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나들이 (1)
아이는 자리에 앉아서 꿈쩍도 않고 세 시간 째 책만 읽고 있었다. 옅은 금발 위로 햇살이 들었다. 기다란 속눈썹까지 투명하게 만드는 오후의 햇살은 사람을 참으로 나른하게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키옌은 하품을 하며 몸을 비비 꼬아댔다. 입술을 오물대던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옅은 녹색 홍채에는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사샤, 시끄러워.”
“우리 공주님. 나랑 좀 놀아줘.”
“나 공주님 아니야. 난 여대공이야. 공주 같은 거보다 높아.”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아이는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난 이제 키예바 여공(princess)이 아니라 옐레나 여대공이거든요, 알렉산드르 대공 전하.”
간혹 저렇게 거만한 표정을 지어보일 때면 정말 너무 닮아서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물론 사람이 틀로 찍어낸 쿠키 반죽도 아니고 어떻게 완전히 똑같을 수가 있겠느냐마는.
“네, 그럼 옐레나 여대공 전하. 저와 놀아주시겠어요?”
아이는 입을 살짝 삐죽이더니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 저 버릇.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닐 텐데 아이는 이안의 버릇을 똑같이 갖고 있었다.
“뭐하고 놀 건데?”
알렉산드르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 나가자.”
***
알렉산드르는 얼마 전 이반 3세로부터 회랑의 열쇠를 받았다. 회랑은 키옌 가문의 선조이자 초대 키예프 공인 대마법사 표트르가 창조했다고 알려져 있는 이공간이었다. 키옌의 피가 이어진 사람, 정확히는 표트르의 피가 이어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들어가 자신의 찰나를 영구적으로 못 박을 수 있었다.
동생을 품에 꼭 안고-손만 잡아도 되지만 알렉산드르는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 회랑에 들어가기 위한 어떤 행동을 한 그는 바로 초상화의 회랑에 발을 딛었다.
“얼굴 펴, 아롈. 안 그러면 엄청 못생기게 나와.”
아니나 다를까 벽에는 천천히 볼이 불퉁하게 부풀어 오른 옐레나와 알렉산드르의 얼굴이 나타났다. 최대한 웃었는데도 황소개 같은 팔자 주름은 어쩔 수 없는지 썩 잘생기게 나오지는 않았다.
옷이 번듯하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는 납치범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인형처럼 가만히 안겨 있는 옐레나를 내려놓았다.
“아롈? 뭐야? 그 이상한 이름은?”
“왜? 안 예뻐?”
“하나도 안 예뻐. 옐레나가 훨씬 예쁘단 말이야.”
“아롈도 예뻐.”
옐레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초상화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회랑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생겨서 다루는 법을 모르면 금세 길을 잃기 십상이었지만 이미 경고를 들은 덕에 옐레나는 오라비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똑똑한 아이니까 말을 잘 듣겠지 싶어 알렉산드르는 등을 돌리고 소피야 황후가 남색 옷을 입고 있는 초상화 밑에 놓아둔 짐을 뒤적였다.
“이건 소피야 황후 폐하. 이건 안나 여제 폐하. 그리고, 이 사람은.”
웅얼웅얼 배운 걸 복기하던 옐레나는 어느새 알렉산드르의 옆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야, 이 누더기는?”
“변장 도구.”
“이런 걸 입으라고?”
만찬의 메인으로 구더기 스테이크를 받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귀여운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린 아이는 뒷걸음쳐 물러섰다.
“안 그러면 못 나가. 네 옷이랑 내 옷 엄청 화려한데?”
그나마 알렉산드르는 검은 제복을 입고 있어 훈장만 떼면 군 장교라고 우길 수라도 있었지만 아롈은 모피로 된 모자와 코트를 걸치고 그 아래에는 금실로 수놓은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 추운 북쪽에서 어깨를 완전히 드러내는 얇은 소재의 옷은 귀한 신분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누더기도 아니야. 이 정도로 수놓은 사라판은 그래도 좀 사는 여자들이나 입는 거야.”
