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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나이츠 - 창공의 기사단


Sortie 018 - Hell Gate Opens Part 1


  1
  연회가 끝난 다음날 아침, 나와 사냐 공주, 그리고 에리카 대위, 아니, 소령은 갈란트 총감의 호출을 받고 전투기대 건물로 들어갔다. 사륜구동차가 멈춤과 차에서 뛰어내린 우리를 한 근위대 장교가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령님."
  아니, 맞이 했다기 보다는 나만 상대하고 다른 두사람은 완전히 무시하는 분위긴데?
  ​"​아​.​.​안​녕​하​세​요​?​"​
  "근위대 전술과의 울프샤임 중위 입니다. 명성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만나 뵙게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명성? 나에게 명성 같은게 있었나?
  "구국의 영웅이자 제국 에이스이신 소령님께서 ​방​문​해​주​셔​서​.​.​.​.​.​.​.​.​.​"​
  아참, 시끄럽네. 대접해준다는건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지금 여기에는 나만 있는게 아니다. 제국 13위의 에이스이자 갈란트 총감의 여동생인 에리카 대위, 아니 소령도 있고, 엄연히 내 상급자이자 신분도 높은 사냐 공주도 있다. 에리카 대위, 아니 소령을 무시하는건 이해를 해보려고 할 수 있겠지만, 사냐 공주를 무시하는건 말도 안된다. 제국의 공주고, 근위대의 모든 장교에게는 상급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
  "중위."
  ​"​해​서​.​.​.​.​.​예​?​"​
  한참을 떠들던 중위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 틈을 타서 나는 내 뒤에 서있던 사냐 공주의 옷깃을 붙잡은 다음 그대로 앞으로 내새웠다. 조금 거칠게 해서 사냐 공주가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중위."
  "예?"
  약간 낮아진 목소리에 울프샤임 중위는 약간 긴장되는지 부동자세를 취했다.
  "지금 여기 계신 분이 누군지는 알고 있어요?"
  "예?"
  "지금 이게 누군지 알겠냐고."
  사냐 공주가 누군지 알아보냐는 말이다, 이놈아.
  "예. 사냐 공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귀관이 공주에게 대하는 태도는 그게 뭐지?"
  "소령님, 그게......"
  "왜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 아니, 소령은 철처하게 무시하는겁니까?"
  "소령님."
  화가 난 내 목소리 사이로 중위가 입을 열었다.
  "소령님께서는 저희의 문화를 잘 모르시겠지만, 사냐 공주께서는 후궁의 소생이십니다."
  "그런데요."
  "황후마마의 소생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요."
  "그렇기 때문에 황실에 충성을 바치는 저희가 사냐 공주께 ​존​대​를​.​.​.​.​.​.​.​.​"​
  잠깐만, 황후 출신이 아니면 황실 취급이 안되는거야? 그런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곧 닫았다.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는 사냐 공주의 눈빛에는 그만 말해달라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는 사람 마음도 읽냐고? 그런건 아니다. 다만, 사냐 공주의 눈가에서 반짝 빛나는 눈물을 봤을 뿐이다. 뭔가 해서 곤란한 이야기라도 있는가보지.
  "중위."
  "예"
  "그냥 입 다물고 길 안내나 해요."
 
  똑똑
  "들어오게."
  갈란트 중장의 허락과 함께 우리 세사람은 전투기대 총감부 작전실로 들어갔다. 약간 어두운 느낌이 나는 방 안에는 전황을 나타내는 거대한 테이블과, 사방에서 날아오는 보고들을 종합해서 정리하는 정보대 장교들, 그리고 갈란트 총감을 비롯한 플레이크 제독, 스푸르언스 제독, 할시온 제독, 나미즈 제독이 있었다. 에르데 제국의 오스트해 전선의 최고 사령관들이 한자리에 모인거다. 으아, 겨우 소령 주제에 별들이 반짝이는 곳에 있자니 웬지 긴장된다.
