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한꺼번에 말을 많이 해서 지쳤는지, 아롈은 팔짱을 끼고 마른 침을 삼켰다. 앙투안은 부질없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블린 본관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달빛 고요한 정원에는 차는 커녕 물 한 모금 없었다. 숨을 고르느라 쇄골에 얹은 손가락이 부러질 듯 가늘었다. 지금 이 눈부신 소녀는 기다란 속눈썹마저 버거운 듯 보였다.
"경이 내 기사인 이상 앞으로도 이런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각오하겠습니다!"
"씩씩하군."
아롈이 얼핏 웃었다.
"뒤에서 뭐라고 지껄이든 신경쓰지 마라."
열등감을 들킨 것 같아 움찔했다.
"풀죽어 돌아다니지도 말고."
"예."
"모브쥬 공작도, 칼레도, 오베르뉴도, 부르고뉴도 열심히 깎아내리려 애쓰겠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인형 놀이에 취미가 없고 세시안도 그걸 알아."
어안이 벙벙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다. 종려 가지 기사단은 세시안이 아롈에게 주는 선물이며 그 자신은 부산물일 뿐이라고. 그래서 아무리 어깨를 펴려 해도 당당해질 수 없었다. 굳이 부단장 지위를 준 것은 사생아 동생에게 쓸만한 지위 하나 얹어주려는 의도라고 여겼다. 받아들인 건 그저 아롈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였는데.
"왜 그런 표정인가?"
"아닙니다."
손을 내저었지만 아롈은 금세 눈치를 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설마 경까지 그리 여겼던 건 아니겠지?"
할 말이 없었다. 아롈이 한숨쉬었다.
"경이 여태껏 보기에 나나 세시안이 그리 한가해보였나? 기사단은 사랑놀음 때문에 만들기엔 지나치게 번거롭잖아."
하지만 온 이블린이 그렇게 떠들었다. 비단 아랫것들 뿐만이 아니었다. 종려 가지 기사단도, 대공가의 기수가문도, 여섯 대공도, 심지어 루이 오귀스트 황제조차 그리 말하지 않았나. 종려 가지 기사단은 세시안이 아내에게 주는 예쁜 선물이라고.
모브쥬 공작과 공작부인은 자신들이 혜택받는 소수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종려 가지 기사단이 그리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로렌에서 기사란 그리 희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권세와 지위가 높은 여섯 대공가는 각자 가문 휘하에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었고, 기수 가문의 전통이 남아있는 만큼 기사 개인의 충성을 받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았으므로.
종려 가지 기사단은 '옷이 예쁘고', '구성원의 신분이 희귀해서' 주목받은 것 뿐이었다. 황제의 사생아로서 기사단의 희소성을 더한 앙투안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죽을 만큼 부끄러운 것은, 이리 질타받으면서도 '진짜 이유'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클라리 경, 이해를 못 했으면 못 했다고 말을 해. 두 번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럼 왜 만드신 겁니까."
내장을 쥐어짜는 듯 부끄럽게 꺼낸 물음에, 아롈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오늘 들은 대로 나는 모국(母國)과 척을 졌어. 도움이 되리라 싶었다."
앙투안은 오늘 인내의 홀에서 고성이 오가기 아득히 전부터 기사단이 창설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쪽에 주목했다.
"시체보다는, 살아있는 사촌이 더 낫다고 하셨던 것도 그 말씀입니까?"
연둣빛 눈이 동그래졌다.
"경. 듀츠 어 할 줄 알았나?"
"외할아버지가 중부 사람이라 배웠습니다."
"그래. 작센에서. 기억이 나는군. 어디부터 들었지?"
"목숨이 그리 하찮으냐는 곳부터....... 사실입니까?"
"어디 가서 떠들지는 말아라."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뭘?"
"목숨이 위험하시다고!"
"내가 경에게 아는 걸 전부 알려야 하는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감정은 당위를 짓눌렀다.
"목숨 위험하신 걸 아셨으면서, 어떻게 제게는 언질 한 번을 안 주실 수가...... 저는 부단장입니다!"
"설마 내가 그걸 모르리라고 생각하나?"
"위험이 닥쳐오는 줄 모르는데 어떻게 호위를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기사들이 전하의 주변을 떠나도 괜찮았던 겁니까? 방금도 혼자 계셨잖습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소리 낮춰."