“그건 사샤 생각이고.”
“우리 공주님, 아니 아롈은 예쁘니까 이거 입어도 예쁠 거야. 빨리 갈아입자.”
“아롈 아니라니까.”
그래도 여자애는 여자애인가보다. 예쁘고 귀여울 거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간 옐레나는 금세 제 손으로 루바쉬까와 사라판을 뒤집어썼다. 머리에 두건까지 씌우고 나자 그래도 어떻게든 밖에 나갈만한 모습이 되었다.
알렉산드르는 급히 훈장의 새시와 별과 메달을 떼어 옐레나의 옷 위에 곱게 올려놓고 동생의 손을 잡아끌었다.
“갈까?”
“응. 아니, 잠깐만.”
아이는 있는 힘껏 고개를 꺾어 올려 초상화들을 쭉 둘러보았다.
“조금만 더 보고 가자.”
***
“어이, 사샤! 그 애는 누구야?”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취객들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꽤 밤놀이를 자주 다닌 덕분에 술집에는 아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났다.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알렉산드르는 옐레나를 뒤로 숨겼다. 블라디미르는 코까지 붉어져서는 낄낄대며 그의 어깨를 탁탁 쳤다.
“설마 숨겨둔 딸이야?”
“미쳤냐? 여동생이야.”
“여동생? 우와. 작네. 우쭈쭈. 아가야, 얼굴 좀 보자.”
“난 아가가 아니다.”
옐레나의 목소리는 샘물처럼 차가웠다. 바냐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얘가 원래 성격이 좀 이래. 조금만 더 있으면 자기가 가문 잇겠다고 나설 기세야.”
이 술집에서 사샤라고 통하는 가상의 인물은 적당히 부유한 군인 집안의 넷째 아들이었다. 그는 갑자기 형이 죽는 바람에 군인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엄격한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는 게 싫어서 도박장이 있는 이 술집을 자주 찾았다. 진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린 설정이라 허점이 많았지만 이 술집의 파락호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는지, 그들은 사샤를 금방 자기 패거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대부분 꽤 사는 집안의 내놓은 자식들이었기 때문에 씀씀이가 컸다. 비싼 담배를 피우고 밤새 술을 퍼마시며 양을 꼬치에 구운 샤실릭을 뜯고 보르쉬를 들이키면서 도박을 했다. 가끔 좀 많이 딴 놈들은 창녀를 찾아갔고 많이 잃은 놈들은 내장까지도 담보로 내겠다며 여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도 했다.
알렉산드르는 어린 아가씨가 장군감이라며 폭소하는 한량들을 뚫고 지나가 가장 구석에서 졸고 있던 바냐의 뒷덜미를 잡아 쫓아냈다. 물론 바냐는 항의했다. 눼가 취훼따궈 무쉬하는 궈야? 알렉산드르는 가차없이 대꾸했다. 숙녀에게 자리를 좀 양보해.
그다지 우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축객령이었지만, 옐레나는 개의치 않고 알렉산드르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물론 의자에 앉기 전에 손수건을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가죽으로 만든 부츠가 사라판 밑으로 나와 흔들거렸다.
“알렉산드르.”
“사샤라고 불러.”
“사샤는 얼간이야.”
알렉산드르는 그 ‘얼간이’라는 말이 여동생이 아는 한 가장 험악한 단어일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후드를 들추자 햇빛 한 번 못 받은 것처럼 흰 얼굴이 드러났다. 옐레나는 황실에 간혹 나타나는 색소가 부족한 혈통을 이어받아 보통 사람보다 훨씬 희고 머리와 눈의 색도 옅었다. 뺨은 볼거리에라도 걸린 것처럼 부어있었다.
“아롈. 화났어?”
“나는 그냥 어이가 없는 거야.”
술집은 충분할 정도로 시끄러웠고 옐레나의 목소리도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래도 너는 그렇게 얘기하면 안 돼. 잘 들어. 너는 군인 집안의 도도한 막내딸인 거야.”
“내가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해야 하는데? 나는 코시."
알렉산드르는 말을 끊었다.
