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9)
거울의 홀에 올 때마다 앙투안은 오를레앙이 그리워졌다. 흙먼지 나는 공터에서 복잡하게 머리 굴릴 것 없이 검만 휘두르면 그만이었다. 훈련이 끝나면 친구들과 뒹굴며 술을 마시고 카드놀이를 했다. 늦게 와 자리에 끼어들어도 당연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나 뒤따를 아롈이 늦는 지금, 앙투안은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혼자였다.
차라리 옛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뒤엉켜 놀던 소년 시절이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거울의 홀에서 멘 공작 신분을 가지고 있는 앙투안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대공가와 황가의 일원 뿐이었다.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미셸은 결혼해서 오를레앙으로 내려갔고, 세시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내일 근무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앞서 발을 붙잡았다. 결국 민망함을 견디지 못한 앙투안은 지나가던 남자 하나를 냉큼 붙잡았다.
"이야, 쟝-폴 아니야? 오랜만이다. 나 기억하지?"
말끔하게 앞머리를 빗어넘긴 청년이 흠칫 발걸음을 멈추고는 허리를 숙였다.
"멘 공작 전하."
앙투안은 순식간에 머쓱해졌다. 그러나 물러섰다간 또 거울과 벗한 채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아롈을 내내 기다려야 할 터였다.
"그간 잘 지냈어?"
뺨에 곰보 자국이 남은 앳된 얼굴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앙투안과 동갑이었다. 옛날 샤를과 드물게 같이 놀던 오베르뉴 가신의 아들.
"예. 공작께서는 안녕하셨는지."
"보다시피. 어디 가?"
"그...... 공작께서 관심 가지실 만한 일은 아니고."
손움직임을 보아하니 카드 놀이였다. 앙투안은 싱글싱글 웃으며 같이 가자 따라붙었다. 카드 몇 판 치다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겠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리라 여겼다. 하도 오래 못 봐서 서먹서먹할 뿐 아닌가.
정의관 구석에 마련된 카드놀이판에는 그 흔한 대공가 방계 하나 없이 고만고만한 집안 자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쟝-폴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다 앙투안을 발견하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투안은 낯짝을 두껍게 하여 자리에 앉았다. 쟝-폴에게 판돈을 좀 빌려달라 했더니 탐탁찮은 기색을 하면서도 내주었다. 루아르 금화는 몇 없고 대부분 은화였다.
카드 다섯 장을 받아 펼치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오를레앙에서야 노상 카드를 쳤으나 이블린에서 카드 놀이는 처음이었다. 그는 적당히 판돈을 쓸어모았다. 질 때도 많았지만 이길 때에는 반드시 크게 이겼다. 그는 기분이 이끄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빈 술병이 쌓일수록 분위기가 차츰 풀렸다. 낄낄거리는 농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빌린 판돈을 갚고 두어 판 쯤 쳤을까, 한둘씩 자리를 뜨면서 도박은 파장 분위기였다. 남은 사람들은 담배을 피우며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는 분위기였다.
"공작 전하. 그거 아십니까? 이 녀석 백작 되기 전에......"
"그걸 왜 말하려 그래!"
완전히 취하지 않은 앙투안과 달리 쟝-폴은 이미 눈이 풀려있었다. 열심히 허우적댄다 해서 입이 막힐 리 만무했다. 쟝-폴의 친구이자 앙투안과도 안면이 있는 남자는 쟝-폴이 목 매달던 여자와 거사를 치르려다가 술을 너무 마시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농담을 저속한 어투를 섞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와르르 웃음이 쏟아졌다.
"그래서 이 녀석 그 때 차이지 않았겠습니까."
또 웃음이 잔잔하게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쟝-폴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술을 들이켰다.
"와, 그런데 너 백작이었냐?"
"딸꾹, 아버지 돌아가셨으니 내가 백작이지. 이번 대회의 승인 받았고...... 아, 근데 나 진짜 너랑, 딸꾹, 지금 이러고 놀고 있는 거 들키면 큰일나."