격정에 차오른 그와 달리 아롈은 본인의 목숨을 입에 올리면서도 침착했다.
"말이 위험하다는 거지 어머니, 아니 경애하는 여제 폐하께서 독이나 칼을 보내실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 다른 방식을 좀 더 선호하시겠지."
딱딱한 갈리아 어에서 깨끗한 듀츠 어로 바뀌어 있었다.
"검을 들고 암살자에게 맞서 용감히 싸울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 긴장 풀어라. 그저 여제 폐하께서 기사단의 존재를 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앙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결국 제가 인형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지나친 투정이었을까. 그러나 앙투안은 멈추지 못했다.
"그저 예복을 입고 뒤따르기만 하면 된다면 인형과 같은 것 아닙니까."
'제가 폐하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냐'는 질문을 간신히 삼켰다. 아롈은 앙투안을 노려보았다.
"작센, 기억하나?"
앙투안에게 작센이란 첫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늘하늘 산책하는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정신없이 두근거리던 밤.
대체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경이 부득불 따라온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아......."
치하의 말 한 마디와 약간의 금품을 받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일이었다.
"종려 가지 기사단은 그 일을 떠올리고 구상했다. 경이 거절했더라도 만들었을 테지만, 적어도 장식품으로 쓰려고 단장 자리를 제의한 건 아니야."
단어가 혈관을 돌아 심신을 홧홧하게 데웠다.
"제가 필요하셨습니까."
"그래."
아롈은 자신이 앙투안의 가슴에 꽂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아무렇지 않게 긍정했다. 술 취한 귀를 의심했으나 짧은 문장은 잘못 들을 여지가 없었다. 그는 단순하게 해석했다. 사모하는 여인이 기사인 그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그게 벅찬 나머지 새파란 눈을 짚었다. 헛된 기대가 사탕처럼 달았다.
"그렇다 해도 너무 부담갖지 마라."
부담은 커녕 벅차서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어쩔 줄 모르던 청년은 손가락을 살짝 벌려 그 사이로 사모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희고 갸름한 얼굴,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금발, 우아한 눈매 따위가 어울려 기품이 흘렀다. 야윈 손목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심장이 바윗덩어리처럼 무겁게 뛰었다. 치켜올라갔던 눈초리가 걱정으로 느슨해져있었다.
"경에게 대단한 걸 기대하지 않는다. 경의 감이 항상 작동할 리도 없거니와 단 한 명에게 내 안전을 고스란히 떠맡길 리가 있겠나? 그저 곁에 있다가 예상치 못한 위험을 다만 한두 가지라도 걸러주면 그걸로 족하다."
하필 부단장인 그가 아롈의 호위를 맡게 된 것은 우연 혹은 세시안의 배려라 여겼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 아닌가. 그 많은 기사 중 앙투안을 특별히 고른 것이다. 앙투안은 특별히 '그의 예지'와 그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검술과 그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기뻐 목소리가 떨렸다.
"저를 신뢰하십니까?"
"난 인형놀이 뿐만 아니라 시간 낭비하는 취미도 없어."
두 번 설명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실 경이 앤과 약혼하는 게 내 신뢰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겠지만, 싫다고 하니 그건 됐다.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니 앞뒤를 잘 살피도록 해. 맞고 다니지 말고."
"맞지 않았습니다!"
발끈해서 거부하려다 이어지는 말을 듣고 금세 얌전해졌다가 또 다시 폭발했다. 금발의 숙녀는 창백해진 뺨을 만지작거렸다.
"마담 라 세르인 내가 고작 자작 부인을 불러다가 괴롭히는 모양새가 되지 않았나? 그렇다고 직접 찾아가 모브쥬 공작 부인을 밀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몇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아 이번 일로 단단히 마음 상한 모양이었다. 이 건에 대해서 앙투안은 혀가 몇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고양이처럼 치켜올라간 눈이 앙투안을 노려보았다.
"내가 그런 치졸한 짓까지 해가며 뒤처리하게 만들지 말고 미리 미리 발을 빼는 방법을 배워."
"예."
"대답만 잘 하는군?"
