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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1. 푸른 눈에 담긴 세상 (5)


 "이 우매한 조카를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이모님."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말을 꺼내며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작센의 빌헬름, 빌헬름 폰 위튼은 왕자로 태어나지 않은 왕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 위튼 가문은 약 칠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가문임에도 갈가리 찢긴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위튼의 상속법은 모든 아들에게 봉토를 나누어받을 권리를 부여한다. 수많은 공작 중 한 명이던 그의 아버지가 대가 끊어진 작센 분가들을 통합하여 왕국을 세운 것은 순전히 처가인 코시카의 덕분이었다.

빌헬름의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였으나, 비극적이게도 상황을 이해하고 코시카의 옐리자베타 여대공의 완벽한 혈통에 열등감을 품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시운을 타고나 잘난 혈통의 아내를 얻어, 곧 왕이 되리라 좋아하는 대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렀다.

 뿌리 없는 나라의 왕.

 열등감 때문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질식하는 것을 똑똑히 보며 살아온 그는 절절하게 느꼈다. 뿌리가 필요하다.

 그 본인은 기댈 구석 없이 자란 대신에 평생을 뿌리 뻗기 위해 살았다.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와 눈물을 머금고 파혼했다. 하노버의 빌헬미네와 결혼하여 귀여운 딸과 사랑스러운 아들을 낳았다. 외가 되는 코시카 황실에서 많은 제도를 모방해 왔다. 사이나쁜 친척에게 작위를 주어 입을 막고, 망명해온 이모와 그 아들에게 기대어 살 지위를 주었다. 그렇게 그의 아들과 아들의 아들과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이 살아갈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삼십대의 젊은 왕은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계 지도를 보며 절망했다. 작센은 갓 왕국의 꼴을 갖춘 나라였고, 주변에서 시기하는 눈길이 적지 않았다. 그가 코시카 황제의 외손자가 아니었더라면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뜯어먹혔을 게 불보듯 뻔했다. 제 살 길 하나 간수하기 벅찬데 주변에서는 폭풍이 몰아쳤다. 

 지혜를 빌릴 관료도, 일가친척도, 전례도 없었다. 

 체면을 버리고 외가에 매달리려 해도 이 폭풍을 만들어낸 코시카 여제는 그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처가인 하노버는 일개 공국으로서 기댈 곳이 못 되었고, 키옌으로부터 뻗어나온 분가들은 언제 목이 날아갈까 엎드려 숨을 죽였으며 외가의 외가, 즉 소피야 황후의 친정은 예전에 대가 끊긴 ​작​센​-​슈​바​이​크​였​다​.​ 

 전 세계를 통틀어 폐하라 불릴 수 있는 왕은 채 서른 명도 되지 않는다. 그리 귀한 왕관을 썼는데도, 밭을 휩쓰는 폭풍우를 마주한 일개 필부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듯했다. 

 고작 한다는 것이 수십 년 전 코시카 황궁을 뛰쳐나온 이모에게 매달리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몇 날 며칠을 잠들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남편을 보다 못한 빌헬미네가 시이모를 초대해서 그의 앞에 앉혀 놓았다. 

 "이모님의 식견을 빌려주십시오." 

 "내게 무슨 식견이랄 것이 있을까." 

 여공이 비웃었다.

 "손녀 아이 하나 시녀로 밀어넣는 데에도 온갖 재주를 다 부려야 했던 나란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조금 더 빌어보라는 것이다.

 코시카의 마리야 이바노브나 여공. 안나 1세의 손녀이며 이반 3세와 소피야 여제의 장녀. 체사레브나였으나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한 여자. 그러면서도 자존심 하나만큼은 눈동자보다 새파랗다. 과거에 비하면 비참할 정도로 영락했는데도 이 이모는 항상 허리며 목이 꼿꼿했다.  

 자연스레 한 소녀가 떠올랐다. 눈도 파랗지 않고, 얼굴은 조금도 닮지 않았지만 허리가 이모-그녀에게는 고모-와 판박이처럼 곧던. 이반 3세의 손녀이며 마리야 여공의 조카이며, 그의 사촌인, 역시 체사레브나였던 소녀.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 팔려가듯 시집가는데도 그녀는 이를 데 없이 오만했다. 

 코시카 황제는 무오하다. 

 따라서 그 후계자는 자신이 무오한 존재가 되리라고 교육받는다.

 태고로부터 내려온, 가장 강력한 가문의 뿌리가 부여한 자긍심은 그토록이나 강력한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작센은 여태 실뿌리 하나 얻지 못한 것이다.