'공작 전하' 소리는 술에 씻겨나간 지 오래고 그냥 '너'였다. 앙투안은 마음 편하게 웃었다.
"큰일 날 게 뭐 있어, 인마. 공작 전하라고 안 불렀다고 내가 형님께 이르기라도 하겠냐?"
루이 샤를과 앙투안과 한 번이라도 어울려본 소년이라면 반드시 세시안에게 혼난 경험이 있었다. 쟝-폴도 그 중 하나로 정원의 나무에 매달려 관상수 한 그루를 부러뜨린 전적이 있었다. 청년 백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르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고...... 그런데 안 이를 거지?"
"이게 진짜. 마셔."
앙투안은 자신이 세시안을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술을 따라 건네었다. 인사불성에 가까운 쟝-폴은 받아서 얌전히 마셨다.
"결혼은 했고?"
"나이 스물에 무슨."
"약혼도 안 했어?"
"했지. 했는데...... 그래서 나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쟝-폴은 고개를 푹 숙였지만 자리를 뜰 기색은 없어보였다.
"왜?"
옆에서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이 녀석 약혼녀가 마담의 시녀입니다, 공작 전하(HSH)."
이름을 붙이지 않은 마담. 즉 무슈 크리스티앙의 아내인 모브쥬 공작 부인을 의미했다. 술에 절은 머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앙투안이 알아차린 것은 기껏해야 약혼녀가 이블린에서 일 년 내내 체류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집안 여식이라는 것 뿐이었다.
"잘 된 일이네. 그게 뭐?"
"며칠 전에 너 새벽부터 불려나가서 공작 전하(HIH)께 사생아한테 기사단 맡겼더니 건방져 졌다고, 아니, 미안."
"괜찮으니까 계속 얘기해봐."
뜻하지 않게 얻어맞아 욱신거리는 기분이었지만 앙투안은 일단 이야기를 재촉했다. 말실수를 해서 눈치보는 이 녀석을 족친다고 해서 그가 세시안처럼 HIH가 되는 것도, 붉은 머리와 파란 눈이 지극히 로렌다운 갈색 머리와 초록 눈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숙부 되는 모브쥬 공작이 앙투안에게 그런 폭언을 한 건 사실이었다.
쟝-폴이 머뭇거리는 사이 옆에서 거들었다.
"공작 전하(HIH, 모브쥬 공작)께서 공작 전하(HSH, 멘 공작)를 폭행하셨다는 소문이 좀 있었습니다."
이제야 좀 상황파악이 되는 것 같았다. 앙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맞았어. 안 맞았어."
"이상하다...... 틀림없이 맞았을 것 같았는데."
밀치기는 했지만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안 맞았다니까. 그리고 무슨 상관이야. 네가 숙부님 시종인 것도 아닌데."
설마 마담 라 세르의 기사와 자기 시녀의 약혼자가 어울렸다고 불러다 뺨이라도 때릴까? 인사불성이던 쟝-폴의 갈색 눈동자에 흐릿하게 어이없다는 표정이 스쳤다.
"몰라? 진짜 몰라?"
"모른다니까."
앙투안의 말투에 짜증이 섞였다.
"너 얻어맞고, 아니 안 얻어맞았댔지, 아무튼 그날로 마담 라 세르께서 화가 나셔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공작 부인 전하께 어디 도둑년을 시녀로 쓰느냐 망신을 주셨다고......"
"뭐?"
결국 자리가 완전히 파했다. 앙투안은 술에 얼근히 취한 채 빠르게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코올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둔탁해진 뇌가 빠르게 돌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앙투안에게 앞다투어 설명을 해주었다.