투덜거리던 소녀는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곧바로 허리를 폈다. 정원에 놓인 하잘것없는 의자가 옥좌라도 되는 양.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잘 듣고, 생각하고, 말은 아껴라. 경은 틀림없이 스스로 짐작하는 것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될 테고, 노력이 결실을 맺을 날이 올 거야."
여성답지 못하다고 속으로 흉을 봤던 적이 있었다. 딱딱한 말투, 앙다문 입술과 고집스러운 눈매. 어여쁜 얼굴이 아깝게 곰살맞은 구석이 전혀 없는 성격이라고. 요정 같은 미모와 여릿한 목소리에 반한 뒤에도 그런 범연한 면모는 아롈의 뼈대를 이루듯 남아있었다. 어쩐지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익숙했다.
-내가 키예나기 때문이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앙투안은 그가 외면해왔던 부분이 아름답다 느꼈다. 우윳빛 단백석(오팔, opale)에 반하여 만지작거리다 문득 표면에 도는 무지갯빛마저 어여삐 보이듯.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발을 뺄 수 없는 상황도 분명 있는 법이지. 가장 신실하신 두 분 폐하가 상대만 아니라면, 명예를 걸고 장갑을 던져도 좋아. 내가 허락하겠다."
말에서, 표정에서, 온기가 사금(沙金)처럼 반짝였다. 감당하기 어려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이 완전히 땅에 닿으며 코트 자락이 풀밭 위로 내려앉았다. 검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사랑하는 여인이 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랑과 필요(救命) 사이에는 대체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는 걸까. 적어도 적서의 차보다는 좁겠지. 앙투안은 멘 공작이고 아롈은 마담 라 세르이자 존경하는 형의 아내였다. 결국 이 간극은 무슨 수를 써도 좁힐 수 없다. 충분히 납득했는데도 갈 곳 잃어 헤매던 마음이 마침내 이정표를 찾았다.
-경이 내 기사잖아.
낭랑한 허락이었다. 닿을 수 없다면 가능한 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음이 다할 때까지 지켜도 좋다고. 옆자리는 아니지만 뒷자리를 내준 것이다.
예지를 가진 호위. 아롈이 아무리 세시안을 사랑한다 한들 대체 불가능한 그만의 자리였다. 그 유일성(惟一性)이야말로 아롈이 그에게 내줄 수 있는 최대한인 동시에 연정이 충족할 수 있는 최소한이었다.
앙투안은 자신이 검을 배워 기사 작위를 받았다는 사실에, 북쪽 출신 어머니가 물려준 예지에 지극히 감사했다. 마법의 근간은 기원. 그리고 앙투안의 마법은 예지와 직감. 직감이 돌연 그를 달빛 어린 정원으로 이끌었을 때부터 이런 미래가 안배되어 있었을까? 언제나 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던 예지가 고작 웃음 한 번을 위해 그를 패배로 이끈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장갑을 던져도 좋다거나 하는 허락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분명 굉장한 관용과 호의였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매사 버겁게 가슴에 매달려 있던 연정을 내려놓아 장식할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홀려있었으므로. 한 번 확장된 마음은 그칠 줄 모르고 정신없이 퍼져나가 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단단함과 가냘픔. 그 혼란 속에서 그가 임의로 분류해놓았던 심상들마저 마구 뒤엉켜 녹아내렸다. 그저 모든 것이 걸리는 곳 하나 없이 휘황하기만 했다.
빛을 가득 담은 마음을 퍼올리듯 붉은 머리의 기사는 의아하게 그를 내려다보는 소녀에게 서약했다.
"전하. 제 목숨을 다해 지켜드리겠습니다."
대체 왜 그 이야기로 튀는 거지?
아롈은 입속말로 불평을 웅얼거리다가 차마 분위기를 깰 수 없었는지 흰 손을 내주었다. 감히 잡지 못하고 손바닥에 스치듯 얹어 입술을 댔다. 감격이 꽃망울처럼 터져올랐다.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지."
"예!"
충분한 시간을 준 뒤 소녀는 너무 늦었으니 들어가자며 몸을 일으켰다. 등을 보였지만 조금도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다. 열기 어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느 여름날 밤, 이블린.
종려 가지 기사단 부단장 루이 앙투안 드 발루아는 두 번째 첫사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