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붉은 관(冠), 나부끼는 죽음 (3)
어린 미하일 파블로비치가 누운 관은 세 살 생일도 맞지 못한 소년에게는 너무나 컸다.
늦은 여름에 존귀한 옥체가 썩지 않도록 하는 만년설 자루와 향 짙은 꽃이 남은 자리를 가득 메웠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유리등 가득한 정원을 뛰놀 때, 소년의 뺨은 사과처럼 보기 좋게 달아오른 붉은 빛이었다. 그러나 신의 품에 안겨 조문객에게 입맞춤을 받는 지금, 매끄러운 볼은 더없이 외로운 푸른 빛이었다.
이 년 전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이 시집간 거대한 홀은 검은 옷을 차려입은 조문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코시카의 공족과 귀족들, 한 줌도 남지 않은 키옌, 키예나 성을 가진 황족들은 의전 서열 순으로 줄을 섰다. 사뿐사뿐 다가가 아이의 이마와 뺨에 입맞추고, 꽃을 내려놓고, 성서의 구절을 읊으며 성호를 그었다.
숨막힐 듯 정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어린 체사레비치를 낳은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옐레나 여제의 눈에 폭포처럼 풍성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연지를 바르지 않았음에도 선명한 산호색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검보랏빛 치마폭이 더욱 검게 젖어들었다.
더없이 법도에 맞고 아름다운 장례식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여제를 괴물이나 악마 보듯 했다.
슬픔에 젖었다는 것을 상징하여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꿀 같은 금빛, 그렁그렁한 눈물 어린 눈동자는 선명한 여름 같은 초록. 흠 하나 없는 장례식을 손수 준비하곤 참석하여 흘리는 눈물은 수정처럼 투명했다.
눈물을 훔치는 여제는 성녀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하나 남은 딸은 팔아치우고, 이제 품에 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본인의 옥좌를 보장해주던 아들의 사망을 알리는 조포가 바로 오늘 새벽 울렸는데도.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키예나 여공은 구두 앞코로 바닥을 탁탁 쳤다.
콘스탄틴 대공 부부와 안나, 아나스타샤는 현재 황도에 남아있는 이들 중 가장 지위 높은 황족이었으므로 가장 먼저 꽃을 바친 뒤 인파 사이로 빠져 아들을 잃은 여제를 위로하며 돕는 위치에 있었다.
초조함에 뱃속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아버지, 콘스탄틴 대공이 분명 아침부터 무슨 밀담을 나누었다. 하필 미하일이 죽은 오늘 아침 출발도 미루고 길게 나눌 대화가 무얼까?
안나는 그리 명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우둔하지도 않았다.
황위와 관련된 일이리라는 건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안나, 미하일이 누구 덕에 체사레비치가 되었는지, 나는 잊지 않는단다.
손톱이라도 물어 뜯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바로 옆에 있었다. 예카테리나 대공비는 아나스타샤가 혹시라도 칭얼대며 철없는 짓을 할까 온 신경을 쏟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손톱을 물어뜯는 걸 본다면 이 많은 인파 앞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손등이라도 때릴 것이다.
-미하일이 우리 곁에 더 오래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일 내 곁을 떠나야 한다면 그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은 마땅히 정해져 있겠지.
미하일은 죽었다. 관에 누워 꽃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 사이에는 진심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장벽도 같이 있지. 승계법 말이다.
코시카의 승계법은 명확하고 단단하지 않았다. 이반 3세가 체사레비치로 정했던 아들 파블 1세를 두고 이반 파블로비치에게 황위를 직접 물릴까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은 코시카가 지정 승계제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물론 몇 가지 규칙이 있기는 했다. '대공과 여대공은 키예프 공을 역임해야 한다'거나, '키옌의 피를 이은 마법사는 비마법사보다 승계 순서가 무조건 우선한다' 같은 규칙들. 그러나 황위 계승 순서가 1위인 세르로부터 줄세우기처럼 명확히 정해져 바꿀 수 없는 로렌과는 비교할 수 없이 헐거웠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안나는 콘스탄틴 대공보다 암묵적인 계승 순위가 우선할 수 없었다. 안나는 여자였고, 콘스탄틴 대공은 남성이었다. 안나는 딸이고 콘스탄틴은 아버지였다. 안나는 HSH 여공이고 콘스탄틴은 HIH 대공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반 3세가 아닌 옐레나 1세 여제로서는 암묵적인 승계순서를 무시하고 안나를 체사레브나로 지정하기 어려웠다. 이반 3세가 '같은 항렬일 경우 남성의 승계권이 여성보다 우선한다'라는 규칙을 추가하여 더욱 그랬다. 같은 항렬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한 항렬 아래라면?
