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4)
먹먹해진 마음 틈새로 잊고 있던 기억이 스며들었다.
-사생아?
배 위에서의 아롈은 팔짱을 끼더니 도도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분홍빛 입술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앙투안은 몇 년만에 마주하는 선명한 경멸에 발끈했다. 미셸의 얼굴을 위해서라도 사죄할 생각이었건만 어느새 잊혀졌고 치기와 분노만이 남아 타올랐다.
-과연, 알 만 하군요. 혼외정사로 태어난 사생아가 알량한 공작 지위 하나 쥐고 황자랍시고 뽐내다니.
어떻게 하면 그를 상처입힐 수 있을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 같았던 그 말.
"도대체 도망가기는 커녕 일부러 찾아 기어들어가 걷어채이는 이유가, 발루아 경."
얻어맞은 듯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아름다웠고, 또 낯설었다. 흠칫해서 눈을 내리깔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감히 눈마주치지 못하고 흘끔흘끔 훔쳐보느라 초점이 흐릿한.
차라리 뒤돌아주었으면. 그러면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둥그런 어깨며 가느다란 허리, 언뜻 언뜻 역광에 희게 빛나는 턱선이며 복잡하게 꼬여있는 금빛 머리채를.
아니면 커튼을 내린 창문이라도 좋았다. 그저 멍하니 보아도 죄 되지 않으리라면.
당연히도, 아롈은 뒤돌지 않았다. 형형한 눈빛이 이마에 꽂혔다.
"잠은 좀 잔 건가?"
꾸중 대신 질문이 날아왔다. 앙투안은 멍하니 대답했다.
"예."
자작나무 가지처럼 섬세한 손가락이 은빛 회중시계를 거칠게 열었다. 캬트 어로 '여덟 시 사십 분'하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지금이 아홉 시도 안 됐는데?"
지난 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들어갔다.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앙투안은 고개를 숙였다. 의자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면 으레 나오는 버릇이었다.
"피곤해보이는데."
"아닙니다."
"잠도 잠이지만, 별로 좋은 소리 듣진 않았을 것 아닌가."
목구멍으로 위액처럼 시큼한 설움이 복받쳤다. 그것보다 더 서럽고 아픈 말은 모두 아롈에게 들었다.
"가서 마저 자고 예정대로 오후에 나오게."
무뚝뚝한 말투였으나 내용만은 가슴 뻐근하게 사무쳤다.
미뇽인 앤에게나 주어질 법한 관용과 호의였다. 페린 경이나 생-제맹 경이라면 이렇게까지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을 것도 않았다. 그러나 그 둘, 대공가 기수가문의 적법한 아들인 둘이라면 오늘 이리 당할 일도 없었을 테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 경과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 정말 안 들어갈 텐가?"
"예."
"그럼 마음대로 해."
앙투안에게 휴식을 권한 것이 무색하게도 먼저 지친 것은 아롈이었다. 거울의 홀에서 숙녀들과 환담을 나누는 내내 눈이 감겼다가 아슬아슬하게 뜨였다. 앙투안은 서러움은 잠시 마음 한 쪽으로 치워놓고 안절부절 못하며 조마조마하게 아롈을 바라보았다. 자칫 잘못하면 긴 속눈썹이 심지를 다 태운 양초처럼 풀썩 내려앉을 것 같았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롈은 손을 뻗어 여자 하나를 손짓해 불렀다. 벌써 아롈의 주변에는 서른 명도 넘는 여자들이 바글바글 몰려있었다. 드문 일이었다. 스물 중반의 여성이 사뿐사뿐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데."
졸음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늘어지는 말투였다.
"모브쥬 공작부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마담 라 세르."
"바레스 자작 부인?"
"그렇습니다. 과연 들으시던 그대로 총명하기 그지 없으세요."
"어디 출신이지?"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롈이 어지간한 가문의 계보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은 이블린에서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저 확인하기 위해 물은 것이다. 그렇게 관심 줄 이유가 있을까. 혹여 마음에 들어 시녀로 들어가면 좋으리라는 계산이 없지 않았다. 모브쥬 공작부인보다야 마담 라 세르의 시녀가 더 지위 높다. 또한 귀부인들끼리 마음에 드는 시녀를 교환하는 것은 드물지도 않은 일이었다.