  "잘왔네, 소령. 원래는 소령만 호출하려고 했지만 사냐 공주께 결례가 될 것 같아서 세사람을 다 불렀네."
  "예에...."
  "일단 앉게나. 공주께서도 앉으시지요."
  사냐 공주와 나, 그리고 에리카 대위, 아니, 소령이 자리에 앉자 니미즈 제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시작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귀관들과, 그리고 귀 기사단의 활약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군.  특히 이창민 경이나 나탈리 대위는 우리 제국 신민도 아닌데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주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감사하네."
  ​.​.​.​.​.​.​.​.​.​.​에​.​.​.​.​.​.​.​.​.​.​.​.​ 장성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는것도 뭔가 굉장한 기분이다.
  "특히 귀관의 경우 적의 주력 전투기보다 한수 아래라고 평가받는 블랙캣을 갖고도 10기가 넘는 격추수를 낸 것에 대해서는 같은 군인으로서 존경을 표하네."
  쩝. 블랙캣이 그렇게 썩 좋은 전투기는 아니기는 하지. 아마 필그림과 에르데 제국 사이가 조금만 좋았어도 나는 분명 PK 73을 탔을거다. 보급에 문제가 조금 생기겠지만 그런건 사냐 공주에게 말하면 사냐 공주가 황제의 권력을 빌려 처리를 해주면 될테니까. 하지만 PK 73은 필그림의 제품이고, 에르데 제국의 공업기술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아직 필그림의 수준 정도는 ​아​니​다​.​.​.​.​.​.​.​.​.​.​.​.​ PK 73 특유의 일격 필살의 공격력의 핵심인 스플린터탄의 설계도가 아직 에르데 제국군에게 보급되지 않았다는 것도 한몫 하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블랙캣을 거의 억지로 쓰고 있는거다. 아예 이참에 신형기로 교체해 달라고 말해볼까?
  "맞아. 블랙캣은 내가 타봐도 조종성이 썩 좋지는 못하더군. 특히 수평 선회전이 너무 떨어지니 말이야."
  할시온 제독은 에르데 제국 해군에서도 특이하게 항공과 출신 장성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갈란트 총감과 같이 비행도 한다고 에리카 대위, 아니 소령이 귀띔해줬다.
  ​.​.​.​.​.​.​.​.​.​.​.​.​.​에​리​카​ 대위가 대위가 아니라 소령이라는 사실을 가끔 까먹는군.
  그건 그렇고, 이런 분위기라면 말해도 되는건가?
  "뭔가?"
  "에?"
  "소령 얼굴에 뭔가 말하고 싶다고 하는 것 같은데, 할말이 있으면 말해보게. 실전 경험자의 의견도 중요한거니까."
  호오. 보통이라면 무시할만한 영관급 장교의 푸념도 들어주는건가, 에르데 제국군에서는? 물론 내가 사냐 공주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기회를 준다는건 고마운거다. 최소한 4성 제독들에게 말하면 이루어질 확률도 꽤 있으니까. 그러니까 사양 ​않​고​.​.​.​.​.​.​.​.​.​.​.​
 
  2
  황실 근위군단 직속 44 타격 기사단 (Imperial Guardian Strike Force 44)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갓 진수된 호위 항공모함 ESS 주디케이터와 경순양함 ESS 알리크론, 그리고 구축함 ESS 샌드, ESS캐롤, 그리고 ESS딥블루로 이루어진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우리 기사단은 사파이어만을 떠났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애시당초 항공모함을 상정하고 만든 물건이 아닌, 부족한 항공모함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이 경순양함 개조 호위 항공모함에는 함재기로 고작 블랙캣 18기, 아니면 돈틀리스 12기가 들어간다. 톤수가 8천톤이 넘어간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최대 88기를 탑재할 수 있는 호넷이나 엔터프라이즈, 최대 94기를 탑재할 수 있는 범블비와 비교해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항​공​모​함​이​지​만​.​.​.​.​.​.​.​.​ 어쩌랴, 에르데 제국에 남은 항공모함이 없는걸.
