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9)


 [클로디? 클로디가 누구더라? 그 금발에 맹한 애?]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는 릴레벨트를 상대로 일기를 쓰듯 하루 일과를 재잘거렸다. 이 년 전 험한 일을 당한 이후로 앤은 몸을 움츠리고 연회에는 잘 나가지 않았다. 소금물에 몸을 담근 용은 호들갑을 잘 떨어주는 좋은 대화상대였다. 릴레벨트는 지느러미를 퍼덕였다.

 [맨날 실수하는 걔?]

 "아뇨, 벨타님. 그건 클레르 양이에요. 클로디 양은, 이번에 마담 르와이얄의 시녀 한 명이 시집가고 새로 들어왔잖아요."

 [아아아아! 알겠다. 그 빨간 머리? 맞아, 맞아, 걔 재수없어.]

 앤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재수 없다고는 안 했어요, 벨타님."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걸? 그렇게 턱을 쳐들고 뒤뚱뒤뚱 걷는 꼴이란. 누가 보면 할아버지가 거위라도 되는 줄 알걸?]

 앤은 맘편히 소리내어 웃었다. 오늘 아롈은 밖으로 놀러나갔으므로, 잠귀 밝고 예민한 주인이 잠에서 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담 라 세르의 침실은 요 2년 사이 세르 부부의 침실이 되었다. 두 겹의 문을 뚫고 아주아주 희미한 신음이 들려올 때마다 릴레벨트는 짜증을 냈고, 앤은 혹여 자신의 목소리가 새어나가 경을 칠까봐 숨을 죽이곤 했다. 

 [있지, 내가 잡아먹어줄까? 걔 이 나라 국적이니?] 

 "네, 맞아요."

 [쳇.]

 "혹여 아니라고 하더라도 잡아드시면 안 돼요. 피라면 제가 얼마든지 드릴게요."

 [고기가 맛있단 말이다. 피는 목을 축이는 정도밖에 안 돼.]

 벨타는 투덜거리더니 금세 포기했다. 이 용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롈에게 로렌이나 코시카 인을 허락 없이 잡아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바 있었다.

 릴레벨트의 무시무시한 본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앤은 마냥 벨타가 좋기만 했다. 식인을 한다곤 하지만 말 뿐이지 한 번도 실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답답해서 못 살겠노라고 펄펄 뛰다가도, 앤이 애원하면 모른 척하고 보석으로 얌전히 변하곤 했다. 만리타향 타국, 가족이라고는 없이 시녀 생활을 하는 앤에게 있어서 벨타는 단 하나 마음 기댈 구석이었다. 아무리 뒤로 욕을 해도 절대로 새어갈 리 없는 대상이 아닌가.

 꼬리로 물을 치며 클로디를 포함하여 몇몇 앤을 배척하는 시녀들의 욕을 즐겁게 늘어놓던 벨타는 갑자기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너, 준비하렴.] 

 아롈이 온다는 뜻이었다. 릴레벨트에게는 언제 아롈이 올 것인지 비상하게 알아채서는 본관 입구에 올 때쯤 알려주는 재주가 있었다. 앤은 허겁지겁 일어나 거울을 보고 몸가짐을 정리하고는 아롈의 침실로 들어갔다. 줄을 당겨서 하녀를 불러 촛대마다 불을 켜고, 곁방과 침실에 세숫물을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요 이 년 동안 마담 라 세르의 침실은 세르 부부의 침실로 이름을 바꿔야 할 지경이 되었다. 세시안은 정의관에 가서 잠드는 법이 없었으므로, 주인의 부군이 함께 와서 의관을 푸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그런데 파티션이며 입욕제, 수건까지 준비했는데도 아롈이 오지 않았다. 앤은 나가서 기다려야 할 지, 아니면 계속 침실에 서서 기다려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하며 서 있었다. 시중을 들기 위해 불려온 다른 당직 시녀 둘이 왜 지금 자기들을 불렀냐며 앤에게 눈치를 줄 때쯤, 갑자기 문이 열렸다. 

 까마귀 공주의 옷을 입은 아롈이 세시안의 부축을 받아 거의 쓰러질 듯 들어왔다. 창백한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요강."

 앤은 급히 뛰어가 손수 구석에서 요강을 가지고 왔다. 다른 시녀들이 눈치를 보며 침실을 나갔다. 아롈은 몸이 아플 때 앤 이외의 다른 시녀들이 곁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윽."

