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부자 (2)
주일, 세시안은 예배 중 숙면에 빠졌다. 묵상 시간이 끝난 것도 모르고 백일몽에 취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자 텅 빈 설교대가 가장 먼저 보였다. 예배가 끝난 모양이었다. 낭패감이 들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으나 예배가 끝난 것도 모르고 잠든 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하물며 오라비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여동생에게 들킨 바에야.
"오라버니, 일어나셨어요?"
그의 앞에 머리에 미사포를 쓴 마담들이 조르르 늘어서있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평소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느라 오라비와는 잘 놀아주지도 않는 아이들이 무슨 일일까.
세시안은 어리둥절한 심정을 능숙하게 숨기며 생긋 웃어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잠든 적 없었던 양 시늉하는 데에는 익숙했다.
"다들 무슨 일이니?"
셋째인 안 마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오라버니, 결혼하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넷째인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거들었다.
"거짓말이죠? 결혼 안 하실 거죠?"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크리스틴과 오거스틴은 동생들에게 추궁을 맡기고 뒤에 서있었지만 따라온 것만 봐도 관심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세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들은 내가 평생 혼자 살았으면 좋겠니?"
칼레의 마리안느 빅투아르가 죽은 뒤, 세시안은 아직 약혼녀조차 없이 혼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직 열세 살이었고, 결혼하려면 십 년은 더 남았다. 약혼녀를 서둘러 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결혼이라니.
완곡한 부정에 오거스틴이 맥이 풀렸다는 듯 웃었다.
"역시 헛소문이었군요."
크리스틴도 웃었다.
"글쎄, 라파엘이 그러는데 오라버니와 자기 누나가 내년쯤 결혼할 거라지 뭐겠어요."
단정한 얼굴에 동요 대신 습관적인 미소가 어렸다.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라파엘이라면 오베르뉴의 후계자인 베리 공작 라파엘을 말하는 건가. 공공연히 떠들 정도라면 아예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닐 터였다. 발루아의 직계이며 세르인 세시안의 결혼상대는 여섯 대공의 피를 이은 여자에 한정되었다. 라파엘의 누나라면 오베르뉴의 마리 제피린느, 부아용의 아가씨다. 현 오베르뉴 대공의 딸이니만큼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는 약혼자가 있지 않던가?
세시안이 당장 부정하지 않자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거짓말이죠!"
"거짓말이야!"
어찌나 성량이 좋은지 성당이 쩌렁쩌렁 울렸다. 예배가 끝난 성당 앞에서 마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일은 드물지도 않았다. 이렇게까지 소란스러우면 바깥까지 전부 들릴 터였다.
"안 마리 조제피느. 마르그리트 루이즈 아나이스."
부러 엄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두 소녀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쌍둥이인지라 입술을 깨문 모양마저 똑같아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배에 힘을 주고 참았다.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미성이 낮게 깔렸다.
"두 분 가장 신실하신 폐하의 딸로서 품위를 지켜야지."
"잘못했어요."
"화내지 마세요."
"화나지 않았어. 그저 조심하라는 거란다."
그는 허리를 숙여 동생들의 뺨에 차례로 입맞추었다. 꾸중했으니 이제 풀어줄 차례였다. 목소리가 금세 다정해졌다.
"내 결혼은 두 분 폐하께서 결정하시는 거고 난 따를 뿐이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결정되면 이야기해주마."
처음 듣는다는 기색은 비추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판단했다.
"자, 이제 들어가야지? 점심 같이 먹겠니?"
"네!"
세시안은 양손에 하나씩 어린 여동생들의 손을 쥐고는 크리스틴과 오거스틴을 재촉해 성당 문을 나섰다. 떠들썩하게 점심을 먹고, 크리스틴의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동생들의 인형이며 새 옷 자랑까지 한참을 들어준 그는 정의관에 돌아왔다. 시종을 불러 알현 요청을 하고 반 시간쯤 기다리자 허락이 떨어졌다.
그는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어서 와라, 내 사랑하는 아들아."
"가장 신실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시안이 자리에 앉자 황제는 술병을 들었다.
"한 잔 하겠느냐?"
"괜찮습니다."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주일인데 이 아비는 찾아 무엇하느냐. 가서 쉬지 않고."
"안 그러셔도 동생들과 있다가 오는 길입니다."
"네가 오라비로서 항상 모범을 보여서 이 아비가 항상 든든하구나."
몹시 다정한 말투였다. 괜스레 부끄러워 목이 붉어졌다.
