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21 - 히스테리 Part 4
5
10분 뒤, 해병 1사단 부상자들과 영헌들, 그리고 우리 기사단원 넷이 분승한 6기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른 직후, 우리는 블랙캣 전투기의 최종 점검을 마치고 활주로를 향해 택싱을 시작했다. 이미 한번 카탈리나 비행정들이 날아오른 덕분에 일어난 먼지구름이 자욱한 활주로 앞은 시계가 썩 좋지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착륙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캐노피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기수 쪽을 한번더 확인한 다음, 나는 넓적다리 주머니 안에 넣어진 방수 코팅된 지도를 꺼내 손가락을 천천히 짚으면서 무전으로 비행지점을 다시 통보하기 시작했다. 별로 우리 기사단원들을 못 믿는다거나 하는건 아니다. 다만, 걱정될 뿐이다. 너무 오랜기간 동안 날지 못했던 나탈리나 에리카 소령, 사냐 공주가 조종간을 잡았을 때, 그 기분에 휩싸여 멋대로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까.
“자, 마지막으로 말하는거지만 잘 들어. 우리가 호위하는건 수송선단과 호위함들이 마중나온 경항공모함 타격대와 만나는 지점 까지야. 그 이상은 절대 안돼! 바로 섬으로 돌아와서 해가 지기 전에 섬 주변을 정찰할꺼니까.”
[알았어. 벌서 몇번째로 말하는거야, 그거? 우리를 좀 믿으라고]
그러니까 나탈리, 네가 제일 걱정이라고, 네가.
[부단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애들도 아니지 않습니까.]
[……흥!]
사냐 공주는 여전히 토라진채 나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있었고, 그나마 에리카 소령이 믿음직한 말을 해줘서 다행이다. 하아…….. 부단장인 내가 기사단장에 필적하는 권한을 휘두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여기는 고생 길이라고. 뭐, 지금 와서 신세 한탄 해봤자 바꿀 수 있는 과거도 아니니 지금은 그저 순응하는 수 밖에 없지만 말이야.
“휴우…….. 다들 말 잘 듣고. 자, 그럼 이륙하자. 이륙 순서는 4번기 부터.”
[오케이. 알았다고!]
오늘의 이륙은 평소와 달리 4번기 부터 시작했다. 사냐 공주가 1번기, 내가 2번기, 에리카 소령이 3번기, 나탈리가 4번기니까, 나탈리 부터 차례로 이륙하게 된거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먼저 이륙하게 되면 가장 먼저 주변 탐색 및 위협 탐지를 하게 된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한데, 만약 갑작스러운 적의 내습을 발견할 경우, 나머지 아군 전투기들이 이륙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으면 아무리 촐삭대고 천방지축에 왈가닥 성격인 나탈리라도 일단은 위축될 수 밖에 없겠지. 일단 이 멤버 중에서 가장 활동량이 높은 사람이 나탈리고, 내가 그동안 알아왔던 이녀석의 성격 상 흥분하면 100% 오버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랜만에 날게되는 나탈리의 행복감을 빨리 충족시켜주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다.
나탈리의 뒤를 이어 에리카 소령의 전투기가 날아올랐고, 그 뒤로 내가 활주로에 들어섰다. 내 전투기는 재생 가능한 부품 중에서도 가장 안좋은 부품들만을 모아서 만들어놓은 전투기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 문제가 터질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나는 이 전투기를 선택했다. 왜냐고? 내 눈 앞에서 다른 사람이 이 블랙캣을 몰다가 사고로 죽는 어이없는 상황을 보기는 싫거든.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그건 다른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이니까. 하지만, 여기에서는 내가 최고 연장자다. 사냐 공주나 에리카 소령이 물리적인 나이로는 나의 수십, 아니, 수백배일지는 몰라도, 정신 연령을 보자면……. 사냐 공주가 비참해지니까 그냥 그만 둘란다. 나탈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쓸데 없는거, 가령 나라든가, 에 집착하려는 것을 보면 참 애 같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애이기도 하고 말이지.