"제 아버지가 고티에 백작의 동생됩니다."
"고티에라면, 보르디로군."
여기에서 '보르디'란 대공가가 아니라 보르디 대공가가 지배하는 지역을 의미했다. 고티에는 보르디의 기수가문이었다.
"예예, 그렇답니다."
아롈은 대답하지 않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앙투안을 등지고 있었으나 벽에 붙은 거울을 통해 얼굴이 보였다. 그저 졸고 있을 뿐인데도 사색이라도 하는 양 아름다웠다. 백작의 조카 된다는 여자는 아롈이 보르디 가신이라는 말에도 반응이 없자 안달복달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어머니도 전 보르디 대공비를 모셨답니다."
전 보르디 대공비는 아롈의 외할머니였다.
"푸른 장미를 모시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한 가문을 대대로 섬기는 맹약이야말로 신의 있는 일이지요."
몹시도 노골적인 말에 아롈은 짧은 웃음을 머금었다. 호의로 착각한 시녀가 더 많은 말을 떠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런 일이 흔하기는 하지. 그러고보니 네 어머니도 외조모님을 모셨다고 하지 않았나?"
이미 몰려있던 무리의 여자 중 하나가 아롈의 눈길을 받고 한 발짝 걸어나와 무릎을 굽혔다.
"맞습니다, 마담. 제 어머니와 에탕프 부인과 포레즈 부인이 같이 모셨지요. 지금까지도 절친하답니다."
숙녀들이 와르르 끓어오르는 물방울처럼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가깝게 지내자 맞장구쳤다. 여러 가문의 숙녀들을 섞어서 시녀로 쓰는 황실 여인들과 달리 대공가의 여인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기수 가문의 여식이나 부인을 부리기 마련이었다. 오랫동안 한 주인을 모시며 가문 사이에 친분을 쌓고 통혼하면서 내부의 결속력과 대공가 간의 배타심을 유지하곤 했다.
아롈은 몹시 상냥하게 웃었다.
"고티에 양도 다음에 찾아와라. 같은 주인을 모셨던 자의 딸들끼리 친분을 돈독히 하면 좋겠지. 그간 왜 소홀했는지 모르겠군."
여자가 감격했다. 아롈은 적당한 칭찬 두어 가지를 던지고는 여자를 돌려보냈다.
고티에 양이 돌아서자마자 샤를루아 공작부인 이본느를 모시는 에탕프 가문의 딸, 르쟁 부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마담 라 세르. 감히 제가 고귀한 분의 초대에 왈가왈부하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나중에 이야기해라. 피곤하니 지금은 좀 쉬어야겠다."
아롈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는 무리를 흩으려는 듯이 손짓했다. 앙투안은 아롈을 따라 거울의 홀을 나섰다. 르쟁 부인이 흥분한 듯 소근거렸다.
"말도 안 되는... 도둑의 딸을..."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아롈도 분명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무시한 채 평화의 홀로 향했다. 작고 고요한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롈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앤을 좀 데려와라, 아니, 혼자로군."
그 말대로 따라온 시중인-기사를 시중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은 앙투안 혼자였다.
"그냥 있어."
"예."
"클라리 경."
"예."
대답 대신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귀를 기울여보아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앙투안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다가갔다. 심장이 뻐근해졌다.
"전하?"
등받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기대어 앉아있다가 옆으로 쓰러져 잠든 아롈이 보였다. 가볍게 감긴 눈, 지붕의 처마처럼 뻗어나온 속눈썹. 앙다문 입술. 아름답다. 심정과 상관없이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때, 톡 튀어나온 쇄골 위로 머리카락이 한 올 떨어져 내렸다. 목걸이를 하지 않아 무방비하게 드러난 살결 위로 떨어진 짧은 머리카락 한 올이 타오르듯 선연했다. 우연히라도 장갑 너머로 손이 스친다면. 만지면 밤새 깔린 눈에 발자국이 나듯 폭 패이지는 않을까? 침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머리카락을 떼어 드리는 것 뿐이다. 손끝이 머리카락을 건드리기 직전,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거기서 그걸 거는 게 아니었다니까."
