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24 - 지니아 Part 2
2
그게 생각이 났던건 참 어이 없는 대화에서였다. 우연히 사냐 공주와 나탈리가 37 기사단 애들을 열심히 욕하고 있는 것을 들었고, 그 와중에 생각나버렸으니까. 정말이지, 어떻게 그걸 잊어버렸는지 나도 신기하다. 감사의 표시로 두사람을 한번씩 안아준 다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안아주자마자 두사람의 얼굴이 굉장히 빨갛게 달아 올랐지만…….. 아니, 뭐, 설마 열이 있다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응, 아닐거야.
발걸음을 재촉하며 내가 온 곳은 다름 아닌 해병 1사단의 정비대. 가벼운 덕분에 상륙이 용이한 스튜어트 경전차를 운용하는 해병 1사단은 지속적인 전투 때문에 원래 보유하고 있던 전차 1개 중대 13대에서 5대로 줄어버렸다. 지난 테나 강 전투의 추격 과정에서 매복에 걸려 적의 대전차공격을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것이 결정타로 작용해버린 것이다. 하긴, 대전차포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수류탄 하나 들고 뛰어들어오는 적의 자폭 공격을 어떻게 막겠어?
어쨌든 전차가 격파되어 할일이 줄어든 기갑 정비소대는 본래의 임무인 전차 정비 뿐만 아니라 수량은 많지만 정비할 일손이 부족한 항공 기사단들의 정비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아까 말했던 37 기사단의 비전투 손실 블랙캣을 해체하고 스크랩 한 것도 37 기사단 정비대가 아닌 기갑 정비소대가 해낸 일이다. 그 중에서도 엔진에 대해서라면 이 과나카날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게 정비소대장 테스텔 힐셔 준위 되시겠다. 그녀의 지휘 아래 떼어낸 엔진이니까 분명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쓸만한 상태인지 알고 있겠지. 단 한기의 블랙캣이 아쉬운 시점에서 이런 문제가 빨리빨리 해결되는게 좋으니까.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볍게 발걸음을 놀리면서 정비대로 향했다. 분명 잘 될것이라는 막역한 희망을 품은 채로.
하지만 그 희망은 나를 배신했다.
“저기, 테스텔 힐셔 준위…… 좀 볼 수 있을까요?”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의 모습에 잔뜩 경계하는 기갑 정비대원들. 왜들 그래, 우리 한두번 보는 사이도 아니잖아, 이젠?
“누구…십니까?”
“아, 44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이창민 소령입니다.”
“!!”
다들 이제야 내가 누군지 눈치를 챈 모양이다……. 아니, 나를 모르는거 꽤 힘들텐데? 아무래도 나는 에르데 제국군 내에서 몇 안되는 동양….계? 군인이니까. 내 전과니 뭐니 그런 쓸데없는건 저쪽에 제쳐 놓더라도 말이야. 다들 흥미가 있다는 눈으로 이제는 나를 처다보고 있다.
“이창민…?”
“어디서 많이 들어봤….. 잠깐, 혹시……”
“그렇다면 공주 전하의…..?”
“소령이잖아!”
“44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사냐 공주의 제 1기사!”
“하늘의 기사!”
“푸른 사신!”
“하렘 마스터!”
……마지막에 뭔가 이상한 말이 나온것 같은데?
“미미미미미처 알아 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소령 각하. 저는 해병 제 1사단 기갑 정비소대 소속 카를로스 상사 입니다. 소대, 전체, 차렷!”
처처척
“이창민 소령 각하께 대하여, 경례!”
척
절도 있는 군인들의 경례가 갑자기 내게 쏟아진다. 뭐냐, 이건? 난 그냥 일개 소령에 불과할 뿐이라고. 거기다 각하?
“……저는 각하까진 아닙니다만”
“그러지 말고 말 놓으십시오, 소령 각하. 각하께는 각하라는 호칭이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제국 최고의 전쟁 영웅은 조금 거만해지셔도 됩니다.”
……내가 제국 최고의 전쟁영웅이라고? 왜?
“공주 전하에게 반해, 우리 제국을 도와 간악한 후소 놈들을 무찌르시고, 우리 제국군에게는 구원을, 적에게는 죽음을 안겨 주시지 않습니까?”
웬지 내가 무슨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다. 아군에게 구원을, 적에게는 죽음을이라니…… 무슨 1940년대 프로파간다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 그리고 잠깐만. 지금 뭐라고?
“직접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 입니다.”
“잠깐만요, 내가 누구한테 반했다고요?”
“그거야 공주 전하지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해다.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이 인간들.
“아니, 저는 딱히……”
“그럼 데리고 오신 중위님이 취향이신겁니까? 아니면 사파이어 영주 각하?”
데리고 온 중위면 나탈리고, 사파이어 영주면 에리카다……. 둘다 아니거든요!
“죄…죄송합니다.”
돌겠군. 어쩌다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된거야? 뭔가 이상한 오해들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괜히 부정했다가 더더욱 긍정이 될까봐 두렵다. 뭐? 내가 사냐 공주에게 반했다고? 말도 안돼! 사냐 공주 같이 어린아이 몸매에 정신 연령도 어려서 매일 어리광과 투정이나 부려대고, 질투 많이 하고, 독점욕 강한 여자한테 내가 반하겠냐? 절대, 절대 그럴 일 없다고!
……어째 혼신의 힘을 다해 부정할 수록 뭔가 손해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그냥 저희도 그렇게만 들어서…… 결례를 저질러서 송구스럽습니다.”