어쨋든, 그래서 내 전투기가 가장 낡은 전투기다. 나머지 나탈리나 에리카 소령의 전투기는 기본 골조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부품은 새로 지급받은 부품으로 교체했고, 사냐 공주의 전투기는 아에 분해된 신품을 재조립 한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다들 정말 운이 없지 않은 이상 별일은 없을거라는 이야기다.
옆에서 엔진 피치를 최저로 낮춘 채 엔진을 돌리고 있던 사냐 공주의 신품 블랙캣이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역시, 새거라서 그런지 알루미늄 외피는 번뜩이고 윤기가 좔좔 흐른다. 정말, 저런 신품 전투기, 나는 언제 한번 타볼까, 모르겠네.
…..으음. 사냐 공주가 자기를 처다보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 어째서 몸을 가리면서 배배 꼬는지는 모르겠지만, 웬지 모르게 기분 나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데…… 왜지?
[뭘 봐요, 창민경?]
으아, 평소랑 전혀 다름 없는 말투지만 저렇게 낮게 깔린 저음이면 이야기가 다르다. 엄청나게 무섭다고…….
[아무리 자기거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바라보면 기분 나쁘거든요?]
…….응? 무슨 소리래?
[자기거라고 훔쳐보지 말고 그 눈은 앞으로 돌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비행에나 집중하시죠!]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했군. 자기를 바라보는줄 알고 있잖아? 아무래도 빨리 풀지 않으면 안되겠어.
[참나, 그렇게 비행이 좋으면 비행이랑 평생 살던가, 왜 내 마음은 뒤숭숭…….]
“저기,”
[왜요?]
뭔가 미묘하게 묻어나오는 기쁨이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상관 없겠지.
[드디어 제게 사 “나는 딱히 너를 본게 아니라 블랙캣을 본건데?” 과할 마………]
사냐 공주의 말이 갑작스럽게 끊겼다. 어라, 통신 장비에 이상이 간건가? 그건 아닌거 같다. 나탈리나 에리카 소령의 숨소리는 잘만 들리니까. 나는 혹시나 하고 사냐 공주 쪽으로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말 영문도 모르겠는데 나를 향해 살인 광선을 뿜어내는 사냐 공주가 있었다!
아예 저 눈빛으로 나를 죽일 분위기야. 아니, 내가 도데체 뭘 잘못했다고?! 이제는 항공 장교가 전투기를 보기만 해도 죄가 되는 세상인거냐?
[아, 정말, 몰라요! 창민경 미워요! 그냥 이륙이나 해요.]
……왜인지 모르지만 매도당했습니다. 그것도 밉다는 말을 여자애 입에서 듣다니…… 충격이다, 충격.
이륙 자체는 빨리 끝났다. 4기 뿐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고작 4기 뿐이지만 다시 우리 기사단이 편대를 이루고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우리 모두는 기뻐했다. 모두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지만 말이다.
부아앙
익숙한 진동, 익숙한 소리.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낯선 설렘. 정말 오랜만이다.
[이야호~ 이게 얼마나 오랜만이야!]
[후훗……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요.]
[……]
그래. 다들 기뻐하는구나. 나도 기쁘다고. 오랜만의 비행. 드디어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맡을 수 있다는 기쁨과 성취감. 그런거 말이야. 그러니까……
파파팍
왼쪽 다리에 무언가 둔탁한 통증이 전해진다. 갑자기 튀어오른 붉고 뜨뜻미지근하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튀어올라 얼굴에 철퍼덕, 부딛힌다. 갑자기 빨갛게 변해버린 시야 앞으로 쉭, 연한 하늘색 그림자 12개가 빠르개 지나간다.
기….기습인가?
[차…창민경?]
