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실험작으로 라이트 노벨과 밀리터리를 합친 소설입니다.
리메이크작이 예정되어 있으며, 일부 고증 오류 및 설정 구멍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꿈이다. 이건. 분명히 꿈이다.
푸르른 수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어둑어둑한 하늘과 구름의 가장자리는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밀폐된 캐노피 틈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파일럿용 가죽 헬멧이 덮고 있지 않은 내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 투명한 고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마치 꿈속에 있는 것 처럼 몽롱했다. 이 기분, 어디서 많이 느껴본 것 같다. 익숙 하지만 뭔가 불길한, 위화감이 드는 그런 기분.
분명 이건 그날 끝났을 텐데.
[크립터, 크립터, 크립터. 여기는 에르데 제국 황실 선박 스코르피아. 해적이 방위 3-1-4에서 접근 중! 긴급 지원을 바란다, 오버!]
[스카이 00, 스카이 00, 여기는 크로우 네스트. 섹터 에코 21에서 긴급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 현재 레이더 상의 전력은 전투기 8기과 해적선 1기. 선제 공격은 절대 엄금이며 인질이 다치지 않도록 발만 묶어두도록. 구출 부대는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겠다.]
귀에 연결된 헤드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목소리도 아니다. 이건 꿈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소리의 근원 같은것도 없이 그저 내 뇌내 망상에서 나오는 환청일 뿐이다. 나는 결과를 알고 있다. 가면 안된다. 절대 가면 안된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이미 가고 있다.
“수신 완료. 예상 도착 시간 16분. 스카이 01에서 스카이 00에게. 방위 1-3-3으로 선회, 섹터 에코 21에 진입한다.”
스로틀 레버를 살짝 잡아 당기면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조종간을 왼쪽으로 비틀었다. 내가 움직이는게 아니다. 어떤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힘이 내 몸을 움직이고 있다. 부르릉 거리던 엔진의 진동이 점차 작아짐과 동시에 기계식 조준기의 밑단과 수평이던 해수면이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왼쪽 캐노피 윈도우에 푸른 색 빛이 감돔과 동시에 나는 조종간을 천천히 잡아 당겼다. 방위계가 133도가 될 때 까지. 매끄러운 후방 캐노피에는 나를 따르는 3기의 때까치들이 보였다. 방위계 바늘이 133도를 가리킬 때, 나는 조종간을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 수평계를 수평으로 맞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도를 높히면서 엔진출력을 높혔다. 부르릉, 하면서 강렬한 콧김을 뿜어내는 엔진의 진동이 조종석에 울렸다. 뒤이어 누군가가 잡아낸 민간 라디오 채널에서 나오는 ‘발키리의 기행’의 선율이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노래인데. 분명 레코드 판도 내가 깨버렸을 텐데, 어째서 내 귀에 들려오는거지?
어느새 우리 편대는 그곳에 다다르고 있었다. 푸르른 바다 아래쪽에 보이는 두척의 배는 바짝 붙어서 항진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6기의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크로우 네스트, 여기는 스카이 01. 스코르피아 발견. 현재 해적선으로 추정되는 함선과 함께 항해 중이다. 육안 확인된 적기는 도합 6기.”
그래. 내가 한 말이다. 분명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한게 아니다. 저건 내가 아니야.
[알았다. 선제공격은 하지 말되 적기가 응전해오면 발을 묶을 정도로만 상대하라. 지원 부대는 15분 뒤에 도착한다.]
“알았다. 발을 묶어 놓겠다.”
에너지 파이팅에서 고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현재 우리의 고도는 8천피트, 저들은 대략 2천피트 정도. 우리가 급강하 전법을 사용해서 일격 일탈, 적기만 잡는다면 충분히 상대 가능하다. 해적 따위가, 필그림 육군 항공대 최고의 비행편대를 막을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모두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게 된거야?
[스카이 01, 여기는 스카이 03. 해적 따위 후닥 해치우지? 설마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셈?]
“스카이 03, 우리의 임무는 적의 발을 묶는 것이다.”
[스카이 01, 지금 농담하는 거지?]
“당연하지. 전기 급상승 직후 강하, 목표는 적 항공기. 각자 임의 사격으로 격추시키고 고도를 회복한다.”