고티에 백작의 조카라는 바레스 자작 부인은 어머니가 전 보르디 대공비의 시녀였다고 한다. 앙투안은 이 이야기를 새카맣게 잊어버린지 오래였으므로, 마치 처음 듣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델라이드 선황후의 여동생인 전 보르디 대공비는 칼레 대공녀였다. 칼레에서부터 주인을 따라 보르디로 온 자작부인의 어머니는 주인의 주선을 받아 고티에 백작의 동생과 결혼했는데 손버릇이 나빴다. 주인의 위세를 믿고 다른 공작부인들의 보석을 야금야금 훔치다가 들통나 시녀에서 쫓겨난 것이 몇십 년 전의 일이었다고 했다. 보르디의 기수가문인 고티에 가문의 딸이 칼레 산하에 있는 바레스 자작에게 시집간 이유가 다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들으니 기억이 나는 듯도 같았다. 앙투안이 형편없이 혼났던 그 날, 아롈이 웬 여자 하나를 불러다가 앞으로 자주 찾아오라며 웬일로 다정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것 뿐. 최근에 아롈은 시숙모 되는 모브쥬 공작부인과는 스쳐지나간 적도 없었다. 그 얘기를 하자 쟝-폴이 바로 그거라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거울의 홀에서 바레스 자작부인을 부르신 거, 그게 바로 그 뜻이라니까?
-그게 어떻게 망신이야. 그냥 우연일 수도 있지.
-마담 라 세르께서는 보르디 대공의 외손녀시잖아. 설마 그걸 모르셨겠냐? 하필 네가 얻어맞, 아니 깨진 그 날, 하필 관심도 없던 바레스 자작부인을 거울의 홀에서 불렀다고? 평소 보르디 아니면 공작 미만에게는 눈길도 안 주시는 분께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당연히 뭐하는 여잔가 소문 짜하게 나지. 보르디 쪽이 눈이 뒤집어져서 오늘 코시카 대사 올 때까지 그 얘기만 떠들었는데. 너 요 며칠 이블린에 없었냐?
-아, 아니. 나는 전하(HIH, 아롈) 곁에서 내내 호위하느라......
쟝-폴의 말에 따르면 그 소문 때문에 모브쥬 공작 부인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바레스 자작 부인을 내쫓았고, 지금 그 쪽 사람들은 앞다투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쟝-폴은 약혼녀의 소개를 받아 모브쥬 공작이나 앙굴렘 공작(모브쥬 공작의 아들, 세시안의 사촌)의 시종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앙투안은 순식간에 미안해졌다.
-아냐. 공작 전하께서 명령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안 듣겠어. 혹여 화내시면 그렇게 말씀드리면 되지.
쟝-폴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내가 쫓겨나면 네 시종 삼아줄래?
기사가 시종이 어디 있냐고 기겁하자 쟝-폴은 농담이라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앙투안을 믿는 구석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 고고하신 마담 라 세르께서, 아랫사람 일에 그 정도로 나서신 건 네가 두 번째잖아.
마음이 붕 떴다.
-물론 본인의 위신 문제라고 생각해서 나서셨겠지만.
이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 때부터 자리가 완전히 파할 때까지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동안 심장이 무겁게 느껴졌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쾅, 쾅, 쾅, 뱃속이 내려앉았다. 쟝-폴이 완전히 취해 들어가야겠다 일어선 순간 앙투안은 바닷속을 헤엄치는 커다란 물고기처럼 힘차게 공기를 뚫고 걸어나갔다. 기사단 예복 대신 연회에 어울리게 갖추어 입은 코트(justaucorps)자락이 마치 지느러미처럼 휘날렸다. 잠시라도 멈추었다간 숨이 막혀서 쓰러질 것 같았다. 얼마나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지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그저 차오르는 감정이 버거웠다.
누가 목줄을 잡아채는 듯 발걸음이 한 곳으로 향했다. 마법의 기본은 기원. 앙투안은 이 순간 간절히 한 소녀가 보고 싶었다. 이복형처럼 끌어안고 입맞출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눈에 담지라도 않으면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북쪽 출신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예지는 그런 그를 헤매지 않도록 이끌었다. 정원 한 구석, 이블린 본관에서는 다소 떨어진 나무 아래에 마침내 새벽 햇살 같은 금발이 보였다. 시중인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였다.
언제 서러워했냐는 듯 기억이 표백되었다. 앙투안은 인기척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아름다운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채 십 초나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싸늘하게 여름밤을 울렸다.
"사촌은 내 목숨이 그리 하찮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