  매치 포인트 해전 동안, 에르데 제국은 항공모함 ESS 호넷 1척을 상실한 대신 후소 제국의 항공모함인 히류, 소류, 카가와 아카기 4척을 격침시켰다. 교환비로만 따져보자면 4대 1의 우수한 교환비고, 이제 오스트해에 투입된 정규 항공모함의 숫자가 쇼카쿠, 즈이카쿠 2척 대 엔터프라이즈, 범블비, 사라토가, 와스프 4척으로 에르데 제국이 우수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우선, 매치포인트 해전 도중 범블비는 탑재한 6개 기사단 72기의 항공기 중 65기과 항공기 승무원 43명을 상실했고, 해전이 끝난지 이틀뒤인 6월 8일, 빅토리아 시티에 기사단을 배치하고 돌아오던 와스프가 후소 제국 잠수함의 뇌격에 당해 격벽이 무너지고 비행갑판이 불타버려 작전 불능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니, 말이 작전 불능이지 사실상 대파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빈사상태의 와스프는 간신히 빅토리아 시티의 항구로 돌아간 모양이지만, 지속적인 후소군의 공습 때문에 과연 얼마나 빨리 수리를 마칠 수 있을까는 미지수이다. 에리카 대위, 아니, 소령의 말로는 지금까지 수리 중 격침당한 공작함만 해도 2척에 이른다니까,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전열로 복귀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라토가의 경우, 진수된지 8년도 지났고, 대공포나 레이더 같은 함의 대공 장비들이 부실해 제국 서해안에서 오버홀 중이었다. 즉, 6월 13일 현재 에르데 제국이 당장 가용 가능한 완편 상태의 항공모함은 엔터프라이즈 단 한척 뿐인거다. 에르데 제국 수뇌부도 항공모함 전력 확충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신형 항공모함의 설계 작업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리 에르데 제국이 3일에 1척씩 수송선을 찍어내고, 5시간만에 전차 1대를 만드는 나라라도 정규 항공모함을 수십척씩 단기간에 건조하는건 무리다. 우리 세계에서는 미국이 해냈지만, 그건 미국이니까.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에르데 제국이다. 착각하지 말자. 어쨌든, 당장 가용 가능한 정규 항공모함이 단 1척인 상황에서, 제국 내의 에이스 5명이 몰려있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우리 세계의 비행대대급 취급을 받는 우리 기사단에게 비록 급조되었지만 호위 항공모함을 내줬다는건, 정말, 뭐라고 해야 할까, 굉장한 대우라고 해야 하나? 당장, 우리 보다 더 규모가 크고, 제국 해군의 최정예라고 평가받는 13 해군 항공 기사대 '블루 데빌'의 경우, 경항공모함은 커녕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한채 빅토리아 대륙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고, 야간 전투 전문인 제 2 야간 항공 기사대 '나이트 레이더스'는 후소 제국의 야간 폭격 저지를 위해 투입 되었다가 4개월이 넘는 작전 기간 중 40%가 넘는 전술기를 손실했다. 그러고도 아직 재보급이나 보충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저들은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후소 제국군의 전술기를 도합 200여기 가까이 격추시키면서 선전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같은 항공 기사로서 이렇게 편애 받는 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당사자인 내가 봐도, 우리가 임시지만 타격대로 승격되고 항공모함까지 배속된건 순전히 황제의 입김 때문이니까. 뭐,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싸워서 최소한의 실력 정도는 검증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제 44 항공 기사단 부기사단장 이창민 소령님은 지금 즉시 전투 정보실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말합니다. 이창민 소령님은 지금 즉시 전투 정보실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올라가보자.
 
  “오셨습니까?”
  “왔어요?”
  함교에 들어서자마자 에리카 소령과 사냐 공주가 나를 맞아주었다. 무슨 일들이야?
