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보르디의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는 정말이지 취하고 싶었다.
숙녀가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마실 수 있는 가장 독한 술을 남들이 눈치 채지 않을 한도 내에서 연거푸 들이켰는데도 정신은 찬물처럼 맑기만 했다.
그 투실투실한 손등에 입 맞추던 순간에는 속에서부터 진득한 썩은 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같잖은 우월감이 담긴 표정이란! 시골뜨기 주제에!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으로 애썼건만 바로 그렇게 애썼기 때문에 점점 초라해지고 있었다.
엘리엔은 그걸 자각하고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은 온 몸을 찔러대는 가시였다. 유행에 따라 완전히 내놓은 어깨가 따갑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아플 수록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밀고 배에 힘을 주었다. 고고한 백조처럼 미끄러지는 걸음걸이로 걸었다. 턱을 당기고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못 들은 양 웃었다. 언제나 숨 쉬는 듯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이제 의식적으로 행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아,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던가.
“어머나, 툴루즈의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언제나 사이가 안 좋았던 여자였다. 부르고뉴의 셋째 딸인 조제핀은 끝이 갈라진 턱을 치켜들며 호호호 웃었다.
“그러게요, 조제핀 양. 무려 ‘반나절’이나 조제핀 양의 얼굴을 못 보다니 제가 상심이 컸답니다.”
“별 말씀을요. 항상 바쁘신 툴루즈의 아가씨께서 저따위를 만난 걸 기억하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조롱 섞인 말이었지만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간혹 교만이라는 죄악이 머리를 들더라도 끝까지 평정을 지키며 상대에게 예의를 다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엘리엔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를 들면 자기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는 먼저 말을 걸 수 없다는 불문율을 지킨다든가?”
조제핀은 살짝 눈을 치켜떴다.
엘리엔은 보르디의 유일한 대공녀였고, 조제핀은 부르고뉴의 셋째 딸이었다. 요즘에야 사문화되다시피 한 규칙이지만 원래 딸이 여럿인 동작(同爵)의 가문끼리 비교할 경우 장녀가 다른 가문의 차녀보다 높았다.
조제핀은 눈꼬리에 난 점을 파르르 떨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툴루즈의 아가씨께서는 다소 생각이 구식이시군요. 요즘에는 같은 작위의 여인들끼리는 서열을 따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그거야 이블린에 들어오지도 못 할 이들의 일시적인 유행이겠지요. 언제나 전통이라는 건 의미가 있는 법이고, 조제핀 양이나 저나 자랑스러운 7인의 맹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딸들인 이상 그런 의미 있는 전통이야말로 당연히 지키고 보호해야 하지 않겠어요? 드레스의 옷감이나 구두에 다는 보석의 유행 같은 것과는 당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지요. 에티켓이라는 건 고귀한 이의 기본이니까요.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도 해주고요.”
안타깝게도 조제핀은 결혼한 그녀의 언니보다는 순발력이 떨어졌다. 나중에 집에 가서 할 말을 생각해내고 원통해하겠지. 바보 같으니. 그럴 때는 대공가의 모든 딸에게 세례를 받자마자 아가씨 칭호를 주도록 칙령이 내린 지가 언젠데 그러냐고 반박해야지.
“Et populum pauperem salvum facies oculisque tuis excelsos humiliabis. 주께서는 불쌍한 백성은 구하여 주시고, 교만한 사람은 낮추시니, 라고들 하잖아요?”
그녀는 지나가던 하인을 손짓으로 세운 다음 우아한 손길로 백포도주가 담긴 술잔을 집어 들었다. 조제핀의 표정을 안주로 한 모금 머금고 입안에서 굴리자 상큼한 향이 퍼졌다.
이 향은 조롱의 잔재일까?
보르디 대공의 늦둥이 외동딸인 엘리엔은 다른 대공녀들처럼 아가씨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툴루즈의 아가씨가 그녀의 칭호였다. 툴루즈가 유명한 와인 산지이기는 해도 샤토 브리앙, 샤토 루, 상파뉴 등의 하고 많은 곳을 놔두고 왜 하필. 부르고뉴 대공령은 로렌 땅이 아니라던가.
