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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5)


 조피 공주가 이블린에 당도한 지 정확히 이 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성황의 선포는 파발을 타고 로렌에 와닿았다. 

 [우리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주님의 자식들은 들으라! 현세에 마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는지 경계하라. 마귀는 여자아이를 더 사랑하여 그 어깨를 움켜잡으리니 특별히 등불을 밝히고 사내아이라도 방심하지 말지어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에서 해가 지며 남쪽에는 해가 비추나 북쪽은 하루 중 해가 닿지 아니하여 그늘지기 쉽다. 속세의 빛은 그림자를 어둡게 하지만 천국의 빛은 그렇지 아니하리니 성경을 가까이 하고 부모는 가르치고 아이는 배우며, 남편은 다스리고 아내는 순종하는 것으로 세상을 밝히라! 이것이 우리의 뜻이다.]

 부르고뉴와 칼레, 오베르뉴로 대표되는 해안 지방 대공가는 신앙심이 깊은 반면 나바르, 보르디, 오를레앙의 세 내륙 대공가는 중부와 접하고 있어 구교에 대한 신앙심이 상대적으로 옅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신앙심의 농담을 막론하고, 성황청의 조치는 다소 선을 넘었다는 것이 공통된 반응이었다. 대공가들은 십여 년 전 카스티야와 세르의 결혼이 파투난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발루아의 두 부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시안은 소식을 내리 두 번 읽고는 비뚜름한 웃음을 머금었다.

 "기분이 나쁘군요."

 성황청은 과거에 비해서 세력을 아주 많이 잃어버렸다. 쥐고 있는 강대국은 고작해야 서부 전체와 카스티야, 그리고 로렌 정도. 로렌을 두고 이렇게 구는 건 아무래도 선을 넘었다. 그는 괜히 옆에 앉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 반지 두 개를 겹쳐 낀 왼손은 가늘고 길고 차가웠다.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나이든 성황이, 마담 라 세르가 북쪽 출신인 걸 잊어버린 게 아닐는지."

 십여 년 전 카스티야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나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코시카와 로렌 둘 모두를 깎아내린다. 아롈은 전 보르디 대공의 손녀인 동시에 코시카 황제의 딸이었다. 마녀 선포 공의회가 열리리라는 흉흉한 소문보다야 나았지만 현세에 마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는지 경계하라니.

 대놓고 코시카-로렌의 사이를 더 가깝게 하지 말라 경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황제의 표현 그대로였다. 문제는 이렇게 대놓고 깐족거리는 성황청을 '쥐어박을'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로렌은 거의 다섯 대 째 성황을 배출하지 못했다.

 성황은 벌써 세 대 째 피렌체 공가이자 밀라노 공가인 오르시니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이는 여섯 대공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여자와만 결혼할 수 있다는 발루아 가문의 제약 때문이 컸다. 피렌체 공녀를 아내로 들일 수도 없었고, 루이 조제프 황제는 여자 형제도 딸도 없었기 때문에 피렌체 공가로 딸을 시집보낼 수도 없었다. 대공가들은 머나먼데다 쓰는 말도 다른 서부로 딸을 시집보내기를 꺼려해서, 서부와는 통혼이 어려웠다. 

 "적당히 경계하는 시늉이나 하려무나."

 주교 이하의 성직자 임명권이 황제에게 넘어온 다음부터, 로렌 황실은 성황청을 부모 대하듯 하는 대신 말 안 듣는 남동생이라도 하나 더 생긴 듯 다루었다. 아예 나 죽자 하고 파문이니 뭐니 하면 정말 귀찮아지지만, 그랬다간 저 쪽도 손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적당히 뜯어먹을 거리를 던져주고 달래는 것이 최선이었다. 

 세시안은 그걸 알면서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한 번 더 굴렸다. 

 "로르쉘의 아가씨가 중부와 혼담이 오가고 있다고 합니다만. 중부는 저희보다는 '북쪽'에 있지요. 아무래도 지금 일을 시작했다간 서쪽이 의기양양해질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으냐?"

 "두 번 독촉이 올 때까지 기다렸으면 합니다. 그 때까지는 식민지 쪽이나 건드리면서 추이를 지켜보지요."

 황제는 아들의 결정에 두 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고 나서 다음 주일에 세시안은 병을 핑계로 미사에 불참하고 고해성사를 한답시고 추기경을 불러다 하루 온종일 침묵으로 그를 잡아놓았다. 뷔슈 가의 추기경은 칼레 대공가의 기수가문 출신이었는데, 흔히 '성황의 앵무새'로 불리는 로렌 추기경치고도 소심한 인사였다. 노을이 질 때까지 기다리자 손발에서 난 땀이 성당 바닥을 다 적실 지경이었고, 싸늘한 얼굴을 한 세르가 주님의 광휘 아래 성사된 결혼도 고해해야 하느냐고 묻자, 숫제 엎드려 빌기 직전이었다.

 결국 '성황의 뜻은 그게 아니라는' 대답을 받아내고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은 세시안은 루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롈을 살살 구슬렸다. 마침 심란했던 아롈은 못 이긴 척 남편에게 넘어가주었다.

