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01 - 졸업식날
1914년, 인류는 한차례 대규모 전면전을 치뤘다. 훗날, 제 1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린 이 전쟁은 이른바 '모든 전쟁의 어머니', 혹은 '마지막 전쟁'이라고 불리며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람들의 희망의 탑에 불을 지폈다. 뭐, 단단한 줄 알았던 그 탑의 기반은 사실 지푸라기보다 연약하다는게 밝혀진건 얼마 되지 않아서지만. 세기의 미치광이 히틀러가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시작하고, 뒤이어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생긴 2개의 거대한 전선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대규모 전쟁은 평화에 대한 희망을 모조리 부수어버렸다. 악의 축인 추축국이 무너진 다음에야 평화가 찾아왔지만 물론 그 평화 조차도 오래 가지 않았다.
2차대전 직후, 영국과 미국은 정말 말 그대로 '생각지도 못한 작전 (Operation Unthinkable)'을 발동, 동유럽의 붉은 군대를 몰아내고 소련과의 새로운 '이념 전쟁'을 시작한다. 두개의 거대한 세력이 맞붙은 이 전쟁은 지난 두번의 양 대전에서 개발된 전략 폭격, 독가스, 그리고 핵무기 같은 수백가지의 대량 살상 무기가 거리낌 없이 사용되었다. 정말, 잊지 못할 날들. 덕분에 인류는 제 3차 대전 개전 직후 2년 뒤에 전체 인구의 80%를 잃은 채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핵무기의 과도한 사용은 지각의 변화를 잃으켜 전체 육지의 40%를 침몰 시키고 지각을 변동시켰으며, 대전 기간동안 피로서 얻어낸 새로운 발명품들을 상실시켰다. 그 뒤로 우리 인류에게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과 방사능으로 오염된 토양, 그리고 인류의 몇 남지도 않은 발명품들이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방사능으로 뒤덮힌 육지를 피해 끼리끼리 뭉쳐 바다를 누볐고, 그렇게 '제 2차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다. 항공모함, 구축함, 전함, 순양함 같은 군함들 뿐만 아니라 대형 여객선과 화물선, 심지어 수송선까지 거주 구역으로 삼은 인류는 네덜란드 운하의 보트하우스를 보는 것 처럼 바다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고기를 먹으면서 산지 30년이 됐을 때, 인류는 과거 버뮤다 삼각지역, 아니 버뮤다 삼각지역이었던 곳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포털을 발견했다. 이른바 코드명 '테라'라고 붙혀진 이 평행세계에 지구와 비슷한, 하지만 평균 신장이 조금 작은, '리히트'라는 종족이 살면서 과거 지구와 비슷한 문명을 일구고 있었다. 이들의 세계와 융합하기로 결정한 세계 정부는 이주민을 꾸려 포털을 넘어 테라로 넘어갔으나, 무슨 일인지 어른들의 경우 대부분 이주 얼마 뒤 사망하고 아이들만 남는 참사가 발생했다. 뒤이어 얼마 되지 않아, 포털의 강력한 에너지장이 세포의 텔로미어를 축소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이주민들은 20세 미만일 경우에만이 가장 높은 생존성을 보인다는 인체연구 결과가 나왔다. 결국 세계 정부는 인류라는 종족의 보전을 위해 전세계에 퍼져있는 어린이들 중 우수한 인자만을 수집, 새로운 이주민, 즉 필그림 선단을 꾸려 신세계 테라로 보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땅, 특히 문명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다른 세계로 이주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고 평화적인 것도 아니었다. 우리 필그림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필그림 함대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아무런 지도도 없이 나오게 되었고, 덕분에 무려 1달간이나 거대한 테라의 대양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큰 섬을 발견하고 필그림의 최초의 육상 식민지인 '홈 아일랜드'를 건설한다. 우리는 여기가 무주공산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니다. 여기에도 지적 생명체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홈 아일랜드의 주인은 바로 '에르데 제국'이라는, 메리고 대륙의 최강대국이였다. 그들로 부터 홈 아일랜드의 거주권을 받기 위해 우리는 이른바 '홈 아일랜드 방어전'을 치뤘고, 그들보다 약간 앞선 무기체계를 보유했던 필그림들은 비교적 적은 손실로 에르데 제국을 누르고 홈 아일랜드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에르데 제국에서 4번째로 큰 섬인 '홈 아일랜드'를 무력으로 점령한 우리 필그림들은 바다가 행성 표면의 90%를 덮고 있는 테라의 상황에 맞추어 지구식 함대와 공군을 건설했다. 덕분에 침략당한 제국민들과의 관계는 극악으로 치닿게 된다. 필그림들이 도착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10년간, 거의 매일 해상이나 공중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부족한 인구와 부족한 병력을 가진 필그림들은 징병제를 시행하며 병력을 최대한 긁어모았다. 최초 정착인구 5000여명의 인구가 2차 필그림 함대의 합류로 15000여명으로 늘어났지만, 그것을 갖고 홈 아일랜드를 지키기에는 턱도 없이 무리였다. 남녀의 차별 없이 14세 이상 부터 징집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고, 현역 조종사건 비행사관학교 생도건 모두 실전 투입되어 홈 아일랜드의 방어에 투입되었다. 그래서 우리 필그림 4세대, 홈 아일랜드에 네번째로 도착한 필그림들은 기초적인 군사 훈련만 받은 채 실전 투입되어 비행을 배우기도 전에 실전 경험을 쌓았다. 덕분에 나 같은 생도도 벌써 4기의 격추 기록을 갖고 있고, 에른스트 하르트만 같이 200여기도 넘게 격추시킨 슈퍼 에이스들도 즐비하게 늘려 있다. 과거 지구에서의 에이스의 기준이 5기 이상 격추였는데 여기서 에이스의 기준은 20기란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지. 언제 20기 격추해서 에이스 타이틀을 딸 수 있을지.......하........
이야기가 잠깐 다른 곳으로 샜군. 뭐, 그렇게 천천히 세력을 불려나가던 우리 필그림들은 40년 전, 인류가 겪었던 끔찍한 일들을 다시 한번 겪게 되었다. 에르데 제국의 유로파 대륙 동맹국들인 브리타니아 제국과 루스 제국이 기습적으로 크리스란트 제국의 침략을 받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에르데 제국 최대의 해군기지이자 우리 홈 아일랜드에서 비행기로 고작 4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파이어 만을 후소 제국이 폭격했다. 일요일 새벽에 자행된, 선전포고 조차 없었던 이 폭격은 필그림과 에르데 제국 양측을 긴장시켰고, 특히 우리 필그림들은 과거 비슷한 일을 당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분노했다. 정의라는 명분 아래, 양측은 10년간 쌓여온 해묵은 감정들을 정리하고 동맹을 맺게 되었다.