별 것 아닌 와인 한 잔이었다. 툴루즈 산 와인을 하필 마르그리트 안 따위가 인정받는 연회에서 서빙하는 것이 그녀의 앞에서 무릎 꿇은 것만큼이나 치욕스러웠다.
“가르침에 감사드려요, 엘리엔 양.”
조제핀은 정말 애써서 웃어보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교양 넘치시는 분께서 오늘의 주인이 아니라니, 제가 더 안타깝군요. 툴루즈의 아가씨께서도 어서 좋은 혼처를 찾으셔야지요.”
엘리엔은 조제핀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유치한 도발이었지만 유치한 만큼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엘리엔은 짧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걱정 감사해요. 조제핀 양.”
빈 크리스털 잔을 하인에게 넘겨주고 손을 한 번 만지작거린 다음 걸었다. 갑자기 묵은 취기가 한꺼번에 뱃속에서 올라왔지만 눈 한 번 제대로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걸었다.
아, 그래.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나는 그 년에게 무릎을 꿇었지.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차츰차츰 지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마르그리트 안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발가락조차 제대로 달리지 않은 배냇병신을 황태자비로 삼겠다고 선언한 황태자 루이 오귀스트는 물론이요, 엘리엔의 손을 꼭 부여잡고 반드시 너를 며느리로 삼으리라 운운한 이모조차도 경멸스럽기 그지없었다.
결국 알량한 아이 때문에 버림받았다. 황후는 한없이 고상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만 믿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놓곤 영혼이 깃들었는지도 모를 콩알만한 핏덩이 때문에 조카인 자신을 버렸다는 것이 자존심을 할퀴었다.
이 와중에도 마르그리트 안은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옷자락에 파묻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한껏 화장을 하고 꾸미기는 했지만 햇볕에 타서 주근깨가 생긴 칙칙한 피부며 부스스한 머리칼은 숨길 수 없었다. 타고난 촌스러움이 어디로 갈까. 그나마 단시간에 고칠 수 있는 외모도 저 모양인데 교양과 예법은 또 어떨까. 볼 만하겠지.
그녀는 마르그리트 안의 앞에 다다라 촌뜨기 따위가 감히 흉내 낼 수조차 없을 만큼 우아하게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났다.
“Est pulchra nocte. Princeps Mrs.”
“q, quid?”
그래도 페란토 어를 알아듣기는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루이 오귀스트가 가정교사라도 붙여서 밤낮으로 공부시킨 걸까? 엘리엔은 부드럽게 웃었다.
“Fit gratulatio Princeps Mrs. Nolite timere. Pulcherrima princeps Mrs in saecula saeculorum. Credo vos.”
축하합니다, 황태자의 부인이여.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전례가 없이 가장 아름다우신 황태자의 부인이 되실 테니까요. 저는 믿고 있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홀에 있는데 정말이지 마르그리트 안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나 맹목적이라니. 사내 때문이면 차라리 나았겠지.
엘리엔은 멀뚱하게 눈을 굴리며 그리 어렵지도 않은 말을 해석하고 있는 마르그리트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아주 상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같이 춤과 승마와 산책으로 단련한 엘리엔의 근력은 남들에 비해 처지지 않았다. 게다가 손가락에 낀 반지가 제대로 살점을 찢어놓았다.
쾌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개처럼 관통했다. 여인들이고 사내들이고 그 자리에서 비명 한 마디 못 지르고 굳어버렸다.
엘리엔은 생글생글 꽃처럼 나비처럼 웃었다. 평생 이보다 기분 좋았던 일이 없었다. 뒤늦게 올라오던 취기까지 더해지자 정말로 날개라도 달고 날아갈 것 같았다. 마르그리트의 통통한 뺨은 발갛게 부풀어 오르고 입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 그래. 입술에 핏물이라도 물고 있으니 이제 좀 화장이 볼 만 하잖아.
“어머나, 실례합니다. 블루아의 아가씨. 이런 좋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날파리가 눈에 띄는 바람에 놀라서 그만.”
화르륵 타오르는 그 눈이라니. 서늘한 상파뉴의 기포처럼 짜릿했다. 지금만큼은 죽어도 좋았다. 엘리엔은 억지로 마르그리트 안의 손을 당겨서 입 맞추었다.
