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붉은 관(冠), 나부끼는 죽음 (2)
일리야 오시포비치 샤마노프는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샤마노프 백작의 차남인 그는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에게 가장 충성하던 이들 중 하나였다.
많은 이들은 옐레나 파블로브나든, 파블 이바노비치든 똑같이 고귀한 혈통을 지녔으니만큼 그들이 바칠 충성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샤마노프는 달랐다.
승리는 영원하다
강함이야말로 곧 승리이다.
샤마노프는 단순히 이반 3세의 하나 남은 손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에 아롈을 선택했다.
-전하께서 대체 왜 저기서 뛰고 계신 겁니까?
톡 치면 부러질 듯 깡마른 여자아이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하시더군.
젊었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다. 예가체프 대원수는 융통성 없고 혹독한 사람이었다. 예쁜 모조검 하나 쥐어주고 휘두르는 연습이나 시켜드리면 될 것을 뭐 저리 하나.
운동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어린 소녀가 저렇게 뛰었다가는 내일이면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공터로 나오는 걸음이 비틀거렸다.
나왔다는 자체에 순수히 놀랐으므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키가 훌쩍 커질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이 펄펄 끓는 날도 나와서 뛰다가 장군에게 한 소리 들은 다음에는 아픈 날은 쉬게 되었다.
거기까지였다면 성실하시구나, 하는 감탄으로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근위대였고, 하필 근위대라는 직위는 쓸데없이 사람을 관찰하기에 좋은 자리였다.
-거기, 샤마노프, 이리 오거라.
가늘고 높고 새된 목소리였다. 정원을 순찰하던 샤마노프는 여대공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아롈 여대공 전하.
-검을 가지고 있느냐?
-예, 전하.
여대공의 흰 치마에 털복숭이 고양이가 누워 피를 흘리며 떨고 있었다. 유리예프스카야 공비의 고양이는 아니었다.
갈색 털을 보아하니 숲에서 숨어든 듯했다.
코시카는 국명 때문에(코시카는 고양이라는 뜻) 고양이를 함부로 죽이는 일이 적었으나 혹독한 날씨는 이 작은 털짐승들의 목숨을 쉽게도 앗아갔다.
-어미가 버리고 가서 물린 모양이야.
목에는 사냥개의 것으로 추정되는 짐승의 잇자국이 선명했고, 깊은 골 사이에 파리 구더기가 득시글댔다. 몇 마리는 치마폭에 떨어지기까지 했는데, 여대공은 징그럽다는 듯 머뭇거릴 뿐, 고양이를 치마에서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고양이의 무늬 있는 이마를 손끝으로 살짝 쓸어내렸다. 가쁜 숨이 가냘팠다.
-그래서 검은?
-맡겨주시면 소신이 처리 하겠습니다, 전하.
언뜻 유령처럼 덧없고 멍해보이는 눈에 단번에 날이 섰다.
-샤마노프. 내 명령이 무엇이었지?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여대공은 목검으로 사람을 때리는 걸 힘들어했다. 정확한 동작, 끈기, 안목을 가지고 있음에도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항상 손이 무뎌졌다. 공무가 많다는 것을 핑계 삼았지만 예가체프 공이 검술 수업을 그만 둔 이유는 여대공에게 살심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더 고집을 부리는 대신, 마치 군주의 꾸짖음을 들은 양 제깍 품에서 단도를 꺼내어 받들어 올렸다.
단도라고 한들 열 살 소녀가 들기에는 무겁다.
소녀는 창백한 입술을 악물더니 눈을 감지도 않고 짐승의 숨을 끊어주었다. 상대를 절명시키는 정확한 손놀림은 눈에 번쩍 뜨일 만큼 훌륭했지만 일을 끝내고 확인하는 손은 갈 곳 없이 허공을 헤매며 떨렸다. 손수건에 짐승을 감싸고는 땅을 파 시체를 묻어준 여대공은 치마를 털어내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
겨우 가엾은 짐승 한 마리의 사정을 보아준 것 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결단' 운운할 것도 못 되는 사소한 일.