과연 그 동맹이라는게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 동맹을 맺은 뒤에 아직 우리 필그림이나 에르데 제국이나 직접적으로 취한 군사행동은 없다. 메리고 대륙 에르데 연합 제국은 총 12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으나 각 주의 자치권이 너무나도 강하고, 황제는 그저 상징적인 지위이기 때문에 실제 정치는 황제가 아니라 제국 의회가 처리하는, 사실상 공화정에 가까운 모습이다. 후소 제국과 크리스란트 제국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브리타니아 제국과 루스 제국과 '트라이앵글 얼라이언스', 이른바 삼각 동맹을 채결하지만, 애시당초 군대가 너무나도 빈약해 본토 방어도 힘든 실정이다. 제국 전쟁 개전 직후의 병력은 고작 각 주의 방공을 책임지는 16개 항공 기사단과 테라 전반에 걸쳐있는 거함 거포주의 사상에 입각한 전함 4척과 중순양함 6척, 항공모함 1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20척이 전부였고, 설상가상으로 그들 중 항공모함을 제외한 대다수의 주력함들을 사파이어만 폭격에서 상실해버렸다. 물론 착저한 전함들과 순양함들을 모두 인양해 드라이독에서 수리를 하고 있고, 구사일생으로 항공모함들과 구축함 다수, 그리고 어뢰정들은 살아남았지만 그로는 공격은 커녕 연안 방어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야간 항공 기사단 '나이트 라이더'나 21 잠수함대 '언더워터', 해군 항공대 '블루 데빌' 같은 뛰어난 에이스 부대들도 있지만 전쟁은 부대 하나, 장비 하나로 하는게 아니다. 에르데 제국의 상황은, 말 그대로 허리케인 앞의 촛불 신세였다.
물론 이런건 내가 신경 써야할 사항이 아니다. 지금 나에게 제일 급한건 이미 늦은 졸업식에 늦지 않도록 가는 것. 나탈리가 미리 와서 깨워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지각을 면치 못했다. 가끔씩은 나도 신기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뭐, 이미 이렇게 졸업식 시작하고 10분이 지난 시점에서도 비행사관학교 정문을 향해 달리는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지만, 그건 100% 어제 밤에 꿨던 꿈 때문이다. 그 잠자리 뒤숭숭한 꿈 때문에 그런거라고. 절대 내가 게으른게 아니다.
비행사관학교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고 나니 이재 500m도 채 남지 않은 비행사관학교 정문이 보였다. 거대한 철제 구조물이 ㅅ자로 엮인 채 우뚝 솟아있는 정문 뒤로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비행사관학교 교정이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6개의 활주로를 가진, 홈 아일랜드에서 두번째로 큰 공항인 필그림 베이스가 보였다. 졸업식을 위해 주기 되어 있는 수십기의 깨알같은 전투기들과 폭격기들도 보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슬슬 들어가지 않으면 졸업식에 완벽하게 늦게 되기 때문에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언덕 위에서 잠깐 숨고르기를 끝낸 나는 다시 언덕 아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지."
"소...소령님......"
아무래도 오늘도 조용히 들어가기는 글른것 같다. 교문을 조용히 통과했다고 생각 했을 때, 생각치도 못한 복병이 내 발목을 잡았다. 정확하게는 내 뒷덜미이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지금 내 뒷덜미를 욺켜쥔 채 차갑고 절도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추측하는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거의 매일 해왔던 일이니까. 누구라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갑고 절도 있는 목소리와 라벤더향의 향수 냄새. 대응되는 검색 대상은 단 한명. 내 스카이 편대의 교관이자 실전에서 36기의 해적 전투기를 격추시킨 필그림 공군의 베테랑 에이스, 코르넬리우스 스토왈트 소령이다.
"이창민 생도! 지금 시간이 몇시냐?"
"0816시 입니다!"
"졸업식 준비를 위한 집결 시간은 몇시냐?"
"0800시 입니다."
"귀관이 늦은 사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저도 모르겠어요. 나도 왜 이러는지 몰라.........
"귀관은 우리 사관학교 최우수 생도이자 조종사다. 그리고 귀관은 지난 1년간 조종사와 군인은 정의를 위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그 정의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게 뭔가?"
"군율, 입니다!"
"그렇다! 군율이다! 군율 위반은 중죄다, 중죄! 창민 생도는 지금 정신이 있는건가 없는건가? 어? 어떻게 오늘 같은 날에 지각을 한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스토왈트 소령은 내 뒷덜미를 더욱 거세게 잡아당겼다. 단추로 매여진 앞섶이 기도를 조르자 나는 순간 턱하고 숨이 막혔다. 손을 움직여서 숨통을 트려고 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아까 그 꿈 속에서 처럼. 스토왈트 소령이 나에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런건 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귀에서 들어오는 소리는 오로지 삐-하는 고음 하나 뿐. 그마저도 동굴 속의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눈 앞이 핑핑 돌았다. 살짝 어질어질해서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무서웠다. 눈 앞에 아까 봤던 그 시뻘건 손이 다시 나타날까봐. 근육들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서웠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나를 현실로 되돌린 것은 스토왈트 소령이 내 목덜미를 놨을 때였다. 턱 막혀있던 기도가 뻥 뚫리자 그제서야 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정.....하.....겠습니다......."
"후........."
내가 한심해 보였는지 길게 한숨을 내쉰 스토왈트 소령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또 숨을 못쉬냐?"
"예........."
"또 그 꿈이야?"
"예.........."
"후........."
한숨을 내쉰 스토왈트 소령이 파랗게 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소령님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군율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하시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너그럽게 대해주신다. 그 일 이후 PTSD로 1주일간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나를 돌봐주신건 소령님과 나탈리였으니까. 가끔씩 내 사생활에 너무나도 깊게 참견하지만 그건 나를 걱정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뭐, 알고 있다만........ 그렇지만 졸업식날 까지 늦는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시정하겠습니다, 소령님."
"이제는 시정이고 뭐고 해봤자 무지 늦었지만. 오늘 아침에 나탈리랑은 별일 없었냐?
못 넘어가겠군.
"소령님!"
"알아, 안다고. 농담 좀 해본거야."
"지금 벌써 10번도 넘지 않았습니까! 그녀석과 저는 그냥 친한 친구사이라니까요!"
"친한 친구 정도의 관계로 매일 아침에 깨워주고 식사를 챙겨줄까?"
"네."
