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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형제 (2)


 알렉산드르는 그 일 이후 이반을 완전히 모른 척 했다. 기껏 찾아가면 없다고 우기거나 진짜로 창밖으로 뛰어내리기 일쑤여서 이반은 열 번째 화해 시도가 실패한 후로 알렉산드르를 포기했다. 자기가 마음이 풀리면 슬금슬금 다가오겠지.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옐레나 대공비가 진통을 시작했다.

 정말 지독한 난산이었다. 이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산실 건넛방에서 내내 대기하고 있었다. 하도 오래 앉아 꼼짝도 안 했더니 편한 옷을 입고 있는데도 종아리가 배겼다.

 이반과 알렉산드르의 아버지이자 옐레나 대공비의 남편인 체사레비치, 파블 이바노비치 대공은 정부의 곁에 있었다. 정비가 아이를 낳고 있는데도 조산기가 있는 정부의 옆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이반은 딱 한 번 전령을 보냈다. 거절의 말을 듣고는 다시는 보내지 않았다.

 조부는 아까 들렀다 갔다. 콘스탄틴 대공과 예카테리나 대공비도 낮에 들렀다가 해가 지자 대공저로 떠났다. 그리고 이반의 형제, 알렉산드르는 산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시녀의 지적에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그래서 이반은 눈을 지그시 감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홀로 숨 쉬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반은 노크 소리를 듣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보는 사람이 없다곤 해도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비는 품위 없는 짓을 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들어와라.”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들어온 것은 옐레나 대공비의 시녀인 카나예바 백작 부인이었다. 이반은 그녀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남편을 잃은 뒤로 백작 부인은 지나치게 대공비를 모시는 데에 집착했다. 그녀의 눈이 스산했다. 

 “대공 전하.”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나 이반은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그만 둬. 산모에게 인사를 받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그녀는 한 달 전에 몸을 풀었다. 통상적으로 석 달 정도의 휴가를 받아 몸조리를 하거나 시녀 일을 아예 그만두는 데 그녀는 딱 일주일만을 쉬고 황궁에 나왔다. 낳았다는 딸은 친정에 맡겨둔 채였다. 

 “송구하옵니다. 대공비 전하께서 찾아계시옵니다.”

 “전하의 용태는 어떠하시지?”

 “아무래도 어렵사옵니다.”

 좋지 않다는 말이었다.

 이반은 조산사에게 몇 가지를 묻고 산실로 들어섰다. 대공비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어 지나치게 파리해보였다. 눈 밑에는 푸른 그늘이 드리우고 입술에는 핏기가 가셔 있어 평소의 미모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금빛 눈썹 사이에는 고통으로 인한 골이 깊게 파여 있어 그 고통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들의 앞에서 신음 한 토막 흘리지 않았다. 파사(破邪)의 주문을 흰 실로 수놓은 흰 이불이 배를 따라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어머니?”

 “그래.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불렀다.”

 그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산도 아닌데 꼬박 하루였다. 이반은 진통이 열두 시간이 넘어간 순간부터 차곡차곡 감정을 정리해서 마음의 한 구석에 쌓아 놓았다. 언제든지 털어버릴 수 있도록.

 안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는 일주일을 앓다 죽었다. 시의는 그녀가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 진찰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 되는 감정 부스러기까지 탈탈 털어다 갈무리 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르는 이런 그를 비난했지만 어머니는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이반은 뼛속 깊이 알 수 있었다. 그는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어머니를 닮았다. 마음으로부터, 영혼으로부터, 핏줄로 묶인 강한 유대감. 

 그래서 이반은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푸석해진 손을 꼭 잡았을 뿐이었다.

 “밖에서 들었습니다.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고요.”

 그녀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진통에 힘을 주지 않고 견뎌낸 대공비는 후,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하더구나.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지만.”

 “끄집어내십시오. 생사는 주님께서 결정할 바겠지요.”

 대공비가 그를 만나기 전에 모든 이들을 내보냈기 때문에 이반은 편하게 잔인한 의견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네 동생이자 코시카의 대공이 될 아이인데도?”

 “아직 숨도 쉬어보지 않은 핏덩이가 체사레브나의 생명에 비하겠습니까?”

 황실에는 아이가 많을수록 황권이 공고해진다. 사람이 적다는 것은 언제 황통이 끊길지 모른다는 것이니. 하지만 이반은 황통이 끊기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체, 자신이 황제가 되지 않고 죽는다면 그 다음 계승권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알렉산드르가 황제가 되든, 절치부심하던 콘스탄틴 대공이 황제가 되든, 폐주의 딸들이 탑에서 뛰쳐나오든, 코시카가 망하든 아무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반에게 있어서 뱃속 아기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대공비는 만족스레 웃었다. 

 “생각해보마. 하지만 앞으로는 내게도 이런 말을 하지 말거라.”