뒤이어 명령 확인 복창이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스카이 04의 복창이 들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기체를 뒤집은 다음 엘레베이터 패달을 밟으면서 조종간을 힘껏 당겼다. 캐노피에 가득 차있던 하늘빛의 아침 바다가 점점 커졌고, 기계식 조준기의 십자 표시의 중간에 해적 전투기의 동체가 한가득 들어왔다. 진한 갈색의 캔버스 동체가 십자 표적 지시선의 중간에 들어온 순간, 방아쇠를 감고 있던 손가락이 당겨지며 기관포를 발사했다. 양 주익과 엔진 카울링, 기체 하부에 장착된 기총과 기관포들이 진동을 일으키며 탄환을 발사했고, 마치 마법처럼 수십발의 탄환은 정확하게 해적 전투기의 목제 동체를 뚫어버렸다. 긴 꼬리를 길게 끌며 강철을 길게 뽑아 관통력을 증가시킨 20mm 스플린터탄과 길다란 탄심을 가진 13mm 철갑탄, 그리고 다목적 7.62mm 고폭탄은 해적 전투기의 목제 동체를 산산조각냈다. 꼬리날개가 날아가버린 해적 전투기를 그대로 지나친 나는 다시 조종간을 당겨 고도를 회복했다.
여기까지 했으면 좋았을 것을.
[스카이 04에서 스카이 00에게! 적기 2기가 후방에서 접근 중!]
[스카이 01! 해적선이 속도를 높히는데!]
“스카이 03와 04는 그대로 반전해서 적기를 견제하라. 스카이 02와 본기는 해적선의 속도를 늦추겠다. 급강하 준비.”
이때 멈췄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고도를 낮추면서 기관부를 타격하기 위해 접근하던 나는 해적선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해적 두세명이 대공포에 덮어두었던 위장포를 걷어내고 이내 나를 향해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섯기가.
[스카이 01. 적 대공포대 6기.]
“육안 확인했다. 포대 조작원들 먼저 처리하고 재진입한다.”
윙맨에게 그렇게 대답한 나는 스로틀을 당겨 엔진 피치를 줄인 다음 침착하게 조종간을 움직여 나를 향해 돌리고 있는 선수의 대공포를 조준했다. 그리고는 무장을 20mm 기관포로 선택한 뒤 십자선 정중앙에 대공포가 겹치는 순간, 방아쇠를 강하게 잡아 당겼다. 터엉, 터엉하는 묵직한 반동과 함께 하늘에서 흰 꼬리를 끌며 날아간 20mm 스플린터탄이 포방패도 없는 구식 노천 대공포를 덮쳤고, 스플린터탄이 깨지면서 생긴 수많은 파편들이 포대 조작원들을 갈갈히 찢었다. 나를 노리고 천천히 회전하던 다른 대공포도 내 뒤에서 날아오던 스카이 02의 기관포 세례를 받고 침묵했다.
[해적 놈들이 인질들을 꺼냅니다!]
“알았다, 스카이 02. 한번더 진입해서 대공포를 침묵 시킨다. 해적 따위가 우리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라져]
만약 이때 멈췄다면, 과연 그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조종석으로 강하게 짓누르는 중력 가속도를 견디며 임멜만 턴을 한 나는 다시 한번 해적선을 노리고 공격 코스로 진입했다. 이번도 아까와 같이 쉬울 테니까. 기껏 해봐야 해적들인걸.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이들은 대공포를 격렬하게 난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끌고 나오고 있었다.
안돼! 멈춰!
귀족풍의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들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댄 채 우리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수십명의 해적들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엔진 피치를 낮춰 실속 속도 에 가깝게 속도를 늦춘 다음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7.62mm 기총을 해적들을 향해 조준했다. 비행사관학교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인 내가 농성하는 오합지졸도 상대 못할까.
멈춰야 한다. 손가락이 움직이면 안된다. 하지만 내 팔과 다리는 무엇인가에 눌린 듯 부르르 떨기만 할 뿐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마비라도 된 것 처럼, 무거운 바위에 눌린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무서웠다.
그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 강력한 측풍이 내 전투기를 때렸다. 신중하게 조준해놓았던 광학 조준기의 노란색 십자 표시가 획 움직였다. 그리고 7.62mm 기관총탄들이 노란색 궤적을 그리면서 해적선의 갑판을 긁었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전투기에서 발사된 기관총탄의 운동에너지가 연약한 사람들의 살갖을 갈갈히 찢었다. 아침 햇살 보다 더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소리 없는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공포로 뒤덮혔다. 팔다리가 잘린 어른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피로 흠뻑 적셔진 작은 꼬마아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시체에서 뿜어져나온 피가 캐노피에 묻었다. 캐노피에 묻은 피는 점점 캐노피를 덮으면서 내 시야를 가렸다. 캐노피를 뒤덮은 붉은 색 엑체의 한 곳에서 점차 뭉치더니 순식간에 붉은 손이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괴로웠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강하게 내 목을 조이는 이 핏빛 손을 떼어내기 위해서 팔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아직도 말을 듣지 않았다. 붉은 색 손가락이 천천히 내 기도를 눌렀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아무런 저항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귀에서는 추락한다는 편대원들의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지만 나는 응신할 수 없었다. 어느새 조종석 안으로 까지 붉은 피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천천히 내 몸을 타고 흘르기 시작했다. 위쪽으로.
