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짝사랑 (2)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코시카의 이반 3세, 코시카의 차르, 황도의 수호자, 주의 첫 번째 자식, 북부의 절대자 임페라토르는 시종이 빼주는 자리에 앉았다.
“모두 일어나라.”
“감읍하옵니다.”
노인의 눈이 빈자리를 훑었다. 미간이 씰룩거리더니 코에서 콧김이 뿜어졌다.
“새아가. 파블은 어디 있느냐.”
며느리가 시집온 지 삼십년이 넘었는데도 황제는 항상 며느리를 다정하게 새아가라고 부르곤 했다.
“몸이 좋지 않다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참석하지 못 하겠다고 하더군요.”
“개뿔.”
알렉산드르가 낮게 읊조렸다. 황제도 들은 것 같았다. 흰 눈썹이 찡그려졌다.
“못난 놈.”
황제는 주름진 손으로 탁탁 박수를 쳤다.
“식사를 대령해라.”
***
“그 대구 맛있겠다.”
알렉산드르의 포크가 냉큼 대구살을 찍어 가져갔다. 옐레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오라비를 쳐다보았다. 이게 몇 번짼지 모르겠다. 나탈리야가 음식을 잘라다 손질해서 옐레나의 접시에 놓아주면 두 번 중 한 번은 알렉산드르가 낚아채갔다.
“알렉산드르 대공 전하. 대공께도 시종이 있지 않아요?”
황제의 앞이라 얄미울 정도로 또박또박 말한 옐레나는 이번에야말로 크림소스를 얹은 생선을 입에 넣었다. 대구는 날이 추운 코시카에서도 많이 잡히는 생선인데다 맛이 좋아 식사에 자주 올라왔다. 고소한 생선살이 소스와 섞여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아롈 여대공 전하. 오라비에게 생선 한 조각 주는 게 그렇게 아까우십니까?”
“제 이름은 옐레나 파블로브나예요. 아롈이 아니라.”
“뭐 어떤가요. 솔직히 옐레나 대공비와 옐레나 여대공이라고 하면 아랫사람들도 다들 헷갈릴걸요? 애칭으로 구분하는 것도 좋잖아요? 그렇지요? 폐하.”
묵묵히 쇠고기를 씹고 있던 황제는 고개를 들어 옐레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아롈이라.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 부르자.”
옐레나가 좋은데. 하지만 할아버지는 생김새만큼이나 무서워서 감히 뭐라고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옐레나는 괜히 우유를 꼴깍꼴깍 들이켰다.
작은 배가 금세 볼록 튀어나왔다. 먹을 것을 다 먹자 옐레나는 조용히 물을 마시면서 대화를 듣기만 했다. 옐레나 대공비는 단 한 번도 딸을 쳐다봐주지 않았다. 예카테리나 대공비와 콘스탄틴 대공은 아까 한 소리를 듣고 나서 불퉁한 얼굴로 서로를 쿡쿡 찔러대며 수군거리기만 했다. 안나 여공은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있었다. 알렉산드르는 조부가 공부 관련 얘기를 하면 온갖 거짓말을 지어내며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졸려. 배가 너무 부르니까 슬슬 눈꺼풀이 감겼다. 그 때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조부는 잔을 식탁에 탕탕 부딪히더니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고함쳤다. 옐레나는 깜짝 놀라 졸음에서 깼다.
“게 무슨 일이냐!"
“폐하. 파블 대공이 들었습니다.”
“꺼지라 해라!”
황제의 고함에 어린 소녀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낮은 남자 목소리가 문을 뚫고 들려왔다.
"들어가겠습니다, 아버지."
조부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도 다시 꺼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장신의 미남이 시원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검은 옷 위에 붉은 새시를 두르고 금빛의 휘황찬란한 훈장을 몇 개나 달았는데도 얼굴로 시선이 갔다.
맑고 깨끗한 키옌 가문의 파란 홍채와 칠흑 같은 머리카락, 북부인의 흰 피부가 어우러져 꼭 이교도의 신화에나 나올 법해 보였다. 옐레나는 예전에 다른 시녀들이 수군거리던 이야기를 책을 보고 읽듯이 기억해냈다.
지금도 미남이지만 젊었을 때는 정말 깎아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얼굴이라 혼인식에서 여러 처녀들이 손수건을 적셨다고.
긴 다리로 무릎을 꿇고 일어나는 것조차 춤처럼 보였다. 파블 이바노비치는 모후의 자궁에서부터 아름다워보이는 방법을 터득한 듯, 사십줄에 들어선 지금도 대단한 미남이었다. 황제의 앞에서 다른 이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예가 아닌 탓에 옐레나는 앉은 채로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에 우수가 맺힌 듯했다.
