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푸른 눈에 담긴 세상 (3)
"오빠가 둘?"
카타리나가 무심하게 되물은 순간 숨이 막혔다.
이제는 하나도 없지 않냐는 말처럼 들렸으므로. 마리야는 재빨리 눈을 깜빡거려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로렌의 도나 치에르바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나보지? 언니라 부르지 않는 걸 보면."
-당장, 영원히 내 눈 앞에서 사라져라.
새파란 눈에 투명한 눈물이 순식간에 그렁그렁 차올랐다. 아름다운 소녀가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나, 아스투리아스의 카타리나는 기묘하게 시큰둥한 얼굴로 마리야를 내려다보았다. 청순한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나는 우는 아이를 싫어해, 공작부인."
"죄송해요."
마리야는 눈물을 닦았지만 다시 차올라 흘러내렸다. 카타리나가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오똑한 코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본디 마리야에게는 높이 매달려 펄럭이는 깃발 같은 신앙이 있었다. 성이 키예나가 아닌 유리예프스카야여도 괜찮았다. 마리야의 어머니가 체사레브나라 불리지 못해도, 큰 오빠인 표트르가 대공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아버지는 언제나 마리야를 안아올려 뺨에 입맞추고,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해주었다.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신을 잃어버린 성녀라도 된 양 입술을 깨물었다.
"저기, 아스투리아스 여공 전하. 말씀하신 대로 아롈은 저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니, 사실은 미워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훌쩍 커버린 지금까지도, 마리야에게 아롈은 정원에서 마주쳐 같이 공놀이를 하던 새하얀 여자아이였다. 각질이 일어 부르튼 창백한 입술, 퀭하니 외로워 보이던 눈. 공을 잡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알렉세이를 소개받아 '아, 이 사람이 내 오라버니구나'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자매는 하루 아침에 마리야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미하일의 탄생을 보지 못한 마리야에게 아롈은 단 하나 남은 혈육이었다. 그런 아롈이 자신을 미워한다. 자매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외부인인 카타리나의 앞에서 샅샅이 까발리는 것이 못내 서럽고 비참했다. 같은 아버지의 딸인데. 깃대가 목 베여 꺾이고 의지할 곳 없는 신앙은 흙발로 짓밟혔다. 그녀는 예전처럼 고개를 들고 거칠 것 없이 떳떳하게 굴지 못했다.
그리 비참하고 서럽게 말을 꺼냈는데도, 카타리나는 다만 유감이라는 듯 턱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렇구나."
일견 부드러웠지만 진심 어린 공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답이었다. 어린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며 잡아당긴 망토를 바로 거두는 듯한. 그녀는 투명한 벽을 느끼곤 이 자리에서 도망쳐 사라지고 싶어졌다. 카타리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음료수 잔을 톡톡 쳤다. 어서 더 말해보라는 신호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당연했다. 이렇게 둘만 앉아 얼굴을 맞댄 적이 없었으니까.
카스티야에 시집 온 지 오 년도 넘었지만, 마리야는 대부분의 왕실 사람들과 친분이 없었다. 나이가 너무 어리고, 동부 레온 어가 미숙하고, 사교를 하는 데에 필요한 이런 저런 자질이 부족한 것을 모두 차치하더라도,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사람을 만나 친분을 쌓는 일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마리야에게 그런 일을 요구하지 않아서, 마리야는 그 흔한 다과회조차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개최하는 법이 없었다. 남편인 페드루스조차 마리야의 그러한 폐쇄적인 오만함을 용인했다.
그렇게 안일하게 살아온 결과 마리야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희미한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래서 묻기로 했다.
"여공 전하. 제가 여공 전하께 뭔가를 잘못해서 여기에 불려온 건가요?"
놀라울 정도로 거친 질문이었다. 마리야는 카타리나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쇄골 위에 손을 얹고 자신의 억울함을 그저 호소했다.
"페드루스는 여공 전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왜 저를 부르셨는지 용건을 해결하고 돌아가고 싶어요.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그렇게 빙빙 돌리지 마시고 물어보세요. 대답할게요. 제게 화난 게 있으셔서 저를 괴롭히시는 거라면 부디 제 과실만을 질책해주세요. 제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마시고요."