모든게…….네…..탓이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다. 내 탓이다.
죽어라……..
하지만 아직 죽기는 싫어…….. 하고 싶은게 많은데 어떻게 죽으란 말이야? 어머니하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아직 못지켰는데……..
천천히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온 붉은 피가 천천히 내 얼굴을 덮었다. 잠깐 기도에 가해지던 압박이 풀리자 숨을 크게 내쉬었지만 그것도 잠시, 뜨뜻미지근한 끈적거리는 엑체가 기도로 들어가자 숨이 턱 막히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생긴 또다른 손이 내 어깨를 움켜쥐고는 어깨 뼈를 부술 듯 강하게 조였다. 다리, 가슴, 팔 할것 없이 전부 다. 이렇게 죽는 건가........
“창민?”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그동안 참아 왔던 숨을 토해내듯이 내쉰 나는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응시했다. 분명 지금은 한여름인데 왜 이렇게 으슬으슬한거지? 상의는 땀에 푹 젖어 있고, 머리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거칠게 숨을 들이쉬자 뜨뜻한 여름 공기가 폐로 들어와 떨고있는 내 몸을 진정시켜 주었다. 아참, 내 팔은? 번뜩 생각이 나서 내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끊어졌던 신경다발이 연결이라도 되었는지 아주 잘 움직였다. 내 가슴도, 다리도, 몸도, 목도. 모두 멀쩡하다. 천만다행이야. 그냥 꿈이였구나. 아니, 그냥 꿈이 아니라 악몽, 이겠지. 분명 모두 떨쳐버렸다고 생각 했는데.
"창민아?"
그제서야 나는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거야 그림자가 내 머리로 드리워졌으니까.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금발머리, 짙은 금색의 눈썹, 오뚝한 코, 핑크빛 입술, 그리고 테라의 바다보다 더더욱 깊은 푸른 눈. 내 친구이자 동료, 윙맨인 나탈리 프로필라이넨이다. 매일 아침 나에게 찾아와 아침에 약한 나를 깨워주고 돌봐주는 고마운 친구이자 그 끔찍한 일을 같이 겪은 또다른 한사람.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고, 그냥 아침이라서 깨우러 왔어. 오늘 졸업식 날이잖아."
아........ 맞다........ 오늘이구나. 졸업식.
"고마워........"
"뭐, 그렇게 큰건 아니니까. 거기다 네가 몇시간 전부터 꿈을 꾸다가 그런건지는 모르지만 자꾸 큰소리로 소리를 질러대길래 걱정되서 와봤어."
소리를 질렀다고? 내가?
"응. 엄청 크게. 온 기숙사에 다 울려퍼졌다니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젠장.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잠을 잤단말이야? 살짝 낙심해서 침대에 걸터앉은 나의 옆에 나탈리가 천천히 앉았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내쪽으로 쏠려있던 침대가 평형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탈리에게서 전해져오는 온기와 향기가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또 그 꿈이야?"
"하........."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
"응."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이제 묻어둬도 되잖아. 다시는 그런 바보같은 짓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는건 아니야."
"최소한 그 일을 계속해서 곱씹으면서 과거에 눌려 사는것 보다는 것보다는 나아."
톡 쏘아 붙인 나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옷장을 향해 걸어갔다. 뭘하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나탈리는 옷장 속에 처박혀있던 내 생도용 제복을 꺼내 내 얼굴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 좀 징징거리고 옷좀 입어. 남자애가 옷차림이 그게 뭐냐?"
짙은 녹색의 셔츠와 카키색 바지, 그리고 그 위에 걸치는 갈색 가죽 자켓이 차례로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지만 순간적인 반응성이 중요한 전투기 파일럿에게 이런걸 피하는 것은 거의 반사신경급이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자 제복들은 힘 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고, 나는 별다른 반응도 없이 제복으로 손을 가져갔다. 잠깐, 그런데 내 옷차림이 어떻다고? 아차, 까먹고 있었다. 나 지금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이지!
