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21 - 히스테리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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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원들을 도와 전투현장의 뒷정리를 끝낸게 대략 오전 11시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당장에라도 일하는거 멈추고 늘어지고 싶지만, 그걸 하고 싶으면 여기가 아니라 집에 있어야지. 곧 비라도 오려는지 바람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채 축축했고, 푹푹한 공기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따갑게 살갖에 내리쬐었다. 따갑다. 그리고 덥다. 누가 열대지방 아니랄까봐 무진장 덥네.
“…..더워……”
“네가 덥게 입었잖아.”
그런 의미에서 사냐 공주나 나탈리 같은 여기사단원들이 조금은 불쌍하다. 다들 민감한 자신의 피부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며 긴 옷으로 꼭꼭 가리고 있으니까. 넓은 챙 모자를 쓴 이마 사이로 땀방울이 맺이는게 보일 정도다.
“하지만 피부가 상하는걸.’
네 피부를 볼 사람이 지금 여기 어디에 있다고…….
“더우면 벗어.”
나는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금방 그게 실수라는 것을 자각했지만.
“진짜? 네가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할……”
“취소취소취소! 벗지마, 그냥 입어!”
“…….너무해.”
나탈리가 나에 한해서는 그 방어 수위를 낮춘다는 것을 깜빡해버렸군. 솔직하게 말해서 다들 옷 한겹 정도는 벗으라고 하고 싶다. 정말 더워보이니까. 잘못하면 열사병 걸릴 분위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차마 뭐라고는 못하겠다. 아니, 뭐라고 하면 안될 것 같은 상태다. 다들 나에게 지금 당장 시원한 곳으로 가지 않으면 나를 능지처참 해버릴거다!라고 눈빛 광선을 쏘고 있으니까. 쳇,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이제 거의 다 왔단 말이야.
“……여긴 어디입니까?”
“보면 알잖아? 잔디밭.”
“헤에, 여기를 두번째 활주로로 사용하자는거지?”
“괜찮은 생각인데요, 선배?”
어제 내가 스쳐지나가면서 봤던 그 잔디밭으로 돌아왔다. 물론 어제처럼 하늘에서 잠깐 보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걸어서 온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충 눈대중으로 짐작해봤을 때 약 200미터 정도의 잔디밭이니까, 우리 블랙캣 전투기 정도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거다. 물론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 계속된 폭격과 포격에 우리 기사단의 전투기는 고작 3기 밖에 남지 않았고, 연료도 이제 블랙캣 1기가 30분 동안 비행할 수 있는 양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보급선만 복구 된다면……. 그놈의 해상 보급만 잘 된다면 분명 1개 기사단 정도는 여기서 운용할 수 있을거다.
“보급만 기다리면 되는건가요, 그러면?”
“그렇지, 소령. 전투기들 쉘터를 만들어 놓고, 잔디밭만 조금 단단하게 다져놓으면 충분히 운용할 수 있을거야.”
“언제부터 시작하실 생각입니까?”
“오늘. 최대한 빨리 끝내놓는게 좋잖아?”
“흐흥……”
에리카 소령이 의도를 알 수 없는 콧소리를 냈다.
“지금부터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겠…….”
아하.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군. 다들 더워서 축 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빛 하나 만큼은 나를 죽일 기세다. 지금 일하면 나중에 크게 혼날 분위기다.
……….그럼 답은 간단하지.
“창민아~ 더우면 그냥 공병대원들에게 맞기고 그냥 여기로 와서 쉬라니까~”
시끄러, 나탈리. 저쪽 그늘 아래에 축 늘어져 있는 나탈리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르지만, 나는 못 들은 것처럼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흥. 분해서라도 일해야지. 나 혼자 일하는게 미안하면 와서 돕던가.
“소령님, 저쪽에서 프로필라인 중위가 부릅니다만……”
“괜찮아요, 중위. 우리는 일이나 하죠.”