그 비굴한 당당함은, 마드리드 공작가의 저택을 빠져나와 배 위에 오른 행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아버지의 너른 품에 매달려 읍소하면, 무엇이든 다 해결되던 시절의 잔재였다.
계시처럼 사랑을 내리쬐던 파블 1세가 목 잘려 죽었음에도,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여전히 운이 좋은 소녀였다. 아스투리아스의 카타리나는 열두 살 어린 공작부인의 행동에 분노하여 치죄하는 대신 그녀의 무지함이 시사하는 이용가치에 더 무거운 가치를 두었으므로. 카타리나가 웃었다.
"그래,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너는 카스티야가 좋니, 로렌이 좋니?"
상상도 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코시카 여제가 너를 요구했어."
정수리로 찬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마리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마저 우는 방법조차 잊은 것처럼 보였다. 카타리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마리야는 간신히 침을 끌어모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실 건가요?"
아버지, 어머니, 표트르와 알렉세이.
아롈도 반쪽 피를 나눈 자매였으나 두 오라비들은 한층 각별했다. 모두 죽은 지 이 년이 넘었는데도, 간혹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가엾은 오라버니들. 자신도 그리 목 잘려서 죽게 되는 걸까?
"설마 내가 목이라도 잘라서 보내리라 생각한 거야?"
"아뇨,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한 게 맞았다. 아스투리아스 여공은 새 음료를 받아 홀짝홀짝 마셨다.
"마드리드 공작을 코시카 대사로 달라는 제의가 왔어."
페드루스는 외교관이었다. 뭐야, 그런 이야기였구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카스티야는 코시카의 속국이 아니니까."
채 안도감이 얼굴에 드러나기도 전에 마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로렌의 도나 치에르바인 언니에게 신변을 의탁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는 제안을 하려고 부른 거란다."
그러니까, 왜?
카타리나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사정은 알았으니 이제 돌아가도 좋아."
뒷덜미가 얼어붙듯 차가워졌다. 손으로 만져 데우고 싶은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마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타리나에게 무릎을 꿇었다.
안젤로 추기경이 완고한 원칙주의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가장자리를 붉은색으로 두른 검은 수단에는 주름 한 점 없었으며, 갈색 머리칼은 기름을 발라 잔머리 없이 뒤로 넘겼다. 그런 그가 씩씩거리며 성황청 복도를 달리듯 빠르게 걸어 가로지르는 모습은 모두를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성황의 집무실에 도착한 추기경은 숨을 몰아쉬며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나."
철필로 석판을 긋는 것처럼 끽끽거리는 목소리였다.
커다란 문에 잘못 닿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노인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세월이 등에 올라탄 듯했다. 얼굴은 평평한 곳보다 주름져 패인 곳이 더 많았고, 한 때 검었던 머리카락은 노인의 몸을 감싼 유백색 수단에 지지않을 만큼 희었다. 갈색 홍채가 둘러싼 왼쪽 동공은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 꼭 흰 꽃처럼 보였다. 앞니가 네 개 모두 없어 말을 할 때마다 바람이 샜고 입술은 쪼글쪼글했다.
그 초라한 노인이야말로 전 세계 교회의 황제,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이(Servus servorum Dei), 성황 인노첸시오 7세였다.
"성하."
"오오. 가까이 오게."
성황은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감히 안쓰러이 여기며, 추기경은 다가가 무릎을 꿇고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에 접구했다. 멧돼지처럼 그를 달려오게 한 당혹스러움이 안쓰러움에 잠시 짓눌렸다. 성황은 선종할 때까지 양위할 수 없다. 그리고 63세에 흰색 옷을 허락받은 인노첸시오 7세는 33년 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추기경은 마음을 다잡으려 속으로 기도문을 되뇌었다.
주여. 우리의 목자로 택한 인노첸시오를 인자로이 굽어보소서.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맡은 양 떼를 보살피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맡은 양 떼를 보살피고.'
"성하, 어찌 목자로서 주님께서 쥐어주신 지팡이로 무고한 양들을 겨누려 하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