"제가 같이 흐트러져 놀았는지는 어찌 아시고요."
"넌데 그럴 리 있겠느냐."
느슨해질라치면 마음을 읽는 듯 들어오는 이 칭찬이 좋았다. 여동생들은 '어머, 저는 오라버니처럼은 못 살아요'하고 손을 내저었지만 이런 신뢰는 더 잘해야지, 실망시켜드리지 말아야지 마음 먹게 했다. 비록 구불거릴지언정 목적지를 향하도록.
"그래. 오래간만에 딸아이들 소식이나 들어보자꾸나."
세시안은 마리안느(마담 안 마리)와 마고(마담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사냥에 데려가달라고 조른다는 이야기며, 오거스틴이 황후에게 목걸이를 물려받았다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초상화를 그린 지도 이 년이 지났으니 슬슬 그릴 때가 되었다는 말을 늘어놓다가 슬쩍 말을 꺼냈다.
"그리고 요즘 크리스틴이 오베르뉴 대공자와 어울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 그 아이가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느냐?"
황제는 뜻밖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떠보려는 마음이 무색하게도, 그는 큰딸이 벌써 남자와 어울린다는 말에 마냥 기껍고 대견하게만 여겼다. 세시안은 특별히 그런 차별에는 의미두지 않고 사심없이 웃었다. 형이 죽고 르 쁘띠 세르가 되었던 날부터 기대와 책임은 숨쉬듯 몰아서 주어졌으므로.
"예. 미셸과 결혼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마르그리트 안이 전 오를레앙 대공의 장녀였으므로, 오를레앙 승계권 잡음을 없애기 위해 미셸은 세시안의 여동생 중 한 명과 결혼하게 되어있었다.
"원래 그 나이에는 아침과 저녁의 마음이 다른 법이다. 두어라. 아직 약혼한 것도 아니잖느냐. 짐의 딸이 한 명인 것도 아니고."
"혹여 잘 되면 겹혼인이 되는지요?"
술을 새로 따르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그 말은 언제 들었느냐?"
"미사가 끝나고 크리스틴에게 들었습니다."
세시안은 성당에서 있었던 대화를 간추려 설명했다.
"왜 알고 있는 척 했느냐?"
"굳이 모르고 있었다고 알릴 필요가 없다 생각했습니다."
동생들을 사랑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들의 입이 그리 무겁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황제는 갈색에 가까운 개암색 눈으로 한참동안 세시안을 바라보다가, 새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내밀었다.
"마셔라."
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 그는 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복잡한 향이 훅 끼쳤다. 의외로 쌉싸름한 것이 입에 맞았다.
황제는 잔의 술을 단번에 비우고 나른하게 한숨 쉬었다.
"벌써 이리 컸구나."
어리둥절했다. 고작 결혼 상대가 오베르뉴냐는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는 과하지 않은가.
"동생들에게 알고 있었던 시늉을 한 것은 잘했다. 의표를 찌르는 방식도, 그래, 훌륭했다."
세시안은 잔을 돌리다가 고개 숙였다. 설마 그가 말을 꺼낸 방식을 칭찬받을 줄은 몰랐다. 당장 달려와 이 이른 혼담이 진짜냐고 따져묻지 않은 것에 대하여.
"물론 한참 다듬어야겠지만, 너보다 훨씬 나이를 먹고도 여태 천치같은 이들이 널린 것을 생각하면 칭찬받지 못할 일도 아니지."
황제는 자축하듯 술을 다시 한 잔 따라 비웠다.
"네가 나와 그레트(마르그리트 안) 중 누굴 더 닮았을까 항상 고민했는데 오늘에야 그 답을 알겠구나. 너는 네 할아버지를 닮았다. 이름이 부끄럽지 않구나."
로렌의 루이 세바스티앙 '조제프' 자비에.
굉장한 칭찬에 정말로 부끄러워졌다. 그리 깊이 생각한 일도 아니고 노리고 행동한 것도 아니었는데. 황제는 평소 칭찬에 그리 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후하지도 않았다. 굶지 않을 만큼만 머리 위에서 뿌려지던 칭찬이 담긴 병이 와르르 엎어진 기분이었다.
"과찬이십니다."
"두 번 칭찬할 일은 없을 테니 지금 마음껏 기뻐하거라."
"감사합니다."
뱃속에 든 호박색 액체가 끓어올랐다. 소년은 창자를 식히려 손에 들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기분이 달아올라 웃었다.