그렇게 해주니까 친한 친구잖아요?
"너도 참......답이 없구나."
"네?"
"아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냐?"
나탈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계속해서 나를 추궁하는 스토왈트 소령을 지나, 나는 졸업식이 열리고 있는 필그림 베이스로 향했다. 필그림 베이스로 가는 길은 크게 2가지, 학교 건물을 통과하거나 학교 주변을 돌아가는 방법이 있는데, 아무래도 학교 건물을 통과하는게 훨씬 빠를 것 같아 학교 건물을 지나가기로 했다. 하얀색 대리석이 깔린 학교 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지금쯤 다들 졸업식에 갔을 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거지. 필그림 비행사관학교의 졸업식은 매우 특별하다. 일반적인 졸업식이 그동안 학교에서 있으면서 겪었던 고난들을 참고 이겨낸 것을 축하하는 자리라면, 필그림 비행사관학교의 졸업식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거대한 일종의 축제이다. 그동안의 고충을 견뎌내고 어엿한 파일럿이 된 생도들을 축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인 필그림들의 평화를 지키는 피스 키퍼가 된 것을 축하하는 거대한 축제이다. 그런 축제에 늦었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다급한지 알겠지? 단단한 가죽 군용 부츠는 뛰는데 그렇게 적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자잘한 사실에 신경을 쏟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늦었다니까! 새하얀 복도를 가로지르고 코너를 돌고, 계단을 내려가고. 이 모든 것이 마치 바람 처럼 스쳐지나갔다. 계단을 내려간 뒤 코너를 돌던 나는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 재수 없이도, 무언가 단단한 것에 배와 가슴을 부딛혔다. 둔탁한 충격이 가슴을 강타하자 헉하고 폐에 있던 공기가 터져나왔다. 도데체 뭔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을 때, 그곳에 있던건........
시체 같은 소녀였다.
혈기 없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서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고, 마치 신이 별을 따다 붗인 것 같은, 깊은 에메랄드 빛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신이 조각한 것 같은 또렷한 이목구비를 따라 푸른 냇물처럼 흐르는 연한 쪽빛이 감도는 빛나는 새하얀 짧은 은발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를 더욱 수상하게 만들었다. 하얀색 상의에는 각종 금색 견장이 달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어린 꼬마의 몸매라고는 믿을 수 없는 늘씬한 몸매를 잘 보여주는 검은색 스커트가 있었다. 흐리멍텅한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움직이자 나는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강하게 부딪힌 이마를 왼손으로 문지르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권위와 위엄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그 눈의 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누군가를 향한 원망과 증오도 같이. 분명히 예쁜데, 분명히 예쁜데, 정말, 장미조차 피길 부끄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운데, 웬지 다가갈 수 없었다. 마치 함부로 만지면 안되는 귀중한 물건을 보는 것 같은 이 부담감.
필그림의 세력권인 이 홈 아일랜드에서, 이렇게 작은 꼬마 아이가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은 단 하나 뿐이다. 이녀석은 얼마 전에 도착한 새로온 필그림이라는 것. 3차 필그림들이 도착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건 내가 소식과 너무 담을 쌓고 살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불안한 세계에 먼저 온 선배로서 길을 잃은 꼬마 소녀를 돌봐주는건 당연하다는 의무감이 솟아났다. 나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초점이 없기도 하고 있기도한 아리송한 소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소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처음 만진 것이라는 듯이 소녀는 움찔 떨었고, 나는 그녀의 눈에서 더더욱 커지는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꼬마야 미안. 오빠가 조금 바빠서 실수했어. 꼬마 혼자서 여기 있으면 안되니까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렴.”
그렇게 말한 나는 이정도면 되었겠지, 하고 일어나서 다시 출구를 찾았다. 비행대대 대기실은 2층 복도에서 고작 300m거리. 빨리 뛴다면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길 잃은 꼬마한테 신경을 쓸 많큼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라서 빨리 가려고 했지만, 나는 몇걸음을 채 띄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소녀가 내 제복 옷깃을 잡고 있었다. 뭐야? 설마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이니 어쩌구 하는건 아니겠지? 꼬마의 손을 풀기 위해 옷을 당겨보았지만 그럴수록 소녀의 주먹은 점점 더 단단해져갔다. 결국 나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다시 한번 봐야 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눈 앞에서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저게 시리우스구나. 얼굴이 마치 불이 붙은 것 처럼 화끈거렸다. 뒤이어 이어진 묵직한 충격이 등에 전해졌을 때야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나, 이 꼬마한테 맞은거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을 듯 오락가락하는 정신줄을 잡고 나서 꼬마에게 한소리 하려는 때, 꼬마 소녀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검지 손가락을 내 이마에 갖다 대었다. 마치 나에게 일어나지 말라고 위협하는 것처럼. 소녀의 눈동자에서 무슨 레이저빔이 나오는 것 마냥, 내 근육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구한테, 꼬마라고 하는 겁니까?”
꼬마한테 꼬마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절대 꼬마 소녀의 검지가 내 이마에 있고, 어느새 나타난 귀족 풍의 하얀 드레스를 차려 입은 누나가 내 목에 끝이 날카롭게 갈아진 레이피어를 갖다대서 그런게 아니다.
“인간들이란 정말 무례하군요. 대화가 아니라 폭력부터 사용하니.”
이렇게 목에 칼을 대고 있으면 대화가 되겠냐? 이 무서운 막무가내 누님은 언제든지 내 목을 꿰뚫어버릴 기세였다. 뾰족한 칼끝이 목에 닿을락 말락하는데 정상적인 생각을 하기는 힘들군.
“지금 이분이 누구신줄 알고……..”
“에리카.”
놀랍게도 나를 살려준건 꼬마 소녀였다. 앙증맞은 작은 입이 움직였고, 뒤이어 꼬마의 손이 올라가면자 에리카라고 불린 이 막무가내 누님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내 목에 대었던 칼을 치웠다. 물론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건 멈추지 않았지만.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에리카.”
저기, 누가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좀 알려줘.
“실례합니다만, 지금 저희는 필그림 비행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졸업식장으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도데체 꼬마…….”
레이저 빔이 내 눈을 꿰뚫었다.
“……숙녀분께서 저희 졸업식에 참여하려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숙녀에게 사정을 케물을 생각입니까?”
아니요.
“저도 졸업식에 가야 하니 길을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아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에리카라고 불린 막무가내 누님의 날카로운 눈길이 내 눈을 꿰뚫었다. 이봐요, 손이 검으로 향하는거 다 보여요. 이쯤 되면 답은 정해져있는 거군.
“…….따라 오세요.”
