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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륜(花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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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 淸風

발아(發芽 : 싹이 트다)


  그것은 <옛날 옛적에-> 라고 시작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이야기.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이 끝난 것이 당연해 지고. 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하던 때였다.

  공습으로 꽤나 파괴되었던 도쿄의 거리도 몇 년이 지나자 제법 정돈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조금씩 웃음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시장이 열리고, 가게가 세워진다. 아이들은 피난길에서 돌아와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 그녀, 니죠 ​스​미​레​코<​二​篠​ 菫子>도 그 학생들의 물결에 속해 있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교복에 시선이 모인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이유가 한 가지도 아닌 두 가지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스미레코는 묵묵히 앞만 보며 잰 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걸었다.

  교문을 통과해 마리아 상 앞에 멈춰 선다. 학교에도 몇 발인가 폭탄이 떨어졌었다고 들었지만 이 마리아 상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그 사람들은 전 일본에서 폭격으로 부서진 교회나 십자가가 한개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크리스천이 아닌 스미레코는 그런 벌 받을 생각을 잠시 하고는 손을 모았다.

  릴리안에 입학했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은 아니었다. 릴리안에 진학한 것은 전후의 혼란을 타 사업에 성공한 그녀의 부모님과 오빠가, 세간에서 알아주는 ‘아가씨 학교’인 릴리안에 그녀를 입학시켜 집안의 위신을 세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내세울 정도의 전통은 있었지만, 실제로 재산이나 권력과는 인연이 멀어 얼마 전 까지는 몰락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최근 부흥기를 타고 성공하자, 다시 그 뼈대를 찾고 싶은 것이다. 스미레코의 아가씨 학교 입학은 그 계획의 하나.


  “어머, 저길 좀 봐요-.”

  멀리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살짝 들려온다.
  교문을 넘어서, 이제 주변에는 그녀와 같은 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한몸에 끌고 있었다.
  이유는 - 간단하다.

  도쿄에서도 비할바 없는 ‘아가씨 학원, 릴리안’의 세련된(*주1) 교복을 입고 있다는 첫 번째 이유는 교문 안에서 효력을 잃었지만,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 13살의 아이’란 두 번째 이유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저 분이 바로-.”

  “그렇군요.”

  - 뭐 이해는 한다. 모처럼 집안에 운이 트여 장사가 갑자기 잘 되자, 집안을 뼈대 있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 수단으로, 마침 학교에 다니는 딸을 아가씨 학교에 넣는 것도 이해는 된다. 더군다나 그 딸이 머리가 비상하게 좋아, 이미 중학교 과정까지 통과할 정도라면 월반을 시켜 더욱 주목을 받고 싶기도 할 것이다.

  ···정작 학교에 다닐, 딸의 의사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난 3년 내내 이렇게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가슴속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해져, 스미레코는 작게 한숨을 내쉬어 버렸다. 그래도 가슴속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평안하세요, 스미레코양.”
  “평안하세요, 노조미양.”
  “어머, 이름을 벌써 기억해 주시는 거군요.”

  원래대로라면, 이 쯤에서는 ‘노조미 양이야 말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 대답해 주는 것이 순서겠지만. 스미레코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고등부에 존재할지 의문이었다.

  현재 고등부에는 제법 학생이 북적이고 있었다. 다만, 그 중 많은 수가 피난으로 인해 학업이 늦어졌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학년보다 몇 살씩 나이가 위인 사람이 많았다. 3학년쯤 되면, 나이가 스물이 다 된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그 와중에 고작 열 셋의 꼬마 아이가 자신과 같은 반에 있는 것이다. 처음에야 신기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콤플렉스로 질투하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예, 실례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무난한 대답을 하며 웃어 준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표정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힘드는 일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이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새삼 답답해 졌다.

  “대단하네요. 과연 2년이나 조기 입학한 수재 다워요.”

  노조미양도 마주 웃으며 칭찬해준다.

  적어도 그 말투에 가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말로 이 말을 호의로 받아 들여도 되는 걸까. 망설여 졌다.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이 힘들어 지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죠···.”
  “실례입니다. 스미레코 양?”

