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2. 린
3. 만남
4. 마법의 포니테일
5. Baseball Queen
작가 후기
역자 후기
5. 린 (4)
결코, 넓은 욕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욕조 안에서 다리를 펼 정도는 되었다.
가즈히로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풀어짐에 따라 뒤바뀐 때로 짐작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꽤 긴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통증이 남아 있는 후두부를 살짝 만져 본다. 커다란 혹이 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프다…….’
혹이 아프다기보다도 상처 깊숙한 곳이 쑤시는 듯한 감각이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가즈히로는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면서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말아 올리고 그 위에다 타월을 감아 둘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애써 감은 머리카락이 욕조에 잠겨 버리니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가야사카 린’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씻고 린스를 하는 데만도 상당한 수고가 들었다. 머리를 감는 데만 거의 15분 가까이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으으, 이 머리카락 귀찮은데…….’
머리카락이 젖은 탓인지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머리가 괜히 더 무겁게 느껴진다. 특히, 원래 스포츠머리였던 가즈히로에게는 상당한 위화감이었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뺨과 목덜미에 달라붙으며 시야 한쪽을 하늘하늘 가로막는 꼴이 성가시기 짝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싹둑 잘라 버리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이미 20분이 넘게 흘렀다. 가즈히로는 결코 오랫동안 목욕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무슨 까닭인지 오늘은 계속 이러고 있어도 힘들지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당황하면서도 신체가 휴식을 원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욕물 안에서 일렁이는 몸을 바라본다. 하얀 빛깔을 띠고 예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보였다. 옷을 벗기 전까지는 브래지어 때문에 압박감이 적지 않았지만 풀어놓은 지금은 편안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가즈히로는 손바닥으로 감싸듯 천천히 젖가슴을 만져 봤다.
‘부드럽네…….’
설마 ‘여자의 가슴’이라는 게 이토록 부드럽고 탱탱할 줄이야…….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번 더 손을 살짝 움직여 본다. 하지만 익숙지 않은 간질간질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주무르던 손을 금세 멈췄다.
‘나도 참, 뭐하는 거지……?’
퍼뜩 정신을 차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터무니없이 부끄러운 행동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움을 떨쳐내려는 듯 수면을 찰싹 때린 가즈히로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안개가 낀 것처럼 욕실을 가득 메운 수증기를 바라보면서 겨우 몇 시간 전까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했었던 일상을 떠올려 본다.
아버지. 야구부 팀원들과 감독. 그리고 고시엔으로 가는 길.
‘어떻게든 될 거야. 분명히.’
내일 살던 집으로 가 보면 된다. 그러면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언제까지고 이대로일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즈히로는 모든 불안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욕조에서 나왔다.
탈의실에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가즈히로는 아직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코토미에게 잘 자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코토미가 의아한 얼굴로 가즈히로를 불러 세웠다.
“어머? 벌써 자니?”
“으, 응.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치만 「텍사스에 사랑을 담아서」 금방 시작하는데?”
‘뭐야, 그게?’
“이번 주는 톨 군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코토미는 마치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린의 기억’에 따르면 「텍사스에 사랑을 담아서」는 주인공인 톨과 나미가 미국 텍사스 주를 무대로 벌이는 사랑 이야기. 매주 한 번씩 방송하는 연속극으로 여고생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모양이다. 젊은 남성 탤런트를 잔뜩 보유한 대형 프로덕션이 한껏 밀어주고 있다는 주연―톨을 코토미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여고생들한테 인기 있는 드라마라. 그러고 보니 코토미 씨…… 정신 연령은 낮아 보이니까.’
가즈히로는 무심코 실례되는 생각을 떠올렸다. 매주 ‘가야사카 린’도 함께 봐 온 듯하지만, 당연히 ‘남자’인 가즈히로가 흥미있어할 만한 드라마는 아니다.
‘채널 돌려서 야구 중계를 보고 싶다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하려나…….’
물론 가즈히로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가즈히로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코토미를 내버려 두고 방으로 올라갔다. 확실히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느니 한시라도 빨리 침대에 몸을 누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을 닫자 방 안에는 무기질적인 형광등 불빛이 비칠 뿐. 가즈히로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귀와 어깨에 휘감겨 드는 기다란 머리카락의 위화감도, 가슴을 덮은 브래지어의 위화감도 모두 다 떼어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 순간 강렬한 졸음이 덮쳐들었다.
내일 일어났을 때에는 전부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런 바람을 품고서 가즈히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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