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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부자 (1)


사라져라, 사라져라, 사라져라.

아무리 중얼거려도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부 갈리아 어와 페란토 어를 번갈아 노려보던 소년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 싫다."

책상에 고개를 묻자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일주일 전, 루이 조제프 황제는 소년의 새카만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당연히 그러하듯, 소년은 냉큼 '네!'하고 대답했을 때의 벅찬 마음을 참 쉽게도 잊어버렸다. 해야하는 공부는 너무 많고 어려웠다. 페란토, 산술, 회계, 기초교양, 승마, 그리고 검술.

검술 선생의 재수없는 얼굴과 쩌렁쩌렁한 호령이 떠오르자 소년은 엎드린 채로 몸부림쳤다. 공부도 끔찍했지만 검술은 더 하기 싫었다.

검술 선생이 험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로렌의 루이 세바스티앙 조제프 자비에, '르 쁘띠 세르'라고 서명할 수 있는 계승 서열 2위의 황손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는 온 이블린을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다만 소년은 밖에 나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너무 싫어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뛰는 것도 싫고 팔이 빠져라 나무 작대기를 휘두르는 것도 싫고 끝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끈적이는 것도 질색이었다.

선생이 공손하게 굴든 바닥을 길 듯 아부하든 알 바 아니었다. 그저 하기 싫었다.

창문으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와 소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젖살이 뭉친 둥그런 볼이 발갛게 눌려있었다. 유난히 붉은 입술에서 다시 한 번 가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해야지.

자그마한 손이 책장을 넘겼다.

간신히 페란토 어 숙제를 모두 끝낸 소년은 검술 수업에서 배탈을 호소했다.



몇 년이 지났다.

소년은 루이 세바스티앙에서 철자를 따 세시안이라는 서명을 만들었다. 루이 조제프 황제가 승하했다. '르 쁘띠 세르'라는 서명에서 '르 쁘띠'가 빠지고 '세르'가 되었다. 형의 약혼녀였던 마리 빅투아르가 낙마해 죽었다. 키가 한참 자랐다. 페란토 어 말고도 동부 레온 어와 중부 듀츠 어가 공부해야 할 목록에 추가되었다. 동생들이 또 태어났다. 여동생 넷에 이어 쌍둥이 여동생을 지나 마침내 남동생이었다. 마침 아버지의 정부 하나가 같은 해에 남자아이를 낳아 공식 정부로 올라섰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변했는데도 소년이 공부를 해야한다는 사실만큼은 그대로였다. 침대에 누워 소설이라도 읽으며 빈둥거리면 딱 좋겠다 싶은 서늘한 가을날. 세시안은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쓰다 말고 손을 주물렀다. 손가락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야, 세시안."

 "왜."

오를레앙의 쟝 미셸 루이 프랑수아, 친애하는 사촌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는 채 펜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너 어디까지 했어?"

녹색 눈이 얼핏 글씨를 짚었다. 시편 71편부터 90편까지 페란토 어로 외우는 게 숙제였다.

 "85편까지."

 "거기까지 다 외웠어? 벌써?"

미셸은 누구에게나 찬사받는 잘생긴 얼굴을 벌떡 쳐들었다.

 "아마도?"

 "78편!"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는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미셸은 성경을 팔랑팔랑 넘겨 확인해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한 살 어린 이종사촌은 세시안만큼이나 노는 걸 좋아하는데다가 암기력은 젬병이었다.

 "우리 그냥 다 외웠다고 하면 안 돼?"

보아하니 한참 남은 모양이었다. 세시안은 '나는 거의 다 외웠는데 내가 왜?'라고 야멸차게 구는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부황께서 직접 검사하신댔는데."

 "저번에도 한다고 하시고 안 하셨잖아. ​저​저​번​에​도​.​.​.​.​.​.​.​"​

 "저저저번엔 하셨잖아."

 30편까지 외워오라는 말을 귓등으로 듣고 놀았던 둘은 황제의 앞에서 벙어리 흉내를 내야 했다. 황제는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특정 편을 모르면 아무 거나 기억나는 곳을 말해보라 일렀지만 펼쳐보지도 않았으니 기억날 리 만무했다. 하필 그 자리는 가족을 다 부른 석찬 자리였고, 망신을 당한 오를레앙 대공비는 미셸의 뺨을 후려갈겼다.