  노조미양이 뭔가 말을 하려던 때, 둘 사이에 제 3자가 끼어 들었다.
  돌아보자, 스미레코의 책상 옆에 연상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클래스 메이트는 아니었다. 평균적으로 입학한 노조미 양보다 한두살 많아 보였지만, 몇 학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안경을 끼고 머리를 목선을 따라 짧게 잘라, 무척 이지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스미레코가 ‘예, 접니다’라 대답하자 그녀는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평안하세요, 스미레코양. 전해드릴 말이 있어서 실례했습니다. 시간이 나신다면, 모쪼록 오늘 방과 후에 동쪽 언덕으로 나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뭐지, 이건. 설마 이지메? 린치?
  그렇게 생각해서 살짝 굳었지만, 말을 하는 쪽은 눈치 못 챈 듯 마저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런 무서운 목적이라기엔 말이 지나치게 공손했다.

  “다도회 ​산​백​합​회​(​山​白​合​會​)​의​ 초청입니다. 그럼 지금 해야만 하는 다른 용무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평안하세요.”
  “···예. 평안하세요.”

  마지막으로 그 사람은 아주 잠시, 스미레코를 흥미 있다는 듯이 지켜 보고는 사라졌다.

  “와아아···. 과연 스미레코 양이군요. 벌써부터 산백합회에 ​초​대​받​다​니​·​·​·​.​”​

  정작 당사자인 스미레코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감탄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것은 옆에 있던 노조미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클래스 메이트들도 우루루 몰려와 축하 분위기를 형성했다.

  “축하해요, 스미레코 양.”
  “정말이지, 과연 스미레코 양이란 말밖에 나오지 않네요.”
  “가서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말. 하지만 당사자는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전히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 산백합회란건, 다도회란 것 같은데. 왜 거기 초대된 것으로 이렇게 축하하고 난리인 것일까?

  물어보면 간단한 문제겠지만, 모두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쩐지 산백합회가 무엇인지 묻는 행위가 ‘실은 전 쌀밥이 무엇인지 모른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 혹시 스미레코양, 산백합회가 뭔지 모르시는 건가요?”
  “예? 설마-.”

  등허리에 순간적으로 얼음이 하나 흘러내려 가는 것 같았다.
  정작 비수를 찌른 장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한체 웃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더더욱 말을 꺼내기가 힘들게 되어 버렸잖아. - 이대로 방과 후에, 뭔지도 모를 산백합회란 곳으로 가야 하는 걸까.

  “어머. 하지만 스미레코양은 고등부부터 전입해 오셨으니 잘 모를 수도 있으시잖아요?”
  “- 실은,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아는 부분을 설명해 주시겠어요?”

  순간적으로 보인 기회에, 필사적으로 말을 꺼냈다.
  조금은 무시 받아도 상관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렇게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곳에 가는 쪽이 더 무서웠다.

  “한번쯤은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산백합회는 명가의 영애 분들께서 모이는 티-파티의 이름이에요.”

  -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다행이야. 스미레코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고, 기대보다 훨씬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시작하는 노조미양을 감사의 미소를 지으며 바라 보았다.

  “이 모임은 반드시 상급생의 추천이 있어야만 입회가 가능하기에, 여기에 참석하는 것은 모든 릴리안 학원생의 꿈이지요.”
  “그럼요. 이제 헌법으로(*주2) 작위 제도는 사라졌다지만, 그래도 산백합회 분들이 모여 앉아 계시면 ‘아. 이분들이.’ 라고 밖에는 생각 안되는 분위기가 있답니다.”
  “모여 앉아 계시면 그야말로 풍경화랄까요.”
  “방금전 분은 ​유​미​코<​弓​子>​님​이​세​요​.​ 산백합회의 2학년 분 중 한 분 이시죠. 차기 학생회 임원 후보시랍니다.”

  일단 입이 열리자 순식간에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스미레코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서로들 누가 더 멋지다느니, 자신도 꼭 들어가고 싶다느니 하는 말로 화제가 옮겨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스미레코가 산백합회 내에서 자리를 잡으면 꼭 자신도 한번쯤은 초청해 달라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한다.
  다행히, 거기서 수업 종이 울렸다. 스미레코의 주변에 모여있던 학생들은 서둘러 자리로 돌아간다. 바로 그녀의 앞자리에 앉는 노조미양만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마지막으로 속삭여 주었다. 그 말이 스미레코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다.

  “이제 귀족제도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그 다도회가 이토록 존경 받는 이유는 말이에요. 산백합회의 가장 큰 의의중 하나가 다음 학생회 임원을 그 중에서 ‘지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결국 스미레코가 초청받은 것은, 불과 십년 전까지라면 실제로 귀족 가문의 아가씨들이 모여 이 ‘아가씨 학교’를 지배하던,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것이었다-.



