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붉은 관(冠), 나부끼는 죽음 (1)
표트르 대제는 옛 노브고르드 땅에 황도를 세웠다.
역사를 연 황제는 제국의 심장에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다. '대륙에 단 하나 뿐인데 왜 이름 붙여야 하는가?'라는 오만함이 낳은 무명(無名)의 도시는 마찬가지의 오만함으로 '원해(園海)'라 이름 붙은 바다를 흰 초승달처럼 감싸 안았다. 초승달의 허리에는 망토처럼 야트막한 언덕이 솟아있었는데, 언덕의 중앙, 가장 드높은 곳에서 황궁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
해가 뜨면 희게 칠한 벽과 금빛 창문이 새벽 바다의 황홀함을 거꾸로 되돌렸고, 달과 별이 뜨면 상록수 사이의 유리 등불이 작은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황도 주민들은 길을 걸을 때마다 찬란한 관(冠) 같은 이 건물을 삼가 우러러보곤 했다.
미하일 파블로비치 키옌 대공이 세례를 받고 체사레비치로 봉해진 이후 황궁 지붕에는 순서대로 코시카 황제기, 국기, 그리고 체사레비치의 문장기, 이 세 개의 깃발이 항시 게양되어 있었다. 이는 황궁에 코시카 황제와 후계자인 체사레비치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체사레브나였던 아롈의 깃발이 내려져 두 개 뿐인 깃발에 익숙해졌던 탓에, 세 개의 기가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도 잠시였다. 황도 주민들은 금세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모양새에 적응했다.
그로부터 몇 달 되지도 않은 여름날 새벽, 대포 소리가 고요를 깨부쉈다.
한 발, 두 발, 세 발. 그리고 열여덟 발.
총 열아홉 발.
우렁찬 대포 소리가 울릴 때마다 다디단 아침잠을 설친 주인의 불벼락을 맞은 하인들이 하나 둘 정원으로 뛰쳐나왔고, 장을 보러 나온 아낙들은 휘둥그레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도 주민들은 눈을 비비며 적군이 쳐들어왔는지 눈부시게 동이 트는 바다를 한 번 보고는, 포성이 황궁이 있는 서쪽에서 나는 것을 확인했다. 설마 또 정변이 일어난 걸까? 거리로 몰려나온 이들은 언덕을 올려다 본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탄식을 흘렸다.
화약 연기가 슬픔처럼 아스라이 흩어지는 궁 지붕에 나부끼는 가장 오른쪽 깃발. 체사레비치의 문장기가 깃대 중간에 걸려있었다. 길다란 검은 리본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 의미는 분명했다.
조기(弔旗)였다.
보고를 받은 귀족들은 부랴부랴 상복을 찾아 헤맸다. 황궁으로 향하는 넓은 비탈길이 마차로 가득 메워진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콘스탄틴 대공저의 마차는 대문을 나설 줄 모르고 못박혀 있었다.
저택의 주인,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키옌 대공은 검은 옷을 입은 채로 초조하게 응접실 안을 오갔다.
딱, 딱, 딱.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치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대공 전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응접실 그늘진 구석에는 역시 상복을 걸친 남자가 앉아있었다. 악무는 게 버릇이 되어 튀어나온 턱,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작은 눈, 턱을 온통 덥수룩하게 덮은 수염. 노란 견장에는 소장(генералъ-майоръ)임을 나타내는 금빛 별 두 개가 올라앉아있었다.
"나, 나는."
대공은 식은땀을 흘리며 탁탁 발뒤꿈치로 바닥을 두드렸다.
"모두가 전하의 결단만을 기다리며 결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생은 짧고 승리는 영원합니다(короткая жизнь, вечная победа, 코시카 육군의 모토)'. 키옌이 코시카를 돌려받을 기회임을 부디 알아주십시오."