“….어디갔다가 이제 오는거야?”
조용히 조종사 대기실에 들어가자 나를 반겨준건 나탈리의 핀잔이었다.졸업식의 하이라이트인 졸업생 탑10의 비행이 나 하나 때문에 늦어지게 되었으니 이해는 가지만, 나는 나대로 사정이 있다고.
“미안. 갑자기 일행이 생겨서.”
엄지 손가락으로 내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복도에서 만난 불청객 일행이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기까지 오는 내내 나를 죽일 것 같은 시선에 죽을 것 같았다고. 나탈리는 내 뒤에 차례로 서있는 하나의 꼬마와 한 호위무녀 (…)를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의외로 저런 동작도 굉장히 귀엽군.
“창민아………”
그런데 나탈리 너는 왜 그렇게 울먹이는거냐? 어느새 나탈리의 두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고, 볼은 새빨개져있었고, 입술은 윗니로 꽉 깨물고 있었다. 왜 우는거야?
“너……..로리콘이였어?”
“도데체 어디서 그런 생각을 한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늦게 올 수가 없잖아. 그것도 이런 어린 애와 같이.”
“아니야! 그런거 아니라고! 그냥 오다가 만났는데 졸업식에 간다길래 데려다 준거야. 이봐, 꼬마, 너도 말을 좀 해봐!”
대답은 없었다. 어느새 사라져 버렸네. 뭐, 상관 없겠지. 별일은 아닐거야.
“우에에엥……. 어떻게 저런 꼬맹이에게 반할 수가 있어……..”
………나탈리를 달래는건 별일이었다..........
나에게 매달려서 10분동안 펑펑 운 나탈리를, 나는 로리콘이 아니라는 확언과 함께 품에 안아서 간신히 진정시킨 다음, 조종사 대기실에 모여있는 10명의 최우수 졸업자, 1위에서 10위는 얼마 뒤에 도착한 스토왈트 소령의 브리핑과 함께 진지함을 되찾았다. 물론 나탈리를 달랠 때 품에 안은 것 때문에 단체로 놀림을 받았지만, 지금은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평소에 많이 받아온 오해라서 이젠 해명하기도 지치니까.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홈 아일랜드 방어 사령관 아이제하우저 중장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스토왈트 중장은 마지막으로 곡예 비행 코스를 우리에게 설명했다.
"이미 다들 설명해서 알겠지만, 이건 전투 기동이 아니라 순전히 곡예 비행이다. 중요한 손님들도 와게시니까 관중석에 가까이 다가거나 하는 놈들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 알았지?"
중요한 손님?
"라디오 못들었나 라디오?"
스토왈트 소령이 못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라디오가 놓여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졸업식 축하 인사가 나오고 있던 라디오에서는 홈 아일랜드 방어 사령관의 40대 중년 같은 목소리가 아닌, 크지만 앳되어 보이는, 조용하지만 품위있는, 하지만 굉장히 슬픈 목소리. 마치 먹구름이 짙게 낀 하늘에서 떨어진 눈꽃이 내리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아까 어디에서 많이 들은 것 같은 목소리인건 그냥 기분 탓이겠지?
[........ 이상 에르데 제국의 제 8황녀, 새틴의 대공 사냐 공주였습니다.]
공주? 무슨 이런 누추한 곳에 공주나 되시는 분이 오셨대?
"왔다고 하니까 그냥 그런줄 알고. 자, 그림 식 진행대로 졸업 성적 1위의 창민부터 출격한다."
짧게 경례를 할틈도 없이 나는 바로 활주로에 주기되어 있는 내 전투기를 향해 달려갔다. 이미 몇명의 정비사들이 최종 점검을 마쳤는지 헬멧과 비상 탈출용 낙하산을 들고 전투기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평소에 하던 훈련대로 딱딱한 금속제 날개를 밟고 올라가 그대로 조종석에 뛰어올랐다. 가죽제 쿠션이 푹신하게 나를 받아주었고, 뒤이어 안전벨트가 나를 조종석에 단단하게 밀착시켰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감싸안는 포근한 느낌. 조종석에 앉으면 더이상 땅을 볼 수 없다. 볼 수 있는건 치켜들려진 기수와 엔진 카울링, 광학식 조종경, 그리고 방탄 유리 너머의 푸른 여름 하늘 뿐. 물론, 하늘을 지키는 우리들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기체에 앉아 비행계기 체크 리스틀을 들고 하나씩 체크하기 시작하자 비행사관학교 정비대장인 카를로스 상사가 내 헬멧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기체 정비는 최상입니다, 소위님. 졸업,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류미스를 맡아주셔서 고마워요, 상사. 나중에 한잔이라도 하죠."
물론 알코올이 아니라 콜라 같은 탄산음료 이야기지만.
"하하하하!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호쾌하게 웃은 카를로스 상사가 그대로 뒤쪽으로 열려있던 캐노피를 밀었다. 뒤이어 찰칵, 소리와 함께 캐노피가 고정되었고, 양쪽에서 조절이 가능한 캐노피 고정핀이 돌아갔다. 이제 나는 혼자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방탄 유리를 뚫고 그대로 내리쬐었다. 예열된 엔진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는 안그래도 더운 여름 공기와 함께 나를 달구어 놓았고, 뒤이어 머리에 쓴 방한 헬멧도 가세했다. 마지막으로 계기판을 점검한 다음, 눈을 보호하기 위한 고글을 썼다. 엔진 정상, 플랩, 정상, 러더 정상, 에일러론 정상. 내 애기, 류미스의 출격 준비가 완료되었다. 때마침 높이 솟은 관제탑에서 나에게 무전을 보내왔다.
[여기는 지상 관제소. 졸업 축하한다. 출격 준비는 끝났는가?]
"고맙다. 여기는 알파 117 스카이 01. 출격 준비 완료."
[1번 활주로에서 발진하라. 멋진 비행을 보여주길 기대하겠다.]
모든 비행기는 이륙하기 직전, 활주로로 가기 위해 택싱을 해야한다. 물론 착륙을 할줄 아는 우리 비행사관들에게 그정도야 쉬운 일이지. 엔진의 회전수를 높이자 엔진에서 전달되는 진동이 몸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뒤이어 천천히, 류미스가 앞으로 나갔다. 발로 밟고 있던 브레이크를 푼 다음 페달을 밀자 류미스가 천천히 왼쪽으로 틀었다. 그대로 나는 1번 활주로로 진입했다.
"알파 117 스카이 01, 이륙 준비, 완료."
[오르카, 이륙을 허가한다. 좋은 비행 되도록.]