  시간은 무정히 흘러, 방과 후.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클래스 메이트들의 기대에 찬 시선도 시선이지만, 상대는 상급생 중에서도 실세중의 실세. 거기에 용건은 실로 정중한 티 파티로의 초대일 뿐. 그런데 그런 고마운 제의에 대한 대답이 도망 이었다가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 완벽히 매장 당하겠지. 사실 나라도, 아무 생각없이 제 3자 입장에서 저런 전말을 들으면 그 도망갔다는 상대를 아마 경멸 할 테니까.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갑자기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귀족의 세계에 초대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없다면 부담일 뿐이었다. 일방적으로 초대하면 누구나 기뻐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고작 10년도 안 지난 시간으론, 그런 귀족적 사고를 고치기엔 모자랐던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우울해 질 뿐이다.

  그래, 가슴을 펴자. 누가 뭐래도, 나, 스미레코는 이 잘난 학교에 조기 입학한 몸이다 이거야. 불러서, 근본이 없는 신흥 부자라고 무시하거나. 조기 입학한게 머리 이외의 것 덕은 아닌거 아니냐고 비아냥 거리거나 하면, 그런 위인들이 선녀처럼 동경받는 존재라는 이따위 학교는 당장 그만둬 주겠어.
  아버지와 오빠의 노한 얼굴이 눈에 선했지만, 스미레코는 입을 악물었다. 웃기지 말라고 해. 이제 조금만 시대가 흐르면, 여성도 시집가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 난 휘둘리며 살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전투 태세를 다지며 걸어가고 있어서 일까.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딴 생각을 하느라···.”

  황급히 대답하고서야 그 대답 자체가 또 두 번째 실례란 것을 알아 차렸다. ‘누군가 말을 걸면 먼저 멈춰선 후 "예"하고 대답하면서 몸 전체를 돌려 돌아선다. 갑작스런 일이라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더군다나 머리만으로 "돌아본다" 같은 행동은 숙녀로서 실격. 어디까지나 우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라는,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오싹거리는 행동 원칙이 지배하는 곳이 이 릴리안이란 곳이거늘.

  “괜찮아요. 다만 다음부터는 좀더 기품있게,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걸어 다녀 주세요.”

  다행히 부른 상대는 수녀 선생님도, 규칙에 철저한 사람도 아닌 모양이다.
  상급생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스미레코를 그다지 혼낼 생각은 없었는지, 가벼운 주의만을 주고 웃었다. 따뜻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마치 그런 표정을 짓기 위해 태어난듯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깔끔하게 한 가닥으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찰랑거렸다.

  “틀리다면 정말 죄송하지만, 스미레코 양이 아닌가요?”
  ​“​맞​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 산백합회의 모임장소로 가는 중인가요?”
  “···예.”

  설마 이 다도회의 초대란 것, 상급생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런 큰일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위가 꾹 주먹으로 죄이는 느낌이 든다.

  “마침 잘 됐네요. 아무래도 스미레코양은 중등부부터 올라오지 않아 길이 익숙치 않을테니, 혹여 헤멜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마리아님의 인도군요. 같이 가도록 하죠.”
  “예?”

  그렇다면- 눈앞의 사람이 그 산백합회의 멤버 중 한명이란 소리?
  따뜻한 느낌의 그 사람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자연스럽게 스미레코의 반발자국 앞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태어 났을 때부터 분명 저렇게 말하고 행동해온 사람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게 ‘귀족’이란 걸까. 헌법 상으로는 없어졌지만, 역시 지금까지 귀족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천박해 질리는 없겠지.

  “학교 생활은, 즐거운가요?”
  “예, 모두가 친절하셔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저에 대해서는 아시나요?”

  조금 방심하자마자, 갑자기 빈틈에 대고 정면으로 공격.
  위가 다시 꾹, 이번엔 두 주먹으로 짠 것처럼 움츠러 드는 느낌.

  ​“​·​·​·​부​끄​럽​습​니​다​.​”​
  “어머나, 무슨 말씀을.”

  - 그렇게 실례될 정도로 잘못 한 거야? 당신이 얼마나 위대한 귀족의 자제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세상 사람이 당신을 당연히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하진 말아 달라고-!

  “모르는게 당연하잖아요.”

