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6)
무얼로 화답할까. 잠깐 고민하던 세시안은 민망해진 아롈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 쯤 입을 뗐다.
"마음은 이미 쪼아먹혔는데, 빈 심장만 내게 주어 무엇하오, 그대여."
오페라에서, 공주가 심장을 내주고 죽은 뒤 대신 살아난 기사가 부르는 아리아였다. 낮고 울림 깊은 미성(美聲)에는 순식간에 발코니를 극장으로 만들어버릴 만한 힘이 있었다.
"날개는 이미 지고 눈물은 말라붙어 갈라진 목으로 그대를 부르짖네."
짙은 연지에 감싸인 입술이 움찔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부끄러운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갸름한 턱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대 심장을 돌려받아 찰랑이는 슬픔은 따라버리고 웃음만 채워 간직해주오."
천천히 노래가 밤하늘로 흩어졌다. 가면 사이로 보이는 연녹빛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노래를 다 들은 까마귀 공주가 투덜거렸다.
"저, 노래는 못 부릅니다. 아니, 부를 줄 알아도 안 부를 겁니다."
"노래 따위는 부르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제 심장의 주인이신 아리따운 공주."
"또 이상한 별명 떠돌면 정말 화낼 겁니다!"
아롈이 '마담 라 페'라는 이름에 얼마나 치를 떠는지 아는 세시안은 경고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꼭 그렇게 슬픈 노래를 골라서 불러야 합니까? 죽은 시늉이라도 해야하나 고민했...... 시키지 마십시오."
짙은 녹색 눈에 장난기가 돌았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기사는 웃었다.
"설마 그런 걸 시킬 리가요. 행복이 약속된 노래니까 불렀을 뿐이에요, 나의 코르네이유(corneille, 까마귀)."
"정말, 또!"
마담 라 세르까지는 참겠지만 마담 라 코르네이유는 참지 않겠다고 빠르게 웅얼거리는 입술이 고왔다. 세시안은 그 투덜거림을 천천히 덮치듯 삼켰다.
"아."
짧은 입맞춤과 함께 불평이 멈추었다.
"부디 입맞추게 해주세요, 내 사랑."
입술이 다시 닿았다. 세시안은 며칠 굶은 이가 만난 만찬처럼 붉은 연지바른 입술을 들이켰다. 큼직한 손이 검은 가발을 파고들었다. 머리카락에는 구슬 장식과 함께 검은 깃털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어루만질 때마다 작게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머리카락에 감추어진 귓불이 차가웠다. 손가락이 스치자 흰 귀가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아롈은 십여 년 전, 오라비인 사샤가 알려준 '미행(微行)의 원칙'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보석은 절대 달지 말 것. 잃어버리든 들키든 골치 아프니까. 그래서 흰 귀는 아무런 귀걸이도 달지 않은 채 태어난 그대로였다. 덥석 베어물자 아롈은 진저리를 쳤다.
"으."
도망칠까봐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말 까마귀였더라면 가는 날개가 으스러져 다시는 날지 못할 정도로.
다디단 숨결이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는 감촉이 미친듯이 선정적이었다. 세시안은 자조했다. 수컷들이란.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지는 못 할 지언정 찬란하게 다듬어져 수많은 면으로 광채를 내뿜는 여자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입술이 천천히 목울대를 훑어내렸다. 그는 속삭였다.
"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져요."
아담한 가슴 사이로 콩콩 피를 뿜어올리는 심장은, 그의 것을 뽑아다 심은 것이 분명했다. 목이 말랐다. 아롈을 만난 지는 고작 2년, 진심으로 심장이 몸에서 빠져나와 저 가냘픈 몸 안에 들어간 듯 느껴졌다. 대체 이것 말고 무엇을 마법이라고 불러야 할까. 세시안은 한 번도 아롈이 '마법'을 쓰는 걸 본 적은 없지만, 항상 사실은 이미 최면에라도 걸려있는 게 아닐까 의심해왔다.