  “시간이 있을 때 현재 상황에 대해 알아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
  사냐 공주의 뒤에서 에이저 페이지 함장이 나타났다. 어라? 에온의 함장이 여기에는 왜?
  “어, 창민경 몰랐던거에요?”
  “뭐를?”
  “페이지 대령이 함장직을 맡게된거에요.”
  “……솔직하게 말해서는 나는 날렵한 경순양함의 함장직이 마음에 드는데 말이야...... 아, 물론 자네 기사단과 함께 작전하게 되었다는게 싫다는건 아니다.”
  “제 ​기​사​단​이​라​니​요​…​…​”​
  기사단장은 지금 댁 바로 뒤에 서 계십니다. 물론 다들 신경 안쓰는 것 같지만.
  “응? 44 기사단의 핵심은 자네 아니였나?”
  “맞는데요.”
  “맞습니다.”
  사냐 공주나 에리카 소령이나, 쉽게 긍정하지 말라고!
  “뭐, 사령부측에서는 힘들게 얻게된 항공모함을 상실하기는 싫은지 배만큼은 살려오라는 것 같더군.”
  그거야 남은 항공모함이 별로 없으니까. 뭐, 어떻게 되었든 좋든 싫던간에 한동안 우리 기사단의 모함이 된 주디케이터의 함장이 안면이 있는 사이라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하기 편해서 좋을지도 모르지.
  “자, 시시콜콜한 잡담은 그만하고 지도나 봐라.”
  전투정보실 중앙에 놓여있는 해도로 우리들의 시선이 옮겼고, 그 위로 페이지 대령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과나카날 지역의 전황을 표시했다.
  “일단, 전황을 쉽게 줄이자면……”
  “줄이자면?”
  “무진장 좋지 않다.”
  단호한 얼굴로 페이지 대령이 말했다. 음. 에르데 제국 귀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만큼 최소한 농담은 아니겠군.
  “일단 과나카날이 어떤 지역인지 다시 한번 설명하겠다. 물론 다들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페이지 대령의 설명이 이어졌다. 간단하게 줄이자면, 과나카날을 전략적 요충지, 그 자체였다. 빅토리아 대륙이 브리타니아 제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빅토리아 대륙은 현재 에르데 제국을 통해 보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의 보급이 에르데 제국의 랜드-리스 정책을 통해 브리타니아 제국을 원조하는 형태로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간에 브리타니아 제국은 에르데 제국을 통해 빅토리아 대륙에 대한 보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곳은 일단 언젠가는 시작될 반격의 거점일테니까, 잘 지키는 것이 중요했고,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 큰 희생을 치루기는 했지만. 하지만, 과나카날에 후소 제국군이 진출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쪽에 적의 진출을 확인한 것은 수상기 정찰을 통해서인데, 후소 제국 해군 공정단이 상륙해서 활주로를 건설하고 있었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아냈다. 왜 무시무시한 사실이냐고? 만약 여기에 활주로가 완성된다면, G4M이나 제로 같은 무시무시한 항속거리를 가진 적 기체들이 대량으로 배치될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빅토리아 대륙에 대한 보급선에 문제가 생길 것은 꽤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제, 6월 19일 제국 해병대가 기습적으로 과나카날 섬에 상륙, 적의 활주로를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현재 적의 산발적인 기습을 방어하며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다.”