일단 지금은 내가 온 목적에만 충실하자.
“아니, 그정도 갖고 무릎 꿇지는 말고요. 됐고, 테스텔 힐셔 준위나 좀 찾아줄래요, 상사?”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내게 그렇게 말한 카를로스 상사가 텐트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정비대원들은 아무래도 내가 눈치 보였는지 아까처럼 늘어져 있는 대신 빠릿빠릿하게 허리를 세우고 정좌하고 있었다. 내게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계급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까 조금은 주저하는 모양이다. 뭐, 나도 일일히 말하기에는 조금 귀찮으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카를로스 상사의 말이 조금 신경쓰이기도 하고 말이야. 내가 사냐 공주에게 반했다고? 흥, 쳇, 핏! 설마, 설마 내가 그럴리가 있겠냐고!
……그런데 왜 이렇게 허탈해지냐?
“저….저기 소령님?”
“하아……”
“히익? 죄송합니다!”
응? 아, 실수. 내게 쭈삣쭈삣 다가오던 어린 정비대원 하나가 말을 건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실수로 한숨을 내쉬어 버렸다. 내 행동에 화들짝 놀란 그 대원은 선임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에? 아…. 왜요?”
“아아아아아닙니다. 괜히 말을 걸어서 죄송합니다, 소령님.”
“아니에요. 무슨 일인가요?”
사람을 불렀으면 대화를 해야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건 또 어느나라 규칙이야? 내 말에도 조금 머뭇거리던 그 대원은 결국 내가 손짓을 하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뵈…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소령님. 소인은 젠킨스 일병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자신을 젠킨스 일병이라고 소개한 이 정비대원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 하자고. 하지만 그런 내 행동에 젠킨슨 일병은 크게 놀란듯 딸국질을 시작했고, 다른 대원들도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지? 에르데 제국에는 악수라는 문화가 없나? 아닌데? 나 지난번에도 다 했던건데?
“소…소령님?”
“아니…. 그냥 악수하자는 건데요? 만나서 반갑다고?”
“어어어어어어어어떻게 제가 감히 소령님 같이 고귀하신 분의 손을 잡겠습니까…..”
……이봐요, 누가 고귀하다고요? 제가요? 스토왈트 중령님이 들으시면 코웃음치실 내용이다.
“저는 하나~도 고귀한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소령님께서는 공주 전하의 제 1기사 아니십니까? 그런 대귀족의 손을 저 같은 평민이 잡는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네?”
“아니, 그러니까…..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고요,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내가 시켰다고 하면?”
“……아…알겠습니다.”
살짝 엄한 표정을 짓자 그제서야 내게 다가와 악수한다. 그리고는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아니, 무슨 대단한거 하는 것도 아닌데 왜그러시나? 물론 문화가 다르니까, 라고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말이야…….
“흑……제가 소령님과……. 악수를…… 이손, 앞으로 절대 씻지 않겠습니다!”
그러지마! 더럽잖아!
“그런데 일병, 무슨 일이에요?”
“아니…. 저….. 그게…..”
“말해봐요.”
“그러니까…… 소령님의 사진을 갖고 있습니다.”
내 사진?
“네. 그러니까 부적 대용으로요. 효과가 좋다고 인기가 많습니다.”
내 사진이? 보통 내 얼굴 보면 다들 별로라고 하던데…..? 워낙 못생겨서 악귀도 달아나는 모양이다.
“혹시 그래서….. 소령님의 친필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제, 친필 사인이요?”
“예. 그러면 이번 전쟁에서 죽지 않을거라는 소문이 있어서……”
내가 오늘 내 사진이 부적처럼 쓰인다는걸 처음 알았는데, 그런 소문은 또 어디서 났데? 하지만 거절하기도 조금 뭣해서 젠킨스 일병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사인을 해줬다. 사인이라고 해봤자 그냥 내 이름을 휘갈겨쓴거에 불과하지만. 뭐, 그걸 받아서 안도하면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면야, 사인 하나 정도는 일도 아니지. 오히려 이쪽이 감사할 일이다. 그런 희망만이 지금 같은 암울한 상황을 견뎌내는데 도움을 줄테니까.
……그런데 왜 이제는 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거지?
“저희도……”
“저희들 것도 해주십시오, 소령님”
이런 겁쟁이들! 가장 약해보이는 일병을 미끼로 던져서 내 반응을 유도해본거구나! 크윽, 해줄 수도, 안해줄 수도 없다. 해주자니 일단 귀찮고 팔 아플 것 같고, 그렇다고 안해주자니 형평성에 어긋나고……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이거?
다행이 구원자가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늬들 뭐하냐? 소령님 불편하시게? 당장 정좌 안해?”
“시..시정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상사. 대놓고 말은 못하겠지만.
“그런데 힐셔 준위는요?”
“준위님께서는 어딜가셨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소령님 오시기 전까지는 분명 있었는데?”
“그래요?”
하는 수 없지. 나중에 다시 오는 수밖에.
“이따가 다시 올게요. 그때는 힐셔 준위랑 꼭 만나보고 싶으니까, 잘 좀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소령님.”
카를로스 상사의 경례를 받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 밖으로 향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카를로스 상사가 나를 불러 세우기 전까지는.
“저기, 소령님? 제 카드에 혹시 사인 해주실 수 있습니까?”
……퇴로는 이미 사진을 꺼내든 다른 장병들에게 막힌 상황. 아무래도 안해주지 않으면 못나갈 것 같다. 뭐, 이깟 사인 한번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건데, 못해줄 것도 없지.
……팔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