[창민아?]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반격부터 하고 보자. 왼손으로 눈가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낸 나는 아래쪽으로 사라지는 적기들을 향해 재빨리 반전, 그대로 급강하하며 추격하기 시작했다.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눈치채지 못했던 나탈리와 에리카 소령, 그리고 사냐 공주는 내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곧바로 별다른 질문 없이 따라왔고. 급강하하면서 속도를 붙인 나는 기수를 들고 천천히 상승하며 그 다음 공격 기회를 노리는 적기에게로 다가갔다. 나의 접근을 눈치챈 적기는 이리저리 꺾으면서 꼬리에 붙기위해 다가오는 나를 떼어내려고 하지만, 늦었다. 이미 나는 최적의 공격 위치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잠깐만.
“나탈리. 지금 내 앞의 적기 보이지?”
[응? 으응? 저거……]
[아군입니다!]
젠장. 검은 원 안의 하얀 직사각형. 그리고 그 위에 그려진 검은색 대각선. 이씨, 우리 편 맞구먼! 왜 공격 하고 난리야? 우리는 도장 색도, 라운델도 후소 제국이랑은 확실히 차이나는 편인데?
“공격 취소! 전부 내 주변으로 집결. 우리 라운델이 잘 보이도록 최대한 천천히 날고.”
[알았어.]
“에리카 소령은 저쪽이랑 교신 시도 해봐. 공격 중지부터 요청하고. 우리를 쏜 이유는 내려가서 추궁해도 되니까.”
[알았습니다.]
고도를 올리면서 선회를 시작하는 저쪽을 향해 나를 필두로 우리 기사단 소속의 블랙캣 전투기 4기가 훤히 등을 내보였다. 양쪽 주익에 그려진 에르데 제국의 라운델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야. 제발 저쪽이 알아보고 공격 그만 해야 할텐데…… 뭐, 봤는지 안봤는지는 곧 알게 되겠지. 적기들이 차례로 반전하면서 우리를 향해 기수를 숙이고 내려오고 있으니까 말이야. 피아 식별이 제대로 되었다면 저쪽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거고, 아직도 우리가 적이라고 알고 있다면 별다른 방어기동조차 하고 있지 않는 우리는 숫적 열세에 휩쓸려 모조리 격추당하게 되겠지. 도 아니면 모다. 저쪽이 우리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에리카 소령 덕분에 우리는 살아났다.
[연결 되었습니다.]
“고마워 소령. 여긴…….”
[야! 지금 우리 공격한 놈은 누구야?]
…….사냐 공주가 폭발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내가 대화하는게 거기에 끼어드냐고?
[여기는 에르데 제국 해군 항공 기사단 소속 제 37 기사단이다. 지금 군용 통신 체널에 끼어든 귀관은 누군가?]
[제국 황실 제 6 황녀, 사냐 공주다. 지금 즉시 공격 중지하고 당장 우리를 호위하도록! 공주의 명령이다!]
사냐 공주의 한마디에 바로 조용해진 통신망 사이로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과나카날에 배치된 제 44 기사단 부기사단장 이창민 소령입니다. 즉시 공격을 중단해주십시오. 비행장까지 유도하겠습니다.”
[44 기사단?]
[전멸한거 아니었어?]
[포위가 몇일도 넘게 진행되어서 피해가 막심하다 들었는데? 거기다 모함까지 잃고.]
야, 야, 야. 다 들린다, 다 들려. 도데체 무슨 소문을 들은거야? 전멸은 누가 전……멸 했구나. 우리. 전체 병력의 30% 정도가 아니라 100%가 날아갔었으니까.
[미안. 섬 근처에서 날아다니길래 적기인줄 알고 일단 공격했다. 설마 아직까지 살아있을 줄은 몰랐지.]
나참, 그렇다고 피아 식별도 없이 무작정 공격하는게 어디있습니까, 중령님?
[미안하네.]
……사과해서 넘어갈 일은 아니지만 일단은 착륙부터하자. 지혈 해야 하니까.
“잘 왔네, 잘 왔어!”