“부디 보중(保重)하시길, ‘아름다우신’ 전하.”
그녀가 뒤돌아서 나갈 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대로 거울의 홀을 빠져나온 엘리엔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전쟁의 홀을 통과해 정의관에 들어섰다. 연회 때문에 모든 시종들이 거울의 홀 주변에 몰려있다 보니 정의관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엘리엔은 불 꺼진 궁에서 온갖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보다가 일 분도 안 되어 그냥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원으로 나와 정처 없이 걸은 탓에 발바닥이 통증을 호소했다. 남부에서는 전통적으로 발이 작은 여자를 미인으로 쳤기 때문에 엘리엔도 다른 여자들처럼 어릴 때부터 꼭 끼는 신발에 발을 밀어 넣는 고통을 감수해 왔다.
엘리엔은 가장 가까이 있는 의자를 찾았다. 이블린 궁의 정원에는 연회 중에 슬며시 빠져나와 정염을 불태울 연인들과, 발을 쉬고 싶어할 숙녀들을 위해 여기저기에 장의자가 숨겨져 있었다.
여기는 귀빈관 근처니까 분명히 이 근처에. 고운 손으로 손수 풀숲을 헤치자 생각대로 나무 의자가 나타났다. 다만 생각과 다른 점이라면 선객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나. 실례합니다. 무슈-?"
거친 수컷 냄새가 나는 남자였다. 새카만 머리는 보기 힘든 직모였고 눈도 순혈의 남쪽 사람에게는 찾을 수 없는 파란색이었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뚜렷하게 보이는 목젖을 보자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꺼져."
꽉 막힌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성적 매력이 충분했고 무엇보다도 이국적이었다. 파열음이 강조되는 북쪽 억양이었다.
"Вы не заслуживают того, чтобы сделать как это мне, даже если бы вы были император. (당신이 설령 황제라고 해도 이렇게 내게 무례하게 굴 자격은 없어요.)"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엘리엔을 멈춰 세운 것,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리엔은 난생 처음 남자가 우는 걸 보았다. 대단히 꼴불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잘생긴 사내가 차가운 눈으로 눈물 흘리는 광경은 심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그는 부끄러운 듯이 흰 얼굴을 붉히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너, 뭐지."
남쪽 제일의 미녀라는 낯부끄러운 별명으로 불리는 그녀는 초승달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나는 엘리엔이에요."
***
처음 치른 남녀 간의 정사는 나쁘지 않았다. 맨 살갗이 마주치는 감촉과 누구에게서 나는지도 알 수 없는 술 냄새. 연신 몸의 곡선을 더듬는, 사내치고는 대단히 고운 손.
남자가 끊임없이 술에 뭉그러진 발음으로 누군지 모를 여자를 불러대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나았겠지만.
엘리엔은 희뿌연 새벽빛이 들어오기는커녕 두꺼운 커튼 때문에 눈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둑한 방에 누워 숨을 골랐다. 지쳐서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니 두드려 맞은 것처럼 몸이 작신작신 쑤셨다.
아, 해버렸다.
사내든 여인이든 정부를 오후에 차 한 잔 마시듯 갈아치우는 이 궁정의 중심에서 여왕 놀이를 하는 주제에 고상하고 정숙한 숙녀인 척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가치 없는 자와 나뒹굴어 혼전에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고귀한 자신의 명예와, 사랑은 없을지언정 이미 맺어진 약혼자를 위해서.
그런데 그 약혼자가 먼저 맹세를 깼다. 손가락을 더듬어보자 아직 반지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약혼반지는 엘리엔이 마르그리트 안의 손에 입 맞춘 바로 그 성당에서 루이 오귀스트가 직접 끼워준 것이었다. 더러운 년의 뺨을 갈겼을 때 속살을 호쾌하게 찢어놓은 반지는 침대 밑 어딘가에 떨어져 있으리라.
이제 저지를 부정도 없는데 그걸 끼고 다른 사내와 뒹구는 것이 못내 신경 쓰여서 반지를 뺐지. 순결을 상징한다는 진주를 뒷걸음에 와드득 밟아버린 직후 그녀는 반쯤 정신을 놓았다.