  스미레코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스미레코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아까와 조금도 달라진게 없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실례를 저지른건 제쪽이었군요. 부끄럽지만, 릴리안 초등부부터 올라온 학생들은 대부분 서로를 알고 지내서, 이런 소개엔 그만 소홀해 지곤 한답니다. 늦었지만 제 소개를 드리죠. 3학년 아마츠카 히나타<天律 日向>라 해요. 부족하지만 릴리안 고등부의 학생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청산 유수로 말을 내뱉었다. 이 자기소개를 위해 밤을 세며 연습이라도 한 걸까 싶을 정도로 막힘없이 나온다.

  - 라지만, 분명히 스미레코는 ‘학생회장’이란 말을 들었다. 느닷없이 실세, 그것도 그 톱에 있는 인물이 이렇게 등장하다니.

  ​“​히​나​타​·​·​·​님​?​”​
  “예. 그렇게 부르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어주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스미레코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갔다. 기대했던 귀족의 이미지와 하나는 맞아 떨어지고, 하나는 전혀 틀렸다. 보는 순간 질려 버릴 정도로 몸에 베어버린 예의와 기품이라면 예상대로였지만, 그것을 자랑하거나 잘난척 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 조금만 생각해보면, 귀족이라고 모두 거만할리도 없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조금 지나쳤던 듯 하다. 그걸 인정하고 나자 새삼 히나타라는 학생회장이 커 보였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네요. 조금 안타까워요.”
  “···예. 그렇네요.”

  하늘은- 잿빛.
  하늘은 빈말로라도 날씨가 좋다고 하기엔 힘들 정도였다. 어쩌면 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고 불안할 정도로, 조금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회색으로 물들어 있다.

  “날이 좋은 날에는, 동쪽 언덕에서 차를 마시면 정말 기분이 좋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귀중한 신입생 환영회를 여는 날에다, 중요한 회의도 하는 날이니 날씨가 흐려도 어쩔 수 없지요. 미룰수도 없는 노릇이니.”
  “실내에서 모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 조금 후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인데.”

  아무리 티 파티라지만, 언덕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서 마시는 피크닉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설마 교실에서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귀족의 사고 방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걸가?

  “그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바람이 너무 좋아서 독단으로 결정했답니다.”
  “-바람?”

  날이 흐려서 인지 바람은 아까부터 상당히 불고 있었다. 벌써 제법 따뜻해진 날씨라 한기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동쪽 언덕에 가보신 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마침 보이네요···. 보세요.”

  - 바람이 좋아서, 란 말은 보는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쪽 언덕’이라 불리는 곳은, 벚나무가 가득 서 있는 곳이었다. 만개한 벚꽃이 조금 거친 바람의 춤에 휘말려 폭풍처럼 날리고 있었다.

  “올해의 벚꽃공주님의 춤은, 조금 거친 춤이군요. 하지만 정말- 아름다워-.”
  ​“​·​·​·​정​말​·​·​·​이​네​요​.​”​

  고요한 허공을 하늘거리며 내려오는 분홍색의 비도 좋아했지만.
  이토록 많은 꽃잎이, 바람을 따라 가득 허공에서 춤추고 있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박력이 있었다. 마지막 숨이 꺼져가는 무희가, 최후로 펼치는 몸짓을 보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벌써 준비가 되어 가는 모양이네요. 스미레코양도 어서 오세요.”
  “아···.”

  히나타는 머뭇거리는 스미레코의 손을 잡아 끌고, 언덕의 아래에서 자리를 피기 위해 고전중인 사람들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언덕에 이미 도착해 있던 사람들은, 바람에 날리는 깔개를 고정시키고 돌을 올려 놓느니. 티 세트가 들어 있는 듯한 바구니가 뒤집혀지지 않게 지키느니 하느라 둘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하는 듯했다.


  “수고들 하시네요-!”
  “히나타, 늦었잖아!”

  깔개의 귀퉁이에 막 돌을 올려 놓아 고정시킨 사람이 허리를 피며 외친다. ‘히나타’라고 그저 이름을 부르기에 살짝 놀랐지만, 두 사람은 그 정도로 친한 사이였는지 전혀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꺅, 꼬마 아가씨다- 인형같아, 귀여워어-.”
  “이쪽 분이 스미레코양, 인가요?”
  “그래요. 아-. 실례. 스미레코양, 소개 드릴게요.”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우르르 쏟아지자 긴장했던 스미레코는 히나타의 배려에 안도했다.

  “일단 이 활달해 보이는 아가씨가 3학년의 아리스가와 ​아​키​하<​有​洙​川​ 秋葉>. 현재 릴리안 학생회의 서기 겸 회계를 맡고 있어요.”
  “잘 부탁해요, 천재 아가씨.”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짧게 자른 머리에, 고양이 같은 얼굴. 생명력이 넘치는 고양이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해 검도도 하는 말괄량이 랍니다.”
  “제대로 소개 하려면, 현재 릴리안 최강자라고도 해 줘야지.”
  “어머, 아키하의 마음속에서만 그런거 아닌가요?”