37 기사단원들이 착륙하자마자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버선발로 달려나온 반데그라프 소장이 말했다. 우와, 눈에서 눈물도 흘리고 있어.
“언제나 놈들의 공격에 시달렸는데 드디어 자네들이 왔으니 항공 우세를 장담할 수 있겠군. 잘 와주었네.”
아니, 이 양반이. 지금까지 우리가 항공 작전을 하지 못한건 보급선 문제 때문 아니요? 더 열불나는건 그런 반데그라프 소장에게 말하는 켈더프 중령의 태도였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온 이상 이제 이 섬의 제공권은 우리 제국의 것입니다.”
이봐요, 그렇게 쉽게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거든요? 지난번에 빅토리아 시티에 있었을 때는 우리보다 스크램블도 늦었으면서.
“이봐요, 중령!”
그리고 화가 난 사냐 공주가 다가왔다.
“왜 우리를 공격한겁니까?”
계급만 아니었다면 바로 멱살 잡고 내던질 분위기다. 그러고보니 사냐 공주가 저렇게 화가 났던 경우가 있었던가?
“미안합니다. 당연히 적인줄 알았습니다.”
“아니, 당연히 적인줄 알았다니? 우리가 여기 있는걸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요. 전투의 기본인 피아 식별조차도 못하면 뭐하자는 겁니까?”
“다행히 공주 전하는 다치치않았지 않습니까?”
“뭐…요?”
아야야. 사냐 공주 화났다.
“지금, 뭐라고요?”
“어차피 공주 전하만 다치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소령이 죽은 것…….”
“야, 이자식아, 계급장 떼고 붙자, 붙어!”
사냐 공주 멱살 잡았다. 계급으로도, 나이로도 한참 위인 켈더프 중령의 멱살을 잡았다고! 다친 다리 때문에 잠깐 내 대응이 늦은 덕분에 이 일어난 사태를 말리기 위해 나는 사냐 공주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지금 뭐하는거야?”
“경, 경은 지금 들었나요? 창민경이 다쳤는데 내가 다치지 않아서 괜찮다고요? 그렇게 말하잖아요.”
“……의무관이 별일 아니라잖아. 별일 아니겠지.”
“별일이 아니라니요? 잠깐만요, 창민경.”
“손 떼. 일단은.”
“……싫어요.”
너 화난건 내가 나중에 풀어줄 테니까 일단은 손 놓으라고. 소장님 계시고 다른 장병들도 보는데 공주가 뭐하는짓이야?
“……알았어요. 하지만 중령, 중령을 나는 용서하지 않을거니까 나중에 제대로 사과문 작성해서 올리도록 하세요.”
37 기사단장 켈더프 중령에게 무려 삿대질을 한 사냐 공주가 휙 돌아서 가버렸고, 그 뒤를 따라 나탈리와 에리카 소령이 따라갔다. 나탈리, 너는 왜 안말린거야?
‘너를 다치게 했으니까. 나도 사냐 공주처럼 화나는걸.”
……다들 왜이래 정말. 좀 아프기는 하지만 정말 별일 아니라고. 사냐 공주 일행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돌려 켈더프 중령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가끔씩 저럴때가 있어서요.”
“음……..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공주의 저런 태도는 참 보기 좋지 않군.”
에……..
“관리 좀 잘하게나. 자네거면 책임을 저야지.”
에…..? 이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켈더프 중령이 피식 웃더니 돌아가버렸다. 뭐야?
“소령, 소령도 들어가서 상처나 치료하게. 공주 전하나 좀 잘 달래고.”
“예.”
반데그라프 소장도 들어가버리자 이제 넓은 활주로에 남은 것은 나밖에 없었다. 수평선 너머로 점점 내려가는 태양이 이제 곧 밤이 된다는 것을 예고해주고 있었다. 슬슬 들어가자. 사냐 공주 좀 달래야지.
편치 않을 밤이 될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