"몸이 안 좋다더니 여기까지 왜 싸돌아다니는게냐."
조부가 배배 꼬인 말투로 비아냥을 던졌다.
"폐하. 외람되오나 먼저 앉으라 하시지요. 바실리예프의 저녁에 뒤늦게나마 온 가족이 모였으니 어찌 경사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롈 여대공까지 모두 모인 축일은 오늘이 처음이 아닙니까. 제 얼굴을 봐서라도 노여움을 잠시 거둬주시지요."
옐레나 대공비의 유창한 설득에 조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블은 당연한 듯이 비어있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전채도 없이 따뜻한 수프로 속을 데우더니 바로 시종이 가져다 준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아프시다 들었습니다만, 식욕이 왕성하신 걸 보아하니 그다지 강한 병마는 아닌 듯하여 다행입니다, 대공 전하."
파블은 꿀꺽 입 안에 든 음식을 삼키더니 벌레를 쫓듯이 콘스탄틴 대공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네, 대공."
"그러게나 말입니다. 체사레비치께서 병이 깊다 하여 두문불출하시니 어디 얼굴을 볼 새가 있어야 말이지요."
"나랏일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겠습니까? 고단하다보면 병이 들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럼 잠시 쉴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체사레브나. 그 바쁘신 와중에 장난감을 가지고 노신 지가 벌써 스무 해가 넘으니 그 애착이 대단하다 할 밖에요."
"아, 오늘 진짜."
알렉산드르가 나지막히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의 짜증은 파블의 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은으로 된 칼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주아주 옛날에는 식사를 하다가 칼부림이 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신뢰'와 '우정'을 표하는 것이었다.
호수에 맑은 하늘이 비친 것 같던 눈에는 천둥이 울리고 있었다. 옐레나는 아버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어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안나 콘스탄티노브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놀랍게도 싸늘한 눈으로 알렉산드르를 쳐다보다가 아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금세 얼굴을 바꾸어 방긋 웃었다. 얼굴이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바뀌었다.
예카테리나 대공비는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고도 부족한 듯 이번에는 알렉산드르를 향해 비아냥을 던졌다.
"과연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 하던가요? 취향이 대대로 비슷하여."
옐레나는 너무 놀라서 알렉산드르의 팔을 부여잡았다. 정말로 칼을 던질 것 같았다.
챙챙챙챙챙.
은제 포크가 섬세한 세공의 유리잔과 마주쳐 경쾌한 소리를 냈다. 모든 눈이 자신에게 향했음에도 대공비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박수를 쳤다.
"후식을 가져오너라."
그러더니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 실례했어요, 예카테리나 대공비. 방금 무어라고 말씀하고 계셨지요?"
예카테리나는 김이 샜다는 듯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체사레브나."
"그것 참 다행이로군요. 오늘의 후식은 제가 특별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라. 예카테리나도 좋아하실 거예요. 친정에서 마카롱을 잘 만드는 요리사를 데려왔답니다. 간만에 맛을 보겠네요."
알렉산드르는 얌전히 집어든 은제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옐레나는 손에서 힘을 탁 풀었다.
"사샤. 마카롱이 뭐야?"
"몰라. 먹어본 적 없어."
살얼음판을 기어가는 것 같은 식사 시간이 드디어 끝났다. 옐레나는 기껏 나온 단 과자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배가 쪼그라드는 기분이라 한 입도 먹기 힘들었다. 알렉산드르의 강권 때문에 딱 한 개를 우물우물 씹어봤지만 무슨 맛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후식을 말 그대로 한 입에 삼킨 조부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한 번 쳐다보다가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나가버렸다. 우르르 그 뒷모습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났다. 숙였다가 일어서니까 정말 토할 것 같았다.
콘스탄틴 대공 부처와 안나 콘스탄티노브나도 금세 사라졌다. 광활한 식당에는 일가족-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 그리고 그들의 시중인들만이 남았다.
옐레나 대공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남편의 옷깃에 붙은 실밥을 떼어냈다.
"고마워."
"늦으셨군요. 안 오시는 줄 알았답니다."
"표트르랑 알렉세이가 아파서 늦게 나왔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 마차가 달리기 어렵더군."
"공자들이 병에 걸렸나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아, 별 것 아니야. 눈싸움을 하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지. 곧 나을 거야."
"시의를 보내도록 하지요. 날이 좋지 않으니 걱정됩니다. 살펴들어가세요."
대공비는 우아하게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일어나서는 식당을 나갔다.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체사레비치."
알렉산드르는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났다. 소녀도 덩달아 무릎을 꿇다가 뒤로 뺀 발로 치마를 밟아 휘청거렸다. 고개를 들었다가 파블 대공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예법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느냐, 옐리자베타."