왼손을 앞으로 쭉 밀고 계기판의 플랩 버튼을 두드렸다. 높아지는 진동음과 함께 전기 모터 소리가 조종석 안에서 울렸다. 류미스의 양 주익에 달려있는 플랩이 내려가는 저음이 끝나자, 나는 그대로 브레이크를 풀었다. 무언가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그립고도 익숙한 느낌과 함께 류미스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뒤이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나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고도계의 바늘이 3000을 가리켰을 때 수평비행으로 전환한 나는 관제탑에서 알려주는 항로 대로 따라갔다. 전방 방탄 유리 너머로 보이는 수백명이 모여있는 졸업식장이 보이는군.
그때였다.
귀를 찢는 긴 고음의 소음이 들렸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처럼 전율이 찌르르 울렸다. 반복되는 고음과 저음의 피치. 공습 경보다.
“여기는 스카이 01! 공습 경보를 수신했다. 도데체 무슨 일인가?”
[해적 전투기 10기가 트라이앵글 포메이션으로 동쪽에서 접근 중이다. 현재 비행중인 모든 전투기는 해적 요격에 전념하라.]
무전망이 혼란스러워졌다. 다른 비행장에서 긴급 발진하는 전투기들의 무전이 들려왔고, 항로를 정리하는 관제사들의 비명도 같이 들려왔다. 그리고 육군 방공포대에서 전달하는 대공포격 지시와 사격 제원도 같이.
[치익......적기 10기 방위 0-8-9에서 접근 중!]
[포격 각도 85도, 고도 2000피트! 대공포격 개시.]
슬쩍 방위계를 보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은 0-9-2도. 곧있으면 보여야하는데 말이지........ 하늘에서, 그것도 오늘과 같은 새파란 하늘에서 적기를 찾는건 무진장 어렵다.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최대한 해를 등지려고 할거고, 태양 반사광을 막기 위해 최대한 낮은 채도의 도장을 사용했을거다. 하지만 하나 다행인게 있다면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비교적 찾기 쉽다는거지. 홈 아일랜드의 강력한 레이더망과 방공망에 걸린 이상, 대공포들이 요격을 시작하게 된다. 홈 아일랜드의 주력 대공포는 바로 대구경 88mm 대공포와 105mm 고사포였다. 지름이 88mm와 105mm에 달하는 대구경 탄환들이 수직으로 쏘아 올려져 거대한 회색 꽃을 하늘에 피워내고 있었다. 지금 내 기준으로 11시 방향. 저쪽에 있는 거군.
"알파 117 스카이 01이다. 적기를 요격하겠다."
[허가하지 않는다. 비무장인 알파 117기는 즉시 선회하여 공역을 이탈하라.]
이탈하라고? 적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이탈하라. 비무장인 이상 전투 속행을 불가능하다.]
물론 직접적인 전투는 못하겠지. 무장을 했던 안했던 간에. 그때 그 일 이후로 방아쇠는 도통 당길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미끼가 되어서 대공포 밀집지역으로 끌고 갈 수는 있잖아? 안그래?
[알파 117은 즉시 1-8-0으로 선회하라! 다시 한번 말한다. 1-8-0으로 선회하라!]
"최소한 미끼가 되어서 대공포대로 유도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동맹국의 고위층 앞에서 격추당할 셈인가? 빨리 선회해!]
[창민 생도! 지금 뭐하는짓인가?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존재라고! 선회해!]
이번에는 스토왈트 소령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교관님. 이번에는 정말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그대로 무전기 전원을 눌러 무전기를 꺼버렸다. 원칙대로라면 절대 끄면 안되지만, 이걸 안끄면 귀가 시끄러워서 집중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대충 그 위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적기가 오는 고도가 2000피트니까 내가 1000피트 높다. 점점 가까워지는 회색 꽃밭은 적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내게 알려줬다. 대구경 대공포 고폭탄들의 충격파는 무려 1000피트나 아래 있는데도 불구하고 류미스를 흔들기 충분했다. 그러던 와중, 푸른색 하늘 한가운데서 은색 빛이 번뜩였다.
"저기다!"
그대로 기체를 반전시킨 나는 조종간을 당겨 고도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익숙한 느낌과 함께 발에서 쿡쿡 쑤시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리고 뒤이어 눈 앞이 천천히 검은색으로 변했다. 급격한 기동시 원심력 때문에 다리쪽으로 피가 몰려서 생기는 블랙 아웃. 천천히 잡아당겼던 조종간을 앞으로 밀자 바짝 말라 붙어있었던 혈관에 피가 흐르는 느낌이 돌아오자 시력도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자 내 눈 앞에 들어온건 4기와 6기로 나뉘어 날고 있던 2개 편대의 해적 전투기들이었다. 꽤나 앞에 있는 6기, 그리고 내 바로 앞에 있는 4기는 모두 대공포를 피해 요리조리 움직이면서 비행을 하고 있었다. 대공포 포격 범위 위에 들어오자 대구경 대공포탄 안에 꽉꽉 채워넣은 TNT의 충격파가 더더욱 강하게 류미스를 뒤흔들었다. 설마 아군 오사로 맞는건 아니겠지?
대구경 대공포의 최대의 약점은 바로 맞지 않는다는거다. 이런 말을 하는게 참 슬프지만 말이야, 대구경 대공포의 실존 가치는 바로 적의 직접적인 격추보다 편대를 흐트려뜨려 요격기가 각개격파시키는 것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구경 대공포의 명중률은 정말 형편없다. 몇천발 쏴재껴서 간산히 한발 맞출 수 있을 정도였나? 그리고 지금, 대구경 대공포들은 자신이 할 일을 정확하게 잘 해주고 있었다. 삼각형의 대형을 이룬채 홈 아일랜드 상공으로 진입했던 10기의 적기는 그 편대를 완벽하게 흐트러진채 단독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2기는 대공포대의 환영인사를 견디지 못한 채 나를 향해 선회하기 시작했다. 나를 봤는지 대공포들 때문에 미처 못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2기의 전투기는 나를 향해 그대로, 프로펠러 노즈콘을 들이댄 채 다가왔다. 이거, 공중전에서 절대 엄금이자 최대의 도박인 헤드온? 적기의 실루엣이 점점 십자 조준기 안에서 커져왔지만 적기는 대공포탄에만 신경이 쓰이는지 롤 기동을 쓰면서 지그재그로 날면서 나를 향해 날아왔다. 도데체 어떻게 하자는거야?
