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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12)


 흔히 신대륙이라 불리는 컴부스 대륙, 아스투리아스 령과 로렌 령 사이에는 멸망한 옛 왕국의 수도가 있었다.

 계단 모양으로 정성스레 깎아둔 산 아래에는 지도에도 이름 없는 마을이 자리했다. 가구 수는 고작 서른 남짓, 마을 사람들은 유적에 오는 관광객을 안내하거나, 주변 농장에 나가 일손을 도와 삶을 꾸려나갔다. 가끔 아이들이 소란을 피울 때 이외에는 흘러가는 연기처럼 고요하던 마을에,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탕-!

 지빠귀들이 놀라서 푸드득 날아올랐다. 

 "지, 진정하십시오, 나으리."

 유적 아래 이름없는 마을의 촌장이 덜덜 떨며 허리를 숙였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건가? 꼬맹이는 대체 어디 있나? 엉?"  

 파란 군복을 입은 남자가 긴 총을 흔들며 위협했다. 어설픈 동부 레온 어에 남부 갈리아 억양이 섞여있었다. 

 "어이구, 나으리. 압니다. 알아요. 지금 찾으러 갔습니다. 헤헤."

 촌장의 눈이 정신없이 굴러다녔다.

 국경 사이에 걸쳐 있는 이 마을은 아스투리아스 령도, 로렌 령도 아니라 애매하게 버려져 있었다. 세금도 잘 내지 않았다. 십 년에 한 번 쯤 측량사가 나타나면 뇌물 몇 푼과 술을 쥐어주어 상대편 나라라고 보고하도록 했다. 그런데 군인이라니. 총 든 군인이 열댓 명이나 오다니! 그것도 꼬맹이 하나를 찾으러!

 노인은 군복을 보고 어느 나라 군인들인지 판단할 능력조차 없었다. 힘없는 노인을 겁박하기 위해 굳이 부싯돌에 불까지 붙여가며 총을 쏘는 졸렬한 인사 앞에서도 벌벌 떨었다. 촌장은 군인에게 마을 사람을 넘긴다는 알량한 죄책감조차 없이 당장에 거한 둘을 보내 '지안'을 찾아오라 일렀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 마을에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꼬맹이라곤 지안 하나 뿐이었다. 

 "아, 영감. 대낮부터 이게 뭔 소리요? 힉!"

 얼마 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돕다가 손가락을 다쳐 쉬고 있던 루카가 슬렁슬렁 걸어오다가 군인들을 보자마자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대뜸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손을 하늘 위로 올리고 고개를 처박았다.

 촌장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자, 자네. 지안 못 봤나?"

 "산, 산, 사사사사산에 올라갔죠."

 "그 새낀 대체 왜 거길 처올라가고 지랄이야!"

 "매일 올라가잖습니까. 왜, 그 가출했다가 잡혀온 ​이​후​부​터​터​터​터​터​.​"​

 "닥치고 있지 못 해!"

 "넵!"

 군인이 윽박지르자 노인과 장정은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세 명쯤 촌장 옆에 줄을 서게 됐을 때쯤, 붉은기 도는 갈색머리의 여인이 꽁무니에 작은 여자아이 하나를 달고 걸어왔다. 

 "로베르토, 우리 지안을 찾는다고. 어?"

 군인들이 여인을 향해서 총을 겨누자 그녀는 어깨를 잠시 움츠렸다가 다시 폈다. 

 "그, 저는 지안의 어미 되는 사람입니다만. 무슨 일로 제 아들을 찾으시는지."

 나이는 스물후반쯤일까. 이런 벽지에 사는 시골여자치고는 둥근 얼굴이 곱상했다. 몇몇 군인들이 음탕한 손놀림을 해보이며 킬킬거렸다. 가장 계급이 높은 군인이 앞으로 나섰다. 

 "네년이 악마와 붙어먹어 낳은 새끼가 대체 그 분을 어떻게 모셨길래 이 사달이 나, 엉?"

 여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그 분이라뇨?" 

 "페리고 남작님의 둘째 아드님 말이다! 시골 촌것이 남작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알기나 해? 어떻게 모셨길래 실종이 되시냔 말이야!"

 "그게 왜 제 아들 탓, 악!"

 "엄마!"

 여인의 눈 앞에 별이 튀었다. 

 "닥쳐! 쨍알대기는!"

 그녀는 쓰러진 채 바르르 떨었다. 머리가 뒤흔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군인이 지껄이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남작님께서 진노하셔서 여기까지 뛰쳐나오셨단 말이다. 옛 왕실 유적에 함정이 많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냐! 네년의 새끼가 남작 아드님을 잘 모시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난 것 아니냐고? 엉?"

 분대장은 억울하게 얼차려를 받은 울분을 여인에게 풀었다. 가냘픈 몸이 군화로 마구 짓밟혔다. 

 "악. 아악!"

 "어떻게 책임을 질 테야? 어? 천한 목숨 한 바구니로도 배상이 안 될 텐데 어쩔 거냐고!"

