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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3)


 이본느가 궐련(cigar) 한 통을 들고 들이닥쳤을 때, 필리프는 침실에서 홀로 술을 즐기고 있었다.

 보르디의 핏줄은 '술이 익으려면 기다려야 한다'라는 가언에 걸맞게도 대부분 애주가였다. 나이든 샤를루아 공작은 술잔을 내려놓고는 아내의 담배에 친히 불을 붙여주었다. 어둑한 방에 붉은 불빛이 확 타올랐다. 

 이본느는 필리프 옆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찾아올 수 있나요?"

 샤를루아 공작부인은 남편의 바로 옆에 앉아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코로 내뱉었다. 하늘하늘 연기가 흘러나왔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필리프가 채근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오늘 만찬에서 뭐라도 있었어?"

 "별 일 없었어요. 꼬마 마담은 아주 귀엽더군요. 재잘재잘. 얘기가 끊이지를 않는 통에 즐겁게 한 잔 얻어마시고 왔네요."

 "그런데?"

 이본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끌어안은 쿠션은 요 근래 유행하는 '코시카 풍' 자수를 놓아 화려했다. 샤를루아 공작의 침실에는 요 몇 년 갑작스레 부유해진 가문의 위세를 보여주듯 제법 사치스러운 소품들이 눈에 띄었다.

 "여보. 우리 그간 꽤 벌었지요?"

 여제는 포도주 관세를 올리지 않았고, 보르디는 포도주를 코시카에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웠다. 또한 코시카 문화가 유행하면서 여제의 친정인 보르디는 반사 혜택을 받았다. 세시안은 감추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아롈을 싸고 돌았고, 아롈도 어머니의 친정인 보르디에 제법 신경을 써주었다. 몇 년만 더 이 추세로 나간다면 손해를 죄다 메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나쁘지 않았지."

 필리프는 바로 자세를 고쳐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정말 뭐라도 들은거야?"

 "이건 뜬소문인데요, 성황께서는 코시카를 ​못​마​땅​해​하​신​다​는​군​요​.​"​

 자그마한 속삭임에 필리프가 헛웃음을 지었다.

 "코시카 좋아한 성황도 있었나?"

 "물론 그렇지만, 말이 나오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누가 떠드는데?"

 "로슈 추기경의 조카요."

 "작위가 뭐더라? 르베이유?"

 "뷔슈요."

 "비슷했어."

 "전혀요."

 사촌이기도 한 두 부부의 이마에는 나란히 비슷한 주름이 잡혔다. 필리프는 일어나 잔을 하나 더 가지고 오더니 아내에게 콸콸 따라주었다. 이본느는 술을 한 번에 들이키고는 잔을 다시 내밀었다. 필리프는 한 잔 더 따라주었다.

 "성황청이 마녀 선포를 준비한대요."

 "뭐? 미쳤대?"

 "목소리 낮춰요."

 침실에서 다른 이가 듣고 있을 리도 없건만 부부는 자연스레 얼굴을 거의 맞대듯 하고 소근거렸다. 

 "성하께서 노망이 나셨나?" 

 몸에 배어 경어를 쓰고는 있으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말투였다. 

 "생각나요? 마드리드 공작부인. 마담 라 세르의 사생아 여동생. 코시카에서 내놓으라고 했다는군요. 그걸 알고 성황께서 진노하셨다는 거예요."

 "대체 그 연세에 진노를 몇 번을 하시는거야? 십 년 전쯤 진노하셨을 때 이미 선종하실 때가 되지 않았나?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이게 별 일이 아니면 당신은 뭐가 별 일이야?"

 "소문이라니까요. 그런 얘기가 나온다, 이 정도. 성황이 정말 노망이 나지 않고서야 코시카 여제이자 보르디 대공녀를 마녀라고 공식 선포하지는 않겠지요."

 필리프는 포도주를 입 안에서 서너 번 굴리고는 꿀꺽 삼켰다. 진한 향이 맴돌았다.

 "그것까진 아니라도 마녀 사냥 정도는 다시 하자고 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코시카와 연을 끊자?"

 "마담 라 세르를 버리든가요. 여제 폐하께 마담 라 세르가, 그거라는 사실만 알려준다면 꽤 쓸모 있게 쓰지 않을까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헛소리."

 갈색 눈이 몽롱해졌다. 

 "후. 당신 생각도 그렇죠?"

 "당연하지."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세르는 아예 '내 삶의 끝'이라고 부르면서 싸고 도는데. 차라리 지금 세르가 낫지 '무슈'(황제의 첫 번째 남동생, 즉 무슈 크리스티앙)는 영......"

 "세르가 순순히 아내를 버리고 재혼한다 해도 문제야. 황후가 곧 죽어도 소피는 싫다잖아. 이제 시집갈 대공녀도 안 남았는데 저기 중부 어디서 데려올지 감도 안 잡히는군."

 "일단 그 생각은 집어치우죠. 오늘 만찬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요. 고기를 대신 썰어주고 싶어할 지경이었다니까요. 하."

 "당신이 먼저 말해놓고는."

 "그거야 생각은 해보자 이 말이지요. 나라고 진심으로 마담 라 세르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아요. 보르디를 떼어다가 코시카로 이사갈 수도 없는데, 그러니까 우리 선택지는 하나 뿐이군요?"

