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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3)


 새파란 새벽이었다. 무슈 루이 크리스티앙은 찔레꽃관에 달려와 왜 자신의 부인과 딸에게는 호위를 배정하지 않았냐며 뒤집어 엎었다. 종려가지 기사들이 어지간한 가문의 자제들이라곤 해도 '황제의 동생'에게 감히 댈 신분은 아니었다. '말싸움은 입이 아니라 신분으로 하는 것'이라는 로렌의 생리에 익숙한 기사들은 늦잠을 자고 있던 앙투안을 깨웠다. 예복을 갈아입자마자 허둥지둥 숙소에서 뛰쳐나온 그는 숙부가 부리는 행패에 귀가 벌게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무슈는 앙투안을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며 '예의범절 따위는 모르는 사생아'라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아롈의 얼굴을 생각하며 꾹꾹 눌러참았으나 폭언의 수위는 점차 올라갔다. 무슈는 심지어 앙투안을 밀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그가 폭발하기 전에 단장이 달려왔다. 단장은 전대 나바르 대공의 조카 손자로, 그 아들에게는 지위를 상속할 수 없는 대공가 말단 방계였으나 어쨌든 '전하'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장이 될 예정이던 앙투안이 밀려난 것은 현 단장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새파란 나이의 앙투안에 비해 서른 살이 넘어 마흔 살에 가까운 그는 훨씬 더 성숙했고 군 체계에 익숙한 인물이기도 했다.

 종려가지 기사단장은 무슈에게 자리를 권하더니 그 앞에 서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무슈가 앉으라고 하지 않았으므로 서 있어야 했다. 대답을 좀 해보라는 다그침에 단장은 사정을 봐달라고 무슈에게 매달렸다. 말은 길었으나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대회의의 결정이다.'

 융통성도 없는 멍청이라는 폭언이 쏟아졌으나, 단장은 그 말만을 반복했다. 씩씩거리다가 제풀에 지친 무슈는  단장과 앙투안을 끌고 정의관으로 쳐들어가 알현 신청을 했다. 시종이 잠시 기다리시라 하더니, '사랑하는 동생의 부탁이니 특별히'라는 답을 가지고 왔다. 황제가 나올 때까지 앙투안은 처음 들어오는 황제의 집무실에 서서 기다렸다. 

 갓난아기 때부터 정의관에서 자란 그였으나 황제의 집무실은 처음이었다. 장중하다기보다는 호화롭게 치장해놓았다. 번쩍번쩍하고 넓어서 그것만으로도 서 있는 사람을 압도했다. 실내장식을 구경하며 잠시 기다리자 연극의 주연 같은 태도로 루이 오귀스트 황제, 그의 아버지가 들어와 푸른 비단을 씌운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눈짓해 동생을 앉혔으나 단장과 앙투안에게는 착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의 뒤를 따라 들어온 아름다운 여자가 황제의 팔과 어깨를 주물렀다. 아마 그 유명한 '비올레트'일 것이다. 여자의 목과 가슴팍에 남은 적나라한 정사의 흔적에 귀를 붉힌 것도 잠시, 무슈의 하소연이 쏟아져 내렸다. 

 이야기를 다 들은 황제는 턱을 괴더니 단장에게 물었다. 

 "사실인가?"

 "대회의의 결정에 따랐을 따름입니다, 폐하."

 황제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무슈가 흥분한 채 끼어들었다.

 "아니, 자네는 도무지 판단력과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군!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크리스티앙. 어린 조카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 목소리 낮추거라."

 무슈가 황제를 폐하가 아닌 '형님'이라고 부른 그 순간 황제는 앙투안을 끌어들여 이 일을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으로 격하시켰다. 무슈 루이 크리스티앙은 앙투안을 사납게 흘끔거렸으나 차마 고작 '사생아'라는 항변은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앙투안은 인지된 자식이었다. 황후의 자식들과 동등한 계승권은 보장받지 못할지라도 감히 발루아의 성을 받은 가문의 일원. 

 무슈는 목소리를 낮춰 불만을 토로했다.

 "제가 지금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 걸 아시잖습니까."

 "그럼 이러지 않으면 되지."

 나긋한 일침에 무슈, 모브쥬 공작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형님, 무슨 말씀을 그리 차갑게 하십니까. 이 아우가 겁이 나서 무슨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그​려​.​"​

 "내가 무얼. 이 나이든 형은 하루하루가 새롭게 힘들어. 그런데도 힘겹게 이 새벽부터 노구를 이끌고 나서서 네 '투정'을 들어주고 있지 않으냐. 네가 내 가장 아끼는 동생이 아니었다면 받아주기나 했겠느냐."

