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2. 린
3. 만남
4. 마법의 포니테일
5. Baseball Queen
작가 후기
역자 후기
4. 린 (3)
가즈히로는 가야사카 린이 사는 집의 현관 앞까지 와 놓고서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망설이고 있었다.
‘린의 기억’에 의하면 ‘가야사카 린’이 사는 곳은 이 집이 틀림없었다. 만약 기억이 없다 하더라도 천연석으로 만든 명패에 새겨진 ‘가야사카’라는 성씨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보험 판매사 일을 하는 ‘린의 어머니’는 이미 집으로 돌아와 있는 듯했다. 그 증거로 부엌이라 짐작되는 곳으로부터 환기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다.
시간은 이미 오후 5시 반을 지났다.
‘막상 들어가려니…… 역시 긴장되네…….’
아무리 ‘린의 기억’이 있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집이다. 어지간히 넉살이 좋지 않고서야 자신의 집인 양 행동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이제부터 다른 사람의 어머니에게 용돈을 졸라야 한다면…….
‘뭐, 어때. 벌벌 떨어 봐야 아무것도 안 되잖아. 일단 부딪쳐 보자!’
어떤 위기에서도 “어떻게든 되겠지” 한마디로 마음가짐을 가다듬을 수 있는 가즈히로의 특수 스킬이 지금 다시 발동되었고, 더 미적거리지 않고 현관문을 연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나, 어서 오렴~.”
거실로 이어지는 문 건너편에서 묘하게 늘어지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목소리 덕분에 바짝 굳은 가즈히로의 신체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짧은 복도를 지나 드디어 거실이다. 주뼛거리며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주방과 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거실과 대면식 오픈 싱크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부엌 안에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던 마흔 살 정도의 파마머리 아주머니가 거실로 얼굴을 내민 가즈히로를 흘낏 돌아봐 주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얼굴에는 주름이 패었지만, 피부만큼은 아직 화장을 지우지 않았기도 해서 생기 있고 산뜻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이 코토미 씨구나…….’
어머니의 이름은 ‘가야사카 코토미’. 물론 ‘가야사카 린’의 어머니다.
“오늘은 조금 늦었구나~. 어디 들렀다 왔니?”
코토미가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생글거리며 말을 걸어온다. 가즈히로는 당황하면서도 무난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으, 응. 잠깐…….”
“……응?”
코토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우뚝 멈췄다.
“어디 안 좋아?”
“아…… 아니, 그런 건…….”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역시 어머니인가. 사소한 위화감조차 이렇게나 빨리 감지해 내는구나. 가즈히로는 심장이 두근두근 고동치고 뺨에서는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금방 식사 준비 끝나니까 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오렴~.”
마침 잘됐다 싶어서 가즈히로는 거실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 ‘가야사카 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가즈히로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 뺨에 배어난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 깜짝 놀랐네…….’
조금 어수룩한 분위기도 있어서 마음을 놓을 뻔했지만 역시 어머니는 어머니. 지금 단계에서 들킬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의심할 살 만한 일이 벌어진다면 골치 아프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즈히로는 다시 한 번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이곳은 ‘린의 방’이었다.
‘처, 처음이네. 여자애 방에 들어온 건…….’
의식하고 보니 어쩐지 고동이 빨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우선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두고 신기한 듯이 주변을 둘러본다. 귀여운 물방울 문양의 커버로 감싼 이불이 놓인 침대. 나름 세련된 디자인의 화이트 에나멜 서랍장. 낡았지만 소중하게 사용한 흔적이 엿보이는 책상. 배색이 예쁜 카펫.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가즈히로가 원래 지냈던 살풍경한 방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잠시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던 가즈히로는 시계가 6시 정각을 가리키며 울리는 기계음을 듣고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아, 안 돼, 이러면 안 돼! 뭘 구경하는 거야. 다른 사람 방인데!’
머리를 휙휙 흔들었지만 이미 본 광경이 잊힐 리도 없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코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 저녁 준비 다 됐단다~! 빨리 내려오렴~!”
확실히 맛있는 음식 냄새가 2층에 있는 ‘린의 방’까지 풍겨 오고 있었다. 배에서 저절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가즈히로는 그대로 방에서 나가려다가 퍼뜩 걸음을 멈췄다.
‘앗……, 아직 옷을 안 갈아입었어!’
“옷 갈아입고 오렴……”이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이제껏 세일러복 차림이다. 이대로는 틀림없이 코토미가 잔소리를 늘어놓으리라.
가즈히로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하지만 난처하게도 세일러복을 어떻게 벗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옷의 구조가 남학생의 가쿠란(*목깃이 짧게 올라온 남자 교복)과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뭐하는 거니~? 린~?”
재촉하는 코토미의 목소리가 괜히 더 크게 들린다.
‘큰일 났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손이 꼬인다. 찬찬히 ‘린의 기억’을 더듬어 보기만 한다면 간단한 일인데도.