세시안은 저도 모르게 뺨을 어루만졌다. 루이 오귀스트 황제, 세시안의 아버지는 결코 세시안을 때리는 법이 없었다. 다만 식사가 끝난 뒤 세시안을 불러다 앉혀놓고는 차를 대접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내장이 쥐어짜이는 것처럼 불안했다. 소년은 다리를 흔들며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차를 다 마신 뒤 황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혹여 네 나름의 사정이 있었느냐?

없었다. 그저 놀고 싶었다. 짙고 힘 있는 눈썹 아래 날카로운 눈이 세시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꿰뚫릴 것처럼.

 -허면 공부가 너무 어려웠느냐? 하나도 모르겠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힘없이 아니라고 하자 아버지는 딱 한 번 한숨 쉬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 손의 포근함을 느낄 새도 없이, 낮은 한숨이 못 견디게 부끄러웠다.

 -열심히 해야지.

 -예.

그래서 그 다음도, 또 그 다음에도 열심히 외웠지만 바쁜 황제는 검사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한숨이 싫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답게 게으름은 점차 선명해지고 반대급부로 의지는 금세 흐려졌지만 시편을 외울 수 있을 만큼은 남아있었다.

 "그럼 우리 이거 끝나면 다음 달엔 검술수업 ​늘​려​달​라​고​.​.​.​.​.​.​"​

 "싫어."

좀처럼 남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는 세시안도 이것만큼은 박정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미셸이 책상을 탕 짚고 일어났다. 금갈색 머리칼이 결 좋게도 찰랑거렸다.

 "야, 여기서 성서나 눈빠져라 외우느니 검술이 낫지 않냐?"

 "너나 가서 늘려달라고 해. 난 검술 수업 빼준다고 하면 시편 열 편은 더 외우겠다."

 "나 혼자 가면 어머니한테 죽어. 네가 같이 가야 말이라도 들어보시지."

세르인 세시안의 앞에서 오를레앙 대공비인 루이즈 안을 높이는 결례를 저질렀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공적으로는 세르와 리무쟁 공작, 사적으로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이며 사촌. 이블린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 소년은 점차 그 선을 조율해나가는 데에 능숙해졌다.

 "너 외동아들이라 못 죽이셔. 걱정 마."

바로 지난 주에 로렌의 상속 순위에 대해서 달달 외운 세시안은 얄밉게 대꾸했다. 미셸이 한숨을 쉬었다.

 "동생 있다고 그러기냐?"

 "동생 있으면 뭐 해. 걔가 세르해 줄 것도 아닌데."

루이 샤를은 아직 글자도 제대로 몰랐다.

 "그래도 여차하면 도망가도 되고...... 왜, 저기 북쪽은 지금 세르 누나가 원래 세르? 마담 라 세르? 아무튼 그런 거였는데 도망갔다며."

소년들은 로렌의 귀하신 몸답게 북쪽의 작위 체계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나, 북쪽 황제의 후계자인 파블 대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보르디의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 대공녀가 그에게 시집갔으므로. 선대의 치정극은 어린 소년의 귀에 들어올 정도로 아직까지 유명했고, 북쪽 캬트 어를 가르치러 온 선생은 흥미 유발을 목적으로 특히 그에 관련된 잡담을 늘어놓곤 했다. 물론 잡담 내용만 기억하고 수업 내용은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잠시 북쪽의 뜬소문을 주워섬기며 킥킥대던 둘은 펼쳐진 채 그대로 놓여있는 성경을 보고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넌 어디까지 외웠는데?"

 ​"​7​8​편​.​.​.​.​.​.​ 그런데 머릿속에서 다 섞였어."

미셸은 벌써부터 뭇 여성들에게 어여쁨 받는 잘생긴 얼굴을 콩 하고 성경에 박았다.

 "어찌하여 주께서는 저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뭐지?"

 72편. 세시안은 턱을 괸 채 저도 모르게 그 다음 구절을 따라이었다.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맞다. 하."