 기실 군인도 길잡이를 맡은 소년의 책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옛 왕궁의 유적에 갔다가 실종됐다면 길잡이인 소년도 같이 죽었어야 옳지 않겠는가. 신에게 종사한다고 주교 자리를 받았으면서도 본가의 지원을 받아 속세의 즐거움을 쫓던 남작가의 아들이 실종될 만한 이유는 차고 넘쳤다. 길바닥에서 강도를 만났을 수도 있고, 원한을 산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고, 지금 어느 마을에서 창녀에게 빠져 부어라 마셔라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이건 그저 세습귀족의 화풀이일 뿐이다. 꼬맹이를 잡아다 처참하게 죽이고 나서 아들이 돌아온다 해도 남작은 허허, 하고 담배 정도나 피우고 말 것이다. 안다. 그러나 귀족은커녕 중류층 딱지도 붙이지 못한 군인 나부랭이는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부당한 폭력이 여인의 머리에 핏물로 흘러내렸다. 

 "윽. 흐윽."

 "엄마!"

 저 멀리에서 남자아이가 달려왔다. 한눈에도 키가 훤칠하고 팔다리가 길었다. 여인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지, 지, 지안. 도망쳐."

 "오빠!"

 "엄마한테서 떨어져."

 새파란 눈에 귀화(鬼火)가 일렁거렸다. 






[경애하는 해사 ​국​무​경​(​S​e​c​r​é​t​a​i​r​e​ d'État de la ​M​a​r​i​n​e​)​이​시​자​ 칼레 대공가의 적자이신 콜로뉴 공작 전하께.


 현재 본국령 아카디 주(州)에서 마법사가 목격되어 추격 중에 있습니다.

 석 달 전 본국령 아카디 주와 아스투리아스 령 ​오​레​혼​(​O​r​e​j​ó​n​)​ 주 경계에서 페리고 남작의 차자가 실종되었습니다.

 페리고 남작은 얼마 전 아카디 주의 누벨-리옹으로 이주하여 세를 불리고 있는 세도가로, 근방 유적에 관광을 떠난 차자가 귀환하지 않는다며 영사관에 수색을 요청했습니다. 누벨-로렌 영사의 명에 따라 28일 전 본 연대 3대대 1중대 1소대 3분대를 파견했습니다만, 생환자 없이 15인 전원 순직했습니다. 

 1소대, 결원 19인 현 8인 전원을 재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마을에 살고 있던 지오반니라는 이름의 소년이 마법사로 각성하여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군인들을 학살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소년의 국적은 불명으로, 이름은 서부인으로 추정됩니다만 청안을 가진 것으로 보아 코시카 핏줄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소년은 3분대 전원을 살해한 직후 부모 및 여동생과 함께 도주 중입니다. 

 이에 소관은 연대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극악무도한 적을 사로잡되, 형편이 되지 않을 경우 사살할 것을 명령했음을 보고합니다. 

 가장 신실하신 황제 폐하 만세.  


-약속된 승리(La victoire promise, 로렌 육군의 모토)-
마로니에 기사단 누벨-로렌 특수파견연대장, 로베르 펠릭스 드 알-루이에]




[근방에 사특한 술법을 쓰는 악마의 자식이 등장하였다고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정화될진저. 미천한 주님의 지팡이의 소견으로는 이단심문관이 필요하지 않은가 사료됩니다. 

아, 과연 성하의 옥음이 옳았도다. 주님께서 밝히신 뜻은 얼마나 찬란하고도 높은가?

주님, 주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 고해 발설의 죄를 범하는 이 범속한 자를 부디 용서하소서. 

-아카디 영사관 주재 신부 아르망]




[세르께 무한한 영광 있으시기를.

 보고받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누벨-리옹에 마법사가 등장하였습니다. 사실 2년 전 생 뤼스킨에 주님께서 생존을 허락하지 않으신 흉악한 짐승이 영해에 나타나면서부터 예고된 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군 보고서에 올라갔을 것으로 추측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략)

 따라서 현재 국경을 봉쇄한 상태입니다. 타국에 이야기가 흐르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습니다만 유의미하다고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통제가 길어지면 그 자체만으로도 정보가 되는 것을 현명하신 분께서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로 아카디 영사로서 선 사살 후 보고를 주장하였습니다만, 특수파견연대장을 설득하기에 역량이 역부족하였음을 망극하게 생각합니다. 연대장은 무조건 생포 및 본국 송환과 정식 재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재 신부는 이단심문관을 파견하길 강력히 주청하고 있습니다. 성황청에 보내는 보고서는 현재로서는 적발되지 않았습니다만 주장 전에 이미 보고서를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려워보입니다. 영사관에 해당 마을 주민들을 모두 구류한 상태입니다만 이단심문관이 만일 도착할 경우에 대해 지시를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어 보고드리겠습니다. 


-한 송이 푸른 장미를 위하여-
누벨-로렌 주재 영사, 생 플로랑탱 백작, 귀욤 크레티앵 르 베르디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알았는데 비밀이 될 리가 없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로렌 육군 모토는 일단 약속된 승리로 했는데 '뿌리는 깊게, 가지는 넓게', '생은 짧고 승리는 영원하리' 등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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