 시원하게 토하지도 못했다. 몇 번이나 당장이라도 올릴 듯 꺽꺽 헛구역질을 했지만 입에 고이는 단물을 뱉어내는 정도에 그쳤다. 보다 못한 세시안이 손가락을 입 속에 집어넣어 혀를 눌렀다. 

 "윽. 우욱."

 간신히 쓴 물이 터져나왔다. 옳지, 잘했어요. 세시안이 등을 쓸어주며 아내를 달랬다. 아롈은 속을 몽땅 헹궈내듯 토하고, 또 토했다. 저녁을 걸렀는지 나오는 것은 붉은 포도주 몇 모금 뿐이었다. 샛노란 위액이 몇 번이나 쏟아졌다. 앤의 목구멍이 다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따라나갈걸. 기회를 놓친 앤은 헛구역질 사이에 섞인 희미한 울음소리를 똑똑히 들으며 서있어야 했다. 신발 안창에 가시나무가 자라는 듯했다. 

 체중을 싣는 발을 바꿔가며 서성거리자 기척을 눈치 챈 세시안이 고개를 들어 턱짓했다. 나가보라는 것이다. 앤은 감격해서 허리를 숙이고 소리 죽여 제 방으로 돌아왔다. 

 [왜 저런다니?]

 문을 채 닫기도 전에 벨타가 물었다. 유리잔 가장자리에 턱을 괸 채였다. 

 "전하께서 조금 편찮으신가봐요, 벨타님."

 [조금이라기엔 제정신이 아닌데?]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세요?"

 [소리보다는.] 

 벨타가 지느러미로 날씬한 배를 툭툭 쳤다. 그녀의 샛노란 눈이 언뜻 앤의 침대를 스쳤다.

 [갑자기 배가 불러서 말이야.]

 "예? 갑자기요?"

 입이 쩍 벌어졌다. 꺼억, 위에 찬 공기를 뱉어낸 용은 아름다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속이 ​더​부​룩​해​지​겠​는​걸​.​]​




 구역질은 한참이나 뒤에 진정되었다.

 세시안은 먼저 제 손을 씻고는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아주었다. 토사물과 함께 새빨간 연지와 눈물이 묻어나왔다. 젖은 얼굴을 하고 헐떡이는 모습은 흡사 폭풍우에 휩쓸린 나비 같았다. 그는 아롈을 안아올려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잠옷차림이 된 아롈은 연인이 쥐어주는 칫솔을 입에 물었다. 짭짜름한 소금맛이 났다. 힘없는 손으로 말없이 양치를 하던 소녀는 입을 헹구어 짠기를 씻어내고 나서도 계속 입을 다물다가 이름을 불렀다.

 "세시안."

 "네."

 편하게 옷을 갈아입은 아롈과 달리 세시안은 여전히 '까마귀 공주'에 나오는 기사의 푸른 튜닉을 걸친 채였다. 그는 아롈이 입을 열자마자 자연스레 한 쪽 무릎을 꿇고 앞에 앉았다. 반지를 끼지 않은 왼손을 잡아 손등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리 이야기를 할까요?" 

 "내일 하는 건 어떨까요?"

 "마음이 급하군요."

 부축 없이 몇 발자국 떼는 동안 가느다란 발목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곧은 허리, 반듯하게 펴진 어깨, 살짝 올라간 턱, 반짝이는 금발처럼 쏟아져내려 온 몸을 감싸는 자존심. 언제 약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했지만, 강한 시늉은 약해진 사람만이 하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세시안은 쉬자는 말을 다시 꺼내지는 않았다. 

 넓은 탁자에 간신히 도달한 아롈은 떨리는 손으로 세계 지도를 펼치고 상자를 열었다. 어른, 어린아이, 범선, 왕관, 꽃, 십자가, 용, 총, 그 밖에도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상아말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흰 손가락이 사람 모양의 말을 여럿 골라내어 지도 위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키예프 공으로 시작하여 제국의 황가까지 올라온 키옌 가문은 명확히 전해지는 가계도만 이천 년이 넘을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옛 페란트 시절까지 올라가도 거대한 명가였던 가문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후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북부의 영아 사망률은 다른 지역에 비교해서 확연히 높은 편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손들은 동기끼리 상잔을 하여 관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천한 핏줄을 애호하여 계보에서 이름을 지우고 떠나갔다. 

 안나 여제는 네 명의 적자녀를 두었다.