  참 신기하게도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강행된 상륙작전은 의외의 성공을 거두며 페이지 대령의 말대로 적의 활주로를 점령하고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음냐, 내가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지만, 일단 우연의 일치라고 해두자. 우리의 임무? 간단하다. 후소 제국 병력들은 아군에게 소탕당한 것이 아닌, 정글 안으로 ‘밀려난 상태’이기 때문에 다수의 화포와 전차들이 아직 가용 가능한 상태로 남아있고, 이는 보병 전력 밖에 없는 에르데 제국 해병대에게는 꽤나 버거운 상대다. 그래서 우리는 항공 정찰 및 초계를 통해 이들을 때려잡는 것이 1차 목표, 그리고 섬 주변 해역의 제공권을 유지해 아군 순양함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2차 목표로 할당 받았다. 엔터프라이즈를 주축으로 한 아군 주력 함대가 이미 전개되어 있으니, 우리의 일은 함대 방공 및 대지 공격 지원 정도로 축약할 수 있겠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쉽게 해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내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3
  오랜만에 빅토리아 시티에 돌아온건 6월 21일이었다. 이곳에 잠깐 들린 이유는 다름아닌 보급. 지하 유류 저장창고 덕분에 무사한 연료를 급유받기 위해서 들린 것이다. 항공유야 충분하지만, 함선의 중유는 지난 8일간의 항해동안 어느정도 사용해버렸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들린 것이다. 언제 받을지 모르는 보급, 확실하게 챙겨두는게 놓으니까.
  "아, 그래서 보급 말인데,"
  당직 문제로 함교에 들린 내게 페이지 대령이 말했다.
  "보급 절차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소령은 기사단원들 데리고 잠깐 항구에 가있어도 돼."
  선뜻 선심을 써준 페이지 대령 덕분에 우리는 출렁이는 함선에서 내려 8일만에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음. 확실히 나는 뱃사람이 아니야.
  "창민경은 오래 항해해도 뱃멀미 같은거 잘 안하잖아요."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지. 확실히 땅이 낫다고."
  "맞아. 창민이는 의외로 겁이 많아서 배가 조금 요동치면 침몰 하는줄 안다니까?"
  "에엑? 정말이에요, 창민경?"
  "그...그럴리가 없잖아? 나탈리, 왜 쓸데없는 말을 하는건데?"
  오랜만에 땅을 밟는다는 사실에 그렇게  즐거워 하며 현문을 나선 우리들의 눈 앞에 상처입은 빅토리아 시티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가 떠난 직후 전투가 격렬해졌다고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 격렬함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붉은 벽돌 건물들이 차례로 늘어서있었던 빅토리아 시티 내항은 타다 남은 나무와 잿가루로 사방에 검은 검댕이 묻어 있었고, 항구 곳곳에는 파괴된듯 한 대공포들과 차량들이 널려있었다. 뿐만 아니라 항구에는 항 내에서 격침당하거나 착저한 함정들에서 흘러나온 중유 냄새가 가득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그나마 빅토리아 대륙에서 가장 방공 태세가 잘 갖추어져 있는 빅토리아 시티가 이정도니, 다른 곳이 어떨지는 대충 가늠하고도 남겠다.
  "심각하네요."
  폐허가 된 항만을 바라보며 사냐 공주가 말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죽어갔을까요?"
  아무래도 사냐 공주는 죽어간 에르데 제국민들이 걱정되나보다.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 이래뵈도 일국의 공주인걸.
  "다행이 우리 제국군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손실은 브리타니아 제국 ​측​이​.​.​.​.​.​.​.​"​
  "에리카, 어느 쪽이든간에 소중한 생명인 것은 변하지 않아요."
  헤에. 이런 말을 하는 사냐 공주도 은근히 새로워보인다. 뭐랄까, 전에 알던 공주와는 다른, 조금 성녀 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가슴이 뜨거우면 전투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우리는 군인이기 이전에 살아있는 생명이다.
  "물론, 후소 제국 놈들에게는 제대로 된 복수를 해줘야겠지요."
  방금 한말 취소. 어째 분노의 오오라를 불태우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거냐, 응?
 
  3시간 동안의 가벼운 산책이 끝난 즉시 우리는 다시 출항했다. 사실 산책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게 폐허가 된 도시를 걸어다니면서 히히덕거릴 용기가 전혀 나지 않아 그냥 항구 앞에서 앉아있었으니까.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열심히 일하는 피해 복구반들과 공병대원들 앞에서 걸어다닐 배짱, 나에게는 없다.