십자 광학 조준기에 적기의 엔진이 가득 찼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조종간을 움켜쥐고 있던 나와 해적 파일럿의 눈이 마주쳤다. 이녀석,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군. 눈을 크게 뜬 채 놀란듯이 나를 쳐다보는 이 파일럿은 정말 말 그대로 돌처럼 굳은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비키라는 뜻으로 손을 옆으로 저었지만 그것도 소용 없는지 그저 굳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이녀석을 피하기 위해, 나는 쥐고 있던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류미스의 양 주익의 공중전용 플랩이 각각 위와 아래로 전개되었고, 그대로 나는 공중에서 크게 한바퀴를 돌았다. 하지만 적이 너무 가까웠다. 내가 롤을 한바퀴 끝내기도 전에 나에게 너무나도 가까이 다가온 해적 전투기는 그대로 자신의 날개와 류미스의 날개를 충돌시켰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충격이 내게 전해졌고, 공중전을 하다가 설마 상대와 충돌사고를 낼 것이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던 나는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계기판에 시원하게 이마를 박았다. 잠깐. 지금 해적 주제에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류미스와 추돌사고를 낸거야?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지만 적기는 없었다. 공중에서 뺑소니를 치고 달아나다니! 그것도 류미스를 다치게 하고! 류미스의 날개는 금속제라서 별 피해는 없었지만 매끄러웠던 금속제 외피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져있었고 흉측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거기다가 류미스가 아프게 나무 파편까지! 지금 내가 앉아있는 조종석에서 봐도 내 왼쪽 날개 상황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날개의 형틀을 잡아주는 스파 (Spar)가 훤히 보이고 립(Rib)들도 앞부분이 덜렁덜렁......... 주익의 스파가 타격을 입었는지 좌측 주익에서 전해져오는 격렬한 진동이 조종석으로도 느껴졌다. 이자식, 내가 총알이 없어도 네녀석은 반드시 격추해주마!
공중전의 필승 법칙 중의 하나는 바로 데드 식스라고 불리는 6시 방향, 즉 상대방의 꼬리를 무는 거다. 후진이 불가능하고, 모든 무장이 앞으로 향해있는 전투기에게 후방의 적을 공격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물론 후방 기총 사수가 있는 전투기들도 있지만, 그렇게 덩치가 큰 복좌 전투기들은 단발 단좌 전투기들보다 기동성이 떨어진다. 즉, 6시를 먼저 잡는 쪽이 선공필승! 이라는 거지.
나랑 충돌해버린 적기의 꼬리를 잡기 위해 나는 그대로 조종간을 당겼다. 아까 강하할 때와의 또 다른 느낌의 중력이 나를 짓눌렀다. 속도계의 바늘이 시속 350 마일, 대략 시속 560km에서 200 마일 정도로 천천히 떨어짐과 동시에 고도계의 바늘도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전방 시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홈 아일랜드의 지평선이 사라지고 대신 푸르른 하늘이 앞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큰 반원을 그리며 수직으로 선회한 류미스의 캐노피에 홈 아일랜드의 초록색 대지가 반사되기 시작할 때, 또 한번 우직, 하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와 함께 날개가 잘린 채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구식 해적 전투기 한기가 나무 파편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바로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전 금속제 날개 조각까지. 도데체 어떻게 된거지? 아무런 감을 잡지 못한 채 얼이 빠져있던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건 아까 한번 충돌했던 왼쪽 주익을 봤을 때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던 류미스의 왼쪽 날개의 절반이 그대로 부러져나간 것이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언제 접근했는지 해적 전투기 몇대가 나에게 기총을 쏘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푸른 하늘에서 흰색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다니는게 총탄 말고 더있겠냐. 쉭쉭, 귀를 찢는 고음을 내며 나를 스쳐지나가는 예광탄의 궤적들은 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나에게 제대로 된 전투기가 있었다면 최소한 회피 기동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류미스의 상태는 날개가 잘려 버린 독수리,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최소한의 제어 조차 되지도 않는 상태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최소한의 제어라도 하기 위해 나는 조종간을 잡고 좌우로 당겨보았지만 한쪽 날개가 날아간 지금 그렇게 큰 효과는 없었다. 천만 다행인게 있다면 날아간 왼쪽 주익의 절반이 남아있는 덕분에 공중전용 플랩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체 좌우의 양력을 맞추기 위해 공중전 플랩을 내리고 나서야 간신히 수평상태로의 제어가 가능해졌다. 물론 내가 그렇게 비행기를 안정시키려고 애쓰는 동안 해적기들은 나에게 더더욱 가까이 다가왔지만. 이제는 특유의 프로펠러 소리도 들을 수 있군.
또 한번 기총 소사가 이어졌다. 아까는 아무도 그 경로를 예상할 수 없는 스핀에 빠져 운이 좋게 피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몇발의 예광탄이 캐노피 좌우로 슈욱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뒤이어 깡깡, 하는 소리와 함께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 얇은 금속제 외피를 뚫고 들어온 총알 한발이 내 얼굴 바로 옆에서 튀어 올라 그대로 전면 방탄유리에 박혔다. 구멍으로 들어오는 고도 3000피트의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때렸고 날카로운 소리가 캐노피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우리 세계의 ㅅ 지금 그런거에 신경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뒤에 있는 놈들을 떼어내지 못하면 죽으니까.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아, 대공포대로 유인하기 위해서지.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에서 부터 허공에 수놓고 있던 대공포탄들의 환영 인사는 멈춰져있었다. 아군 오사 때문에 안쏘는건가? 어차피 맞추지도 못할텐데?
생각이 길었다.
한번 더, 아까와 같은 기분 나쁜 바람소리가 고막을 두드렸고, 아까와 비슷한 충격이 나를 강타했다. 날개에 맞았는지 흉물스러운 구멍이 뻥뻥 뚫린 날개는 언제라도 부서질 듯 덜덜거리면서 떨고 있었다. 안되겠다. 이렇게 얻어맞아 격추당하기 전에 최소한 6시를 잡아서 사격 자체를 못하게 만들어야지. 8기의 적기가 내 6시에 모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조종간을 당겼다. 날카로운 선회를 하며 해적 전투기들의 3시 방향 쯤에 왔을 때,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나를 따라 선회하려고 하던 적기들은 전부 어느새인가 도착한 홈 아일랜드 요격기 편대에게 하나하나 사냥당하고 있었다. 노란색 20mm 예광탄 궤적이 나무로 만든 해적 전투기 한기한기를 꿰뚫자 해적기들은 별다른 저항조차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서 나무 파편을 사방으로 뿌린 채 지면으로 곤두박질 쳤다. 덜덜거리는 기체 때문에 비교적 큰 선회 반경을 그려 돌아온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무전기로 그들을 호출했다. 꼬리날개에 그려진 붉은 색 스페이드 문양이라, 붉은 사신, 그러니까 레드 리퍼들이잖아?