 이 자리에 아롈이 있었더라면 비웃었을 것이다. 그 '가장 아끼는 동생'은 둘째 형인 아르투아 공작이 후사 없이 병사한 뒤부터 몹시도 노골적인 야심을 드러냈다. 당시 황제는 마르그리트 안 황후와의 비밀 결혼으로 세르에서 폐위되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루이 페르디낭과 세시안이 태어나기 전 그의 계승 순위는 루이 오귀스트 다음이었으므로 야심을 품는 것은 일견 당연했다.

 루이 페르디낭이 태어나던 밤 만취한 루이 크리스티앙이 고해신부를 찾아가 잠긴 문을 두들기며 울부짖었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세시안이 로렌 남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된 것은 결코 세시안의 숙부 되는 루이 크리스티앙과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세시안에게 아들이 태어날수록 루이 크리스티앙의 서열은 자동적으로 밀리게 된다. 

 황제는 여태 가능성을 생각하며 군림해왔고 따로 동생을 박대하지 않았다. 손자가 생기지 않으면 조카손자가 후일 황위를 이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내 암시하며 동생의 목줄을 졸라왔다. 앙투안은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했으나 '내 가장 아끼는 동생'이라는 말에서 가시를 느꼈다. 그건 모브쥬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형님께서 노구라고 하시니 이 아우는 민망합니다. 아직 강건하신데요. 이런 미인도 새로 들이시고."

 무슈의 녹안이 비올레트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황제는 불쾌해하기는 커녕 마치 과시라도 하듯 여자의 허리를 끌어당겨 더듬었다.

 "나쁘지는 않아. 그래, 사랑하는 동생아, 내가 너를 항상 믿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이​야​기​해​야​겠​느​냐​?​"​ 

 황제는 웃었다. 신기하게도 목소리와 분위기가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았다. 

 "내, 제수가 마음 상한 것은 알겠다. 하지만 고작 기사 두엇이 아니냐. 너그러움과 포용력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미덕이지." 

 "그냥 기사 두엇이 아니잖습니까. 새로 생긴 기사단, 그것도 한낱 창부도 받을 수 있는 기사를 왜 자기는 못 받느냐고 소리소리를 ​지​르​는​데​.​.​.​.​.​.​.​"​

 '창부'. 무슈는 앙투안과 비올레트와 죽은 앙투안의 어머니와 이 자리에 없는 공식정부를 칼로 찔러버리듯 한숨을 내쉬었다. 비올레트는 조금도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앙탈하듯 황제의 품에 감겨들었다. 풍만한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쯔쯧. 내가 네 고충을 어찌 모르겠느냐. 내가 모를 것 같으냐?"

 황후의 성정을 암시하는 말에 무슈는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도 은밀하게 사내끼리의 마음이 통했다는 듯 낄낄거렸다.

 "하지만 여인네의 좁은 아량을 품어 잘 다스려주는 것이야말로 사내가 할 일 아니겠느냐."

 루이 크리스티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결국 결정을 물리지 않으리라 말한 것이니. 

 "형님."

 황제가 손짓하자 비올레트가 쪼르르 달려가 술을 가져왔다. 호박색 술을 한 모금 머금은 황제는 잔을 뱅글뱅글 돌리며 웃었다.

 "그리고 서로 덮어주고 이해해주는 것이야말로 가족의 미덕일 테지."

 무슈는 이를 악물었다.

 "너도 한 잔 하지."

 ​"​아​침​부​터​.​.​.​.​.​.​.​ 괜찮습니다"

 "한 잔 갖고 무얼 그러느냐. 한 잔 해."

 무슈는 잔을 받아들었다. 콸콸 술이 쏟아져 예의에 조금 어긋날 만큼 술이 많이 담겼다.

 "원래 사내라는 것들이 그래. 한 번 빠지면 앞도 없고 뒤도 아니 보이지."

 삼십 년이 넘도록 뭇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결혼을 한 황제가 하는 말이니만큼 무게가 넘쳤다. 

 "하하하, 아무래도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요."

 "너도 알지만 네 조카가 힘든 일이 많았다. 이 나도 몸이 좋지 않았다보니 짐을 많이 졌지."

 황제는 짐짓 기침을 해보였다.

 "그런 아이가 아내에게 예쁜 선물 하나 해주려고 해도, 대회의라는 것이 참. 쉽지가 않아." 

 "형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찌합니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 무소불위라는 것이, 뒤엎고 지워버리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그렇다고 내가 체신머리 없이 나서서 없던 일로 하라 해버리면 그 아이의 얼굴은 또 뭐가 되겠느냐?" 