콘스탄틴 대공은 분명 욕심 많은 남자였다. 미하일 대공의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숙부인 이반 3세에게 황위를 빼앗긴 것을 항상 억울하게 느끼도록 교육받았다. 레프친의 난에서 돌고루코프를 포함한 수 개의 가문이 그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전하 칭호를 박탈당하거나 폐문당했음에도 탐욕은 가슴 속에 희미한 불꽃처럼 살아있었다.
그러나 욕심이 항상 행동으로 치환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레프친의 난 때 콘스탄틴 대공은 고작 열 살이라는 이유로 반역죄의 칼날을 피해갔다. 나이든 숙부가 형을 죽였다는 더러운 소문에 굳이 '무결해 보이는' 조카의 피를 얹고 싶지 않아했으므로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머리가 큰 다음 직접 반란을 꾀하거나 손으로 황위를 움켜쥐려고 해도 목이 성하게 몸뚱이에 달려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콘스탄틴이 성장하자 숙부는 혈통은 그럭저럭이지만 실권은 별볼일 없는 가문의 여자를 고르고 골라서 그에게 붙여주었다. 아들은 없어도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딸이 태어난 이후 아무리 애써도 아들이 생기지 않자 암묵적으로 정부를 만들었고, 코시카 여제의 손자와 손자며느리라는 지위를 안락하게 누렸다.
"꼭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은 체사레비치의 추모식이야."
코시카 육군 소장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샤마노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 어느 검이나 총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손수 손잡이를 들어주시지 않는데 어찌 신하들이 움직이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십시오."
콘스탄틴 대공은 '그럼 검이 주인을 선택하는 법은 있단 말인가?'하고 빈정거리는 대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반 파블로비치가 죽고,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도망가 황적에서 제명되었을 때는 잠시 기대가 들기도 했다. 아들을 낳으면 어린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결혼시켜 황통을 이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아내와 밤에 노력한 것이 그의 전부였다. 어린 아나스타샤가 태어나고, 기대는 거품처럼 꺼져들었다.
파블 1세, 그 이교도의 남신처럼 황홀하고 어리석은 선황제가 사생아 따위에게 황위를 물리겠답시고 안나 콘스탄티노브나와의 혼담을 내밀었을 때에도 대공은 지금처럼 똑같이 우유부단하게 망설였다. 만일 그 때 안나와 표트르 파블로비치 유리예프스키를 혼인시켰더라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반 3세는 조카를 충성스러운 개처럼 길들였다. 고깃덩어리에 침을 흘리며 꼬리를 흔들 수는 있어도 감히 주인을 물지는 못하도록. 항상 조금만 운이 좋았더라면 자신이 코시카 황제였을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으나, 진심으로 뭔가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마다, 포상처럼 생명이 주어졌다.
"내가 달랑 자네 말만 믿고 어떻게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냉정한 것'이다. 콘스탄틴 대공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고 싶은 욕망의 발로였지만, 내뱉어보니 또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는 자신감에 차서 허리를 당당하게 폈다. 대공은 전형적인 코시카 남성의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둥글게 말린 어깨를 펴자 실팍한 체구가 큰 키와 어울려 위엄있어 보였다.
"비밀결사네 뭐네 해도 내가 자네 말고는 얼굴조차 본 적이 없잖나. 자네들은 가문의 이름을 꽁꽁 숨기고 어둠에 숨어있으면서 헌데 반란의 정면에는 내 이름을 걸라고?"
"반란이 아닌 정당한 권리의 행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샤마노프 장군은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말을 인용했다.
"또한 결전의 날에 피를 흘리는 것은 저희들입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저희가 닦아놓은 피를 밟고 걸어오셔서 옥좌에 앉기만 하시면 됩니다. 콘스탄틴 대공 전하 만세라고 외치며 돌격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대공은 장군의 말에 스며든 희미한 조소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 자네들이 누군지 얼굴은커녕 명단조차 보지 않고 결정하란 말인가?"
"전하, 근위연대 부대장 코롤프 중령의 사망을 알고 계십니까?"