황제는 자신의 잔을 채우고 아들의 잔도 가득 채워주었다. 목소리가 감회에 젖어들었다.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혈통이.
"무척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래, 이어지지 않았느냐."
황제는 취한 듯했다.
"모후는 항상 내 선택이 발루아의 맥을 끊어놓으리라 염려를 표하셨다. 고귀한 피는 쉽게 흐려져 자칫 끊어지기 쉽다면서."
루이 오귀스트의 모후는 세시안의 할머니, 칼레의 아델라이드 선황후였다. 그녀가 조카인 보르디의 엘리엔을 큰 아들과 결혼시키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는 십오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유명하게 회자되었다.
"내 선택을 항상 독선이라 부르셨지. 페르낭(루이 페르디낭의 애칭) 때문에 간신히 결혼을 인정하셨지만 붕어하시는 그 순간까지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세시안도 귀가 아프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당시의 약혼녀와 공개 파혼하고 어머니와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아무도, 심지어 외조부인 오를레앙 대공조차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어머니는 마담 라 세르가 될 수 있었다. 죽은 형, 루이 페르디낭을 혼전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맞장구를 치는 데에는 지나칠 정도로 능숙했지만 지금은 입을 다무는 것이 좋겠다고 느꼈다. 황제의 침실, 이블린이 생긴 이후 오랫동안 발루아 가문의 황제들이 써왔고, 언젠가 세시안도 사용할 유서 깊은 방에 루이 오귀스트의 이야기가 울려퍼졌다.
"너를 서른 살에 얻었다. 건강한 너를 보고 짐과 황후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를 것이다."
"형은 병약했다 들었습니다.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려야 하겠지요."
문득 황제는 날카롭게 웃었다.
"페르디낭의 장례식 때 모후께서 짐에게 말씀하셨지. 거 보아라. 만류를 마다하고 배냇병신을 고르더니 기어코 아이를 이 지경으로 낳지 않았느냐고."
세시안은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그녀는 세시안이 두 살이 되기 전에 붕어했다. 그러나 초상화만은 아주 인자해보여 그런 말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사실이었구나.
어머니인 마르그리트 안 황후가 오른발의 발가락이 없다는 소문은 쉬쉬하며 온 이블린에 퍼져 있었다. 외가인 오를레앙 대공가에 그런 일을 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므로 세시안은 입을 다물고 못 들은 척 했다. 아들이 모후의 맨발을 볼 일이 없으니 진위를 확인할 일은 없었다. 그저 부황이 그런 소문을 지껄이는 놈에게 직접 결투를 신청했다던 옛 말에 기대어 아니려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네 아래로도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짐에게는 항상 네가 각별했다."
-네가, 네가 복수해줘야지! 너만은 이겨야지. 잘 해야지.
그를 붙잡고 훌쩍훌쩍 울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부황도 모후도 유독 딸들이 아닌 세시안에게 엄격했다. 그는 지금껏 아들이고 후계자이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그게 아니었다. 세시안은 그의 존재 자체로 어머니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명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할머니에게만이 아닌, 세상에게 외치는.
다섯 개 다 달린 발가락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죽은 형은 발가락이 전부 있었을까?
"짐이 네게 기대가 크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오베르뉴 대공녀와의 혼담은 사실이다. 내년에 결혼하여 아들을 둘만 낳아라."
"외람되지만,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이 멀게 느껴졌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깊게 취해있었다. 아버지의 말에 대드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취기가 등을 떠밀었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버럭 소리지르지 않았다.
"듣고 이 자리에서 잊어라. 너는 앞으로 동생이 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모후는 부황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많았고, 아이를 연달아 아홉이나 낳았다. 오히려 남동생을 가진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다. 리젤로트와 미네트 이후 아이를 낳지 않으리라 여겼건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또 생겼다.
"그리고 짐의 다른 아들은 오래 살지 못 할 테지."
가슴이 얼얼해졌다.
"예?"
"시의가 말하길, 제 형을 닮아 성년이 되어도 오래 살지는 못하리라 했다."
아직 어린 아이였다. 이름도 받지 못한.
"짐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네게 물려준 혈통을 반석에 올려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로는 불안하다."
"크리스티앙 숙부가 있잖습니까. 숙부에게도 아들이 생길 테고......."
"짐은 천치에게 발루아를 잇게 할 생각이 없다."
말을 잃은 아들에게, 황제는 힘주어 명령했다.
"그러니 네가 아들을 낳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