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10)
"누가 죽였을까요?"
세시안은 코시카에 놓여있는 남자아이의 상아말을 지도에서 빼내었다. 미하일 파블로비치 키옌. 아롈은 고집스럽게 어린 남동생의 말을 황도 한가운데에 배치해놓았다. 죽은 사람은 황위에 오를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일 생각할까요? 말이 혀끝에 맴돌았다. 다급한 일인 건 안다. 하지만 세시안도, 아롈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은 그냥 쉬는 건데. 후회가 막급했다.
아롈은 절대 움직일 수 없다는 듯이 빤히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굳이 한 명 꼽으라면 콘스탄틴 대공이 가장 쉬울 것 같습니다. 황도에 살고 있으니까요. 물론 지금 납작 엎드려있어야할 때인 건 맞지만, 제 목을 졸라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느니 행동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작센이나 홀슈타인-고토로프 쪽도 물론 배제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제가 직접 본 위튼 가문 사람들은."
들으라고 정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메모나 다름 없는 말이었다. 세시안은 말을 끊으며 발상의 바깥을 부드럽게 지적했다.
"꼭 사람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
사람은 지극히 쉽게 죽는다. 세시안의 동생 셋이 죽었듯. 병, 선천적인 수명, 사고. 암살 이외에도 사람이 죽는 방법은 많다. 아롈은 입술을 꾹 물었다.
"미하일은 두 살입니다."
'두 살이었습니다'가 아니다.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두 살이니까요."
로렌 황실과 대공가에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다섯 살 생일을 넘겨야 세례를 준다. 그만큼 많이 죽기 때문이었다. 당장 세시안의 형제자매 중 넷이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지 않았나.
"물론, 암살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는 해야겠지요. 하지만 정말 사고사나 병사일 수도 있어요."
아롈이 삐걱삐걱 고개를 들었다. 넋이 나간 듯 얼굴이 파리했다. 세시안은 탁자를 쥔 아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렐르, 결과를 정해놓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걸 알잖아요?"
"압니다."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아니, 모르겠습니다."
루이 페르디낭이 죽었을 때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 동생이 하루 차이로 줄줄이 죽었을 때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역병에 걸려 죽었다 하여 마지막 입맞춤도 하지 못했다. 정의관 세르의 방에 앉아서, 크기가 다른 세 개의 관이 줄줄이 나가는 모습만을 지켜봐야 했다. 다시는 쌍둥이들이 달려와 재잘대지 않을 것이다. 어린 남동생을 훈계하며 형 노릇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다 아문 지 오래인 심장의 흉터가 희미하게 아려왔다.
크리스틴은 침묵 수도원에, 오거스틴은 부르고뉴에, 미네트와 리젤로트는 수녀원에, 앙투안은 오를레앙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병아리가 태어난 닭장처럼 복작복작하던 이블린에는 세시안 홀로 남았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이 가장 원하던 일을 아롈에게 했다.
즉, 끌어안았다.
소녀는 움찔하더니 팔을 뻗어 등에 손을 얹었다. 파란 튜닉을 통해 냉기가 전해졌다. 어지러웠다. 마치 가면을 쓰고 눈물흘린 일이 그저께쯤 있었던 일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한 시간 넘게 루이 오귀스트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온 참이었다.
-너라면 어찌할 것 같으냐.
-저라면.
-사랑하는 며느리에게 묻는 것이다.
방금 동생의 부고를 들은 누나를 대하는 일로는 지나치게 가혹했으나, 그만큼 가혹해져야 할 만 한 소식이기도 했다. 협력을 맺은 여제가 실각하면 로렌으로서도, 세시안으로서도 곤란했다. 이미 저울질이 끝나 성황청에게 참견이 지나치다는 신호까지 보내놓은 시점이 아닌가. 식민지에 퍼진 전염병 이후 몇 년 만에 맞는 호황이었다.
세시안으로서도 처가가 몰락하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설령 옐레나 여제가 아롈을 전혀 아끼지 않고 시집보낸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후계자가 될 남동생이 살아있는 것과 죽어 다른 이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저라면 아나스타샤 콘스탄티노브나 키예나를 고르겠습니다.
아롈은 눈물 한 방울 흘릴 여유도 없이 자리에 앉아 목이 쉬도록 이야기를 했다.