  히나타님은 웃으면서 다음 사람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조용히 바구니를 붙잡고 앉아 있는 아가씨였다.

  - 뭐랄까, 방금 스미레코 자신도 ‘일본 인형 같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니 이유없이 부끄러워 질 지경이었다. 허리까지 닿는 머리카락은 바람이 거칠게 불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고 매끄러웠다. 단정히 이마에서 자른 머리카락 아래로 커다란 둥근 눈동자. 정말로 인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정돈된 얼굴.

  “2학년의 오자키 사이코<尾岐 彩子>라고 합니다.”

  그쪽은 히나타님이 소개를 하기전에 스스로 소개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미레코도 황망히 마주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히나타님과는 전혀 행동거지가 틀렸지만, 이쪽 사람도 첫눈에 뿌리 있는 귀족 가문이란걸 알아볼 수 있는 몸가짐이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이 조용한 그 자세가 긴장이 풀어졌던 스미레코를 다시 조금 몰아세웠다.

  - 혹시, 날 싫어하는 걸까?

  “사이코는 언제나 이렇게 정숙한 아이에요. 말이 없어도 스미레코양을 싫어하는게 아니니 걱정 마세요.”
  “이른바, 놀려도 재미가 없는 아이지.”

  히나타님과 아키하님이 재잘거리며 찔러도 사이코님은 반응이 없었다. 덤덤히, 눈을 살짝 내리감으며 두 사람을 외면하는 모습이 묘하게 능숙하다. 세 사람의 이런 관계가 하루 이틀이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두 분의 즐거움이라면 지금까지 충분히 만족시켜 드렸지 않아요?”
  “어머- 사이코가 삐졌어요.”
  “귀엽지 않아라-.”

  까르륵 웃는 두 3학년을 조금 질려서 바라보고 있자니, 한 사람이 생긋 웃으며 소매를 당겼다.

  “평안하세요. 2학년의 니와 스즈란<丹羽 鈴蘭> 이라고 해요.”

  또 새로운 이름의 소개.
  스미레코의 머리가 좋긴 하지만,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켜가며 한꺼번에 외우기는 힘들었다.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한바탕 자기 소개가 이어졌지만. 한번에 이름과 얼굴을 모두 기억한 것은 스즈란이라고 자기 소개를 한 사람까지였다. 열명에 가까운 사람이 우루루 소개하면 이미 친절이 아니라 고문이다.

  “자, 날이 더 나빠지기 전에 즐겁게 보내죠.”

  누가 보아도 이 곳을 주도하는 것은 히나타님. 그녀의 말에 모두는 자리에 앉았다. 스미레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2학년 이상이었다. 앉는 자리까지 전부 정해져 있는 건지, 아니면 누구 옆이라도 상관 없는건지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앉았다.

  “스미레코양은 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조금 머뭇거리고 있자 스즈란이 붙임성 있게 웃으며 그녀를 자신의 옆으로 안내했다. 엉겁결에 감사하고는 앉고 보니, 그 자리가 또 명당이었다. 옆 자리의 스즈란 너머로 바로 학생회의 임원인 아키하님. 그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 모임의 리더인 히나타님이 앉아 있고, 그 옆에는 그 옆에는 여전히 우아한 태도로 바구니에서 티 세트를 계속 꺼내어 건네고 있는 사이코님.

  즉 그녀의 옆으로 늘어 앉아 있는 사람들은 누가 보아도, 이 모임의 실세라 할만한 사람들이었다. 학생회의 두 임원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2학년인 사이코도, 히나타가 다른 3학년을 제치고 먼저 소개한 것만 봐도 특별한 존재란걸 알 수 있었다.

  분명, 저 사이코란 분도 틀림없이 다음 대의 학생회 임원으로 내정되어 있는 사람이겠지. 왠지 알아도 ‘역시 그렇구나’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기품을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사람이어서 일까, 남의 머리 위에 서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자, 오늘은 얼 그레이네요.”
  “감사합니다.”

  스미레코는 계속해서 자신을 챙겨주고 있는 스즈란에게 조금 고마움을 담아 웃어주었다. 워낙 쟁쟁한 미인들이 옆에 있어 상대적으로 빛이 바라지만, 누가 봐도 예쁜 얼굴에 자신만만하면서도 섬세한 배려.