"빠..빨리 나가기나 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이런건 부끄럽다고!
"이미 다 봤고 어차피 볼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시나? 시끄럽고 빨리 옷 입어. 난 나가있을테니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탈리는 그대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멍하니 방문만 쳐다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불편한 정장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나 땀 엄청 흘렸는데 그냥 입어도 되는거야? 시간도 좀 있는데 간단하게 샤워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별 생각 없이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홈 아일랜드 한가운데의 거대한 식수원이자 상수원인 마리아나 호수에서 나오는 시원하다못해 차가운 물이 분무기에서 뿜어져나와 땀에 흠뻑 젖은 내 머리를 다시 한번 적셨다. 차가운 물이 찐득찐득 끈적였던 몸을 한번 훑고 지나가자 어느새 내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그때 그 일에 대한 기억은 슬그머니 내 머릿속 어두운 곳으로 기어들어갔다. 지금은 잊자. 오늘은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해서 정식으로 임관하는, 기쁜 날이니까. 물론 잊지는 못하겠지만.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뜨거운 한여름의 아침이지만 문제는 물의 비열이 크기 때문에 증발하면서 무지막지한 열을 날려버린다는 것이다. 찬 물로 샤워하면 춥긴 춥다. 그건 불면의 법칙이다. 그래서 구석구석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 옷을 입기 위해 갈아입을 옷으로 손을 뻗었.........는데 없네? 아까 안 갖고 들어왔나? 어쩔수 없군. 수건으로 임시로 가리고 밖에 나가서 갈아입는 수밖에. 몸을 닦는 커다란 수건으로 하반신만을 가리고 화장실 밖을 나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 옷장으로 다가가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신기하게도 옷장이 열려 있었지만 나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속옷을 꺼내 입고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제복을 입기 위해 옷장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본 것은......
상의를 갈아 입고 있던 나탈리였다.
새하얀 어깨, 어깨를 따라 내려오는 허리 곡선과 바디라인. 하반신은 아쉽게도 제복 바지를 입고 있어 보지 못했지만 눈이 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상반신은 그대로 나를 굳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친한 친구 사이로만 지냈지 이런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남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취미는 도데체 언제부터 가진거야?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고개만 돌려 살짝 뒤를 돌아본 나탈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깊은 아쿠아마린색 눈동자가 뚫어지게 나를 응시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탈리의 얼굴도 붉은 루비색으로 변하더니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꺄아악!"
"미....미안! 절대 의도한거 아닙니다!"
"아....알면 바로 고개를 돌리란 말이야!"
"죄....죄송합니다!"
나탈리는 내가 사과하자 잠깐 조용히 있었다. 뒤이어 슥슥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탈리의 손이 내 어깨에 올려졌다. 나탈리는 뒤이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내 귀에 대고 물었다.
"........봤어?"
잠깐, 이 질문,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거지? 나는 대답만 하면 되는거지? 그렇지?
".........안봤는데."
"쳇."
혀 차는 소리 같은거 못들었다. 잘못 들은거겠지.
"미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괜찮아."
나탈리는 의외로 쿨하게 나를 용서해주었다. 그동안 친하게 지내서 내가 남이 옷을 갈아입는걸 훔쳐보는 치한이 아니라는건 알고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까놓고 얘기하자면 나는 여자가 옷 갈아 입는걸 훔쳐보는 시간에 전투기 한번 청소해주겠다. 어쨋건, 그건 그렇고.
"하여튼, 너도 참 바보라니까."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아참, 이거 먹어."
나탈리는 주머니에서 하얀 알약 두개를 꺼내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친절하시게도 물 한잔까지 함께. 뭐야 이건?
"진정제. 아까 군의관이 와서 주고 갔어. 너 졸업식 하는데 히스테릭한 반응 일어나면 안된다고 하던데."
"진정제 먹을 정도는 아니고, 이제는 완전히 진정되었다고."
"그래도 먹어. 혹시 모르잖아."
그렇게 말한 나탈리는 씽긋 웃고는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내가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왜 그러는 거야? 특히 최근 들어 나에게 물리적인 접촉을 많이 시도하는 것 같은데........ 별거 아니겠지. 그리고 고민할 시간 같은 것도 없다. 오늘은 졸업식 날. 내가 드디어 정식 파일럿이 되는 날이다. 오늘은 그것만 생각하자. 그런 내 생각에 긍정이라도 해주는지 뚜우 하는 긴 나팔 소리와 함께 기상벨이 울렸다.