그러나 과연 이 황성에서 몇 명이나 그 사소한 일을 직접 해줄 것인가? 샤마노프는 감히, 모셔야 할 여러 이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았다. 단 한 명도 뽑아낼 수 없었다. 여러 복잡한 여대공의 면 중 한 편을 알아낸 듯한 감상에 젖어든 것도 잠시, 몇 년 동안 샤마노프는 황도를 떠나 전쟁터로 떠날 것을 명받았다.
피비린내 나는 세월이었다. 조국과 승리를 위해 싸웠다. 허리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얻고 가슴에 별을 달았으며, 머리를 뒤흔드는 총성을 잊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동안 당연히도 고양이를 죽여준 어린 여대공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반 3세의 부고와 동시에 이루어진 인사 이동에 황도로 귀환한 것은 무려 오 년 만의 일이었다.
인사를 올리러 참석한 자리, 금강석을 가득 박은 관을 쓰고 붉은 어깨띠를 한 소녀가 거기에 있었다.
-여대공 전하. 아니, 체사레브나.
이제 여린 다정함이라곤 어렴풋한 기운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잠시 멈칫할 만큼 대공비, 아니 옐레나 황후와 닮은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장식술처럼 얹혀 있었다. 독초 같은 악이 휘감긴 연녹색 홍채가 그를 담더니 언뜻 웃었다.
-아, 샤마노프. 오랜만이로군.
그는 아롈이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사실보다 '체사레브나'라는 그 칭호에 설렜다.
체사레브나.
코시카의 제 1계승권자.
차기 코시카 여제.
다음 그의 주인.
-귀관이 코시카에 바친 승리를 치하한다.
그 말 한 마디와 가슴에서 반짝이는 훈장이 그의 욱신거리는 통증과 불면증을 잠재워주었다. 그래서 샤마노프는 일 년 뒤 여대공의 소집에 망설임 없이 응했다.
-긴 말 하지 않겠다. 나는 코시카와 나의 가문에 저질러질 더없이 끔찍한 죄를 막고자 한다. 그래서 그대들의 목숨이 필요하다.
머뭇거리며 주판알을 튕기는 장성들 사이에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연하다는 듯 가장 먼저 무릎 꿇어 복종했다.
진 다음에도 여대공은 무너지지 않았다.
유폐된 방에서, 스스로 목을 찌르거나 독약을 마시는 대신 가냘픈 몸을 간신히 가눈 채 말했다.
-군인으로서 코시카를 지켜라, 샤마노프.
-전하. 후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나는 졌고, 패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 그러니 너희들이 키옌을 도와라.
그 말이 제발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임을 모르지 않았다. 서늘한 자존심으로 차마 내뱉지 못 한, '살아남으라'는 명령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결국 콘스탄틴 대공저를 찾아오고야 말았다.
미하일 대공이 훙서했다.
그의 주군은, 키옌을 도와달라 했다.
살라고 했다.
-내 대천사 훈장에 걸고, 그대의 충정을 생각하여 이 일은 어디에도 발설치 않겠네. 그러니 나가서 체사레비치의 영전에 꽃을 바치고 고개숙이게. 그게 군인으로서 자네가 할 일이야.
그렇게 한다면 구차한 목숨,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연장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인가? 숨쉬기가 아니라?
샤마노프의 뭉툭한 손끝이 가슴 속을 매만졌다. 차가운 금속이 달그락거렸다.
언제나 그의 삶에서 깃털처럼 높이 받든 말은 충성과 승리였다.
마차가 드디어 황궁 문 앞에 도달했다. 북적이는 인파 속, 그를 기다리고 있던 형, 샤마노프 백작이 그의 어깨를 잡아 툭툭 두드리고는 같이 홀로 향했다.
추모식이 열린 홀로 들어가 줄을 서면서, 샤마노프는 다시 한 번 가슴에 맞닿아 있는 서늘한 냉기를 상기했다.
생은 짧고,
승리는 영원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