  - 게다가 잘 보니, 스즈란이 앉은 위치는 두명의 학생회 임원을 사이에 두고 사이코님과 마주보는 위치. 그런 자리에 망설임 없이 앉고, 다른 사람들도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들이고 있었다. 스즈란이란 분 또한 이곳에서 위치가 높은 분이란 소리일까.

  “맛있네요.”
  “그것 다행이군요.”
  “사이코의 차 끓이는 솜씨는 좋으니까요.”

  웃으며 말했지만, 실은 긴장 때문에 차 맛을 음미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실수를 하지 않도록 긴장하고, 사람들의 관계를 관찰하고 있자니 차를 마시는지 물을 마시는지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난폭한 바람이 찻잔에 벚꽃잎을 계속 떨어 뜨리고 있었지만 그걸 막을 생각도 못하고 꽃잎채로 마시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찻잔에 떨어지는 꽃잎을 풍류로 여기는지 즐거워 하며 마시고 있었다.

  산백합회가 처음인 1 학년생은 스미레코 뿐인 듯 했다.

  들어본 말을 종합하면, 산백합회에 초대되기 위해서는 회원의 초대가 있어야 하므로, 1학년이 입학식 바로 다음날 곧장 초대되는 것은 유례없이 빠른 일인 듯 했다. 입학식 바로 다음날, 신입생 환영회가 열리기도 전에 부르다니. 그만큼 조기 입학한 아이에 대해 관심이 비상하다는 걸까.

  시간이 흐르자 대화의 중심은 차츰 스미레코에서 떨어져,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끼리의 잡담으로 흘러갔다. 스미레코 입장에서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스즈란님이, 작게 속삭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뭔가 궁금한건 없나요?”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겠지만, 이건 ‘모르니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해방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서, 조금 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을 말해 본다.

  “제게 초대의 말을 전하러 오셨던, 유미코님은 왜 자리에 안계신 건가요?”
  “아, 유미코 말이군요. 히나타님, 그러고보니 유미코는 어디 있나요?”
  “그 아이라면 츠바키를 끌고 오라고 시켰어요.”

  그렇군요, 라고 스즈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스미레코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네요.”
  “예···.”
  “유미코, 차가워 보여서 긴장했었죠? 저도 일년 전 쯤 처음 보고는 엄청나게 깐깐한 사람일거라 생각했었어요. 이제 알게 되겠지만, 의외로 속이 깊은 사람이랍니다.”

  에에, 한번 밖에 얼굴을 보지 못한 모르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평을 들어도 - ‘인상과 다르구나’ 정도 밖에는 감이 오지 않는다. 게다가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하는 스즈란이란 사람부터 방금 처음 본 사이가 아닌가.

  “음, 학생회 임원은 여기 두분 뿐인가요? 부회장이란 직위는 없는 건가요?”
  “그건- 물론 한 분이 더 계세요. 부회장으로, 방금 말했던 츠바키란 분이신데.”

  원활한 대화를 하기 위해 아무 생각없이 물어 본 것 뿐인데, 스즈란의 말이 갑자기 어색해 졌다.
  뭘까, 나 혹시 건드려서는 안되는 걸 말해 버린 실수를 해 버린 건가. 간신히 느슨해 졌던 마음이 바짝 얼어 붙어 버렸다.

  “츠바키님은-. 뭐랄까.”

  스즈란이 조금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주변이 어느새 조용해 졌다. 히나타와 아키하, 두 사람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스즈란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힐끔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다.
  역시 이 멤버의 시선집중은 익숙한 사람이라도 힘든 걸까. 스즈란을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아하하, 뭐라 잘라 말하기 곤란한 분이긴 해요. 뭐랄까-”
  “- 부회장 주제에 모임은 걸핏하면 결석하고, 방약무인 한 여자지요?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요, 스즈란양.”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몸을 돌리자, 처음 눈에 들어온건 누군가의 팔을 잡고 서 있는 안경을 쓴 여성. 오늘 아침에 봤던, 유미코님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 하얀 사람.

