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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3. 붉은 관(冠), 나부끼는 죽음 (5)


 로렌의 루이 오귀스트는 자비관 삼 층에 있는 제 서재에 앉아 있다가 문득 선잠이 들었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 꿈속으로 퐁당 빠져든 그의 눈앞에서 마르그리트 안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젊었다. 비록 그 때도 미인이라 할 만큼은 아니었으나 지금과는 비할 데 없이 싱그러웠다. 

 마르그리트 안은 벌써 이 년 가까이 남편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루이 샤를이 죽은 뒤부터 칩거하기 시작한 마르그리트 안은 주로 남편을 꿈에서만 만나려 했다. 
 그래도 그렇지, 비밀 문서를 보고 있었는데 때도 가리지 않고 갑자기 꿈으로 끌어들이다니. 

 게다가 이런 식으로 다른 이를 꿈속으로 초대하고 나면 마르그리트 안은 당분간 잠에 들 수 없다. 잠을 못 자면 꿈을 꿀 수 없고, 꿈을 꿀 수 없으면 다른 이를 감시할 수 없다.

 이 중요한 시기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루이 오귀스트는 아내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 역시 젊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서글서글한 호남(好男)이 되어 있었다. 아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레트. 이렇게 나를 불러주고. 내가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

 목소리는 꿀에 푹 절인 자두 같았다. 화난 기색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달았다.그도 그럴 법했다. 최근에 황후가 물어다 준 정보는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정보였으므로. 코시카에서 소식이 올 때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열흘 가량. 공식 문서 작성 기간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길다. 코시카의 ​세​르​(​체​사​레​비​치​)​,​ 미하일 파블로비치의 사망을 가져온 황후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결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응당 그의 가장 가치 있는 보물로서 대접받을 가치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블린의 모든 사람들은 황제가 황후를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소원이라면 대체로 거의 무엇이든지 들어주었으므로. 심지어 황후가 북쪽 여대공 출신인 마담 라 세르를 침실 앞에서 이유 없이 무릎 꿇렸을 때조차, 그녀는 '대외적으로는' 어떠한 처벌이나 제재도 받지 않았다. 

 큰 손이 아프지 않게 뺨을 꼬집자, 마르그리트는 뺨을 붉혔다. 

 "그게요, 요즘 당신 꿈을 많이 못 꿨잖아요? 그래서 먼저 찾아왔지요! 놀랐죠?"

 놀라긴 했다. 

 며느리가 작성하여 아들이 암호로 번역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으므로. 하필 펜을 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잠든 그의 팔이 잉크병을 쳐서 엎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명령을 두 번 하는 일은 몹시 성가신데다 바쁜 아들의 노동력을 낭비하는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아내가 기계가 아닌 게 안타까웠다. 회중시계처럼 톱니바퀴로 만들어졌더라면, 태엽이나 감고 기름칠이나 해주면 오작동 한 번 없이 째깍째깍 제 소임을 다 하였을 것을. 시간을 보고 싶을 때만 열어보면 되는 시계와 달리, 살아있는 여자는 그가 원하지 않을 때도 입맞춰주길 원하며 꿈을 타고 찾아오곤 했다. 

 아니, 기계면 아들을 못 낳으니 지금이 나은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루이 오귀스트는 아내의 허리를 안아들어 정열적으로 입맞춤을 퍼붓는 것으로 사랑에 빠진 남쪽 남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 새라 개암색 눈에는 애정을 가득 담아 보였으나, 마르그리트는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주변 풍경이 갑자기 꽃 핀 정원으로 변하고, 분홍빛 꽃잎이 흩날려 머리카락이며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는 간신히 실소를 참았다. 예순이 넘은 나이인데도, 마르그리트 안의 정신세계는 염정 소설을 즐겨 읽는 소녀와 별 반 차이없이 돌아갔다. 

 첫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부쩍 성숙해진 태를 내는 막내딸 리젤로트만도 못 한 정신연령.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황제는 단 한 번도, 그녀가 옥좌에 앉아 성숙한 책임감을 보여주며 이블린에서 가장 신분 높은 여성으로서 군림하길 바란 적이 없었다. 손가락 발가락이 열 개씩 달린 멀쩡한 아들을 낳은 순간 마르그리트 안은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그저 마르그리트 안은 지금의 그녀로 있으면 충분했다. 

