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붉은 관(冠), 나부끼는 죽음 (7)
조피의 눈이 도르륵 굴러 아롈을 향했다. 아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알긴 하지만 로트링겐(Lothringen, 로렌의 듀츠 어 표현) 말으로 번역할 자신은 없어요."
"서툴러도 괜찮으니 부디 낭독해주지 않겠어요? 가곡이란 원래 시를 같이 즐기는 것이니만큼 사양하지 말고요."
이쯤 되면 부드럽게 넘어갈 방법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아롈은 한숨을 삼키곤, 누가 또 헛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Noch schlägt das herz so warm. Wann grünt ihr Blätter am Fenster? Wann halt' ich mein Liebchen im Arm."
능숙한 듀츠 어였다. 작곡가가 붙인 피아노포르테의 선율은 흔적도 없었지만 흡사 모국어로 된 줄글을 읽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 부분의 해석이 신기해서 웃었습니다, 크리스틴."
번역은 부러 붙이지 않았다. 크리스틴의 뺨이 어색하게 일그러지며 해석을 읊조렸다.
"아직 내 가슴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다. 창밖에 잎사귀 푸르게 돋을 날 언제인가, 이 팔에 사랑하는 이 안아볼 일은 또 언제인가."
"듀츠 어가 아주 능숙하군요, 크리스틴."
아롈은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듀츠 어를 할 줄 안다면 놀랍고, 모른다 해도 듣자마자 해석을 말할 정도로 외워왔다 해도 놀랍다. 어느 쪽이든 크리스틴의 눈에 띄어 군림하고자 하는 열정은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열정을 본의 아니게 짓밟아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천만에요. 이 자리에서 가사집 한 번 보지 않고 줄줄이 외워 말하실 수 있는 아렐르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부끄럽네요."
누가 봐도 진심이 아니었다.
"어느 부분이 그렇게 훌륭하다고(merveilleux) 느끼셨나요? 저 혼자만 눈치를 채지 못했나봐요."
"훌륭하다기보다는 흥미로운(curieux)이 맞겠군요. 어디 한 번 그 부분만 다시 연주해보겠느냐?"
소프라노가 눈치를 보더니 중부 듀츠 어로 소근거렸다.
<저기, 황태자비께서 마지막 부분만 다시 연주해달라셔, 테오.>
<뭐? 다음 곡이 아니라? 어디부터?>
<눈을 감았네. 이 부분부터.>
음악가는 건방지게도 불퉁한 표정으로 건반을 어루만졌지만, 노래와 연주는 객관적으로 훌륭했다. 셈여림을 잘 살렸고. 하지만 그래봐야 가곡, 연주자의 기량을 드러낼만 한 곡은 아니었다. 중부에서까지 불러와 이런 곡을 연주시켜야 할까? 어쩌면, 아롈이 웃고 있지 않았더라면 크리스틴이 듀츠 어를 뽐낼 다른 사건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시카의 궁정 음악가는 가슴이 따뜻해진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다음 부분에 다소 희망의 여운을 담아 연주하곤 했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아렐르, 기억해둬요. 거짓말을 할 때에는 뻔뻔해져야 해요.
-애초에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들키지 않으면 되지요. 혹시 들킨다고 해도 제가 무조건 용서해 줄게요. 그러니까 기억해요.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니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코시카의 궁정 음악가가 가곡을 어떻게 연주하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필요할 때는 불러다 연주를 시켰고, 적당한 감상평을 붙이곤 했지만 벌써 그게 몇 년 전인데. 아롈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허리를 곧게 폈다.
"그런데 이 음악가는 마지막 부분에서 셈여림을 특히 살려서 쓸쓸함을 표현하는군요. 그게 흥미로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코시카에서는 그렇게 해석을 하는군요! 낭만적이네요."
"마담의 말씀은, 지금 쓸쓸하고 외로운 현실에 있더라도 꿈속의 연인을 생각하는 게 코시카의 주류 음악이라는 말씀이시죠? 꺄아."
여느 책이나 시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떠들 수 있지만, 음악이라니.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떠들고, 여기저기서 탄성을 받노라니 기분이 으쓱해지기는커녕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남편이 시부(媤父)의 앞에서 슈 아 라 크렘 따위를 먹으랍시고 밀어줬을 때보다 열 배는 창피했다.
"그런가요? 저는 지금 이게 당연한 해석이라고 여겼어요. 제가 알기로는 그 부분 악보에 쓸쓸하게 연주하라고 적혀 있거든요. 거기, Könnten Sie bitte die Notenmusik übergeben(악보를 좀 건네주겠어요)?"
크리스틴의 듀츠 어는 마치 아롈이 갈리아 어를 처음 배웠을 때처럼 어색했지만, 뜻은 분명하게 전해졌다. 날카로운 음성에 소프라노가 당황하더니 달려가 악보를 들고 와서는 무릎을 꿇었다. 크리스틴의 뒤에 시립해 있던 종려가지 기사단 기사가 악보를 크리스틴에게 건넸다.
"어디 보자, Noch schlägt... Noch schlägt..."
크리스틴의 눈이 금세 찌푸려졌다.
"Nein(아니야)..."
조피가 아주 작게 듀츠 어로 중얼거렸다. 아롈은 곁눈질로 악보를 넘겨보았다. 악보 보는 법은 코시카 황제의 교양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나, 서부 벤티 어로 '쓸쓸하게'를 뜻하는 lamentoso 정도는 읽을 줄 알았다. 물론 슬픈 곡이니만큼 악보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필 그 부분에는 지시가 없었다.
어쩌지.
'쓸쓸하게'라는 지시어가 악보에 없다고 지적하면 크리스틴은 분명 망신살이 뻗칠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여동생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여 얼굴에 금칠을 한다 해서 대체 무엇이 더 나아진단 말인가?
것을 지적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여기 있군요. 점점 여리게."
시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롈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틴의 말이 맞군요. 좋은 음악가를 데려와 주셔서 안목을 넓히게 되어 기쁩니다."
자리는 크리스틴의 안목을 찬양하며 부드럽게 마무리되었다.
숙녀들이 분분히 자리를 뜨는 와중이었다. 크리스틴이 아롈을 빤히 쳐다보다가 살짝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이상한 기분에 대해서 세시안과 말을 나누고 싶어졌다. 아롈은 뒤에 종려가지 기사들을 끌고 정의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