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17 - 붉은 실 Part 1
1
뚜우 뚜우
예인선들의 뱃고동 소리와 함께, 우리, 그러니까 엔터프라이즈의 16 기동부대와 범블비의 17 기동부대는 사파이어섬 방위 함대 소속의 순양함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파이어만으로 들어왔다. 후소 제국의 공격 예봉을 꺾고, 항공모함 호넷을 희생하면서 이루어낸 후소 항공모함 4척의 격침이라는 뉴스는 이미 제국 전토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귀환하는 영웅들을 맞이하기 위해 신문사 기자들과 공보국 기자들, 정치인들, 그리고 황족들과 군 수뇌부도 나와 있었다. 아, 내가 말한 영웅들이란 우리 44 기사단이나 다른 전투 항공 기사단이 아닌, 뇌격 기사단과 급강하 폭격 기사단을 이야기하는거다. 특히, 이번에 새로 수령하게 된 신형 뇌격기들은 매치포인트 해전 당시 말 그대로 전멸 당한 뇌격 기사단의 복수를 한다는 의미에서 ‘복수하는 자’, 즉 어벤저라고 명명되었다. 적 함대를 공격해 수장시킨 급강하 기사단원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우리에게는 뭐 돌아온게 없다. 유일한 항공 기사단에 관한 기사는 바로 군 기관지에 실린 기사였는데, 자그마치 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번 전투로 나는 공인 격추 대수 41기로 에르데 제국의 10위 안에 드는 에이스가 되었다고 한다. 매치포인트 해전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에이스 기사들이 빅토리아 대륙을 지키는 남오스트해 방어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되어서, 격추수가 고작 41기인 내가 10위권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사냐 공주나 에리카 대위는 이 기사를 보고 좋아 했지만, 사실 그 뒤를 알고 보면 별로 좋아할 만한 사실도 아니었다. 그만큼의 전력 공백이 생겼다는 말이니까.
“그래도요, 창민경.”
내 옆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사냐 공주가 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 했다.
“제국 10위의 에이스라면 대단하잖아요?”
“글쎄, 원래 20위권에도 못들던 내가 10위로 올라갔으면 얼마나 많이 죽었다는거야. 심각한 전력 손실이잖아.”
아무래도 사냐 공주에게는 상관 없는 사실 같지만.
2
우리의 환영식은 황제가 직접 참가해서 배푼 만찬으로 끝났다. 그전까지 각종 퍼레이드와 행사, 그리고 훈장 수여식 때문에 기진맥진해 있던 나는 만찬 덕분에 어느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말이다.
“만찬도 오랜만이네.”
그러네. 지난번에 우리가 캐피탈 갔을 때 이후로는 처음인가, 아마?
“이번에는 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려나?”
“……..아마 또 빠따따나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포기해, 그러면 편해 나탈리.”
“히잉……… 여기 음식들 정말 입에 안맞는다고………”
풀이 죽은 개처럼 힘이 축 빠진 나탈리에게 뭔가 한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근위 기사단 단장의 말에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웃고 떠들던 연회실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이고, 모두들 부동자세를 취한 채 정면을 응시했다. 내 정면에는…… 에리카 대위가 연회 정복을 입고 있었다. 사파이어 섬을 뜻하는 푸른 드레스였는데,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랐다.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에리카 대위가 드레스를 입는 모습, 별로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지금 사냐 공주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만찬이 시작하기 전에 사라져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아, 황제랑 같이 들어오려나?
내 짐작이 맞았다. 근위 기사단장이 거수경례를 함과 동시에, 황제와 공주 두명 – 사냐 공주와 아일린 공주 – 이 연회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사냐 공주는 적색 6번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아일린 공주는 폭격 기사단을 뜻하는 짙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둘다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드레스다. 의미로나, 외적으로나 말이다. 그리고 그들 뒤로 특별한 손님도 와있었다.
“어? 스토왈트 소령님?”
“쉿!”
나탈리 덕분에 무안한 상황은 넘겼지만,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정면을 다시 응시했다. 분명 저건 스토왈트 소령님이시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신거지?