 "이모님. 조카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빌헬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협상은 무용하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죽고, 부레옥잠이라도 된 듯 세상에 관심이 없어진 이모였다. 하나 뿐인 손녀가 기댈 자리를 찾은 뒤에는 죽어도 된다는 허락이라도 받은 양 얼굴이 맑아졌다. 당조카 되는 앤 레르헨펠트의 남편에게 레르헨펠트 궁정백의 작위를 승인하겠다는 약속을 들이미는 것도 추했다. 그저 죽은 어머니가 이모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에 매달려 한 조각 지혜라도 빌려달라 매달렸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지만 않았더라면 이리 매달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조카에게 이모님은 어머니나 다름없다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여공이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에게 쫓겨나고 떠도는 나와 내 아들을 받아주었다 생색이라도 내는 것이냐? 어머니나 다름없이 모셔 네 사촌에게 백작위 씩이나 주었으니 감격에 겨워 무릎이라도 꿇고 아는 것을 줄줄이 뱉어내랴?"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그저 가여이 여겨주십시오. 이 조카가 그리 탐탁찮으시다면, 이모님의 여동생의 손녀딸인 조피를 생각해주십시오. 고작 열한 살입니다, 이모님." 

 "궁은 좋은 곳이란다." 

 '궁전'. 

 아무 수식어도 붙지 않은 그 단어야말로 가장 자긍심 넘치게 코시카 황궁을 이르는 말이었다.  

 "키옌의 독수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안락한 둥지지. 조피에게도 유학은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니? 지금쯤 친척이 바글바글할 테니 말이다." 

 빌헬름은 기어코 어금니를 물었다. 

 코시카의 옐리자베타 여대공을 어머니로 둔 덕에,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과 그의 자녀들은 코시카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시집을 가면서 계승권을 포기한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달리, 옐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여대공은 계승권을 말소하지 않은 채 작센 땅에 내려앉아 자식을 낳았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빌헬름과 조피는 키옌이 아닌 위튼이었으며, 코시카 황족이 아닌 작센의 왕족이었다. 

 아름다운 사촌 여동생이 그에게 허리 숙이지 않았듯, 코시카의 귀족들은 빌헬름에게 무릎 꿇어 충의를 재확인할 의무가 없었다.

 -위대한 이반 3세 폐하의 손자이시며, 옐리자베타 여대공 전하의 장자이시며, 작센의 국왕이신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 폐하와 장녀이신 고귀한 조피 도로테아 공주 전하께 영원토록 영광 있으시기를.

 바로 그렇기에 코시카 대사가 알현실에 들어와서 '무릎을 꿇은' 순간, 빌헬름은 옥좌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쓰게 웃으며 덮어버린 편지의 내용이, 나지막한 소녀의 목소리로 화해 귓가에 왱왱 울렸다. 

 -친애하는 사촌. 나는 키예나의 딸입니다. 돌려 말하는 재주는 우리 둘 모두의 경애하는 조부이신 이반 3세 폐하로부터 배운 바 없습니다. 예측이 틀려 조롱당할까 두려워하며 펜을 꺾는 것보다 어리석은 광기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이 더 쉽다 여긴 탓에 이 글을 적습니다. 

 '어리석은 광기의 오명.'

 편지는 정말 그 구절이 아니면 요약하기 어려웠다. 편지의 발신인은 고의적으로 추론의 몇몇 과정을 누락시켰고, 빌헬름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결과만을 남겨놓았다. 빌헬름이 그 편지를 읽자마자 헛웃음을 지으며 책상 위에 팽개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빌헬름에게 있어서는 전혀라고 할 만큼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조피는 사랑하는 어린 딸이었다. 계승권이 없으니 언젠가 다른 나라로 시집 가 행복하게 살도록 어여삐 키우는 작은 아이. 

-내 어머니, 옐레나 1세 폐하께서는 조피를 코시카로 유학보내달라 하실 겁니다.

 평생을 통틀어 단 며칠 동안 만났을 뿐인 빌헬름의 외종사촌 여동생은 분명 제법 조숙한 소녀였다. 본인이 당한 무례를 들이밀어 대가를 받아낼 줄 아는. 그렇다해도 고작 열여덟 살이었다. 근거 없는 상상력을 단순히 잘난 체 하기 위해 지껄일 수 있을 법한 나이다.