 이반은 그것이 유언임을 눈치 챘다. 그리고 아직 자신이 감정을 다 정리하지 못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심지어 쌓아놨던 감정의 상자가 와르르 쏟아져 부딪히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아플까.

 하지만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로 자란 적이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알렉산드르를 불러올까요?”

 “아니. 밖에 있는 자들을 불러오너라.”

 대공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반은 급히 방을 나갔다. 문을 닫자마자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울렸다.

 “이반.”

 그리고 그의 앞에 알렉산드르가 서 있었다.





 이반은 알렉산드르를 끌고 건넛방에 발을 들였다. 문을 닫자마자 천둥이 쳐도 가려지지 않을 것 같은 비명이 문 두 개를 뚫고 가슴을 때렸다. 구멍이라도 뚫렸나. 심장이 시렸다.

 "바니."

 이반은 잠시 남아있는 인내심을 가늠해보았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바니."

 제발 오늘만 좀 징징대지 마. 하다못해 저 끔찍한 진통이 끝날 때까지는!

 "왜 어머니는 나를 안 부르셨어?"

 정말, 제발.

 "알렉산드르 대공. 체사레브나께서 출산 중이신 걸 모르오?"

 꾹꾹 눌러 담은 짜증이 잘못하면 넘쳐흐를 것 같았다. 알렉산드르는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고개를 숙이고 구시렁거렸다.

 "이반은 불렀으면서."

 단 한 번만 더 지껄였다간. 인내심이라는 이름의 실 하나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정말 저게 열 살이나 먹은 아이일까. 분명히, 태어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왜 저 모양이지?

 알렉산드르는 의자에 쪼그리고 앉았다.

 "동생은, 무사히 나올 수 있겠지?"

 이반은 심호흡을 하고, 얼굴 근육을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입술로 곡선을 그렸다.

 "알렉산드르. 저는 지금 피곤합니다."

 네 어머니고 네 동생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저기서 죽을 것 같은 산고를 겪고 있는 여인은 내 어머니이기도 하다. 제발 저 애가 태어나든 죽든 결말이 날 때까지 만이라도 입 닥치고 있으면 안 되나.

 지금까지 두 달 조용히 잘 있어놓고 왜 하필 오늘이지? 일이 끝나고 인내심이 좀 차오르고 나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상냥한 형 노릇을 해주겠다. 그러니까. 좀.

 알렉산드르는 섬나라에서 개량된 황소개를 닮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반은 대체 마음이라는 게 없어?"

 머릿속이 하얗게 백열했다. 다시 한 번 차곡차곡 정리해놨던 마음이 또다시 와르르 쏟아져버리는 흔들림. 이반은 성큼성큼 걸어가 알렉산드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두 살의 나이차를 두고도 알렉산드르가 약간 더 컸지만 이반은 서 있었고 알렉산드르는 앉아 있었다.

 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보고 도대체 뭘 어쩌라는 겁니까?"

 태어날 때부터 감정의 기복이 적었고, 또 영리한 두뇌를 타고나 조숙했다. 

 두 살 어린 알렉산드르는 돌봐줘야 하는 어리석은 생물이었다. 떼도 많고 눈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끔 마음이 내키면 쫓아와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강아지. 그래서 알렉산드르의 비난은 지금껏 이반을 상처 낸 적이 없었다. 개가 말썽을 부리면 짜증을 낼지언정, 사람이 되어서 개를 붙잡고 진심으로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딱 그 정도의 감정, 겨우 그 정도의 위치.

 그러나 옐레나 대공비가 유언이라는 희대의 무기로 그의 가슴을 푹 쑤셔놓은 지금, 이반의 안에서 알렉산드르의 지위는 격상되었다.

 화를 낼만한 사람으로.

 아니, 자신이 개의 수준으로 떨어진 건가. 이반은 서느렇게 웃었다. 

 “천지분간을 못 하는 천둥벌거숭이 같으니. 아무나 오냐오냐 해주니까 머리가 크질 못 하지. 나이를 어디로 먹고 있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요. 죽은 다섯 살 배기 안나도 다른 사람이 기분 나빠 보이면 조심할 줄은 알았단 말입니다. 당신과 같은 피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군요. 천치 같으니라고.”

 이반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한 단어도 가지치지 않고 전부 쏟아냈다. 알렉산드르는 충분히 떼어낼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이반이 내뿜는 기세에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있었다. 

 이반은 호흡하며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쏟아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반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느니 빨리 물을 닦고 새 물을 따를 생각을 하는 소년이었다.

 그는 멱살을 잡은 손을 놓고 천천히 손을 털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니 앞으로 주의해주시오, 알렉산드르 대공.”

 어차피 사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 이반은 옷매무새를 추스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이틀 뒤 옐레나 대공비는 무사히 딸을 출산했다. 옐레나 파블로브나라고 세례 받은 그녀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키예프 공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이반은 옐레나 파블로브나가 황도로 돌아오기 전 열여덟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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