“경들 모두 착석 하도록 하지.”
황제의 명령에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오른손을 들어 모두에게 수고했다며 축사를 내린 다음 오른쪽에 동석한 사냐 공주와 아일린 공주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경들도 잘 알다시피, 이번 전투에는 우리 사냐와 아일린이 참가했소. 경들의, 특히 11 폭격 기사단장 칼렌 대령과 44 부기사단장 이창민 대위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소. 모두에게 감사하오.”
“예, 폐하.”
“또 하나, 오늘 이자리에는 특별한 손님께서 참석하셨오. 필그림측과 재개된 회담의 결과로 오늘 우리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오신 코르넬리우스 스토왈스 소령이오.”
맞구나. 스토왈트 소령님.
“소령 코르넬리우스 스토왈트 입니다. 필그림을 대표해서 제국의 승리에 진심으로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며, 앞으로는 과거의 기억을 털어버리고 같은 목표를 항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라? 언제부터 회담이 시작된거지? 황제가 허락한건가? 그것보다, 사실이 알려지면 여론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건데? 도데체 무슨 생각이야? 나는 슬쩍 나탈리를 바라보았고, 나탈리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굉장히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하지만 황제의 말이 중간에 내 생각을 잘라버렸다.
“우리 에르데 황실은 그동안 축적된 필그림과 우리 제국의 묵은 원한을 털어내고, 앞으로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공동의 적인 후소 제국을 공격 하기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소.”
처음에 나는 그냥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하지만 정말 중대한 결정이었다. 제국에게도, 필그림에게도, 사냐 공주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말이야.
“우리 황실은, 필그림 출신 기사로서 이번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는 이창민경과, 사냐의 약혼을 제안하는 바요.”
좌중이 썰렁하게 얼어 붙었다. 사실 이게 이상한거다. 이세상의 어느 누가, 망명한 파일럿 하나를 위해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하겠는가? 그것도 아무리 정치적인 이유라고 하지만, 자신의 딸의 인생의 동반자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하지는 않는다고! 그러니까 나탈리, 내가 의도한 상황도 아니고, 그런걸 원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
아무래도 이제는 늦은 것 같다. 단순히 나탈리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으니까. 나탈리는 나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고 있고, 에리카 대위는 웬지 모르게 웃고 있고, 플레이크 제독과 스푸르언스 제독은 할말이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고, 아일린 공주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고, 그 옆에 앉은 사냐 공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내쪽만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다. 스토왈트 소령님은 두 눈을 부릅 뜬 채 나를 노려보고 계시는군. 방 안은 순식간에 정적으로 가득찼다. 모두들 놀람과 경악과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와 사냐 공주를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담담한 미소를 유지한 채 웃고있는건 오로지 황제 뿐이었다.
"국제 정치에 내 금쪽 같은 딸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으나, 분명, 우리 에르데 제국의 뛰어난 기사이자, 필그림의 기사이기도 한 이창민 대위라면, 분명 우리 제국과 필그림 양쪽의 좋은 연결 고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래도 그렇지, 결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이런데서 툭 던져 놓으면 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이창민 경은 한번 생각을 해보고 에리카 대위를 통해 나중에 보고하도록 하시오. 알겠소?"
"....그....게......."
"자, 그러면 이제 만찬을 시작하지."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황제는 손을 들어 만찬의 시작을 알렸고, 모두들 조금씩 뻣뻣해진 몸을 움직이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순식간에 주목을 받아버린 나에게는 가시방석과도 같은 자리였지만. 일단, 이번 일은 정말 잘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한번 사냐 공주와 의논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는 슬쩍 사냐 공주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또다시 모두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사냐 공주가 있던 곳은 황제의 옆자리였으니까.
"오, 그래. 벌써 결정을 한건가?"
"아...아닙니다. 단지, 사냐 공주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
잠깐만, 이거, 별로 좋지 않은 생각 같은데? 방금 황제가 약혼 이야기를 꺼냈는데 사냐 공주와 단둘이 있겠다고 해버리면 괜히 확인사살 가하는거 아닌가? 생각이 길었다.