리메이크작이 예정되어 있으며, 일부 고증 오류 및 설정 구멍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 - Sortie 000 - 저주
꿈이다. 이건. 분명히 꿈이다.
푸르른 수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어둑어둑한 하늘과 구름의 가장자리는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밀폐된 캐노피 틈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파일럿용 가죽 헬멧이 덮고 있지 않은 내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 투명한 고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마치 꿈속에 있는 것 처럼 몽롱했다. 이 기분, 어디서 많이 느껴본 것 같다. 익숙 하지만 뭔가 불길한, 위화감이 드는 그런 기분.
분명 이건 그날 끝났을 텐데.
[크립터, 크립터, 크립터. 여기는 에르데 제국 황실 선박 스코르피아. 해적이 방위 3-1-4에서 접근 중! 긴급 지원을 바란다, 오버!]
[스카이 00, 스카이 00, 여기는 크로우 네스트. 섹터 에코 21에서 긴급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 현재 레이더 상의 전력은 전투기 8기과 해적선 1기. 선제 공격은 절대 엄금이며 인질이 다치지 않도록 발만 묶어두도록. 구출 부대는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겠다.]
귀에 연결된 헤드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목소리도 아니다. 이건 꿈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소리의 근원 같은것도 없이 그저 내 뇌내 망상에서 나오는 환청일 뿐이다. 나는 결과를 알고 있다. 가면 안된다. 절대 가면 안된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이미 가고 있다.
“수신 완료. 예상 도착 시간 16분. 스카이 01에서 스카이 00에게. 방위 1-3-3으로 선회, 섹터 에코 21에 진입한다.”
스로틀 레버를 살짝 잡아 당기면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조종간을 왼쪽으로 비틀었다. 내가 움직이는게 아니다. 어떤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힘이 내 몸을 움직이고 있다. 부르릉 거리던 엔진의 진동이 점차 작아짐과 동시에 기계식 조준기의 밑단과 수평이던 해수면이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왼쪽 캐노피 윈도우에 푸른 색 빛이 감돔과 동시에 나는 조종간을 천천히 잡아 당겼다. 방위계가 133도가 될 때 까지. 매끄러운 후방 캐노피에는 나를 따르는 3기의 때까치들이 보였다. 방위계 바늘이 133도를 가리킬 때, 나는 조종간을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 수평계를 수평으로 맞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도를 높히면서 엔진출력을 높혔다. 부르릉, 하면서 강렬한 콧김을 뿜어내는 엔진의 진동이 조종석에 울렸다. 뒤이어 누군가가 잡아낸 민간 라디오 채널에서 나오는 ‘발키리의 기행’의 선율이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노래인데. 분명 레코드 판도 내가 깨버렸을 텐데, 어째서 내 귀에 들려오는거지?
어느새 우리 편대는 그곳에 다다르고 있었다. 푸르른 바다 아래쪽에 보이는 두척의 배는 바짝 붙어서 항진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6기의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크로우 네스트, 여기는 스카이 01. 스코르피아 발견. 현재 해적선으로 추정되는 함선과 함께 항해 중이다. 육안 확인된 적기는 도합 6기.”
그래. 내가 한 말이다. 분명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한게 아니다. 저건 내가 아니야.
[알았다. 선제공격은 하지 말되 적기가 응전해오면 발을 묶을 정도로만 상대하라. 지원 부대는 15분 뒤에 도착한다.]
“알았다. 발을 묶어 놓겠다.”
에너지 파이팅에서 고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현재 우리의 고도는 8천피트, 저들은 대략 2천피트 정도. 우리가 급강하 전법을 사용해서 일격 일탈, 적기만 잡는다면 충분히 상대 가능하다. 해적 따위가, 필그림 육군 항공대 최고의 비행편대를 막을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모두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게 된거야?
[스카이 01, 여기는 스카이 03. 해적 따위 후닥 해치우지? 설마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셈?]
“스카이 03, 우리의 임무는 적의 발을 묶는 것이다.”
[스카이 01, 지금 농담하는 거지?]
“당연하지. 전기 급상승 직후 강하, 목표는 적 항공기. 각자 임의 사격으로 격추시키고 고도를 회복한다.”