어? 옐레나는 머뭇머뭇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저는 옐레나입니다."
흰 얼굴에 무안함이 확 피어올랐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 다리로 쓱쓱 걸어나가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이상하다. 저 쪽으로 가면 계단 없는데. 알렉산드르가 킥킥킥 웃었다.
"와, 자식 이름 공부는 좀 하고 다니시지. 하긴 마리야라고 안 한 게 어디야."
"그래도. 바쁘시다니까."
"너 되게 어머니 같은 소리를 한다. 이럴 때는 욕 좀 해도 돼."
정말일까? 하지만 아버지를 욕하면 안 되는데. 피를 물려준 부모님과, 위대한 조상님들께 존경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알렉산드르가 자신보다 더 잘 알 것 같았다. 대체 뭐가 맞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가자."
"어딜?"
알렉산드르는 쭉 가야 하고 자신은 왼쪽으로 한 번 꺾으면 있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아예 식당에서 나와서 가야 할 방향이 달랐다. 알렉산드르는 코에 주름을 잡았다.
"나 차 한 잔만."
옐레나는 나탈리야의 치마폭을 흘끔 거리고는 단호하게 잘랐다.
"싫어."
***
나탈리야는 옐레나 여대공을 따라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어린 여대공은 그녀가 옷을 갈아입힐 때 어깨를 움츠렸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머리를 풀어주고, 장신구들을 풀어 함에 곱게 넣어두고, 여대공이 잠자리에 드는 것까지 확인한 그녀는 인사를 올렸다.
"물러가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시길."
"나탈리야."
"예, 전하."
옐레나는 침대에 모로 누워 나탈리야를 쳐다보았다.
"곁방에서 자지 말고 그냥 돌아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난 원래 사람 있으면 못 자. 그래서 주코바나 쿠트조바나 카나예바도 곁방에서는 안 자는걸."
"하지만."
"자꾸 그러면 아까 나한테 대든 거 일러바칠 거야. 그런데 이제 여대공 전하께서도 저를 괴롭히시는군요? 그런데 여대공 전하께서도 이제 저를 괴롭히시는군요? 뭐가 맞더라?"
나탈리야는 고개를 푹 숙였다.
"허면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문 꼭 닫고 나가. 몰래 복도를 통해서 곁방에 들어가면 나 정말 화낼 거야."
나탈리야는 당황스레 여대공의 방을 나오다가 알렉산드르와 눈이 마주쳤다.
"대공 전하."
알렉산드르는 아까의 옷차림 그대로 벽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나탈리야는 엉거주춤무릎을 굽혔다.
"아니, 하지 마."
알렉산드르는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쳤다. 밝은 하늘색 눈이었다. 나탈리야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알렉산드르가 잘생겼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무서운 걸까. 알렉산드르의 얼굴은 본 적 없이 붉었다. 특히 귀가.
"나는, 당신이 내 앞에서 무릎꿇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하. 저는 코시카의 신민으로서 마땅히."
"나는 당신이 좋아!"
가슴이 철렁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변성기에 들어서 찢어지는 쇳소리가 났다.
그녀는 벌써 그를 한 번 거절했다.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가장 단호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 때 그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끝내 알았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르는 한숨을 쉬며 웃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잘못했어."
어째서 사과하는 걸까. 나탈리야의 주인인 옐레나 대공비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장아장 걷는 옐레나 여대공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을 지언정 나탈리야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차차기의 황제이며 차기의 체사레비치가 될 알렉산드르가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시무룩하게 뒤에 감추고 있던 꽃을 내미는 걸까. 이 계절에 꽃을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이 좋아."
"저를 좋아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나탈리야는 조그맣게 말했다.
"전하께서 저를 좋아하실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나탈리야가 대공비의 시녀로 들어온 것도 온갖 연줄을 총동원한 덕이었다. 돌로루코프 가문은 바로 전대에 전하 칭호를 잃었다. 가문은 완전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체사레브나는 열두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백작가의 딸조차도 나탈리야를 무시했다. 자신은 그저 그런 계집애에 불과했다. 하루 빨리 괜찮은 사람과 결혼해서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왜.
알렉산드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들고 있던 꽃을 나탈리야의 귀에 꽂았다.
"꽃이 잘 어울려."
노란 해바라기는 코시카의 국화였다.
"꽃이 잘 어울려서 좋아."
그는 괴롭게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건 이유가 안 돼?"
코가 시큰했지만 용케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탈리야는 눈을 감았다. 입술이 내려앉았다.
처음 하는 입맞춤은 생각보다 훨씬 까슬까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