  출항한 우리 44 기사단, 아니, 타격대는 후소 제국의 병력 전개 상황 및 주변 지형에 대한 정보를 연계받고 부대 재정비를 위해 물러나는 제 21 타격대와 교대했다.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지난 몇일간 해안에 근접해 5인치 함포 사격으로 해병대의 상륙 및 교두보 확보를 도왔었고, 더이상 사용할 포탄이 없어 그것을 보급받으러 빠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우리 44 타격대가 채우는 것이고. 고작 경항공모함 1척, 경순양함 1척, 그리고 구축함 3척으로 이루어진 우리 타격대가 21 타격대를 대신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리할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대가 과나카날 해역에 전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발진 가능한 전투기들은 1개의 활주로를 공유하는 덕분에 신속 전개가 힘들다. 하지만 우리 타격대의 합류로 이제 상륙군은 2개의 활주로를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활주로가 많으면 한번에 띄울 수 있는 비행기도 많아지는게 당연지사.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말 하기에는 조금 쑥스럽지만, 우리 기사단에는 제국군의 에이스가 다섯이나 있다. 아무리 적게 쳐줘도 최소한 일반 항공기사단에 필적하는 전력이 집중되어 있으니 최소한 손해는 아닌 것이다.
  [귀관들의 무용담은 잘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에 자만하여 적들을 얕보면 아니된다. 21 타격대의 대신으로 들어온 이상, 52문의 5인치포 값은 제대로 해야 할것이다.]
  ​.​.​.​.​.​.​남​오​스​트​해​ 사령관 곰리 제독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냐 공주의 호출로 브리핑 실로 올라간 나를 기다리고 있던건 사냐 공주와 나탈리, 에리카 소령을 비롯한 우리 기사단원들과 주디케이터의 함장이자 타격대 작전과장의 임무를 겸하고 있는 에이저 페이지 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남오스트해 방명군 사령부로부터 상세 임무가 전달되었어요. 그리고 주변 정찰 결과도 함께요.”
  내가 몇시간쯤 전에 요청했던 정찰 결과가 벌써 나왔나보다. 정찰하는데 3시간, 현상 하는데도 꽤나 오래 걸렸을텐데, 어떻게 벌써 나온거지?
  “아, 사진 자료가 아니라 정찰기의 육안 정찰 결과를 지도에 기입한거야. 사진이 현상되려면 아직 몇시간을 더 기다려야 해서 일단은 그것으로 달라고 했지.”
  “고마워요, 대령님.”
  손을 내밀어 페이지 대령에게 정찰 자료를 달라고 했지만, 대령이 건네준 것은 다른 것이었다.
  “우선 명령문이 궁금하지 않니?”
  “항공 엄호 및 제공권 장악, 그 외에 다른 임무도 있나요?”
  “흐음……그것도 그렇기는 하네.”
  나올 명령이 워낙 예상 가능한 범위라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페이지 대령은 꽤나 놀랐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뭡니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겁니까?
  “창민경이 이래뵈도 전략 전술에 꽤나 식견이 있다고요.”
  “맞아요. 그러니까 대령님도 그렇게 무시하지 말라고요.”
  아니, 사냐 공주랑 나탈리, 거기서 이래뵈도가 뭐야, 이래뵈도? 전혀 칭찬이 아닌 것 같잖아?
  ……뭐 상관 없나? 지금은 정찰 결과에나 집중하자. 사냐 공주랑 나탈리의 말에 일일이 딴죽을 걸다가는 내 정신이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까. 나는 시선을 탁자 위에 놓인 해도로 돌렸다. 과나카날 섬에 상륙한 해병 1사단의 기호가 대대급까지 지도에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대대급으로 분산배치 되어 비행장 주변을 방어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 과나카날 섬 안쪽으로 도망친 후소군의 예상 병력은 대략 4천명. 해병대 1사단 1만 5천명으로 충분히 상대 가능한 수준이다. 저쪽은 화포와 전차를 충분히 갖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정도는 우리쪽에서 항공 엄호로 어느정도 커버할 수 있으니 그렇게 큰 우위도 아니다. 거기다 비행장 활주로 연장공사가 이틀이면 끝나니, 과나카날의 비행장에서도 자체적으로 항공기사단을 운용할 수 있게되면 분명 우리에게 유리해질 것이었다. 관건은 해상 보급을 받으면서 버티는 것이겠지만.