뒤이어 명령 확인 복창이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스카이 04의 복창이 들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기체를 뒤집은 다음 엘레베이터 패달을 밟으면서 조종간을 힘껏 당겼다. 캐노피에 가득 차있던 하늘빛의 아침 바다가 점점 커졌고, 기계식 조준기의 십자 표시의 중간에 해적 전투기의 동체가 한가득 들어왔다. 진한 갈색의 캔버스 동체가 십자 표적 지시선의 중간에 들어온 순간, 방아쇠를 감고 있던 손가락이 당겨지며 기관포를 발사했다. 양 주익과 엔진 카울링, 기체 하부에 장착된 기총과 기관포들이 진동을 일으키며 탄환을 발사했고, 마치 마법처럼 수십발의 탄환은 정확하게 해적 전투기의 목제 동체를 뚫어버렸다. 긴 꼬리를 길게 끌며 강철을 길게 뽑아 관통력을 증가시킨 20mm 스플린터탄과 길다란 탄심을 가진 13mm 철갑탄, 그리고 다목적 7.62mm 고폭탄은 해적 전투기의 목제 동체를 산산조각냈다. 꼬리날개가 날아가버린 해적 전투기를 그대로 지나친 나는 다시 조종간을 당겨 고도를 회복했다.
여기까지 했으면 좋았을 것을.
[스카이 04에서 스카이 00에게! 적기 2기가 후방에서 접근 중!]
[스카이 01! 해적선이 속도를 높히는데!]
“스카이 03와 04는 그대로 반전해서 적기를 견제하라. 스카이 02와 본기는 해적선의 속도를 늦추겠다. 급강하 준비.”
이때 멈췄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고도를 낮추면서 기관부를 타격하기 위해 접근하던 나는 해적선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해적 두세명이 대공포에 덮어두었던 위장포를 걷어내고 이내 나를 향해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섯기가.
[스카이 01. 적 대공포대 6기.]
“육안 확인했다. 포대 조작원들 먼저 처리하고 재진입한다.”
윙맨에게 그렇게 대답한 나는 스로틀을 당겨 엔진 피치를 줄인 다음 침착하게 조종간을 움직여 나를 향해 돌리고 있는 선수의 대공포를 조준했다. 그리고는 무장을 20mm 기관포로 선택한 뒤 십자선 정중앙에 대공포가 겹치는 순간, 방아쇠를 강하게 잡아 당겼다. 터엉, 터엉하는 묵직한 반동과 함께 하늘에서 흰 꼬리를 끌며 날아간 20mm 스플린터탄이 포방패도 없는 구식 노천 대공포를 덮쳤고, 스플린터탄이 깨지면서 생긴 수많은 파편들이 포대 조작원들을 갈갈히 찢었다. 나를 노리고 천천히 회전하던 다른 대공포도 내 뒤에서 날아오던 스카이 02의 기관포 세례를 받고 침묵했다.
[해적 놈들이 인질들을 꺼냅니다!]
“알았다, 스카이 02. 한번더 진입해서 대공포를 침묵 시킨다. 해적 따위가 우리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라져]
만약 이때 멈췄다면, 과연 그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조종석으로 강하게 짓누르는 중력 가속도를 견디며 임멜만 턴을 한 나는 다시 한번 해적선을 노리고 공격 코스로 진입했다. 이번도 아까와 같이 쉬울 테니까. 기껏 해봐야 해적들인걸.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이들은 대공포를 격렬하게 난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끌고 나오고 있었다.
안돼! 멈춰!
귀족풍의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들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댄 채 우리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수십명의 해적들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엔진 피치를 낮춰 실속 속도 에 가깝게 속도를 늦춘 다음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7.62mm 기총을 해적들을 향해 조준했다. 비행사관학교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인 내가 농성하는 오합지졸도 상대 못할까.
멈춰야 한다. 손가락이 움직이면 안된다. 하지만 내 팔과 다리는 무엇인가에 눌린 듯 부르르 떨기만 할 뿐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마비라도 된 것 처럼, 무거운 바위에 눌린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무서웠다.
그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 강력한 측풍이 내 전투기를 때렸다. 신중하게 조준해놓았던 광학 조준기의 노란색 십자 표시가 획 움직였다. 그리고 7.62mm 기관총탄들이 노란색 궤적을 그리면서 해적선의 갑판을 긁었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전투기에서 발사된 기관총탄의 운동에너지가 연약한 사람들의 살갖을 갈갈히 찢었다. 아침 햇살 보다 더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소리 없는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공포로 뒤덮혔다. 팔다리가 잘린 어른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피로 흠뻑 적셔진 작은 꼬마아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시체에서 뿜어져나온 피가 캐노피에 묻었다. 캐노피에 묻은 피는 점점 캐노피를 덮으면서 내 시야를 가렸다. 캐노피를 뒤덮은 붉은 색 엑체의 한 곳에서 점차 뭉치더니 순식간에 붉은 손이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괴로웠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강하게 내 목을 조이는 이 핏빛 손을 떼어내기 위해서 팔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아직도 말을 듣지 않았다. 붉은 색 손가락이 천천히 내 기도를 눌렀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아무런 저항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귀에서는 추락한다는 편대원들의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지만 나는 응신할 수 없었다. 어느새 조종석 안으로 까지 붉은 피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천천히 내 몸을 타고 흘르기 시작했다. 위쪽으로.