모르는 이라면 속없게 조금 인내하면 되지 않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안나는 고작 스무 살이었고 콘스탄틴 대공은 곧 쉰이었다. 여제는 쉰이 넘었다. 여제가 죽고, 아버지가 살아서 보위에 오른다고 해도 키옌 남성답게 여색과 술로 소일하는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순리대로 기다리면 안나는 체사레브나가 되고, 또 안나 2세가 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대체 안나가 어리다고 해서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 두 살인 어린 체사레비치가 죽어 나자빠지고, 쉰이 넘은 어미가 눈물 흘리는 마당에.
동생이 형을 죽이고, 남편이 부인을 폐하려 하고, 어머니가 딸을 팔아치우는 이 비정한 나라에서 안나가 '여공(princess)'으로서 생을 마감하지 않으리라고 신이 아닌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그 때였다.
안나의 파란 눈에 '그 남자'가 들어왔다. 잘못 봤나? 큰 눈을 깜빡여보았다. 꼭 같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그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아침에 본 사람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저 내 편이 아니었던 시간이 이번에는 네 편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구나.
정말로? 그걸 바랄 수밖에 없는가? 가만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저택의 유령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어린 여동생이 자신만큼 키가 클 때까지 말라비틀어지는 수밖에 없다고?
안나 콘스탄티노브나는 아버지를 보는 대신 몸을 기울여 여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여제 폐하. 애통하신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러다 옥체가 상하실까 두렵습니다."
여제의 갸름한 턱이 갸웃 기울어지더니 진한 녹색 눈이 안나를 향했다.
"이러다 쓰러지시겠습니다. 잠시라도 내실에서 쉬시지요.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맺혀있던 눈물이 무슨 말이냐는 듯 한 방울 흘러내렸다.
예카테리나 대공비가 미간을 찡그렸다가, 이내 사람 좋다는 듯한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조금 쉬시지요. 어차피 어지간한 이들은 벌써 꽃을 올렸고, 타국의 손님이 오려면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체력을 비축해두셔야지요."
여제는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톡톡 두드리더니 안나가 내민 팔 위에 가냘픈 손을 얹었다.
"그래. 부축해주려무나."
"저도 같이!"
"얘, 무슨 말이니. 폐하의 마음 번잡하신데. 언니가 하게 두려무나."
예카테리나가 황급히 둘째 딸인 아나스타샤를 잡아 끌었다. 대공비는 아마도, 안나가 여제에게 아양을 떨어 점수를 따려 한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완전히 틀린 추측은 아니었다. 여제를 위해 뭔가를 하려는 건 맞으니까.
여제는 비틀비틀 홀을 나가더니, 인적이 드문 계단을 오르면서 점차 미끄러지듯 힘있게 걸었다. 부축하는 손에 실린 체중이 점점 덜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눈물 흘렸으면서도 조금도 지치지 않은 것이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시녀들과 호위가 긴 줄을 이루어 뒤따르는 가운데, 안나는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심장과 함께 아랫배까지 두근거리며 긴장했다.
침실에 도착한 여제는 따스한 물을 한 잔 마시고는 손을 내저어 시녀들을 물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찬 손과 달리 온기 어린 말투였다. 안나는 무릎을 꿇었다.
"이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느냐. 먼저 일어나렴."
안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내밀어진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제가 받는 대우가 친딸인 옐레나 여대공이 받았던 것보다 훨씬 다정함을 모르지 않았다. 여제는 발갛게 부은 눈매에 잔주름을 잡고 온화한 웃음을 띤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폐하."
등에 사신이 서있는 것처럼 두려웠다. 여대공이 받을 수 있는 성 소피야 훈장의 별을 가지려면, 정말 이 수밖에 없나? 아버지라는 장애물을 치우려면.
지금이라면 돌이킬 수 있을 터였다. 다소 천치 취급을 받더라도 얼마나 슬프시냐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울고 슬퍼한다면.
그러나, 안나가 그럴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열다섯의 옐레나 파블로브나를 배신하고 여제의 앞에 무릎 꿇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 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사람을 하나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