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푸른 눈에 담긴 세상 (7)
여름이 한창이었다.
정원사가 물감으로 새파랗게 물들인 장미가 초록빛 잎사귀와 뒤엉켜 숙녀의 리본처럼 쏟아져내리고, 반짝이는 여름 햇살이 얇은 숄처럼 그 위를 뒤덮었다.
화가 리샤르 쥘-몽팡은 이블린의 장미를 계절별로 그린 연작을 이십삼 번까지 남겼고, 오십 년 전의 대작곡가 알랭 뒤트아르는 사계 중 여름을 작곡하면서 삼악장의 부제를 줄장미라고 붙였다. 그밖에도 건축가, 음악가, 화가를 막론하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덩굴장미에게 영감을 얻으면서, '발루아의 푸른 장미'는 단순한 황실의 상징으로 남는 대신 로렌 예술의 상징으로 발돋움했다. 로렌 인들이 장미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예년과 다름없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었으나, 장미를 제외한 풍경은 다소 달라졌다.
변화는 가장 먼저 여인들의 차림에 찾아왔다. 정원을 산책하는 여인들은 대부분 사라판 비슷한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사라판 '비슷한'이라고 칭한 이유는 코시카 수도를 전부 뒤져도 유사한 의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되었기 때문이었다.
유행의 시작은 코시카 여대공인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였다. 이제 열여덟 살 먹은 마담 라 세르는 그야말로 눈부신 미인이었고, 무엇을 걸쳐도 비슷하게 되고 싶다는 동경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세례식과 결혼식에서 흰색 옷을 유행시킨 아롈은 두 번째로 사라판을 이블린에 유행시켰다.
물론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특유의 폐쇄적인 성격, 그리고 마담 르와이얄과 충돌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상황 때문에 아롈은 사교 활동을 그리 충실히 하는 편은 못 되었다. 그러나 응접실에서 상아말을 매만지거나 심심풀이로 창가에 앉아 책을 읽을 때 허리를 조이는 로렌 풍 가운(robe a la laurenaise) 대신 사라판을 즐겨 입은 것이 불씨가 되었다.
아롈의 시녀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소녀가 피로에 젖은 채 색색의 수를 놓은 가벼운 원피스를 걸친 모습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 그 해 여름은 역대 최고의 혹서를 자랑했다. 허리를 조이는 가운보다 셔츠와 사라판이 훨씬 시원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샤를루아 공작부인인 이본느와 샤를루아 공작녀 소피가 특별히 주문한 사라판-비슷한 원피스-을 입고 아롈의 다과회에 참석한 이후 유행은 불처럼 번져나갔다.
이블린에 유행하는 사라판은 많은 부분이 코시카와 달랐다. 먼저, 머리에 쓰는 모자나 베일이 없었다. 머리를 그대로 말아올려 리본이나 가벼운 꽃으로 장식했다. 아롈이 가져온 사라판은 가슴에 장수를 비는 주술 수가 놓여있었지만 로렌에 그런 수를 놓을 줄 아는 사람이 아롈을 포함하여 있을 리 없었다. 가슴부터 치마폭까지 수를 놓아 모양을 내는 건 몹시 사치스러운 방식이었다.
그래서 로렌의 숙녀들은 가슴팍에 레이스와 프릴과 리본을 일자로 흘러내리듯 잔뜩 달고 가슴에 묶는 장식띠에는 꽃 수를 놓았다. 색감도 달랐다. 눈에 새겨지듯 선명하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면 대신 은은한 색감의 새틴을 써서 한층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을 강조했고, 안에 받쳐입는 블라우스나 셔츠를 흰색으로 통일해서 산뜻해보였다.
그래서 로렌의 장미정원은 유서깊은 장미와 새로운 복식이 어울려 기묘한 활기를 띠었다. 오늘 소풍을 즐기고 있는 로렌의 가장 고귀한 혈통들도 모두 양산을 들고 '로렌 풍 사라판'을 입고 있었다. 유행을 시작시킨 아롈이 팔을 벌렸다. 손뜨개를 한 베일 대신 레이스 장식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가슴에 장미와 진주로 장식한 하늘색 옷을 걸쳐 시원시원해보였다. 블라우스는 반투명해서 팔의 선이 살결이 희미하게 비쳐보였다. 목에는 파란색 보석을 단 단순한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루이 앙투안 드 발루아는 그 자태에 한순간 못박히듯 섰다. 고집스레 '전통적' 로브를 걸친 미네트가 남몰래 비웃음을 머금는 것도 모른 채.