가즈히로는 가슴께의 후크를 차례차례 풀어내고 겨드랑이 아래의 지퍼를 단번에 올려서 세일러복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당연히 하얀 브래지어와 그 안에 감싸인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우왓, 왠지 엄청나게 부끄러운걸…….’
비유하자면 여자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 또한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는 듯한 거북함. 가즈히로도 ‘마음은 남자’니까 여성의 신체에 그런대로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몸을 차분히 감상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가 첫째이고, 무엇보다도 속옷 바람으로 맨살을 드러낸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짙었기 때문이다.
가즈히로는 재빨리 옷을 입어서 몸을 가리지 않으면 졸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약 3분 후, 실내복으로 입는 스웨트 팬츠를 허리까지 올림으로써 무사히 옷을 다 갈아입었다. 생각은 길었지만, 막상 손을 움직이고 나서부터는 거침없는 동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모두 ‘린의 기억’ 덕분이었다. 무의식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방문이 활짝 열렸다.
“린! 얘가 정말!”
“――흡!”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얼굴을 내민 코토미는 뺨을 조금 부풀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빨리 내려오라고 말했잖니!”
“으, 응…….”
“세상에! 교복도 벗어서 그냥 방바닥에다가! 주름지니까 옷걸이에 꼭 걸어 놓으라고 항상 그랬는데!”
확실히 세일러복은 벗어서 바닥에 흩트려 놓은 그대로였다. 이래서는 꾸중을 들어도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한 가즈히로는 얌전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뭐, 봐줄게.”
“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용서하겠어.”
“아.”
“식으니까 빨리 내려오렴!”
코토미는 제 할 말만 하고서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즈히로는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용돈을 달라고 졸라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 봤을 때 코토미의 태도는 길조였다. 우선 벗어 놓은 교복을 옷걸이에 걸어서 정리해 두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의 식탁에는 먼저 내려간 코토미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분의 저녁 식사가 차려진 식탁. 중앙에 놓인 실로 맛있어 보이는 냄비 요리에서 온기가 피어오른다. 우와~ ‘스키야키’ 잖아!
“어때, 굉장하지? 자, 빨리 먹자!”
코토미는 조금 전까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가즈히로는 코토미의 맞은편, ‘가야사카 린’이 항상 앉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입으로 고기를 가져가는 코토미를 바라보다가 가즈히로도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었다. 코토미와 마찬가지로 날달걀에 담가 둔 고기를 입가로 가져간다.
‘마, 맛있어!’
이 얼마나 훌륭한 차돌박이인가. 입속에서 녹아드는 듯한 소고기는 처음 먹어 봤다. 가즈히로의 표정을 보고 흡족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코토미가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때? 무진장 맛있지?”
“으, 응…….”
“이게 다 보너스 덕분이야~.”
“보, 보너스……?”
“그으래! 지난달에 회사에서 엄마가 매출 1위였거든!”
‘린의 기억’에 의하면 코토미가 하는 일은 보험 상품을 취급하는 파트 타임 세일즈였다. 당연히 회사 내부에서도 직원끼리 매출액을 경쟁하는데 이번에 경사롭게도 1위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고로 말이지……. 이건 나한테 주는 상이야!”
가즈히로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용돈 받을 기회인지도 모르겠는데…….’
라고도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에라도 ‘세노에 가즈히로’가 어쩌고 있는지 알아내러 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려면 말을 꺼낼 타이밍이 중요하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 코토미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펴보던 가즈히로에게 코토미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물로온, 린한테도 상을 줄 거야!”
뜻밖의 한마디에 가즈히로는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뚝 멈췄다.
“어?”
“얘도 참! 그러니까 린한테도 상을 준다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코토미는 가즈히로에게 빳빳한 오천 엔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꼭 필요한 데 써야 한다?”
손에 쥐여진 지폐에서 신권 특유의 잉크 냄새가 났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했던 자신이 우스울 정도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아무튼, 덕분에 ‘세노에 가즈히로’의 안위를 살피러 갈 수 있겠다……, 라고 가즈히로는 생각했다. 그래, 내일 당장에라도.
저녁 식사를 먹는 내내, 흐뭇한 얼굴의 코토미가 일방적으로 수다를 늘어놓았다. 가즈히로의 처지에서는 맞장구를 치기만 하면 되었기에 대화도 수월했다.
식사를 마친 가즈히로가 한 가지 알아차린 점이 있다면 여자의 몸으로는 그다지 많이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준비해 놓은 차돌박이는 가즈히로가 평소 먹던 양과 비교하면 매우 적게 느껴졌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여자 둘이서 겨우겨우 다 먹을 만한 양이었다.
“린, 먼저 씻으렴.”
식사를 마친 코토미가 텔레비전 앞쪽의 소파에 누워서 말을 건넸다.
저녁 식사 전 옷을 갈아입을 때조차 졸도할 뻔했는데 완전한 알몸이라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가능하면 욕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코토미가 시키는 대로 가즈히로는 먼저 욕실에 들어가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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