 대회의가 끝난 직후의 밤, 이블린은 연회로 변함없이 소란스러웠다. 대회의가 끝나면 어김없이 로렌에는 초가을 장마가 찾아오고, 장마가 찾아오면 옷이 젖으니 연회가 시들시들해지고 모임은 밤에서 낮으로 옮겨가거나 휴식기를 맞기 마련이었다. 때늦은 여름, 매미가 시끄럽게 우짖는 사이로 마차 한 대가 조용히 이블린을 빠져나와 렌으로 향했다. 

 가문의 문장이 붙어있지 않은 사두 마차였는데 거리에서 쉽사리 시비가 걸리지 않을 만큼은 고급스러웠다. 마차에서는 설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분한 남녀가 차례로 내렸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에 가면을 뒤집어쓴 까마귀 공주와, 흰 머리카락에 파란 튜닉을 입은 성배의 기사였다. 둘은 얼굴 전체를 다 가리는 가면을 쓰고도 모자라 고운 손을 가리는 장갑까지 끼었다. 기혼임을 나타내는 두 개의 반지는 렌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이는 가면무도회장에 나타나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이었다. 

 물론 공작 미만은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세르 부처의 기준에서 볼 때에나 어중이 떠중이였고, 이런 유희를 즐기는 데에 돈을 쓸 만큼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이 향락을 즐기러 모이는 곳이기는 했다. 

 성배의 기사와 까마귀 공주는 지배인의 안내에 따라 무도회장에 들어서다가 잠시 멈칫했다. 적지 않은 수의 여자들이 긴 머리에 고운 밀가루나 백분을 묻혀 백발에 흰 사라판을 입고 있었다. 세시안은 그 분장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보자마자 깨닫고는 애매하게 웃었다. 저런 백발이 아닌데. 먼 발치에서 보면 저리 보일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결혼식 때는 사라판이 아닌 '전통적인' 옷을 입었고. 이블린에서의 유행은 한 박자 늦게 렌에 휘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당황스러웠다. 

 너무 많은 탓에 '진짜' 금발을 하고 오는 게 오히려 눈에 덜 뜨였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아롈은 아직 정체를 깨닫지 못했는지 멀뚱멀뚱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행여 눈치챌 새라 연인을 잡아 끌어 춤을 추러 갔다.




 춤을 몇 번을 추었는지 모르겠다. 

 찰싹 붙어있는, 낯선 연인에게 접근해서 춤 신청을 하는 괴짜는 별로 없었다. 연속해서 방해하는 사람 없이 내리 춤만 춘 두 부부는 결국 헥헥대며 이층 발코니로 올라갔다. 어딘가에서 재주 좋게 발포주를 구해온 세시안은 아내에게 술을 내밀었다.

 "드시지요, 공주님(ma ​p​r​i​n​c​e​s​s​e​)​.​"​

 ​"​공​주​는​.​.​.​.​.​.​ 아닙니다. 공주지요."

 가면 너머로도 불퉁한 얼굴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공주'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왕실 극단에서 빌려온 옷 중에 아롈이 입을 만큼 길쭉한 여성용 옷이 별로 없었다. 시골 처녀로 분장할 자존심은 아니고, 악역을 좋아하는 성미도 아닌지라 결국 고르고 골라 까마귀 공주가 된 모양이었다. 아롈은 오백 년 전 쯤에 입었을 법한 간단한 튜닉 드레스를 입은 채 팔을 내밀었다. 소매에는 날개처럼 길고 얇은 천이 붙어있었다. 깃털이 덕지덕지 붙은 천이 팔이 일으키는 바람에 날개처럼 휙 날렸다. 코까지 가리는 가면도 새부리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공주여야 해요. 그게 규칙이니까요."

 까마귀들의 공주는 성배를 찾으러 가는 기사에게 반해서 이런 저런 도움을 준다. 기사는 공주가 단순한 새라고 생각하여 정을 주고, 공주는 서글퍼한다. 기사가 성배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심장을 뽑히자, 대신 자신의 심장을 뽑아 기사에게 바친다. 결국 기사의 심장을 대신 받아 서로의 심장을 교환한 공주가 사람으로 변해서 둘이 맺어진다. 이 설화는 로렌에서 낭만적이라며 꽤 인기가 있었다.

 어렸을 때의 여동생들에게 이 동화책을 읽어주었더니 미네트와 리젤로트가 멱살을 잡고 싸웠다. 미네트가 감동적이라며 우는 리젤로트에게 진저리를 치며 '공주씩이나 돼서 심장까지 뽑아줘야 시집갈 수 있는 거야? 난 그런 별볼일 없는 남자랑 사느니 혼자 살래'라고 소리를 쳤고, 세시안은 리젤로트를 달래고 미네트를 혼냈다.

 "가라, 나의 까마귀들아. 가서 기사님을 도와드리렴. 그 분이 저 진흙탕 속에서 발끝 하나 더럽히지 않도록?"

 바로 얼마 전 샤를루아 공작부인과 함께 공연을 보고 온 아롈이 멀뚱하게 대사를 읊었다. 탁월한 암기력에, 끔찍한 연기력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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