"루, 이리 오렴."
금갈색 머리카락이 간신히 목을 뒤덮은 어린 여자아이가 유모의 품에서 뛰어내리더니, 당연하다는 듯 아롈의 품에 안겨들었다.
"외숙모(ma tata)!"
아롈은 옷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훌쩍 들어 뺨을 비볐다.
"사랑하는 루."
루 발레리 데지레 로를레앙, 크뢰즈의 아가씨가 이름이었으나, 아이는 사랑하는 루(ma chérie roux)가 제 이름인 줄 알았다. 어렸을 적 홍역을 앓은 탓에 다섯 살이 되기 전 급하게 세례를 받았고, 병마를 훌륭히 이겨낸 지금은 부모와 친척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아롈은 이 시조카를 마치 제 자식이라도 되는 양 끌어안고 옆에서 떼어놓을 줄을 몰랐다. 어찌나 안아올리는지 가슴팍에서 젖냄새가 가시지 않을 지경이었다.
"너무 그리 안지 말아요, 아렐르. 그러다 루가 걸어다니는 법을 잊어버리면 어떡해요?"
분홍색 사라판을 걸친 리젤로트가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그녀는 로렌의 오랜 관례대로 오를레앙의 본성으로 내려갔다가 아이를 낳고 이블린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롈은 아랑곳하지 않고 루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럼 평생 안고 다니면 됩니다. 그렇지, 루?"
"응! 외숙모 좋아."
"외숙모도 루를 사랑해."
앙투안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입에 잼을 한 스푼 물고는 차를 들이키다가 입술을 물었다. 너무 달았다. 잼과 차를 같이 즐기는 건 코시카 식 다법(茶法)이었다.
코시카와 로렌을 접목하는 유행은 비단 의상에만 고여있지 않았다. 이블린은 내륙이라 생선을 즐기는 코시카 황궁의 요리 문화가 미치지는 못했지만, 요리 외에 다른 부분에서 귀족들의 문화가 수입되었다. 그 중 하나가 다법이었다. 이제 이블린 살롱에서 잼과 차를 함께 즐기는 법을 모르면 촌뜨기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정작 차에 잼을 대충 휘휘 풀어서 마시는 아롈은 꼭 그리 예의 지켜서 마실 필요가 없다며 어이없어했다)
사람들은 2년 동안 나타나지 않는 용에 대해 금세 잊어버렸다. 코시카는 높은 가격으로 로렌 포도주를 수입해갔고, 수를 놓은 옷감과 소품을 수출했다. 공교롭게도 식민지의 작황이 좋아지면서 호황이 찾아왔다. 황궁에서 유일하게 코시카 출신인 마담 라 세르는 평화와 호황의 상징처럼 떠받들어졌다. 아롈이 어떤 것을 희생하고 로렌에 시집왔는지에 대해서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이 보였다. 아름다운 마담 라 세르가 알자스 공작-세르의 장자, 로렌의 제 2계승권자-을 낳아주었으면 하는 여론은 점점 커져 이블린을 잠식했다.
아롈이 시조카인 루를 예뻐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왜 아이를 가지지 않는 걸까?
역시 세르에게 문제가 있다, 아니다, 너무 어려서 그렇다.
앙투안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한 지 이제 겨우 두 해였다. 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도무지 눈이 없는 걸까? 왜 보지 못할까. 아롈은 아이가 있든 없든 저렇게 반짝이는데.
할 수만 있다면 결투라도 신청해서 주인의 귀에 그런 더러운 말들이 들어가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다. 물론 아롈이 그런 그의 소원을 들었더라면 '그건 경의 일이 아니야'라며 짜증을 내리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뭔가 하고 싶었다.
"루. 조금 더 크면 외숙모랑 같이 말을 타러 갈까?"
달콤한 목소리에 현기증이 났다.
붉은 머리의 청년은 그 순간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원망스러워졌다. 마음 속 어느 깊은 곳에서부터 문장이 샘솟았다. 그럴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별똥별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바다가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루 발레리 데지레와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가 다정하게 말을 타며 봄소풍을 나갈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고.
그걸 알게 되었고 그걸 부정해보려 애썼으나 예지는 마치 절대적 진리처럼 그에게 다가와 떨어지지 않았다. 앙투안은 소풍이 끝나자마자 이런 사실을 보고해야 할 스스로가 비참하여 고개를 떨궜다.
아롈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