해군 공병대대, 시비즈 2중대의 중대장 모턴 중위가 내게 말했지만 나는 간단하게 대꾸하며 야전삽을 든 손을 열심히 놀렸다. 땅을 파는게 아니라 잔디 덕분에 습기를 머금에 조금 물렁물렁한 땅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보병의 친구는 야전삽이고, 좋은 보병은 야전삽을 잘 다뤄야 한다는 점, 나도 잘 안다. 공감한다. 이해 한다고. 하지만 사소하지 않지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나는 항공 기사지 보병이 아니라고!
우리 기사단의 여기사분들께서는 이 더운 날씨에 피부가 상한다며 두꺼운 긴팔 옷을 입고 움직여주신 덕분에 우리가 잔디밭에 도착한 직후, 모두들 기력을 잃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거기다 무슨 일인지 사냐 공주는 나한테 계속해서 짜증이나 내고 있고. 그래서 나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다들 그렇게 힘들어할거면 그냥 그늘에 가서 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말 가버린다……… 우와. 여기까지 소풍온 것도 아닌데, 그깟 피부 좀 탄다고 막 죽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조금 도와주면 안되나?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봐도 투덜대는 것 만큼 쪼잔해보이는 것도 없기에, 나는 그냥 혼자서 야전삽과 신호용 깃발 여러개를 들고 잔디밭 주변을 걸어다니며 움푹 파인 지형이나 지반이 물렁불렁한 곳에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 그냥 보기에는 작은데 진짜로 걸어다니니까 생각보다 넓다. 무진장. 활주로 뿐만 아니라 전투기를 주기해 놓아도 될 정도라고. 물론, 그랬다간 적 정찰기가 귀신같이 찾아내서 포격과 폭격으로 날려버릴테니 그럴 수는 없겠지만.
간단하게 사전 조사를 끝낸 나는 바로 사단 본부로 전화를 걸어 반데그라프 소장에서 지원을 요청했다. 비상용 제 2활주로의 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반데그라프 소장은 바로 지원 병력을 보내주었고, 내가 사단 본부로 전화를 건지 10분만에 공병 1개 중대가 잔디밭, 미래의 제 2 활주로로 도착했다. 시비즈 중대 중대장 모턴 중위 휘하의 공병대대원 200여명은 나의 간단한 브리핑과 함께 바로 내가 아까 표시해 놓았던 곳들로 달려가 작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가 지키고 있던 제 1활주로의 건설과 피해 복구를 맡아온 공병대원들이어서 그런지 작업 자체는 매우 수월하게 해내기 시작했다. 공병대원들은 딱딱한 바위들을 폭약으로 날려버리고, 움푹 파인 구덩이는 근처의 흙을 삽으로 날라 매운 다음 단단하게 다지고, 시비즈가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중장비인 ‘호그’가 왔다갔다 하며 불도저 삽날로 땅을 찍어 누르고.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시비즈 대원들 답게 내가 지시하기도 전에 벌써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알아서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안그래도 부족한 중대원을 쪼개 숲 속의 나무들을 잘라내서 우리 블랙캣 전투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노천 쉘터를 만들고 있었다. 뭐, 쉘터라고 해봤자 나무 판자를 깔고 그 위에 모래 주머니를 올리고, 지붕 대신 천막을 덮고 주변의 나뭇가지로 위장하는게 다지만, 어쨌든 필요한 작업이고 우리 기사단원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의 도움 없이는 작업이 불가능 할거다…….아니, 가능은 하겠지. 시간과 예산이 충분하다면.