  그 사람이 ‘부회장’이라고 첫눈에 눈치 채지 못한 것은 - 사람이 아닌 그림이라 생각될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회색 하늘아래서, 연분홍빛의 벚꽃잎은 새하얗게 보인다. 가냘프게 팔랑이는 아름다움의 파편들. 하지만 그 흩날리는 새하얀 꽃잎들 조차, 그 중심에 서 있는 이 사람의 근처에 가면 탁해 보인다. 사람의 피부가, 이렇게 하얘도 되는 것일까. 아름답다는 감상을 넘어 기분 나쁠 정도로 하얀 피부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 비유가 아닌 정말로 백옥 같다고 느껴지는 생기 없는 얼굴은 아름다웠다. 히나타님도, 사이코님도 보기 드문 미인이었지만. 이 사람은 거기에 더해 알수 없는 매력을 한층 더 품고 있다. -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위험했다.

  거친 바람에 깃발처럼 휘날리는, 긴 산발. 흐린 하늘과 거친 바람, 흩날리는 꽃잎이란 배경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마치- 지금 이 시간과 공간이 그녀를 위해 준비된 듯 했다.

  “히나타의 협박과 유미코의 애원에, 릴리안 고등부 학생회 부회장 세리자와 츠바키<芹擇 ​椿​(​*​주​3​)>​,​ 방금 산백합회에 ​도​착​했​습​니​다​-​만​.​”​

  스미레코는, 그 미소를 보아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미래가 어떤 운명에 결박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장난?”

  뒤늦게 산백합회가 차를 마시는 언덕에 도착한 츠바키가 스미레코를 보고 처음 한 말은, 스미레코가 전혜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니죠 스미레코 양이라고해. 저 나이로 신입생 대표를 맡았던 재능 있는 아이지. 장난으로 고등부의 교복을 입혀 놓고 있는게 아니야.”
  “···흐음.”

  히나타는 츠바키가 모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처럼, 스미레코를 소개했다. 츠바키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흐음’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다.
  제법 유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3년내내 ‘봐요. 저 사람이 바로 스미레코야.’라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서 살아가야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사람도 있구나. 역시, 모두가 남의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들지는 않는 거다. 그렇구나. 다행이야.

  ···그런데, 왜, 가슴이 조금 아플까.

  츠바키는 식후의 나른한 육식동물을 연상시키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히나타와 아키하 사이의 자리에 앉았다. 히나타와 아키하처럼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것은 같았지만, 그녀의 매력은 압도적이랄까, 위압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다도회의 공기가 조금 불편해 졌다.

  “수고했어, 유미코양. 주의가 모자라서, 날이 추워지는걸 생각 못해 폐가 안 좋은 유미코양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해.”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이코의 옆에 유미코가 앉자, 히나타가 그녀에게 살짝 사과했다. 유미코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받는다.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지켜보던 츠바키가 끼어 들었다.

  “그런데, 이건 꼬마 아가씨의 환영식인건가?”
  “그렇다고 말하면 돌아가 버릴 거지? 절대 안 돼. 스미레코양을 처음 초대한 자리기도 하지만, 다른 중요한 안건도 있으니까 부른 거라고.”
  “뭘까나.”
  “모르는 척 하지마. ‘마리아 제’ 일 인게 당연하잖아?”

  그건 스미레코도 들어본 단어였다. 아까, 그녀가 산백합회에 초청되어 난리가 났을 때 흘러나왔던 말이다. 학생회의 간부들은, 마리아 제란 축제에서 신입생 환영의 인사와 공연을 하는 모양이었다. 오늘 초대되면 뭘 공연하는지 꼭 좀 알아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받았었다.

  “장기자랑이라면, 난 안하겠어.”
  “안 돼.”

  으아, 불꽃이 튄다.
  스미레코는 ‘싸움이라뇨, 태어나서 한번도 한적이 없어요.’라는 듯 부처님처럼 웃고 있던 히나타가, 여우와 늑대를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의 츠바키와 정면으로 눈싸움을 벌이고 있다는데 질겁했다. 게다가, 팽팽하다. 아니, 오히려-
  먼저 시선을 돌린건 츠바키였다.

  “···말해 두지만, 최근 몸이 안 좋아.”
  “의욕이 없을 뿐이잖아- 라고 말하고 싶지만, 요즘 네가 계속 몸이 쇠약해 지고 있는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약간의 배려를 했는데.”
  “‘화륜의 춤’, 출 줄 알지? 그걸로 결정했어.”

  산백합회 일부에서, ‘어머나!’ 란 감탄이 터져 나온다. 이건 스미레코 뿐만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꽤 있는 듯, 곧 아는 사람들이 소곤거리며 설명해 주는게 보였다.

  “전통 무용이야. 꽃을 뿌리며, 우아하게 도는 군무.”

  스미레코에게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스즈란이 살짝 속삭여 준다.