 -사촌에게 이유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작은 빌헬름보다 조피를 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사실, 빌헬름에게 있어서는 전혀라고 할 만큼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아들과 딸이 모두 소중했으나, 국왕으로서 그 둘을 같은 무게로 둘 수는 없었다. 조피는 사랑하는 큰딸이었다. 언젠가 다른 나라에 좋은 신랑을 골라 시집보낼 때까지 유리종을 덮고 고이 보호해주고 싶은 귀여운 어린 아이. 그리고 어린 빌헬름은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의 왕관을 물려받아 뿌리를 마저 뻗을.

 -답장은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줄에는 '코시카 여대공, 로렌의 마담 라 세르,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라는 서명이 있었다. 기묘할 정도로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였다.

 빌헬름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굳이 이해하고 보듬으려 길게 고민하는 성품은 못 되었다. 코시카 대사가 올 때까지 사촌 여동생의 편지를 책상 서랍에 처박고는, 아량 넓은 오라비의 마음가짐으로 잊어버렸다. 그는 한숨을 삼켰다.

 "이모님."

 "네 머리의 왕관이라도 내 대신 써주랴?"

 빌헬름은 한 번 참았다.

 여공은 왕관 대신 흰 머리를 정수리에 얹은 채로 웃었다. 노인의 입가에 주름이 나붓이 잡히고, 키예나로서 물려받은 청안이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식견을 빌려줄 수 있단 말이냐? 황궁을 떠난 지 수십 년이다. 내 알고 있던 것들은 죄다 먼지조각이 되었고, 내 아버지조차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뜨셨다. 시집 못 간 손녀 하나 마음에 걸려 연인 곁에 눕지 못하는 이 초라한 늙은이의 머리로 짜낼 수 있는 것들이, 네 왕관이 뱉을 수 있는 것보다 못하다면, 대체 그 왕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내 동생은 대체 왜 여기까지 시집와, 얼굴에 멍든 초상화를 남겨야 했단 말이냐?"

 멍든 초상화? 빌헬름의 어머니, 코시카의 옐리자베타 여대공이자 작센의 엘리자베트 공작부인은 초상화를 몇 장 남기지 않았다. 당연히, 얼굴에 멍 든 초상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질문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막듯 이모의 힐난은 줄줄이 이어졌다.

 "무엇을 알려주랴?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게 아니라면 직계의 공주를 내놓으라 강짜 부릴 리 없다는 걸 새삼 알려줘야 알 수 있다는 말이냐? 아니면 작센이 망할 나라라고 설명해주랴? 내주면 나라가 십 년 뒤에 망하고 내주지 않으면 당장 망하리라고?"

 "작센이 웨데나처럼 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 웨데나조차 나라는 부지했고요."

 이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폐하, 저는 코시카의 것이고, 코시카는 위튼의 것입니다."

 조롱기 어린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푸른 시선이 심장을 관통하는 창처럼 떨어져내렸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하겠느냐?"

 도저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잠을 못 이루던 그 많은 날에, 고민에 고민을 거치는 동안, 머릿속에 코시카 옥좌가 떠오르지 않았다고는.

 이반 3세는 슬하에 세 명의 자식을 두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옐리자베타 이바노브나, 파블 3세.

 눈 앞의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낙혼하여, 남긴 자손이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 뿐이었다. 파블 3세의 자손은 공식적으로는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둘 뿐이었다. 사생아인 마리야 파블로브나 유리예프스카야와 도망친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까지 다섯 명 중 미하일을 제외한 네 명 모두 코시카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거나, 황위에 오르기 부적절했다.

 그리고 둘째인 옐리자베타 여대공의 자손이 바로 이 작센 왕실이었다. 이반 3세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작센의 형제들이 코시카를 승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은 걸음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기였다. 미하일의 다음은,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이 계승권을 포기했으니, 코시카 승계법에 따른다면?

 적어도 아주 멀리 있지는 않을 터.

 빌헬름은 지금까지 코시카 승계법에 그리 크게 관심이 없었다. 손만 뻗으면 알아볼 수 있을 터인데도, 여태 그 옥좌는 남의 것이었다. 괜히 알아보아 욕심을 키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아랫배가 아려왔다.

 태고로부터 이어져내려온 남의 단단한 뿌리에 연약한 위튼의 줄기를 접붙일 수 있다면.

 코시카 승계권은 그의 죽은 어머니가 물려준 빌헬름의 정당한 권리였다. 빌헬름은 순식간에 쏟아진 깨달음의 파도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것 보렴."

 문득 시선을 올렸다.

 이모의

 새파란 눈이

 그를 질책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저 면목이 없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P.S. 빨리 다음편을 쓰라고 꾸준히 질책해주신 츠이사키님과 델마르님 ​감​사​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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