작업 돌입 4시간만에, 시비즈 대원들은 전투기 쉘터 4개를 만들고 제 2활주로의 절반 가까운 잔디밭을 평평하게 다졌다. 딱딱한 블랙캣 전투기의 꼬리 바퀴가 내리찍어도 어느정도 벼텨낼 수 있을 정도로. 고무로 된 마스터 배드가 있다면 전부 깔아버렸을테지만, 그건 지금 제 1활주로에 쓰기도 급하니 그냥 포기하자. 그렇게 시비즈 대원들이 열심히 우리 대신 일하는 동안, 우리 기사단원들은 전부 시비즈가 쳐준 천막 안에 들어가서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며 놀고 있었다. 다행히 바쁜 시비즈 대원들을 붙잡으면서 방해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저렇게 놀고만 있으니 조금은 부끄럽네. 특히 옆에서 자기네 일도 아닌데 열심히 하는 모턴 중위와 시비즈 2중대원들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나탈리, 제발 나 보면서 웃는 얼굴로 손 흔들지 마. 차라리 와서 일해. 나는 필사적으로 나탈리를 듣지 못한 것 처럼 고개를 돌려 일에 집중하는 척 했다. 으으…..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서 이대로 두더지 처럼 땅을 파고 들어갈 것만 같아.
“소령님? 프로필라인 중위가 부르는 것 같습니다만…….?”
“신경 꺼도 되요, 중이. 우리는 일이나 하죠.”
하아……… 모턴 중위는 쓸데없이 그런 일은 왜 내게 말해가지고 내가 대꾸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거냐고!?
“아니, 그래도……..”
“중위와 중대원들에게 미안하게, 저희 일을 그쪽에 떠넘겼는데 저녀석들은 와서 돕지도 않으니……. 미안해요, 중위.”
“아, 아니. 저희가 사과를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당연히 이건 저희가 해야할 일이니까요.”
물론 그쪽이 이런걸 담당하는 전문부대인 것은 알지만…….그래도 인원수 부족한 상황에선 저녀석들도 거들어야지! 그게 당연한거 아니야?
…..절대 나 혼자 일한거에 삐져서 이러는거 아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저희가 해야할 일이니까요. 설사 다른 기사단원들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셔도, 어차피 그쪽 관련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는 그저 투입하기 힘들 뿐입니다.”
“…….”
정론이군. 뭐라고 할 말이 없던 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뭐야?”
“저기, 이창민 소령님 어디…….아, 거기 계시는데…….. 뭐하십니까, 소령님?”
야전삽으로 땅 두드리는거 처음보냐? 쩝, 자기보다 한참 높은 계급의 사람이, 그것도 전혀 다른 병과의 장교가 공병대원들이랑 같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겠다.
“무슨 일이야, 베스터 중사?”
“아, 반데그라프 소장 각하께서 이창민 소령님을 호출하셨습니다.”
응? 통신병이었어? 베스터 중사라고 불린 공병대원이 내게 등에 걸려있는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반데그라프 소장이다. 아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평소랑은 조금 목소리가 달라서 놀랬다. 반데그라프 소장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예. 예. 그럼, 그건 이쪽에서 결정…… 예. 예. 알겠습니다. 예, 그럼…….”
“무슨……. 일입니까?”
이런. 나도 모르게 히죽 웃고 말았구나. 하지만 방금 반데그라프 소장의 말을 들으니 입이 귀에 걸리는걸 어떻게 하라고?
“흠, 좀 있으면 알게될거에요, 중위. 그건 그렇고, 지금 여기 2 활주로는 사용 가능한가요?”
“예? 지금 당장이요?”
“예. 지금 당장.”
잠깐 고민하던 모턴 중위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저희가 급한 곳들만 손을 보기는 했습니다만……. 활주로의 바다쪽 끝은 조금 지반이 약합니다. 저쪽은 나중에 제대로 보수 공사를 벌어야 합니다.”
“그럼, 지금 당장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죠?”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모턴 중위의 말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오랜만에 좀 즐겨 보는거야. 나는 손목시계의 바늘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시각 오후 3시 34분. 4시까지는, 여기서 철수할 수 있겠지?
“지금 하고 있던 급한 마무리 작업을 45분까지 마치고, 4시까지 철수하겠습니다.”
내 말에 모턴 중위가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중대원들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충분히 쉬어두고요.”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들에게 휴식 명령을 내리고 걸어가려는 찰나, 모턴 중위가 불렀다. 중위의 대답에 나는 가볍게 씨익 웃어주기만 하고, 우리 기사단원들에게로 걸어갔다.
천사가, 등 뒤에서 밀어주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