엘리엔은 가만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알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바닥에 어지러운 허물처럼 떨어져있는 옷을 주워 입었다. 공단 스타킹을 발에 끼워 넣고 허벅지에서 대님을 묶고, 슈미즈를 입었다. 고래 뼈와 실로 된 스테이를 허리에 두른 다음, 스커트를 입고, 스토마커를 핀으로 고정하고, 다 구겨진 드레스를 대충 뒤집어썼다. 화장은 사내가 다 삼켜버린 지 오래라 포기하고 흐트러진 머리칼은 다 풀어 휘휘 말아 올렸다.
허점투성이인 복장이었지만 밖에 못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직접 허리를 숙여 이지러진 진주반지를 집었다. 섬세하던 세공이 다 망가졌다. 엘리엔은 어둠 속을 더듬어 탁자에 놓여있는 메모지에 즐거웠다는 말을 쓰고 화대로 진주반지를 놓았다. 망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하룻밤의 가격으로는 충분하리라.
그 때 남자가 벗어놓은 옷 사이로 무엇인가가 보였다. 칠대 죄악의 하나라는 호기심이 엘리엔을 덮쳤다. 엘리엔은 조심스레 그 것을 집어 올렸다. 로켓이었다.
남쪽의 규칙을 따르는 문장은 아니었지만 엘리엔은 그 문장을 본 일이 있었다. 엘리엔은 그 로켓을 열어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그 내용물을 알아보았다.
아. 이건 기회다.
명석한 머리는 찰나의 순간 모든 계산을 마쳤다. 그녀는 자기가 쓴 쪽지와 진주반지를 거칠게 구겨 집고는 로켓을 누가 볼 세라 감춘 채 슬금슬금 방을 떠났다.
그 때까지도 사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심장이 뛰었다. 이제 된 거야.
***
사내는 무려 사흘이 지난 뒤에야 숨을 씩씩거리며 들이닥쳤다. 엘리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늦으셨군요."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뇨. 한 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거지요. 코시카의 파블 이바노비치 대공 전하."
뚜렷한 본명을 들은 그는 한 김 수그러들었다. 엘리엔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밝은 곳에서 보니까 좀 매력이 덜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북쪽은 남자들도 원래 다 저렇게 흰가?
파블 대공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너, 뭐지."
"부디 예의를 지켜주세요. 분명히 그 날 밤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요. 저는 보르디의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 대공녀, 툴루즈의 아가씨예요."
"그 날 밤이라니?"
그녀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당신이 일개 백작녀에게 푹 빠져서 혼인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대공 전하의 부모님께서 신붓감을 찾아오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억지로 쫓아냈다는 것 정도?"
"자세히도 알고 있군."
"일단 앉으시겠어요? 천천히 얘기 나누지요."
"필요 없어."
"내가 필요해요.“
대공은 다리를 꼬고 앉아 코웃음을 쳤다.
"원하는 게 뭐야?"
"글쎄요. 원하는 거라뇨?"
사내는 폭발했다.
"네가 내 로켓을 가져갔잖아! 도둑고양이 같으니!"
곱게 다듬어진 손끝이 탁자를 톡톡 쳤다.
"대공 전하. 대공 전하. 말씀은 똑바로 하셔야죠. 제가 도둑고양이라면 그 도둑고양이와 몸을 섞은 전하께서는 오입쟁이 고양이인가요? 부디 서로의 명예를 존중해서 험한 말은 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엘리엔은 쥐를 잡아다가 꼬리를 채서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굴었다. 그리고 사내는 그럴수록 안달을 냈다.
"열어 봤어?"
"그러니까 전하께서 누구신지 알지요."
"돌려줘. 뭐든지 할 테니까."
"정말 뭐든지 해주실 건가요?"
"내 목숨 같은 거야."
