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붉은 관(冠), 나부끼는 죽음 (6)
창밖의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음(音)들이 가슴을 때렸다.
미하일의 부고를 받은지 고작 엿새 째. 오늘 오찬에서도 거의 먹질 못했다. 타고난 다정함이란 때로 뱃속에 도사린 종양처럼 두려웠다. 박박 긁어내고 싶은 것, 언제 터져 생명을 앗아갈지 모르는 약함. 대체 남동생이 뭐라고? 태어나 딱 두 번 본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은 것 뿐인 갓난아기가 뭐라고. 그렇게 못내 되뇌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사샤 때문이었다.
-안녕, 꼬맹이.
아롈이 여동생이 아니었더라면 주어지지 않았을 애정이었다. 아, 코끝이 시큰거렸다. 아롈은 천장을 보며 애써 루를 떠올렸다. 어여쁜 크뢰즈의 아가씨는 아롈의 웃음을 저장해놓은 주머니 같았다. 얼마 전엔 외숙모(ma tata)가 코시카 말로 뭐냐고 묻기에 тётя라고 발음해주었더니 '코샤'가 싫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외숙모 악수!
만두(пельме́ни)처럼 오동통한 손을 상상하자 간신히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아롈에게 어딜 가든 웃으라고 명령했다.
황제가 어떤 방법으로 아직 공표되지도 않았을 정보를 이렇게 빨리 알았는지는 모른다. 동생이 죽었다 하여 검은 옷을 입고 어딜 가든 울상을 지을 수 없다는 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정식으로 부고가 도착한 뒤에나 가능할 사치였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곧바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는 영민함에 대한 마뜩찮음과 흡족함이 동시에 드러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
다시 가슴이 따끔했다. 오늘이 사후 9일 째. 꽃을 바쳐 추모해야 하는데. 부드럽게 올라간 입술 안쪽을 꾹 물었다. 뜯지는 않았다. 입맞출 때 피 맛이 나면, 세시안이 가슴 아파할 테니까.
"오늘따라 기분이 참 좋아보이시네요, 아렐르."
아롈은 가슴에 긴 창이 박힌 듯 고개를 들었다.
음악이 어느새 끝나 있었다. 이 자리를 주최한 크리스틴이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습니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보지요? 이렇게 슬픈 곡을 들으시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기에 그리 웃음이 고우실까요?"
슬픈 곡? 무슨 곡이었는지 제목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분명 초대장에 무슨 레퍼토리를 연주할 지 쓰여 있었는데. 아롈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보니 요즘 시의(侍醫)를 자주 찾으신다면서요? 어머나!"
크리스틴은 과장된 탄성을 지르며 뺨을 감쌌다. 한 때 얽었던 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매끄러웠다.
"설마 제게 조카가 생긴다는 기쁜 소식이라도 전해주시는 걸까요?"
절대 그렇게 생각할 리 없지.
감람석 빛깔의 눈이 물끄러미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의 소식도 아닌데 음악회에 늦은 것도 모자라 딴 생각을 하고 있냐며 면박을 주는 것이다. 무슨 중부의 천재라는 음악가를 웃돈을 주고 섭외 해왔다고 들었는데 곡명은 커녕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피곤하다며 참석을 하지 않을 걸 그랬나. 하지만 음악회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되어 제일 무난하다 여겼는데. 이 시기에 칩거하면 다른 말이 돌 수도 있으므로 어디든 얼굴은 비추어야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결례였으므로, 아롈은 크리스틴의 편을 드는 몇몇 부인들이 웃으며 정말이냐고 물어도 표정을 굳히지 않았다. 여기에서 아니라고 부정하면 또 아이는 언제 생기냐는 이야기로 한참을 떠들 텐데. 어울려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지겨웠다. 혼인한 지 꼬박 이태 째,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걱정은 벌레처럼 징그러웠다.
"저. 겨울 나그네는 곡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잖아요?"
그 때였다. 아롈이 채 입술을 떼기도 전에, 아를랭 공작부인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물론 전체 곡의 분위기가 쓸쓸하고 비통한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요, 용기(Mut)라든가 지금 연주한 춘몽(Fruhlingstraum)은 다른 해석도 있곤 하니까요. 나는 사랑을 꿈꾸었네(Ich traumte von Lieb)라는 부분은 특히나 음악이 달콤하기도 하고요. 마담 라 세르께서는 쓸쓸한 나그네가 꿈속에서까지 연인을 보는 걸 흐뭇해하셔서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신 게 아닐까요, 마담 르와이얄?"
아, 겨울 나그네였나.
시를 원작으로 한 가곡인 만큼 가사는 교양으로서 외우고 있었다. 춘몽의 가사를 떠올려 본 아롈은 순식간에 황당해졌다. '나 사랑을 꿈꾸었네, 아름다운 숙녀와 서로의 마음이며 입맞춤이 교환되는 순간을, 황홀한 행복을'이라는 가사만 보면 분명 달콤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 시는 나그네가 그런 봄날의 꿈에서 깨어 쓸쓸한 현실과 마주하는 걸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잠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수탉들이 울 때, 나는 눈을 떴습니다. 어둡고 추운 하늘, 지붕에는 까마귀가 깍깍댔습니다.'라는 가사가 그를 나타내어 주었다. 보아하니 아를랭 부인도 좋아서 이 말을 꺼낸 건 아닌 듯했다. 그저 보르디의 피를 이은 아롈이 이렇게 규모 있는 모임에서 석녀 비슷한 소리를 들을까봐 편을 들어준 것이다.
"맞아요. 제가 듣기에도 중간중간 분명 다디단 선율이 있었어요."
"첫 부분은 확실히 아주 부드럽게 들렸는 걸요.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꼭 꿀물 같았어요."
중부 듀츠 어를 배우지 못한 몇몇 숙녀들이 맞장구를 쳐버렸다. 아롈은 한숨을 삼켰다. 혼자서 귀찮아지고 끝났을 일이었건만. 이제 말싸움에서 지면 보르디며 나바르의 망신이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봐도 아를랭 공작부인과 미리 이렇게 판을 짜서 음악회의 주도권을 가져가려는 줄 알 텐데. 하필 원래 레아(아를랭 공작부인의 이름)가 열려고 했던 날짜를 크리스틴이 가로챈 터라 복수하는 줄 알 것이다. 늦은 것조차 연출로 보이겠지.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과연 크리스틴이 듀츠 어를 알까? 남부 숙녀들이 대체로 외국어에 약하니만큼 가사를 들어도 모르지는 않을까?
크리스틴의 눈이 금세 샐쭉해졌다. 만약 리젤로트였더라면, '참나, 그런 곡이 아닌 걸 모두 아시잖아요! 제가 듀츠 어를 모른다고 저를 속일 생각이라곤 하지 마세요!'라며 솔직하게 분위기를 풀어나갔겠지. 하지만 크리스틴은 언제나 돋보이는 걸 좋아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있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건 대조를 주는 전채(hors-d'œuvre)일 뿐, 주제는 꿈에서 깨어 서글픈 나그네의 심정을 표현한 것 아닌가요?"
역시나였다. 가사를 한 번쯤은 훑어보고 온 것이다.
듀츠 어를 아는 듯한 몇몇 숙녀들의 얼굴에 난감함과 흥미가 어렸다.
"안 그런가요, 삭스(Saxe, 작센의 갈리아 어 표현)의 공주? 유명한 시(詩)인만큼 공주는 춘몽의 가사를 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