  “이건 뭐야?”
  나는 시선을 움직여 과날카날 섬 북서쪽의 트럭섬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후소 제국의 남오스트해 항공 세력 거점인 해처리 섬에는 수십개의 함선 기호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별로 좋지는 않은 소식입니다.”
  “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진지한 에리카 소령의 말이라면 분명 정말로 좋지 않은 소식이겠지. 그 긴장감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에리카 소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후소 제국 해군의 주력인 기갑함대가 몰려왔습니다.”
  기갑함대.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어떻게 보면 무시무시한 이름이다. 16인치급 전함인 나가토와 후소급, 이세급 전함들을 비롯한 후소 제국의 모든 전함 18여척이 집중되어 있는, 이른바 ‘세상에서 가장 많은 포’를 보유한 함대였다. 전함만 18척, 전함을 보조해서 포격전의 주인이 될 중순양함이 12척, 대공을 책임질 경순양함이 14척, 그리고 잠수함을 견제할 구축함이 22척, 그외 자잘한 군수 지원함과 급유함, 유조선들까지 합쳐서 100여척이 넘어가는 대함대가 이쪽으로 몰려온 것이었다. 반면 이쪽의 함대, 그러니까 과나카날 해역에서 작전하는 남오스트해 사령부 소속의 함대는 기껏해봐야 중순양함 3척과 경순양함 5척, 구축함 10척일 뿐이었다. 브리타니아 해군과 빅토리아 방위군 소속 함정들을 합쳐도 중순양함 5척과 경순양함 12척으로 숫자가 늘어날 뿐, 정작 근거리 포격전에서 중요한 전함은 단 한척도 없었다. 이쪽의 이점인 항공모함 2척은 적이 제대로 전개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도 제공권을 얻기 위해 힘들게 투닥거리고 있는데, 만약 적이 기갑함대를 필두로한 대규모 해상작전과 병행하여 제공권을 장악하려든다면, 우리는 반드시 밀릴 것이었다. 농담인 것 같지? 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만약 포격전이 벌어진다면 우위를 갖는 것은 크고 아름다운 전함의 주포들이다. 우리 중순양함의 함포 구경은 끽해봐야 8인치. 구경도 차이가 나지만 숫적으로도 우리가 열세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안좋은 소식은 그게 아닙니다.”
  또 있어?
  “정찰기의 관측사가 전해온 것입니다만, 처음 보는 함종의 전함이 새로 발견되었답니다.”
  “크기는?”
  “16인치급으로 추정되는 주포가 9문, 6인치급 부포 4문, 그리고 다수의 부포탑들이 장착된 전함입니다. 정확한 스펙은 우리 분석가들이 정찰기가 촬연한 사진을 보고서야 알아내겠지만, 관측사의 말에 따르면 그 옆에 있던 전함들 보다 그 크기가 컷다고 했습니다.”
  정말 좋은 소식이 아니군. 후소 제국의 전함들보다 컷다면 못해도 5만톤급 아닌가? 지금 우리가 당장 이용할 수 있는 함정들 중 가장 큰 정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2만 5천톤급이니…… 뭘 어떻게 하라는거냐? 충각 달고 들이라도 받아?
  “어떻게, 지원 병력은 요청 했어?”
  “예. 하지만 바로 기각당했습니다.”
  ……애초에 보낼 배도 없을테지만, 그나마 있던, 아니, 있던것 처럼 보였던 실날 같던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22일, 우리 타격대는 과나카날 해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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