 불만어린 기색이었으나 무슈는 뭐라 더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어디 저라고 숙모를 챙기고 싶지 않아서 그리 결정되었겠어? 언제 예의를 차리지 않은 적 단 한 번이라도 있다더냐. 말많은 이들을 여섯이나 달래고 어르고 하다보니 저도 미처 생각이 닿지 못한 게지. 너와 제수가 넓은 아량으로 봐주고 덮어주거라, 알겠느냐?"

 무슈는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얼굴이 붉어졌다. 황제는 자못 다정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내 사랑하는 동생이 조카를 그만큼은 아낀다 믿어도 되겠지?"

 ​"​물​론​.​.​.​.​.​.​이​지​요​.​"​



 앙투안은 터덜터덜 정의관을 나서서 자비관으로 들어갔다. 근무시간까지는 한참 남았으나 도무지 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머릿속이 엉켜들었다. 

 -아무리 사생아라 해도 예의도 모르느냐?

 -계집아이들이 퍽 좋아할 만한 옷이기는 합니다만.

 -아내에게 예쁜 선물 하나 해주려고 해도.

 종려가지 기사단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승낙했다. 제대로 된 경력이 되기는 어려우리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출세에 욕심이 있었더라면 클라리 경이라는 이름으로 오를레앙에서 지내지도 않았겠지. 그는 명목상으로나마 멘 지방의 영주인 공작이었고, 오를레앙 기사단에서도 조금 더 높은 지위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런 그가 '발루아 경'이라는 이름으로 이블린에 돌아온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경, 왜 이렇게 빨리 왔지?" 

 그가 결정할 때에, 아롈이 꼭 지금처럼 눈부셨으므로. 

 "전하."

 앙투안은 무릎을 꿇는 대신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근무 중이라는 암묵적인 의사표시였다. 

 아롈은 센 궁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 채였다. 크림을 탄 듯 뿌연 파란색 옷감에 금실로 짠 가벼운 리본을 잔뜩 달아 장식했다. 가는 손목에도 카메오가 달린 같은 색의 리본을 매어 늘어뜨렸다. 소매에 여러 겹으로 단 ​레​이​스​(​앙​가​장​뜨​)​도​ 금빛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가느다란 목 위로 한밤중 창문처럼 흰 얼굴이 보였다. 

 "오늘은 오후부터 근무 아니었나?"        

 말문이 막혔다. 그저 단순한 질문이었다. 애정도, 걱정도 없는. 근무표를 가져갔으니 앙투안의 근무표를 꿰고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마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들렸다. 

 "그냥 좀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일찍 나왔습니다."

 사실은 속상하고 서러워서 왔다.

 그는 이블린을 떠난 뒤 제법 오랫동안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직면할 일이 없었다.

 -야, 트완!

 훈련이 끝나면 기사단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카드놀이를 하는 삶은 평범하고 안온했다. 루이 앙투안 드 발루아가 아닌 앙투안 드 클라리의 삶은 그렇게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남동생이 가슴을 밀쳐 크게 비틀거린 순간 그를 잠식했던 분노는 조금씩 모멸감으로 치환되어 기도에 들러붙었다. 질식할 것 같은 순간 숨 한 모금처럼 떠오른 것이 이 얼굴이었다.

 주제 넘은 말을 삼킨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아롈은 미간을 문질렀다. 황후의 얼굴이 새겨진 카메오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모브쥬 공작?" 

 감상에 차있던 것도 잠시, 앙투안은 기절할 듯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둘이 오자마자 떠들던데. 단장은 뭘 하고 경이 불려나갔나?" 

 그는 종려가지 기사단 기사 둘을 죽일 듯이 곁눈질로 흘겨보며 이를 악물었다. 틀림없이 생-제맹 경일 것이다. 생-제맹 경은 몹시 경박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별 일 아니었습니다."

 "얼굴 보아하니 한 소리 들은 모양인데."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롈은 아랑곳 않고 그를 타박했다.

 "단장에게 맡길 것이지 뭐하러 경이 그 자리에 나가서 싫은 소리를 들어? 앉을 풀잎 못 찾은 귀뚜라미도 아니고."

 "단장이 늦게 왔습니다. 그리고 저도 엄연한 부단장이고요."

 그의 무능함을 당연시 하는 말에 귀가 달아올랐다. 보다못한 페린 경이 끼어들었다. 

 "라 뷔에 경이 깨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담. 아무래도 숙부와 조카이시니만큼 이해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생각이 있는 건가? 바로 그러니까 나가지 말았어야지." 

 시야가 산산조각나는 듯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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