"레드 리퍼, 여기는 스카이 01!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6기의 전투기가 내 주변으로 다가와 대형을 짜고 나를 호위하기 시작했지만 그들 중에서 누구에서도 무전이 들어오지 않았다. 명령 안들었다고 무시하는거야, 뭐야? 수신호라도 보내려고 주변을 둘러보자 마침 오른쪽에서 날고 있던 한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레드 리퍼의 파일럿 하나는 헬멧을 두번 두드리고 무전을 뜻하는 수신호를 내게 보냈.....다? 아차! 아까 시끄러워서 꺼놨었지! 무전기의 ON 버튼을 누르자 무전기 특유의 노이즈와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익.....스카이 01! 들리나, 오버!]
"여기 스카이 01. 미안해요. 깜박하고 무전기를 꺼놨습니다."
[비행중 무전기를 꺼놓으면 도데체 어쩌라는거냐?! 학교에서 뭘 배운거야? 졸업생 맞아?]
헤헤헤헤. 아무래도 내려가면 잔소리 좀 듣겠군.
[어쨋든 무장도 없이 2기나 격추해내다니, 대단하다. 최소한 졸업 1등이라는건 확실히
알겠다.]
"헤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까 피탄된거 같은데 기체 상태는 어때요?"
[현재 동체에서 다량의 연료가 새고 있고 왼쪽 주익은 절반이 날아갔다. 리퍼 03, 그쪽은 좀 어때 보이냐?]
[이쪽은 좀 멀쩡해 보입니다만, 기총에 피탄된 구멍이 좀 있습니다. 내부 배선이 끊어졌는지 연기도 좀 나옵니다, 소령님.]
[스카이 01, 연료 상태를 보고하라.]
"대략 18%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곧 착륙하지 않으면 불시착 할거 같습니다만......."
[좀 더 못버티나?]
"고도가 낮아서 힘들거 같습니다. 날개 상태도 멀쩡하지 않고요."
[휴.......]
귀에 꽂혀있는 무전기용 스피커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그러는거지?
[.........가까운 활주로로 유도하겠다.]
".......수신 완료. 잘 부탁드립니다, 이상!"
레드 리퍼 편대의 편대장, 리퍼 01이 말했던 가까운 활주로라는 건 바로 졸업식장의 활주로였다. 이미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9기의 곡예 비행대들이 레드 리퍼 편대를 대신해 내 주변을 에워쌌다. 물론 무전으로 질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고.
[야, 1등이면 그렇게 뽐내도 되는거냐? 자랑하는거야?]
[1등이라는 녀석이 상부 지시 거부에 무전기를 꺼놓고 비행하면 어쩌자는거야?]
등등. 뭐, 대충 각오 했던 일이라서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없었다. 단지 조금 신경 쓰이는게 있다면 나탈리의 전투기가 거의 충돌할 뻔할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것 뿐. 고글을 이마에 올린 나탈리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땅에 발을 딛는순간, 넌 죽었어.]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건 또 뭘까?
이렇게 무사귀환한 나를 축하라기 보다는 질타에 가까운 농담......을 건내는 동료들도 내가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내리자 다들 비켜주었다. 연료도 이제 고작 5% 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그동안 이동한 속도와 거리, 그리고 류미스 엔진의 연비를 계산해봤을 때, 연료의 소모량이 엄청 큰걸 보면 탱크에 꽤나 큰 구멍이 뚫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10분도 안되는 거리에 30리터가 넘는 양을 썼를리가 없으니까. 랜딩기어용 레버를 당기자 우웅, 하는 전기 모터 소리와 함께 랜딩기어가 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세개의 푸른 불이 계기판 랜딩기어 스테이션에 들어왔다. 다행이다. 동체 착륙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겠군. 천천히 고도를 내려 100피트가 되자 엔진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더이상 엔진에서 전해오는 덜덜덜덜 거리는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부러진 주익에서 전해오는 진동은 여전했다. 엔진이 정지하자 속도도 천천히 감속하기 시작했지만, 이제 고작 200m 남았다고! 관성으로도 충분해! 마지막 진입 각도를 잡고 어프로치를 시작했을 때, 나탈리가 나에게 말했다.
[스카이 01, 여기 스카이 02인데, 랜딩기어는 왜 안펴는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랜딩기어가 안펴져 있다니?
"스카이 02, 랜딩기어 내렸........."
고도계의 바늘이 3피트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라? 지금쯤이면 기어가 땅에 닿아서 유압장치가 그 충격을 부드럽게 흡수해야 하는 시점인.....데?
[스카이 01! 지금 동체 착륙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은 그대로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안전벨트가 단단히 붙들어매고 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군. 쇠가 바닥에 끌리는 기분나쁜 소음을 내면서 류미스는 앞으로 미끄러졌다. 누출된 기름 때문에 후방 동체 밑면은 마찰이 거의 없는지 무거운 엔진이 있는 기수보다 빠른 속력으로 움직였고, 덕분에 나는 아까 하늘에서 겪은 스핀으로도 모자라 땅에서도 겪어야 했다. 고무패드 활주로 아래서 자욱한 먼지연기가 일었고, 덕분에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돌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내가 움직일 수 있었던건 그렇게 시간이 지난 다음, 기체가 어느정도 감속해서 멈췄을 때였다. 물론 연료통은 텅 비어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폭발할지도. 그래서 나는 안전벨트를 풀어 해친 다음 캐노피를 뒤로 밀었다. 아까 동체 착륙할 때의 거친 충격 때문인지 캐노피 밀폐용 핀들이 벌써 부러져 있어 그냥 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후다닥 난장판이 된 전투기에서 빠져나온 나는 먼지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물론, 방향 같은건 모르지. 나침반도 없는데 그런걸 이 먼지구름 속에서 어떻게 찾아? 내가 유일하게 이정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프로펠러 엔진 소리 뿐이었다.
그렇게 엔진 소리를 향해 찾아갔을 때 나를 맞이한건 수백명의 환호성을 지르는 필그림들이였다. 다들 주먹을 쥔 다음 하늘을 향해 치켜드는, 하늘의 적도 무찌르겠다는 뜻이 담긴 홈 아일랜드 공군 특유의 응원 동작을 나에게 보이면서 환호했다. 내....내가 뭘 했다는거지?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필그림 비행사관학교 3기 수석 졸업생, 이창민 소위를 소개합니다!"