모든게…….네…..탓이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다. 내 탓이다.
죽어라……..
하지만 아직 죽기는 싫어…….. 하고 싶은게 많은데 어떻게 죽으란 말이야? 어머니하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아직 못지켰는데……..
천천히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온 붉은 피가 천천히 내 얼굴을 덮었다. 잠깐 기도에 가해지던 압박이 풀리자 숨을 크게 내쉬었지만 그것도 잠시, 뜨뜻미지근한 끈적거리는 엑체가 기도로 들어가자 숨이 턱 막히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생긴 또다른 손이 내 어깨를 움켜쥐고는 어깨 뼈를 부술 듯 강하게 조였다. 다리, 가슴, 팔 할것 없이 전부 다. 이렇게 죽는 건가........
“창민?”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그동안 참아 왔던 숨을 토해내듯이 내쉰 나는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응시했다. 분명 지금은 한여름인데 왜 이렇게 으슬으슬한거지? 상의는 땀에 푹 젖어 있고, 머리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거칠게 숨을 들이쉬자 뜨뜻한 여름 공기가 폐로 들어와 떨고있는 내 몸을 진정시켜 주었다. 아참, 내 팔은? 번뜩 생각이 나서 내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끊어졌던 신경다발이 연결이라도 되었는지 아주 잘 움직였다. 내 가슴도, 다리도, 몸도, 목도. 모두 멀쩡하다. 천만다행이야. 그냥 꿈이였구나. 아니, 그냥 꿈이 아니라 악몽, 이겠지. 분명 모두 떨쳐버렸다고 생각 했는데.
"창민아?"
그제서야 나는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거야 그림자가 내 머리로 드리워졌으니까.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금발머리, 짙은 금색의 눈썹, 오뚝한 코, 핑크빛 입술, 그리고 테라의 바다보다 더더욱 깊은 푸른 눈. 내 친구이자 동료, 윙맨인 나탈리 프로필라이넨이다. 매일 아침 나에게 찾아와 아침에 약한 나를 깨워주고 돌봐주는 고마운 친구이자 그 끔찍한 일을 같이 겪은 또다른 한사람.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고, 그냥 아침이라서 깨우러 왔어. 오늘 졸업식 날이잖아."
아........ 맞다........ 오늘이구나. 졸업식.
"고마워........"
"뭐, 그렇게 큰건 아니니까. 거기다 네가 몇시간 전부터 꿈을 꾸다가 그런건지는 모르지만 자꾸 큰소리로 소리를 질러대길래 걱정되서 와봤어."
소리를 질렀다고? 내가?
"응. 엄청 크게. 온 기숙사에 다 울려퍼졌다니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젠장.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잠을 잤단말이야? 살짝 낙심해서 침대에 걸터앉은 나의 옆에 나탈리가 천천히 앉았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내쪽으로 쏠려있던 침대가 평형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탈리에게서 전해져오는 온기와 향기가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또 그 꿈이야?"
"하........."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
"응."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이제 묻어둬도 되잖아. 다시는 그런 바보같은 짓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는건 아니야."
"최소한 그 일을 계속해서 곱씹으면서 과거에 눌려 사는것 보다는 것보다는 나아."
톡 쏘아 붙인 나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옷장을 향해 걸어갔다. 뭘하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나탈리는 옷장 속에 처박혀있던 내 생도용 제복을 꺼내 내 얼굴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 좀 징징거리고 옷좀 입어. 남자애가 옷차림이 그게 뭐냐?"
짙은 녹색의 셔츠와 카키색 바지, 그리고 그 위에 걸치는 갈색 가죽 자켓이 차례로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지만 순간적인 반응성이 중요한 전투기 파일럿에게 이런걸 피하는 것은 거의 반사신경급이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자 제복들은 힘 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고, 나는 별다른 반응도 없이 제복으로 손을 가져갔다. 잠깐, 그런데 내 옷차림이 어떻다고? 아차, 까먹고 있었다. 나 지금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이지!
