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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7)


아롈은 누가 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연인의 어깨에 이마를 붙인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세시안의 손가락이 아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롈은 한참이나 그의 품에서 숨을 고르더니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십시오."

 "그 전에, 사랑하는 아렐르. 괜찮나요?"

어깨에서 이마가 떨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겨울날 몸을 떨다가 수프를 떠먹은 듯한 온기가 퍼졌다. 아직도 모욕감에 손끝까지 차가웠다.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아렐르."

 "오늘 들은 헛소리보단 백 배쯤 낫군요."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세시안은 이마와 눈꺼풀에 한 번씩 입술을 눌렀다. 아롈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아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차 마시겠어요?"

탁자에는 아롈이 유독 좋아하는 과자 몇 가지가 엄선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세시안은 빨갛게 우린 차를 손수 따라 내주었다. 세시안의 잔에는 독약 같은 빛깔의 커피가 담겨있었다. 이미 반쯤 마신 뒤였다. 잔을 집으려는데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 수 없었다. 아롈은 덜덜 떨리는 손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잔이 평소 나쁘지 않다 생각하던 흰 꽃무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렐르."

세시안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맞추었다. 손이 따뜻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눈물이 솟아 세상을 흐리게 만들었지만 간신히 넘치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렐르. 부디 허락해줄래요?"

 "무엇을 말입니까?"

 "제가 아렐르를 속상하게 만든 자들에게 몹시, 아주 몹시 치졸해지는 걸요."

아롈은 무심코 웃었다. 세시안은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로 옆에 찰싹 붙어앉았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다.

 "농담 같나요?"

 "침대에 벼룩이라도 뿌릴 겁니까?"

 "아렐르는 저를 얼마나 배포가 작은 사람으로 보는 건가요? 포도주에 물을 타서 먹일 건데요."

 "코시카 군인들은 남부 포도주는 밍밍하다고 안 먹습니다."

 "그렇게까지 잔인해질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지요. 파테에 쥐고기를 넣는 수밖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아롈은 연인의 어깨에 폭 기대었다. 세시안은 굳이 아롈의 앞에서 그가 세르로서 가할 수 있는 정치적 불이익을 늘어놓으며 우쭐거리지 않을 만큼 사려깊었다. 그가 당연한 듯 가지고 있는 포근함이 좋았다.

 "이미 호되게 꾸짖고 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답에 앞서 볼 안쪽 여린 살을 꼭 깨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모욕감이 칼날이 되어 배를 들쑤시는 듯했다.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짐작하고 있었으나, 짐작하고 대비하였다고 한들 내리치는 칼날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사랑하는 어머니가.

대체 얼마나 얕봤으면 그런 편지를 보내 조롱할 수 있었을까.

옐레나 여제의 눈에 아롈은 아직도 자신의 눈길 한 번 따뜻한 말 한 번 받지 못해 복도를 서성이는 어린아이 같았을까? 이렇게 내쳐지고도 여전히 목매달았으리라 짐작했을까? 어떻게, 내게.

아롈은 자신이 아직도 어머니에게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밑바닥이라고 생각했건만.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기고 내쫓긴 다음에도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리 잔인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멍청한 옐레나 파블로브나.

아롈은 왼손을 뻗어 과자를 집었다. 바삭하게 구운 머랭이 입 안에서 부서졌다. 씁쓸하고 달콤했다.

 "용을 부리는지 추궁하러 온 건 아니었습니다."

 "다행이군요."

여기에서 '제가 그랬잖아요'라고 우쭐대지 않는 면이 또 그다웠다. 그는 안도한 듯 잔을 들어 쓴 음료로 목을 축이고 다시 내려놓았다. 왼손으로는 여전히 아롈의 손을 잡은 채였다. 풍부한 목소리에 한결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상해할까요?"

 "세시안. 제가 그간 걱정했던 건 벨타를 의심받을까봐서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늦봄, 식민지 공해 상에 푸른 용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롈은 이본느에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세시안을 찾아가 화를 냈다. 세시안은 자신이 한 일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설명을 요구하자 답했다.

아롈의 안전을 원했고, 종려 가지 기사단이 완전히 창설되기 전에 여제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의 눈에 벨타는 딱 좋은 사건 덩어리로 보였다고.

세시안은 여러 가지 요건을 고려해서 벨타를 던져넣을 장소를 선택하고 벨타를 던져넣었다. 물론 '용'을 던져넣으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 편지가 든 선물용 귀중품 상자를 만든 뒤 마치 상자에 박힌 보석인 양 몸을 둥글게 만 벨타를 끼워넣었다. 상선으로 하여금 아카디(상트 루스카부르크 인근 로렌 식민지) 영사관에 시간 차이를 두고 상자를 전달하라고 지시하고, 근처를 지나가는 군함으로 하여금 회수하게 했다. 영사는 세시안의 '아내에게 주려는 선물'이라는 부탁을 믿고 산지의 주먹만한 루비를 구해 넣고 밀봉해서 다시 로렌으로 부쳤다. 처음 운반된 뒤 제 발로 걸어 바다에 나가 모습을 드러냈고, 다시 영사관으로 돌아와 상자인 채 위장하여 로렌으로 돌아왔다. 그 도시에 군함과 상선을 번갈아 다섯 척 보낸 이유는 세시안이 혹여 일정이 어긋날까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아렐은 정확히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분노했다. 첫 번째는 세시안이 아롈에게 말하지 않고 그런 큰 일을 마음대로 결정했다는 점, 두 번째는 세시안이 벨타에게 대가로 준 것이 아무리 사형수라고는 해도 인간이라는 점, 세 번째는 하필 그가 선택한 장소가 상트 루스카부르크 바로 옆에 있는 로렌 식민지 아카디 제도라는 점이었다.