"가끔은 정말 내 심장에라도 넣어다니고 싶어요. 당신에게 날아오는 칼날을 내가 한 번쯤은 대신 맞아줄 수 있을 테니."
"저 대신 칼 맞으면 평생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기사에게 심장을 내주고 죽는 까마귀 공주로서 할 말은 아니었다. 냉기어린 목소리는 '아롈'의 것이었다.
"제가 당신에게 소중한 만큼 당신도 제게 소중하단 말입니다."
흐릿한 마음이 그대로 무너져내려 취기와 뒤섞여서는 울컥 치밀어올랐다. 코끝이 쥐어짜듯 아파왔다. 그거야말로 그의 바닥의 바닥에 있는 진심이었으므로.
대답하지 않자 아롈이 채근했다.
"알겠어요?"
까마귀 공주의 옷은 쇄골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가면을 쓰고도 얼굴을 감추려 쇄골 위에 입 맞추는 척 얼굴을 묻었다.
"공주야말로, 절대 저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겨우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아롈은 대답하는 대신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머릿속이 겨울날 유리창처럼 희뿌옇게 물들었다.
그녀는 절대로, 지나가는 빈말로라도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 점에 반한 주제에 그게 못내 서러워 흰 살결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내렸다.
"세시안?"
웃기지도 않는 가면의 규칙이 박살났다는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나를 봐요."
아롈이 그의 얼굴을 들어올리려고 하는 것을 피해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그는 무너지듯이 눈물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따라서 주저앉은 아롈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왜....... 얼굴 좀 보여주십시오."
있는 힘껏 달래려고 애쓸 수록 눈물이 흘러 공주의 옷 앞섶을 적셨다.
"무슨 일 없을 겁니다. 응? 앙투안도 있고, 벨타도 있는데."
벨타, 그 망할 짐승.
"마녀 사냥이니 뭐니 다 자기들 지배력이나 확인해보려는 유치한 술수인 것, 모르는 바도 아니잖습니까. 별 일 없을 겁니다. 설사 마녀 선포를 한다고 해도 다 그냥 하는 말일 겁니다. 응? 정말 어린 애도 아니고...... 취했습니까?"
원체 말 없는 아롈이 아무 말이나 늘어놓을 정도라면 정말 당황한 것이다. 세시안은 숨을 고르며 내뱉었다.
"그 늙은이를 죽여서 새로 세우고 싶어요."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아롈의 손이 덜컥 멎었다.
"마녀 사냥이라고? 요즘 세상에? 아버지는 식민지에서 하는 시늉이나 하라고 했지만 그런 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누구 맘대로? 사실은 레르헨펠트 양도 없애버리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은 싫어하겠죠. 멀리 시집보내고 싶어도 믿지 못해서 그럴 수도 없어. 당신 고모도 당장 죽여서 입을 막고 싶어. 어딘가에 유언장을 써놨을지도 모른다는 것만 아니면 당장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 망할 짐승의 혀도 뽑아서 저녁 만찬에 올리고 싶어요. 당신을 지켜야 하는 입장만 아니었다면 내 손목을 하나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핏물로 목욕을 시켰을 거예요."
마음의 자물쇠가 뜯겨져나간 것 같았다. 이블린이 아니라 렌이라는 것만으로도, 분장하고 가면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시안은 아내의 품에서 눈물흘릴 수 있었다.
"당신 어머니도 증오스러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내가 아버지였다면, 명령권이 있었다면, 지금 당장 없애라고 하고 싶어요."
끌어안아야 겨우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그는 토로했다.
"가끔은 샤......나 미셸이나 앙투안까지도 기억을 지우고 싶어져요."
물론 아무리 마음을 열어도 차마 할 수 없는 말은 있었다. '내가 만일 그 때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나 혼자 당신을 데리러 갔을 거예요'.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롈을 위해서 여제가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옳다. 그게 그의 심장을 잃는 일이 되더라도. 하지만 진심의 나침반은 옳지 않은 곳만을 하염없이 가리켰다.
"그러니까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약속해요."
아롈은 한참 후에 대답했다.
"노력하겠습니다."
세시안은 그대로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