"빠..빨리 나가기나 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이런건 부끄럽다고!
"이미 다 봤고 어차피 볼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시나? 시끄럽고 빨리 옷 입어. 난 나가있을테니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탈리는 그대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멍하니 방문만 쳐다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불편한 정장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나 땀 엄청 흘렸는데 그냥 입어도 되는거야? 시간도 좀 있는데 간단하게 샤워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별 생각 없이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홈 아일랜드 한가운데의 거대한 식수원이자 상수원인 마리아나 호수에서 나오는 시원하다못해 차가운 물이 분무기에서 뿜어져나와 땀에 흠뻑 젖은 내 머리를 다시 한번 적셨다. 차가운 물이 찐득찐득 끈적였던 몸을 한번 훑고 지나가자 어느새 내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그때 그 일에 대한 기억은 슬그머니 내 머릿속 어두운 곳으로 기어들어갔다. 지금은 잊자. 오늘은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해서 정식으로 임관하는, 기쁜 날이니까. 물론 잊지는 못하겠지만.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뜨거운 한여름의 아침이지만 문제는 물의 비열이 크기 때문에 증발하면서 무지막지한 열을 날려버린다는 것이다. 찬 물로 샤워하면 춥긴 춥다. 그건 불면의 법칙이다. 그래서 구석구석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 옷을 입기 위해 갈아입을 옷으로 손을 뻗었.........는데 없네? 아까 안 갖고 들어왔나? 어쩔수 없군. 수건으로 임시로 가리고 밖에 나가서 갈아입는 수밖에. 몸을 닦는 커다란 수건으로 하반신만을 가리고 화장실 밖을 나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 옷장으로 다가가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신기하게도 옷장이 열려 있었지만 나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속옷을 꺼내 입고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제복을 입기 위해 옷장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본 것은......
상의를 갈아 입고 있던 나탈리였다.
새하얀 어깨, 어깨를 따라 내려오는 허리 곡선과 바디라인. 하반신은 아쉽게도 제복 바지를 입고 있어 보지 못했지만 눈이 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상반신은 그대로 나를 굳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친한 친구 사이로만 지냈지 이런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남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취미는 도데체 언제부터 가진거야?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고개만 돌려 살짝 뒤를 돌아본 나탈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깊은 아쿠아마린색 눈동자가 뚫어지게 나를 응시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탈리의 얼굴도 붉은 루비색으로 변하더니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꺄아악!"
"미....미안! 절대 의도한거 아닙니다!"
"아....알면 바로 고개를 돌리란 말이야!"
"죄....죄송합니다!"
나탈리는 내가 사과하자 잠깐 조용히 있었다. 뒤이어 슥슥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탈리의 손이 내 어깨에 올려졌다. 나탈리는 뒤이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내 귀에 대고 물었다.
"........봤어?"
잠깐, 이 질문,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거지? 나는 대답만 하면 되는거지? 그렇지?
".........안봤는데."
"쳇."
혀 차는 소리 같은거 못들었다. 잘못 들은거겠지.
"미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괜찮아."
나탈리는 의외로 쿨하게 나를 용서해주었다. 그동안 친하게 지내서 내가 남이 옷을 갈아입는걸 훔쳐보는 치한이 아니라는건 알고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까놓고 얘기하자면 나는 여자가 옷 갈아 입는걸 훔쳐보는 시간에 전투기 한번 청소해주겠다. 어쨋건, 그건 그렇고.
"하여튼, 너도 참 바보라니까."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아참, 이거 먹어."
나탈리는 주머니에서 하얀 알약 두개를 꺼내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친절하시게도 물 한잔까지 함께. 뭐야 이건?
"진정제. 아까 군의관이 와서 주고 갔어. 너 졸업식 하는데 히스테릭한 반응 일어나면 안된다고 하던데."
"진정제 먹을 정도는 아니고, 이제는 완전히 진정되었다고."
"그래도 먹어. 혹시 모르잖아."
그렇게 말한 나탈리는 씽긋 웃고는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내가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왜 그러는 거야? 특히 최근 들어 나에게 물리적인 접촉을 많이 시도하는 것 같은데........ 별거 아니겠지. 그리고 고민할 시간 같은 것도 없다. 오늘은 졸업식 날. 내가 드디어 정식 파일럿이 되는 날이다. 오늘은 그것만 생각하자. 그런 내 생각에 긍정이라도 해주는지 뚜우 하는 긴 나팔 소리와 함께 기상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