-키옌과 키예나의 성을 이은 이들 중 승계권을 가진 이는 이제 콘스탄틴 대공 부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이든 콘스탄틴 대공과 안나는 어떻게든 치울 수 있을 테니, 아나스타샤가 유력합니다.
-네가 데려온 공주는?
-조피가 아나스타샤와 나이가 비슷하기는 합니다만, 위튼입니다. 옐리자베타 고모님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키예나 성을 물려주지 못했고, 키옌, 키예나의 만세일계는 키예프만을 다스리던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끊어진 적 없습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키예프 쪽처럼 가문의 결합을 상징하는 이름이라도 남았다면 모르겠지만, 작센 통합의 상징성 때문에 칼 1세 아우구스트는 위튼에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다 죽인 다음 힘을 못 쓰는 쪽 먼 친척을 데려오는 게 나을 수도 있지.
-홀슈타인-고토로프-키예프는 너무 예전에 갈라진 방계입니다. 제 십촌이면 통혼도 가능한 관계입니다. 황도에 한 번도 오지 않은 이를 이제 와서 후계자로 고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겁니다. 정교회를 믿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정통성 있다면 오히려 굴리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레프친의 반란 때 이반 3세 폐하께서는 콘스탄틴 대공을 체사레비치로 삼아야 한다는 공작 가문 세 개와 공가 두 개를 폐문하셨습니다. 이후 콘스탄틴 대공 본인 이외에는 감히 그런 말을 눈빛으로라도 나타낸 무엄한 자들이 없었습니다. 얄팍한 충성이 새로 생긴다면 모르겠습니다만.
반 시간 정도 아는 것을 토해낸 아롈은 쓰러지기 직전에 간신히 허락을 받고 정의관을 빠져나갈 것을 허락 받았다. 그리고는 자비관에 돌아와 신나게 구역질을 하고, 지금이었다.
"세시안."
"아렐르."
"저를 사랑하나요?"
"내일 해가 뜰까요?"
아롈은 웃는 대신 다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도 말입니까?"
"아렐르가 살아숨쉬는 한."
"약속하나요?"
"네."
"그럼 들어주세요."
"이야기 해줄래요?"
아롈은 말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세시안은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사제처럼 가만히 연인의 금발을 쓸어내렸다. 가슴에서 하고 싶은 말이 부풀어올라 터져나오기를. 아니나 다를까, 꽃잎 같은 입술이 열렸다.
"미하일이 어차피 이렇게 일찍 죽을 거였다면......"
목소리가 급격하게 젖어들었다. 지나가던 천사가 들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왜."
등을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아렐르."
그 이름이 물로 가득 찬 유리잔의 마지막 물방울이었다. 말이 넘쳐흘렀다.
"고작 이 년짜리 짧은 생일거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주지, 아니면 조금만 더 일찍, 그랬더라면, 그랬으면 어머니는 나를.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서."
아니, 유리잔이 아닌 폭포수였다.
"그 아이의 지금 얼굴도 모르는데, 한 번 안아보지도 못했는데. 그 아이도 나나 사샤와 완전히 같은 피를 나눈 키옌인데. 그런 아이가 죽었다는데 왜 죽었을까, 슬프다, 안 됐다, 평온히 쉬기를, 그런 당연한 생각들보다 제일 먼저, 스쳐버려서, 한 번 생각나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정돈되지 않은 잡탕 같은 말들이 토사물처럼 널브러졌다.
옛날 독한 술을 몇 잔이나 들이키면서도 고집스럽게 침묵하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특권은 달콤했다.
"그럼 코시카 황위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얘진 머리에 그 생각만 들어서. 기절하면 안 된다, 기절하면 폐하께서 얼마나 한심하게 보실까, 지금 약하게 보이면 지는 거다, 하다못해 그런 생각보다도 늦게. 동생이 사흘 전에 죽었다는데, 오늘도 아니고 사흘 전에,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사후 삼일 째인데 성호를 긋고 술을 따르고 기도를 올려 па́мять(추도)하지도 못했는데. 아직 영혼이 주님 곁으로 올라가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그 애가 보면 슬퍼할 텐데."
"아렐르. 저를 봐요."
아롈이 눈물 흥건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계속 말해줘요. 하지만 그 전에,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렐르를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