참으도 단촐한 소개군. 내 사관학교 동기들과 현역 조종사들의 환호성이 가라앉자 홈 아일랜드 방어 사령관 아이제하우저 중장이 내 졸업 증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수석 졸업생, 이창민 소위는 1년의 교육 기간 동안 공중 기동, 공중 사격 부문에서 최우수 성적을 보여주었으며 평소 행실이 바르고 단정한 모범적인 군인으로 투입된 28회의 임무에서 전투기 4기 격추, 군함 8척을 격침하는 등 실전에서도 훌륭한 모범된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어 수석의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뒤이어 울려퍼지는 환호성과 우렁찬 박수소리. 우와, 적응 안되는데..........
"창민, 어느 부대래?"
언제 착륙했는지 나탈리와 다른 8명이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부대 뱃지를 받았네. 11 전투 비행단이라던가, 13 전투 비행단이라던가, 17 전투 비행단 같은 최정예 비행단들에 배속됬잖아?
"아직 모르겠어. 너는?"
앞에서 내 학교 생활에 대해 연설을 하고 있는 아이제하우저 중장 때문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나탈리에게 소근거렸다. 괜히 물어본거 같군. 너도 부대 뱃지가 없네. 부대 뱃지를 다는 오른쪽 가슴께가 허전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나탈리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왜?....... 어깨를 으쓱하면서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너랑 같은데 배치된다는 것만 들었는데."
뭐야, 그런게? 잠깐, 나는 어느 부대로 발령나는거야? 2위가 필그림 최정예 전투비행단으로 임관되었는데 나는?
".........그 뛰어난 자질을 입증받은 이창민 소위의 부대 발령은 오늘 에르데 제국에서 오신 귀빈, 제 8황녀 사냐 공주께서 발표하겠습니다."
어느새 아이제하우저 중장의 말이 끝나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연단위에 올라서지 않았다. 다들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채 수근거리고 있을 때, 활주로 위에 서있는 우리 10명을 향해, 웬 꼬마가 하나 다가왔다. 어라, 저녀석 아까 그 꼬마잖아?
"창민아? 저 꼬마애, 아까 너랑 좋은 시간을 보낸 그녀석 아니야?"
무슨 좋은 시간하고 반박을 하기 위해 나탈리를 돌아 봤다. 아니, 안하는게 좋겠군. 웬지는 모르지만 두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잖아......... 어쨌든 내 눈이 맞는 것 같다. 저녀석 아까 봤던 그 꼬마애 맞아. 그 옆에서 레이피어를 차고 있는 큰 키의 누나는 아까 그 에리카라는 사람인 것 같고. 잠깐, 설마.......
"저녀석이 공주?!"
두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모두들 이 가슴께나 오는 조그마한 꼬마가 공주라는 말을 듣고 놀랐나본지 공주가 한발한발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한발씩 뒤로 물러났다. 기품과 위엄이 있는 걸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에게 다가온 이 꼬마 공주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왜? 어째서? 설마 아까 길 안내 해준거 때문에 그런가?
"당신이, 이창민 소위일줄은 몰랐네요."
옥구슬 같은 낭랑한, 하지만 어딘가 슬픈 목소리. 틀림없다. 이녀석, 아까 그 꼬마 맞아. 정말 신기한 일이다. 높으신 분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가 공주랑 면식이 있는 사이라니. 물론 더 신기한건 그런 공주의 말에 토를 달고 있는 나 자신이지만.
"인생이란 것도 참 재미있군요."
"나는 무슨 100년은 산 것 처럼 말하는 네가 더 신기하다."
피식, 사냐 공주가 웃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뒤이어 돌아온 무표정 때문에 본건 10000분의 1초 뿐이었지만.
"처음에 서류를 읽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이제는 확실하군요. 좋아요."
"뭐가, 좋다는거야?"
그녀는 대답대신 허리춤에 차고있던 가느다란 세검을 빼들었다. 손잡이에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혀 있고, 칼자루는 찬란한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금빛 칼집에 빼곡히 박혀있는 수십개의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에메랄드는 딱 봐도 이 검이 황실의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가볍게 오른손에 검을 빼들은 사냐 공주는 세검을 입가에 가져가 칼자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세검의 끝을 살포니 내 어깨에 올려 놓았다. 키가 작아서 올려놓은게 아니라 내 어깨에 갖다 댄듯한 느낌이지만. 공주도 그게 불만인지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는 내게 무릎을 굽히라고 했다.
"왜?"
"보면 모르나요? 당신들의 세계에서도 이런 비슷한 의식이 있다고 들었는데."
있긴 있었지. 그것도 200년도 전에. 지금 그런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나 저쪽이나.
"어쨌든, 무릎을 굽혀 주세요."
"싫은데."
"어째서죠?"
사냐 공주의 눈가가 치켜 올라갔다. 마치, 지금 당장 내가 하라는대로 하지 않으면 그대로 네 어깨를 베어버리겠다,라고 협박하는 듯한 느낌. 물론, 스토왈트 소령의 눈빛 광선에 단련이 된 나에게 그런 협박은 먹히지 않는다. 저 자세에서 실제로 벨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유도 있으니까.
"무릎을 꿇는다는건 너는 내 상관이란 말이잖아."
"저는 공주니까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미안하지만 우리 필그림들에게는 신분제 같은게 통하지 않아."
"저는 공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에르데 제국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에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 할건가요?"
기사단장? 아직도 그런게 있었나? 뭐, 이 세계, 그러니까 테라에는 있을 수 있겠지. 문명 수준이 우리 세계의 1930년대 후반 수준이니까.
"공주건 뭐건, 사람을 자동적으로 제압하는 품위가 있어야지. 너는 그냥 꼬마일 뿐이잖아."
"꼬마 아니에요!"
사냐 공주가 언성을 높혔다. 눈처럼 새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그래, 하늘에 떠있는 시리우스 보다 더욱 빨갛게 변했다.
"봐봐. 이성적으로 네가 꼬마가 아니란걸 보여주는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잖아. 그게 꼬마지."
"으으......."
울그락불그락, 사냐 공주의 얼굴이 변해갔다. 내 뒤에 서있던 나탈리가 걱정이 된다는 듯이 내 팔목을 잡았지만 나는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꼬마에게 무릎을 굽힐 수는 없으니까, 안그래?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든 사냐 공주의 눈가는 살짝 젖어 있었다. 봐, 그런걸 갖고 울다니. 꼬마애 맞잖아.
"어쨌든!"
사냐 공주는 내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진 세검의 날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의 집게손가락이 내 얼굴을 가리켰다.
"당신은, 우리 대 에르데 제국과 필그림의 동맹의 상징인 에르데 제국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