  “출 줄이야 알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출 정도로 잘 추지는 못하는데.”
  “그게 걱정되면 스즈란양에게 교습이라도 받아.”

  에. 놀라서 그만 옆으로 슬쩍 보자 스즈란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스즈란이 작게 웃어 보인다.

  “결국 연습하고 준비하란 거잖아.”
  “출 수는 있지 않아? 그거면 우린 만족해. 단 무대에서 네가 혼자서 망신을 당하는 것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다는 것 뿐이야.”

  츠바키가 불평을 터트렸지만, 히나타는 사정없이 몰아 붙였다. 저기서 ‘좋아. 그럼 내가 아무리 망신스러운 춤을 춰도 알아서 하라고.’ 라고 해 버리지 않고,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보아 츠바키란 사람은 그런 수치를 스스로 뒤집어 쓰기엔 자존심이 강한 사람 같았다.

  “스즈란양, 괜찮다면 츠바키가 원하는 시간에 교습을 봐주지 않겠어?”
  “저야 언제든 좋습니다만, 츠바키님께 가르칠 것이 있는지는 의문이네요.”
  ​“​니​와​류<​丹​羽​流>​의​ 계승 예정자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고 싶어 지지만, 그래도 부탁해.”

  니와류라. 분명히 니와 스즈란이란 이름이셨지. 아무래도 일본 전통무용의 한 유파의 계승자, 그것도 그 유파의 종가 사람인 모양이었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싶어 스미레코는 조금 감탄했다.

  “마리아제는 열흘 후니, 닷새 후에 한번 모여 호흡을 점검하겠어.”
  “-용건은 그걸로 끝?”
  “일단은.”
  “그럼 이만 기숙사로 돌아가겠어.”

  츠바키님의 말투가 조금 사나워 진 듯이 들리는 것은 절대로 자신의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거칠게 일어난 츠바키님의 몸을, 황급히 따라 일어난 유미코가 옆에 가서 섰다.

  “유미코는 올 필요 없어.”
  “아니요,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좋을 대로 해.”

  두 사람이 천천히 멀어져 간다. 스미레코는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나, 너무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한 사람을 조금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거친 분인 것 같지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남은 사람들은 조금 어색한 침묵에 젖어 각자의 찻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침묵이 괴로움으로 변하기 직전, 히나타가 절묘하게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 이상은 날씨가 허락하지 않을 듯 하네요. 오늘은 이만 해산.”
  “예.”
  “잘 마셨습니다.”

  사람들은 허락을 받았다는 듯이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고 찻잔을 모았다. 스미레코는 이 익숙하지 않을 일들을 어떻게 도와 보려 허둥대다가 스즈란이 웃으며 만류해 그저 관람했다.
  히나타가 그걸 눈치챘는지 활짝 웃어주었다.

  “미안해 하면 오히려 이쪽이 미안해요. 이번에 우리들이 하는 것을 잘 봤다가, 몇 번 후부터는 스미레코양 같은 일학년들이 주로 하게 될테니까.”
  “-예?”
  “괜찮다면 다음에도 부디 차를 즐기러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릴리안이라는 학원에도, 귀족같은 아가씨들의 모임에도 익숙하지 않은 스미레코였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수 있었다.
  그녀는 산백합회란 모임의 일원으로 정식으로 초대 받은 것이다.

  “- 예,”

  이 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핑계를 대고 빨리 돌아갈 생각이었다.
  학생회의 간부가 되어 권력을 가지는 것에도, 이곳에서 인맥을 쌓아 장차 상류 계층에 발판을 만들어 두는 데에도 흥미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스미레코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사람들을 보았다. 자신보다 고작 몇 살 많을 뿐인데, 이렇게 밝게 빛나고 있다니. 이 나이대의 사람이라면 잔뜩 보아 왔지만, 이런 사람들은 없었다.

  더 만나고 싶었다. 더 알고 싶었다. 더, 닮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흥분과 기쁨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지만 간신히 듣기 좋은 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 영광입니다. 라고.
주 1 : 세련되었다 : 이 팬픽의 배경은 1950년경. 이 시대라면 물론 릴리안 교복은 유행의 첨단이··· 겠지요?

주 2 : 헌법 : 우리도 익히 아는 백작이라던가 하는 귀족제도는 일본에서는 1947년 헌법이 만들어지며 폐지되었습니다.

주 3 : 츠바키 (つばき): 저 한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참죽나무입니다만, 일본에 사전에서는 동백나무 군요.; 틀리다면 지적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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