"허허허."
호탕하게 웃은 황제는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사냐 공주의 손을 잡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사냐 공주의 손을 내게 건내 주면서 말을 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으니 뜻대로 하시게나. 이번일은 두사람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일이니까."
".........."
"물론 속도를 위반하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말이야."
저기, 그런 뜻으로 말한거 아니거든요?!
"아...아바마마......."
3
일단 황제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사냐 공주를 데리고 테라스로 나왔다. 우리 둘을 본 하인들이 자리를 비켜준 덕분에 우리는 단 둘이 있게 되었다. 물론 상황은 더더욱 좋지 않다. 평소에는 나와 잘만 이야기 하던 사냐 공주가, 황제의 결혼 이야기 한번에 완전히 부끄러워하는건지 싫어하는건지 그저 고개만 도리도리 저으면서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대화는 일방적으로 내가 묻고, 사냐 공주가 답하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이거 어떻게 된거야?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온거야? 이거 알고 있었어?"
도리도리
"뭐야, 너도 모른거야?"
끄덕끄덕
"그럼 황제..... 폐하께서는 공주인 너에게도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고 결정한거라고?"
"......예......."
미치겠군.
"......생각해요?"
"응?"
평소의 하얗던 그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나를 힐끔힐끔 올려다 보던 사냐 공주가 입을 열었다.
"창민경은....... 어떻게 생각해요?"
"약혼?"
끄덕끄덕
"나? 나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혀 모르겠다. 이해할 수가 없다. 황제의 입에서 왜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왜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감에 짓눌렸는지 말이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는요......"
생각이 길었나? 내가 생각하던 사이 사냐 공주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저는요,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
"예?"
"왜냐고. 이건 결혼이야. 일생에 한번 밖에 하지 못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이혼할 수 있다고 딴지걸면 지는거다.
"그런 중요한걸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그저 정치적인 논리에 따라서 결혼하려고?"
"........나의 희생으로 국민들이 행복해진다면........ 할 수 있어요?"
그것 참 눈물나는 희생정신이구나. 아무리 에르데 제국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귀족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 하라는 말은 아닐텐데.
".........어차피 옛날에도 정략 결혼 같은건 흔했으니까요......"
"그건 몇천년 전 이야기잖아........"
우리 세계 같으면 15세기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라고.
"지금도 똑같아요. 제국의 공주와 왕자들은, 동맹관계를 만들고 굳히는데 최적의 재료잖아요. 정략 결혼. 그거 한번으로 강력한 동맹관계가 형성되는데, 그거 한번으로 우리 국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국경이 조용해지는데,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어요?"
"............."
"어차피 우리 공주들은 상품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죠. 그런 삶이라면, 최소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도 나쁘지 많은 않잖아요, 창민경."
"그래서 너는 고작 그런 이유로 나랑 결혼하겠다고?"
"............"
사냐 공주는 고개를 푹 숙인 다음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유가 뭔데?"
"으으으으......."
귀까지 새빨개진 사냐 공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유가 뭐냐고. 진심이 뭐야?"
사냐 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눈에 눈물을 매단 채, 입술을 깨물고는, 두 눈을 딱 감고 말했다.
"최소한........ 창민경이라면 다른 남자들 보다는 나을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속이 시원한지 가쁜 숨을 내쉬는 사냐 공주. 호오. 그래? 나랑 결혼해도 괜찮다는 이유가 고작 그런거였어? 이건 결국, 나 또한 하나의 물건이자 상품으로 보는거잖아. 악을 택해야 한다면 차악을 택하겠다, 그런 논리인가?
은근히 화가 난다.
결국 사냐 공주에게 나는 그정도 위인밖에 되지 못하는건가?
"차...창민경? 뭔가 오해를 한......"
전혀. 내가 오해한 거 같지는 않은데? 왜, 설마 변명이랍시고 부끄러워서 그랬다고 하려고?
"차....창민경........"
나를 부르는 사냐 공주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테라스 안쪽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흐느끼는 사냐 공주를 내버려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