 촛불 빛이 흔들거렸다. 이본느는 남색 바탕에 흰 꽃을 자잘하게 수놓은 사라판을 걸치고 목에는 가슴까지 주렁주렁 내려오는 진주 목걸이를 둘렀다. 이 로렌 풍 사라판이야말로 그간 보르디가 물심양면으로 아롈을 지지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아롈은 옐레나 여제를 두려워할지언정 둘은 대립할 이유가 없었다. 명목상으로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는 로렌-코시카 동맹의 상징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이 붙어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옐레나 여제가 만에 하나라도 성황청으로부터 '마녀'라는 낙인이 찍힌다면, 친정인 보르디로서는 손을 끊을 준비를 해두어야 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여보. 작센 마담은 갑자기 왜 초대했을까요?"

 이야기가 툭 튀어나갔다. 필리프는 익숙하게 받아쳤다.

 "모르지."

 "있잖아요, 코시카는 딸에게도 승계권을 주잖아요. 그럼 마담 라 세르의 고종조카라는 그 공주한테도 승계권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겠지. 아."

 샤를루아 공작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렸다. 

 "우리가 들은 걸 세르 부부가 못 들었을 리가 없을 테고. 웨데나 전쟁, 마드리드 공작부인. 사생아도 내놓으라고 하는 판에 진짜 승계권이 있는 공주가 탐이 안 날 리가 없겠고."

 "사생아가 너무 미워서 내놓으라고 했을 리는 없겠죠? 왜, 아들들은 죄다 목매달아서 효수했잖아요."

 "그렇게 뚜껑을 덜컥덜컥 열어대면 술이 설익는 걸 모를 분이 아니지, 우리 친애하는 고모님은."

 "그럼, 우리 친애하는 마담 라 페께서는 알고 계실까요?" 

 "그 명석함에 알겠지."

 이본느는 두 번째 담배에 손수 불을 붙였다. 

 "하아. 전쟁은 곤란해요. 이제 겨우 좀 살 만 해졌는데."

 "본인이 코시카 승계권을 포기했는데 아직 미련이 있을까? 물론 나 같으면 미련이 있겠지만. 아니야, 내가 조금 떠보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요?"

 필리프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나 같으면 애초에 여기에 안 있지."

 "그건 당연한 거고요."

 필리프는 제 손으로 술을 채워 한 모금 다시 마셨다. 폭연가에 애주가인 이본느와 달리 필리프는 결코 느긋함을 잃는 법이 없었다. 

 "나라면, 지금이라도 어머니를 죽이고, 어린 남동생을 후계자로 세우든 꼭두각시 후계자를 하나 더 세우든 해서 코시카를 손에 넣을 거야. 하지만 제 동생 못 죽여서 여기까지 밀려온 그 마음 약한 반편이가 그렇게 하겠느냔 말이야."

 "마담 라 세르는 몰라도 세르는 가능하죠."

 그래서 말인데요.

 이본느는 필리프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망하면 딸 인생을 술이 아니라 썩은 식초로 만드는 길이겠지만."

 "당신도, 소피도 모험을 좋아하잖아요?"

 "당신은 아니라는 것처럼 얘기하는군."

 탁자 위에는 종이와 잉크, 펜이 놓여있었다. 필리프는 손을 뻗어 끌어다가, 이블린 전체에 소문난 우아한 달필로 무어라 쓴 다음, 쪽지를 손에 쥐었다가 폈다. 가벼운 잔재주였다. 

 "소피를 벌써 불러요?"

 "왜?"

 "자고 가려고 했지요."

 "친애하는 사촌 누님, 이러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푸핫. 이본느는 깔깔거리며 필리프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한참 웃다가 진정한 이본느는 나른하게 남편의 팔에 기댄 채 웅얼거렸다.

 "있잖아요. 우리 언니의 딸들을 마담 라 세르의 하녀로 넘겼잖아요? 걔들이 당신이 ​알​다​시​피​.​.​.​.​.​.​.​좀​ 그렇잖아요? 물론 신분을 위조해두기는 했지만, 책 잡히지 않으려면 우리 핏줄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손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사생아 신분은 예전에 태어났을 때 손댔던 것 아니야? 괜히 또 손댔다가 오히려 더 티가 나. 마녀 얘기가 아직 물 위로 올라온 것도 아닌데 그냥 두지."

 "하긴."

 "정말 자고 갈거야?"

 "사촌이랑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됐어요."

 "토라지긴."

 "토라진 것 아니에요, 이제 소피도 올 텐데. 왔군요."

 노크 소리가 들리고, 로르쉘의 아가씨 소피가 들어왔다. 

 "왔구나."

 "어머나, 어머니도 계셨네요."

 무릎 꿇는 인사를 생략하고 가볍게 절을 한 소피는 부모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갑작스레 부르는 건 삼가해주세요, 로베르에게 얼마나 변명을 했는지 아세요?"

 "알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데요?"

 "너, 작센에 시집갈 생각이 있니?"

제가 원래 오늘 약속이 있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으로 인해 캔슬되어 집에 틀어박혀 글이나 쓰기로 했습니다... 부디 즐겨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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