북쪽 황실의 독수리 문장이 새겨진 로켓 안에는 초상화 한 장과 눈물어린 절절한 편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어요, 운운하는 것이 약혼자가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으면 피를 토하고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마 그 편지를 썼을 초상화의 여인은 둥근 눈매가 인상적인 예쁘장한 소녀였다. 검은 머리칼을 중부식으로 틀어 올린 그녀는 품에 꽃을 안고 옆으로 돌아서서는 얼굴만을 정면으로 돌린 채 미묘(微妙)하게 웃고 있었다. 놀란 듯이 동그랗게 뜬 눈이 토끼처럼 귀여워서 과연 사내들이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 편지에 의하면 이반 3세와 그 황후는 여자를 완강하게 반대하는 모양이었다. 셋 밖에 없는 자식 중 후계자였던 장녀는 야반도주를 했지, 차녀는 시집가서 애를 낳다가 죽었지, 하나밖에 안 남은 아들이 귀천상혼을 하겠다고 우기고 있으니 당연했다.
그래, 이건 주님께서 내려주신 기회다. 엘리엔은 살면서 뭔가를 딱 한 번 놓쳐봤다. 그리고 다시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꽃다발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저와 결혼해주시겠어요?”
“헛소리!”
“저는 진지하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말씀드리지만 예의를 지켜 주세요. 저도 여인인지라 변덕이라는 악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거든요. 지금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있는 전하의 로켓을 숨기는 곳으로 갑자기 호수나 바다가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겠어요?”
푸른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생각보다 쓸 만한가.
“내놔.”
“결혼 예물로 들고 가지요.”
“장난치지 마.”
“장난이 아니랍니다. 지금 제가 이런 걸로 장난을 치기에는 상황이 좀 안 좋거든요.”
엘리엔은 보란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조차 없는 초라한 방. 파블 대공은 비뚤어진 웃음을 머금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 반신반의하며 찾아왔지만. 대공녀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처박혀 있는 거지?”
“황태자비의 뺨을 연회에서 후려갈기면 대공녀가 아니라 대공비라고 해도 이렇게 될 거예요. 오히려 관대하신 처사지요. 황후 폐하께서 제 이모시거든요.”
“뭐?”
엘리엔은 탁자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그리 좋은 얘기도 아니니 간단하게 말하지요. 황태자 전하는 원래 제 약혼자였어요. 그리고 대공 전하께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간단해요. 당신의 연인과 아들의 목숨.”
그래도 황가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대공은 엘리엔이 번개처럼 생각해 낸 것들을 천천히 알아듣는 눈치였다.
“대공비가 되면 그 여자-헬레네에게 작위를 내려주겠어요. 그녀가 낳았다는 아이도 죽이려고 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들을 죽이려고 해도 최대한 안전을 보장해주겠어요. 물론 나는 당신에게 충실할 거예요. 대공비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후계자를 이을 아이를 낳고.”
“그래서, 그걸 대가로 결혼을 해 달라? 자기를 못 팔아치워서 안달이 난 건가?”
“원래 결혼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사랑 놀음에 정신이 팔려 백작녀 따위와 결혼하려고 하신 분은 역시 다르시군요.”
백작녀 따위라는 말에 대공은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아 헤맸지만 엘리엔이 약간 더 빨랐다.
“제게 황태자비 자리를 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황제가 되면 황후의 자리를 주세요.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드리지요.”
“네가 손해 보는 장사 아닌가?”
“그건 대공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지요.”
엘리엔은 속으로 끊임없이 계산을 복기했다. 이 사람은 사랑을 위해서 작위를 버릴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부모가 가란다고 이 먼 남쪽까지 내려오지도 않았으리라. 강한 척 하지만 실은 우유부단하고 우유부단한 만큼 상대가 당당하면 흔들린다.
이미 마음속에 정인이 있는 만큼 다정다감한 남편은 되지 못 하겠지만 애초에 그런 걸 바랐다면 루이 오귀스트와 약혼하지도 않았다.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은 마르그리트 안을 깔아뭉개겠다는 오기였다. 세상의 하고 많은 남자 중 하필 이 남자와 밤을 보낸 것부터가 천운이다. 그를 걷어차는 것은 그야말로 천치나 할 만한 짓이다.
보르디 대공가의 가언, 술이 익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이 급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정말로 여유롭게 상대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언제까지 결정하면 되지?”
“마음대로 하세요.”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