앙투안은 화들짝 놀라 손을 치우고 물러섰다. 두 명? 아니 세 명이다. 여성들이 수다를 떨며 걷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앙투안은 그 사이 눈을 감고 속으로 군가를 몇 번이나 불렀다. 심장소리가 북처럼 울리며 박자를 맞춰주었다. 다행히도 소리는 점차 멀어졌고,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앙투안은 아직 뻐근하게 부풀어있는 신체부위를 감싸듯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빌어먹을."
앙투안은 그 직후부터 아롈이 누운 장의자의 근처에도 가지 않고 성실하게 주변을 경계하며 서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도 너머에서 몹시도 익숙한 사람이 시중인도 거느리지 않고 홀연히 나타났다.
"앙투안."
"세르."
"형."
세시안은 앙투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앙투안이 입을 꾹 다물자 멋쩍게 웃었다. 앙투안의 귓불이 확 달아올랐다. 사생아 동생에게 무안을 당했는데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얇은 피로가 한 겹 드리운 단정한 얼굴.
"앙투안, 오늘 고생 많았다."
"별 일 없었습니다."
"원래 뜻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기란 그렇게 힘든 법이지. 어려운 자리를 선뜻 맡겠다고 해줘서 내가 네게 미안하고 고맙구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자마자 눈물이 솟으려 했다. 아니 이 무슨 창피인지. 다행히 화제가 금세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아렐르는?"
"주무십니다."
"여기에서?"
목소리가 금세 작아져 거의 속삭이듯 변했다. 앙투안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예. 곤하셨던 모양입니다."
"하긴, 어제도 늦게 잠들었지."
세시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롈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에 민감한 로렌 황족답게 그야말로 소리없는 발걸음이었다. 앙투안은 세시안을 따라 그의 뒤에 섰다. 아롈은 깨지도 않고 잠들어있었다. 그가 떨어뜨린 머리카락은 뒤척이다 떨어졌는지 온데간데 없었다. 세시안은 장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아롈의 뺨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아렐르. 일어나요."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연녹색 눈이 공포에 차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상대를 확인하더니 이내 몽롱하게 가늘어졌다.
"세시안."
지극히 사적인 장면이었으나 앙투안은 그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다.
"자려거든 들어가서 자요."
"오늘까지 말 걸지 않기로 약속했잖습니까."
차가운 목소리였으나 세시안은 태연하게 품안에서 시계를 꺼내보였다.
"아렐르가 말한 오늘은 어제가 되었답니다. 보이나요?"
시계를 본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잠을 다 털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흰 손이 세시안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힘은 들어가있지 않았다. 지극히 무방비한, 아마도 상대가 세시안이기 때문에 보이는 모습.
"그래도 저 아직 화 안 풀렸습니다."
"미안해요."
"사과는 이미 들었고 납득했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화가 안 풀리는 겁니다."
"예, 그래도 미안하군요."
"알고 저지른 일이라는 걸 알아서 더 괘씸합니다만."
"미안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못 할 건 또 뭡니까? 그보다, 클라리 경."
"예."
앙투안은 죄를 지은 듯 크게 움찔했다. 아롈은 몸을 일으키며 앙투안을 쏘아보았다.
"뭘 빤히 보고 있지?"
"죄송합니다."
"앤은?"
"모르겠습니다."
"경 혼자 있었나?"
"예. 전하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원래 오늘 저녁은 앙투안이 근무였으므로 다른 두 기사는 교대하러 않았다. 아롈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문지르더니 세시안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올라가는 내내 앙투안은 그 둘의 뒤에 서 있었다. 앞이 아닌 뒤.
세시안이 침실의 문을 열어주자 앙투안은 인사를 하고 물러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롈은 마치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듯 앙투안을 돌아보았다.
"클라리 경."
"예, 전하."
"자리 뜨지 않은 건 잘했네. 내일 보지."
문이 닫혔다. 어떤 정신으로,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기억이 휘발된 채, 잠시 후 앙투안은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사생아?
그 노골적인 경멸과 방금의 미소 사이의 간극이 그를 좀먹었다. 앙투안은 가슴이 텅 빈 듯한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벽에 걸어둔 예복의 금단추가 반짝였다. 종려나무 가지를 돋을새김한 기사단 예복 단추.
머릿속의 아롈이 웃어보였다.
-내일 보지.
앙투안은 촛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