첫 번째는 얼마든지 세시안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화내고, 사과를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롈은 아직도 벨타가 삼키던 사람들을 기억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인간이-아무리 사형수였다고 해도 용에게 먹혔다는 사실에 실망했지만 '인간'을 사용했다는 자체로 세시안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아롈은 이 모순 역시 털어놓았고 결국은 그를 이해했다. 세시안은 다시는 아롈에게 상의 없이 벨타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세 번째만은 해결할 수 없었다. 아롈은 불안으로 위장이 타오르는 것을 인내했다. 세시안은 아롈의 불안이 '용을 부린다고 의심받을까봐'라고 추론하고는, 절대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달랬다. 그저 결혼한 지 일 년이 넘었으니 내려오는 것이고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나날이 말라가는 아롈의 귀에는 남편의 설득이 들리지 않았다. 당연하다. 애초에 그게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저도 그게 터무니 없는 비약이라는 사실은 압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대답을 하려는데 혀뿌리가 빠듯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감히. 생소리를 내지른 목이 뒤늦게 아파왔다.

 "오늘 레오노프가 제게 군 기밀을 유출했느냐고 추궁하더군요."

단정한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낮게 물었다.

 "생 뤼스킨?"

아롈은 쓴웃음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과연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군사 기지? 점령 준비? 광산?"

바로 이래서 말할 수 없었다.

세시안은 명석한데다 경험 많은 사람이었다. 아롈이 왜 하필 그 곳을 골랐느냐고 화를 내는 순간 뭔가가 있음을 알아차릴 터였다. 그리고 아롈이 불안에 젖어 화내는 이유를 되짚어 추정하기란 세시안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롈은 그리 비참하게 쫓겨난 이후에도 여전히 코시카 여대공이었다. 성 소피야 훈장의 모토는 '조국과 사랑을 위하여'. 차마 자기 입으로 조국의 군 기밀을 로렌의 세르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암시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 근처에 광산이야 넘치는데 그게 기밀이겠습니까? 그리고 점령 준비는 지금 제가 알 도리가 없지요."

 "군사 기지."

 "예."

세시안은 오른손을 아롈의 오른손에 겹치더니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흰 손가락에 따뜻한 한숨이 들러붙었다.

 "쥐라도 잡아오라고 해야겠군요."

 "그런 걸 씹은 입에 입맞추고 싶지 않습니다만."

끌어안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킥킥 웃기를 기대했건만 세시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롈은 잡히지 않은 왼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흰 손이 유독 두드러졌다. 겹쳐낀 반지 두 개가 반짝였다.

 -당신은 코시카의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를 신부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말하는지 자신이 반드시 알아들으리라는 확신. 지지부진한 확인과 설명을 단숨에 뛰어넘은 대화가 어쩌면 존경의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세시안. 제가 말하지 않은 겁니다."

생 뤼스킨, 상트 루스카부르크는 벨타가 모습을 드러내기에 여러 모로 적합했다.

로렌의 식민지가 있는 곳 중에서도 여러 국가의 식민지가 접해있는 곳. 따라서 상선과 군함이 교역이 활발한 곳. 벨타가 어디에 나타나든 눈에 띄기 쉽고, 쉽사리 선박들이 뭉쳐 대규모 해전으로 번지기 어려운 곳. 아내에게 줄 선물을 찾는다는 핑계를 쓸 만큼 질 좋은 보석이 많이 산출되는 곳.

불행하게도, 위의 이유는 바로 상트 루스카부르크 인근 코시카 령 무인도에 군 보급 기지를 세운 이유와 정확히 일치했다. 다만 세시안은 로렌의 세르였으므로 코시카 군 기밀을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저 때가 좋지 않았다. 세시안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아롈은 화가 났다.

 "제가 미리 아렐르와 상의했어야 했어요."

 "아마 처음부터 반대했겠지요. 그리고 만일 장소를 미리 상의했더라도 저는 상트 루스카부르크를 반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입을 다문 것과 같은 이유겠지요."

 "예."

하아. 깊은 한숨이 뿜어져나왔다.

 "그래도 때가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군요. 하필 기사단 창설 직전이라니."

세시안이 한 일은, 평소라면 발각될 일이 없었다. 인내의 홀에서 소리지른 대로 그 주변은 상선의 교역이 활발한 곳이며 아무도 지나가는 배의 기록을 들추고 그 움직임을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이 나타났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근처에 군함이 늘어날 테고, 해군 장관은 관련 자료 분석을 원할 터였다. 그래야 군주가 결정할 수 있으니. 이반 3세는 그렇게 철저했고 아롈 역시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만약, 정말 만약,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움직인 로렌 선박의 규칙성을 누군가 알아낸다면? 하필 그 선박이 상트 루스카부르크 인근을 지나 아카디를 거쳐 로렌 본토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알아내고, 어머니에게 보고가 올라가고, 어머니가 아롈이 기밀을 유출했다고 의심한다면?

가능성이 낮았지만 아롈은 두려워했다. 대비책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기밀 유출자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겠군요. 아렐르가 웨데나 전에 겁을 먹어서 기밀을 이야기하고, 그 대가로 보호를 원했다고."

 "그래서 확인하러 내려온 겁니다."

세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이 또렷하게 아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렐르, 이걸 제게 이야기해도 괜찮겠어요?"

아롈 시점 에피소드 끝내고 올리려다가 너무 길어져서 잘라서 올립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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