 첫째 미하일 대공, 둘째 이반 3세, 셋째 알렉세이 대공, 넷째 나탈리야 여대공. 

 미하일 대공은 부인의 뱃속에 아이를 둔 채 사망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는 파블 1세의 사촌이자 아롈의 당백부가 되는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었다. 콘스탄틴 대공은 예카테리나 대공비와 혼인하여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여공과 아나스타샤 콘스탄티노브나 여공이라는 두 딸을 두었다. 두 딸 모두 미혼이었으므로 미하일 대공의 자손은 세 명이 끝이었다. 세 부녀의 말이 코시카 황도에 올라갔다. 

 둘째인 이반 3세야말로 동기들 중 가장 많은 자손을 두었으나 현재로서는 남은 이가 별로 없었다. 

 이반 3세의 장녀인 마리야 여공은 례비제프 가문과 귀천상혼을 하여 도망쳤다. 하나 낳은 아들은 사망했고, 손녀인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만이 남았는데 당연히 승계권은 없었다. 

 이반 3세의 차녀인 옐리자베타 여대공은 작센으로 시집가 세 아들을 낳았다. 장자인 빌헬름이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이라는 왕명으로 작센 왕위에 올라, 하노버의 빌헬미네와 혼인하여 조피 공주와 빌헬름 왕자를 낳았다. 차자인 루드비히 왕자는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와 혼인하여 자녀가 없었고, 삼자인 하인리히 왕자는 사망했다. 

 이반 3세의 셋째이자 장자인 파블 1세는 보르디의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와 혼인하여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유리예프스카야 공비 헬레네와 사통하여 세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서장자인 표트르 파블로비치 유리예프스키와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유리예프스키는 옐레나 1세가 효수했다. 서장녀인 마리야 파블로브나 유리예프스카야는 카스티야로 시집가 마드리드 공작부인이 되었다. 

 적장녀인 소피야 파블로브나는 요절했다. 적장자인 이반 파블로비치 대공 역시 십대의 나이에 요절했다. 적차자인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은 돌로루코바의 나탈리야와 귀천상혼하여 야반도주했다. 적차녀인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도 요절했다. 적삼녀인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아롈은 승계권을 포기하고 로렌의 마담 라 세르가 되어있었다. 적삼자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은. 

 아롈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은 사흘 전 두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안나 여제의 셋째 아들인 알렉세이 대공은 귀천상혼을 하여 자녀들이 황실 계보에 올라가지 않았다. 알렉세이 대공은 사망한지 오래 되었다. 

 안나 여제의 넷째이자 첫째 딸인 나탈리야 여대공은 이모가 시집간 ​홀​슈​타​인​-​고​토​로​프​-​키​예​프​ 가문에 시집갔지만 자녀가 없었다. 

 안나 여제의 여동생인 올가 여대공은 마르카와 노르카디아를 다스리는 홀슈타인-고토로프 왕실의 둘째 왕자에게 시집가서 ​홀​슈​타​인​-​고​토​로​프​-​키​예​프​ 분가를 만들었다. 첫째 왕자가 병약하여 왕위를 노리고 시집갔는데, 첫째 왕자가 죽기는 커녕 아들을 낳고 충분히 오래 버텼기 때문에 올가 여대공은 왕비가 되지 못하고 언니인 안나 여제로부터 영토를 받아서 분가해버린 것이다.

 안나 여제의 또다른 여동생인 타티아나 여대공은 연애를 하다가 언니에게 대들었고, 좋지 못한 최후를 맞았다.

 안나 여제의 당조카 되는 폐주, 즉 표트르 대제의 둘째 아들의 딸들은 이 년 전 옐레나 여제가 목숨을 끊어 시신을 웨데나로 돌려보냈다. 

 결국 표트르 대제의 자손 중 현재 '적법한'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만한 이들은 세 무리 정도였다. 

 옐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여대공의 자손인 작센 왕실. 

 이반 3세의 조카이자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의 아들인 콘스탄틴 대공과 두 딸들. 

 안나 여제의 여동생의 자손인 ​홀​슈​타​인​-​고​토​로​프​-​키​예​프​ 공작가문.

 아롈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을 지도에 빠르게 배치했다. 배치하고 보니 의미가 달라진 게 환히 보였다. 옐레나 여제의 '살생부'였던 자들이 순식간에 '손에 넣어 살려둬야 할 후보'들로 바뀌어 있었다.

 "누가 죽였을까요?"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