“이름까지 말할 필요는 없고. 나도 알아. 기왕 놀러 나온 거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가만히 있어봐.”
옐레나는 소매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보더니 얼굴을 파지(破紙)처럼 구겼다.
“이거 냄새나.”
그 때 솥뚜껑만한 손이 자그마한 정수리를 푹 내리눌렀다. 옐레나는 펄쩍 뛰려했다.
“어이구. 까다로운 아가씨네.”
“아, 아줌마.”
곰들의 여왕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덩치의 여주인은 턱이 세 겹으로 겹칠 정도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옐레나의 정수리를 비벼댔다.
“그러게요. 얘는 우리 집 막내예요. 늦둥이라 좀 버릇이 없어요.”
“아이고. 시커먼 오라비랑은 하나도 안 닮았네? 예뻐라. 배 안 고프니?”
"아줌마! 내가 뭐가 시커멓다고."
“안 고파.”
여주인은 맥주통 같은 배를 내밀고 큰 소리로 웃었다.
“군인 집안의 곱게 자란 아가씨면 좀 새침해도 괜찮지. 이렇게 예쁘면 특히 말이야. 사샤.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옐레나는 딱 잘라 배가 안 고프다고 했지만 눈치를 봐서는 배가 고픈 것이 분명했다. 알렉산드르는 슬그머니 옐레나의 머리에서 여주인의 손을 떼어내며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옐레나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옐레나.”
대답이 없었다.
“우리 공주님.”
이쯤 하면 공주님이 아니라고 발끈할 때도 되었는데 조용했다. 정말 많이 화났나보다. 옐레나는 누가 갑자기 자기 몸에 손을 대는 걸 어마어마하게 싫어했다. 사실 아롈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황궁에서 알렉산드르 정도였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알렉산드르가 손을 대는 것을 싫어했다. 뒤에서 갑자기 안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곤 했다.
“미안해.”
옐레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안해. 다음에는 제대로 설명하고 데려올게.”
“…….”
“응? 아롈.”
때마침 여주인이 보드카와 옐레나가 마실 데운 우유, 음식들을 들고 왔다. 알렉산드르는 나무잔에 노란 지방이 많이 떠있는 우유를 따라서 옐레나의 앞에 밀어주고 양꼬치인 샤실릭, 만두의 일종인 피로시키, 야채 수프인 솔란카와 호밀빵을 조금씩 나누어서 한 접시에 담아주었다.
“먹어봐. 먹을 만 해.”
옐레나는 고집스럽게 쓰고 있던 후드를 더 푹 눌러썼다.
“거야?”
“응?”
“내가 키예프에서 자랐다고 무시하는 거냐고.”
알렉산드르는 여동생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잠시 감을 잡지 못 하다가 이마를 탁 쳤다.
“그럴 리가. 안 그래. 절대 안 그래.”
“그런데 왜 사람을 이런 곳으로 데려오고 그래?”
“미안해. 미안하다고 했잖아.”
알렉산드르는 말주변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만 헝클어트리던 그는 일단 잔에 투명한 술을 따라 쭉 들이켰다.
“나 사생아 아니야.”
“알아. 방금도 회랑에 들어갔잖아.”
“사생아라서 키예프로 쫓겨난 거 아냐.”
“나도 키예프 가봤어. 거기 되게 촌이지.”
“나도, 아버지랑 어머니 딸이야.”
“응. 맞아. 그리고 우리는 둘밖에 없는 남매야.”
정확히는 살아있는 남매. 알렉산드르는 회랑의 기록에 힘입어 오 년이나 지났는데도 안나의 얼굴을 기억했고, 얼마 전에 전에 죽은 이반의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반이 죽자마자 황도에 돌아온 옐레나는 이반의 망령처럼 닮아있었다. 이반의 얼굴을 닮은, 안나만큼 나이를 먹은 옐레나.
유리예프스키나 유리예프스카야가 아니야. 파블로비치랑 파블로브나를 달고 있다고 해도 걔들은 우리랑은 달라.
'형'이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