오를레앙의 어린 후계자는 지금 당장 뛰쳐나가 검을 휘두르면 소원이 없겠다는 듯 구슬프게 중얼거렸다.

 "주께서는 저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페란토 못 한다고 죽지는 않을걸."

 "여섯 대공 중에 페란토 못 하는 사람 있어?"

세시안은 잠시 대회의를 떠올렸다.

 "아니."

 "역사에 페란토 못 하는 최초의 대공으로 이름이 남으면 어머니가 날 죽이실 거야."

 "못 죽이신다고 몇 번을 말해."

저리 엄살을 피워도 미셸의 페란토 어 실력은 썩 나쁘지 않았다. 옛 이야기책이라면 목걸이 줄의 진주처럼 쫙 꿰고 있는 녀석이다. 그저 암기를 싫어할 뿐이었다.

 "어머니가 동생 낳아주셨으면 좋겠다. 동생한테 빌붙어서 평생 한량으로 사는 게 내 소원이야."

 "여자애면?"

 "난 처남에게 빌붙어서 평생 한량으로 사는 게 꿈이야."

세시안은 결국 웃었다. 이마를 맞대고 징징거리다가도 둘은 어떻게든 삶에 주어진 할당량을 채워오곤 했다. 세시안은 자신이 세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미셸은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에 체념했다. 그저 검술만 좀 줄여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저기 북쪽의 르 쁘띠 세르는 좋겠다."

 "왜?"

 "천재라며. 이런 건 훑어보기만 해도 외우겠지."

잠시 태양을 덮었던 구름이 흘러갔다. 반짝, 선명한 빛이 세시안을 비추었다. 소년은 마치 그 때문인 양 눈을 찌푸렸다. 숲처럼 짙은 녹색 홍채에 햇빛이 고였다.

북쪽 제국 황제의 손자, 보르디의 엘리엔 대공녀의 아들이 천재라는 소문은 남쪽까지 흘러내려왔다. 북쪽 황제가 총애하여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에게 황제 자리를 물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고작 열세 살짜리에게 우랄 지역 총독을 맡겼다고. 둘의 캬트 어 선생은 '이반 대공 전하'에 대해 언급할 때면 자부심 가득한 얼굴을 하곤 했다. 하필이면 세시안과 그는 동갑이었다. 모후가 세시안을 붙잡고 지면 안 된다고 엉엉 울던 소리가 목 끝까지 들어찼다.

어머니는 점차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게 되었다. 마담 라 세르일 때만 해도 그럭저럭 바깥 활동을 하던 그녀는 황후가 되면서 아예 칩거했다. 원래부터 통통한 체형이었는데 아이를 낳으면서 살이 점차 붙었다. '그 년의 아들에게 지면 안 된단다'. '우리 똑똑하고 예쁜 아들'. 품에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예전처럼 포근한 기분에 젖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는 도저히 어머니가 원하는 만큼은 할 수 없었다. 부황의 꾸짖음과는 전혀 달랐다. 노는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 한담을 나누며 빈둥거리는 시간, 산책을 나가 햇빛을 쬐는 시간,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 여러 친구들을 불러 잡담하는 시간, 여동생들을 안아 달래주는 시간. 그리 조각조각 나뉘어 흩어진 자투리시간을 모아 쥐어짜면 어떻게든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해 달린 뒤 힘 없는 다리를 늘어뜨린 채 숨을 몰아쉬는 말을 채찍질할 수 있는가?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불가능한 건 변치 않는다.

그리 판단하면서도 차마 우는 어머니에게 솔직하게는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사랑하므로.

 -노력할게요.

그리 말하며 거짓말에 가슴 짓눌리는 것이 어린 그의 최선이었다. 천재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어린 소년은 꾹꾹 눌러담듯 웃으며 성서를 덮었다.

 "난 다 해서 먼저 간다."

 "치사하게! 기다려!"





세시안의 성장 과정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짧게 쓸 생각입니다. 앞으로 한 화 아니면 두 화... 전처들에 대한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루이 오귀스트의 육아 방식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미셸은 가끔 맞았지만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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