 철없고, 미성숙하고, 질투심 강하고, 예전 일을 못 잊고, 지식이 없어도 괜찮았다. 

 마르그리트 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그레트."

 그는 그 말을 뱉으면서도 조금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여자 중에서 마르그리트 안이 가장 소중한 것이 그의 순수한 진심이었으므로. 비록 그 옛날 블루아 성으로 달려가던 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의 색채가 조금은 다르다 해도, 우선 순위는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가지 않아서 무서워."

 마르그리트는 활짝 웃으며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다. 

 루이 오귀스트는 꿈 속에서 아내의 옷을 벗기며 당분간 눈과 귀가 막힌 사이 그가 지시해야 할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블린의 초가을 장마는 실내 사교의 장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대회의가 끝나고 삼 주쯤 지나면 어김없이 빗방울이 이블린의 지붕을 뒤덮었고, 장미 정원을 거닐며 시를 읊던 신사숙녀들은 응접실로 숨어들었다. 그 무렵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단연 절제의 홀이었다. 짙은 고동색의 피아노포르테가 반드르르한 건반을 뽐내어 음악회를 열기에 제격이었다. 

 자연히 경쟁도 치열했으나, 황제와 황후의 장녀로서 마담 르와이얄의 칭호를 받은 크리스틴 엘리자베트에게 경쟁이란 별세상 이야기였다.

 "아를랭 공작부인, 자리를 선뜻 양보해주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샤를루아 공자 도미니크의 아내되는 여인은 겸손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마담 르와이얄. 오히려 마담의 초대를 받아 귀를 호강하는 것이야 말로 분수에 넘치는 영광이에요."

 요즘 위세를 조금씩 펼치는 보르디 대공가였으나 그 위세는 황가라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달에 불과한 것. 차차기 보르디 대공비라는 지위는 이블린에서 세 번째로 고귀한 '마담 르와이얄'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샹들리에 주위를 춤추는 날벌레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랫배에 뿌듯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중부 쪽에서 나쁘지 않은 명성을 떨치는 음악가랍니다. 중부 음악가가 연주하는 뒤트아르의 곡들도 색다른 맛이 있지 않겠어요?"

 맞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다 옳습니다 하는 여인들의 재잘거림이 크리스틴의 안목을 칭송했다. 

 그녀는 칼레 대공비에게 다과를 밀어주며 다정히 안부를 물었다. 오를레앙 대공비이자 이모인 루이즈 안은 손녀인 루 발레리 데지레가 요즘 부쩍 말이 늘었노라 웃었고, 오베르뉴 대공비는 후계자인 베리 공작 샤를이 갑자기 북쪽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한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다들 친근하면서도 공손하게 굴었다. 

 크리스틴은 혈관을 타고 별이 반짝이는 듯 행복했다. 

 뒤트아르의 사계가 끝나고 또 무슨 곡을 들을까 논의를 하는데 불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먼저 시작한 모양이군요."

 자리에 앉은 여인들이 돌 맞은 새떼처럼 부산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며 무릎을 숙였다. 크리스틴의 입술이 남몰래 비죽였다.

 이 넓은 이블린, 아니 로렌 전체에 그녀보다 지위 높은 사람은 넷. 그 중 한 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부러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혔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지적을 피할 정도로 불손한 자세였으나 방금 절제의 홀에 들어선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늦었습니다, 크리스틴."

 열 살 어린 마담 라 세르는 '미안합니다'라는 말 따위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웬일로 생글생글 웃고 있어 안 그래도 뛰어난 미모가 더더욱 돋보였다. 생전 바르는 법 없던 볼연지로 발그레한 뺨이 화사해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크리스틴은 능숙하게 뻣뻣한 얼굴 안쪽으로 언짢음을 숨기며, 팔을 내밀어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아렐르."

 요즘 유행하는 가운을 입은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는 발걸음도 가볍게 다가와 크리스틴이 비켜준 자리에 앉았다. 꽃대궁 같은 목이며 희게 드러난 손목이 낭창했다. 그녀가 달고온 흰 제복의 기사 둘도 성큼성큼 다가와 뒤에 시립했다. 

 막 시작한 참이라느니, 늦으신 것도 아니라느니 하는 말은 크리스틴이 내뱉을 필요도 없었다. 똑같이 유행하는 사라판인지 뭔지 하는 가운을 입은 이들이 입모아 대신해주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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