생각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부르고뉴는 오를레앙이 아닌 오베르뉴의 편을 들었어. 그러니 자네가 근무표를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현재 앙투안이 작성한 근무표 호위 대상은 황후, 아롈, 마담 르와이얄 그리고 마담 미네트 뿐이었다.

"저, 전하. 저는 도무지 어떻게 그렇게 결론이 나는지...... 결국 르뷔에트 후작 부인(비올레트의 작위)의 호위를 새로 임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롈은 기어코 한숨을 내쉬었다. 앙투안은 어깨를 바짝 긴장시켰다.

"경, 내가 경의 교사로 보이나? 내가 경을 부른 건 오늘 근무표를 새로 짜지 않아도 되니 예비로 빼놓은 인력에게 휴가를 주어도 되노라고 언질을 주려고 한 거지, 회의의 흐름을 하나하나 따져서 떠먹여주려고 한 게 아니야."

"죄송합니다."

"정 궁금하면 이어지는 회의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추정해봐. 이 사람은 왜 이 사람의 편을 드는 걸까. 이유가 뭘까, 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 집중해보게. 장담컨대 틀림없이 자네는 근무표에 호위대상을 추가할 일이 없을 테니."

앙투안은 고개를 숙였다. 검을 차고 근무중인 기사는 무릎꿇지 않는다. 아롈은 그의 붉은 정수리 위에 툭, 설명 하나를 얹어주었다.

"부르고뉴가 칼레와 오베르뉴의 편을 들었네. 대회의에서 남은 투표권은 몇 장이지?"

아.

 

결국 종려가지 기사단의 호위 범위는 황후, 미혼인 마담, 혼인 여부 상관 없이 마담 르와이얄, 마담 라 세르, 현 황후의 며느리, 세르의 미혼인 딸, 마지막으로 '황제의 적자로 인지된 자녀'를 낳은 공식 정부로 결정되었다. 아롈의 말대로 앙투안은 근무표에 새로운 대상을 추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표결이 끝난 다음날, 정식으로 종려가지 기사단 부단장에 임명된 앙투안은 스스로 마담 라 세르의 호위를 맡으면서 미리 짜여진 근무표대로 기사들을 분배했다.

앙투안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논쟁을 키운 것이 세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따라서 선황후의 며느리가 되는 무슈(세르가 아닌 로렌 황자)의 부인들이 논쟁에 오르지조차 못하게 막는 것이, 그래서 방계 황족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세르의 의도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앙투안 그 자신조차, 아롈과 대화를 나누며 '무슈의 부인들인 공작 부인은요?'라고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회의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 원인은 황후의 딸을 호위대상으로 삼느냐, '현' 황후의 딸을 호위 대상으로 삼느냐, 혹은 '현' 황후의 '미혼'인 딸을 호위 대상으로 삼느냐 하는 싸움에서 세 번째가 이긴 것에 있었다. '현' 황후의 미혼 여식이 호위 대상이 되었으므로 '현' 황후의 며느리만 호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은연중에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눈치챈 자들은 미리 오간 약조에 의해 침묵했고, 반발할만한 자들은 심야까지 이어진 긴 싸움에 지쳐 눈치채지 못했다.

앙투안이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다음날 아침, 루이 조제프 황제의 삼남인 무슈 루이 크리스티앙이 이블린 별관 중 하나인 찔레꽃관에 쳐들어온 다음의 일이었다.

그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읽어주세요.

P.S. 지난 화 마지막 부분을 약간 고쳤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마담 르와이얄에게 심부름을 간 시녀들이 돌아왔다. 아롈은 보고를 받으면서도 체스를 접지 않고 세 판 전부 끝까지 두었다. 앙투안은 예지의 힘을 빌어 겨우 한 판 이겼을 뿐이었지만 그저 속없이 행복해졌다. 승리한 아롈이 고민이나 피로가 씻긴 듯 몹시도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였으므로, 그는 체스판을 되돌려놓다가 실수로 '왕비'를 떨어뜨려 발가락을 찧었다.

이 부분을


 얼마 되지 않아 마담 르와이얄에게 심부름을 간 시녀들이 돌아왔다. 아롈은 보고를 받으면서도 체스를 접지 않고 세 판 전부 끝까지 두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예지가 앙투안을 이끌었다. 그리고 앙투안은 세 판 모두 졌다. 패배한 앙투안은 당황해서 체스판을 들여다보았다.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승리한 아롈이 고민이며 피로가 씻긴 듯 몹시도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인 순간 그는 예지가 자신을 배신한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패배와 상관없이 속없이 행복해졌으므로, 그는 체스판을 되돌려놓다가 실수로 '왕비'를 떨어뜨려 발가락을 찧었다.

이렇게 수정했어요!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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