코롤프 가문의 소산(燒散)은 피아스트 정벌, 할름스타드 포로 학살에 더불어 옐레나 여제의 세 가지 폭정 중 하나였다. 대공은 식은땀을 흘리며 반박했다.
"총검을 뽑기도 전에 숙청당하여 가족의 무고한 피까지 흘리는 것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나를 위해 죽겠다고 하지 않았나."
"전하를 위해 충성하겠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콘스탄틴 2세로서 즉위하신 뒤에 저희에게 죽으라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결국, 나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저 신중하겠다는 것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신 뒤 불경을 치죄하시면 됩니다."
그럴 리가 있나. 공신으로 지정하여 쓰다듬어 아끼면 또 모를까. 반정으로 황위에 오른 뒤에 어찌 군대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대공의 지팡이가 다시금 바닥을 딱딱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샤마노프 장군이 내세운 명분은 명확했다.
이반 3세의 장손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이 훙서한 지금, 옐레나 여제는 옥좌에 앉아있을 명분이 없다. 따라서 현재 유일하게 키옌 성을 달고 있는 대공인 콘스탄틴이 황위에 오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왜 지금?
체사레비치의 조기가 게양된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장군은 명분과 이득만을 이야기했을 뿐 '방법'에 대해서는 어느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허락만 해주시면 저희들이 다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수식어만 바꾸어 반복할 뿐이었다. 물론 그들의 신중함이나 두려움에 대해서도 이해하려 하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 달콤한 말을 덥석 물었다가 덫이 그의 발목을 끊어놓지 않으려고 어찌 장담한단 말인가?
-딱, 딱, 딱.
콘스탄틴 대공은 온실 속의 장미처럼 곱게 자란 남자였으나, 본능적으로 결론내렸다. 가만히 서있으면 된다고. 굳이 움직여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고.
어차피 그는 옐레나 여제보다 어렸다. 기다리면 기회는 또 올 테고, 만일 오지 않는다 하면 그 때 가서 만들어도 늦지 않았다. 굳이 지금 이 수상쩍은 사내의 손을 잡지 않아도 그는 코시카 대공이었다.
"장군. 체사레비치께서는 고작 오늘 새벽에 훙서하셨네."
결론을 내리자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는 짐짓 위엄 있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그대의 말대로 나는 이제 코시카에 하나 남은 대공이야. 안나 여제 폐하의 장손이자 황실의 어른으로서 아직 여제 폐하께서 슬픔을 채 달래시기도 전에 응당 당연한 권리에 달려들어 다투고 싶진 않네."
대공은 과연 '황실의 어른'이라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감동받고 말았다.
"허면 전하께서는 세월이 흐르는 것을 느긋이 두고보며 로렌 여자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 하십니까?"
그 감동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샤마노프가 낮게 윽박질렀다.
"설령 여제가 전하를 체사레비치로 삼는다한들, 여제가 죽을 때까지는 긴 세월이 걸릴 터입니다. 그 때까지 키옌의 자손으로서 그저 굴복하여 숨죽이고 기다리기만 하시겠다는 겁니까."
콘스탄틴 대공은 샤마노프가 옐레나 여대공의 충복이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이의 모습을 그에게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그 직감은 '황족'으로서의 그의 자존심을 자극하여 격노하게 만들었다.
-탁!
그는 지팡이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나가게!"
"전하."
"내 대천사 훈장에 걸고, 그대의 충정을 생각하여 이 일은 어디에도 발설치 않겠네. 그러니 나가서 체사레비치의 영전에 꽃을 바치고 고개숙이게. 그게 군인으로서 자네가 할 일이야."
대공의 푸른 눈이 한동안 장군을 쏘아보았다.
샤마노프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는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가문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두 남자는 다급히 대공저를 나섰다. 마차 안에서 안나 콘스탄티노브나의 눈이 데구르르, 움직임을 따라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