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작품은 葵絵梓乃님의 허가를 받아서 번역했음을 알립니다.
허가해주신 작가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해당작품 본편은 회색빛잔영님, 2side님, 일각여삼추님, PsnPd님, BlueT님, 우드락님, Jemes님이 각기 번역해 주셨고,
번역 감수 및 외전은 저 아이시스가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의 협력 정말 감사합니다.
일어설 기운이 정말로 없다.
무슨 엄살을 피고 있냐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일어설 수 없다.
그야 그렇지 않겠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낸 추리가 그저 억측에 지나지 않았던 데다 더 구제불능, 아니 손조차 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의기소침하겠지.
히키가야 하치만도 옥상에 안 오고.
그도 그럴 것이 오지 않도록 한 게 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5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이번 시간은 뭐였지, 아아, 선택이과이었나. 그럼 이동교실이네. 그렇다는 건 교실에 돌아가도 아무도 없다는 뜻인가…….
그 애 정도는 찾으러 와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결국 오지 않았고. 박정해라…….
어쩜.
그걸로 됐어. 날 찾으러 일부러 이런 곳까지 찾아올 필요 따위 없는걸.
수업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착실히 수업에 가야지. 이런 곳에서 젖어있는 나한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렇게 생각한 때였다.
닫혀있던 옥상 문이 열린 것은.
「여기 있었나?」
하고 침입자가 말했다.
찾지 않아도 될 나를 찾고 있었기라도 한 말투였다. 그 목소리는 내가 정확히 한 시간 전에 들었던 목소리.
4교시 때 유감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나에게 주의를 준 목소리.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쭉 뻗은 장신의 미인이 서 있었다.
「……히라츠카 선생님」
“또 만났네요.” 라고 평소라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 속에서 얼핏 떠올랐다 사라져 갈 뿐.
흠뻑 젖은 나의 이름을 부른 히라츠카 선생님은 트레이드마크인 백의를 벗어 돗자리 위에 던졌다. 선생님은 그다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온다.
「……감기 들어요, 히라츠카 선생님.」
겨우 짜낸 한 마디에 선생님은 무척 따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공교롭게도 나는 교사가 된 이래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다. 흠뻑 젖은 네가 말해도 설득력도 없고 말이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건가요. 선생님, 5교시 수업은 어떻게 하고요.」
「그런 건 보이콧이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히라츠카 선생님이 단언했다.
……여전히 여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호쾌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 멋진 모습은 몰래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금방 비에 젖는다.
「이야기는 다 유키노시타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하루노---유키노시타의 언니는 알고 있으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가요.」
역시 그 사람, 내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던 건가. 정말이지, 자매 둘 다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교사로서 이렇게 말하는 건 조금 어떨까 생각한다만--- 넌 잘했다. 방법이 조금 지나친 면도 있었지만 수사로는 만점을 주고 싶다. 이렇게까지 히키가야에 대해 조사해준 인간이 있는데다가 확실하게 오해 없이 진실에 다다른 게 무엇보다 훌륭하다. ……그 쇼크는 컸던 모양이지만 말이지.」
「……히라츠카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신가요?」
「뭐가.」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이래선 하나도 보답 받지 못하잖아요!
우리는 결국 「한 명은 모두를 위해」로 끝이라고요!
단 한 명에게 상처를 주고 진실을 감추는 희생양으로 삼고, 곤란한 건 축제의 소란이 어떻게든 해주겠거니 넘어가기나 하고,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돌만 던지고! 그걸 이야깃거리로 삼는 우리들이 못난이잖아요! 이런 아무런 구원도 없는 결말 따위 괴롭기만 해요!」
「진정해라. 네가 난리 쳐도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선생님이라면 알잖아요! 전 무리라도 선생님이라면 분명 그 소문을 어떻게든」
「할 수 없다. 히키가야가 아무런 잘못 없이 지금 같은 취급을 당하면 몰라도 교육자로서 본 히키가야의 행동은 도저히 칭찬할만한 게 아니야. 소문이 직원회의에서 거론되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다.」
「그럼 지금 나돌고 있는 소문이 거짓이라고 말해주세요! 일이 일어난 다음이라면 늦는다고요!」
「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전파된 소문을 막을 재주는 없다. 처음 퍼트린 사람을 밝혀서 주의 주는 게 고작이겠지. 분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도 어떤 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손을 댈 수가 없다.」
「……우리란 건 다른 선생님들도 아신다는 말인가요.」
「아니, 알고 있는 건 나와 교사 중 일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소식을 접해도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아.」
「……그러고도 교사인 거냐고.」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돌고 있는 소문은 좀 그렇지만 학생들끼리의 커뮤니티 내에서 처리해야 할 범주를 넘지 않아. 너도 조사했다면 알겠지. 히키가야의 이름도 반도 모르는 녀석들이 히키가야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아요! 방치하는 게 해결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선생이라면 히키가야 하치만이 반에서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잖아요! 그럼 뭐라도 하라고요!」
「역효과다. 만약 내가 움직여봤자 수면 아래로 숨어들 뿐이다. 히키가야가 자기 위치를 걸고 만들어낸 결과를 내가 부술 수는 없는 거다. 교사로서, 한 학생만 특별히 봐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특별히 봐준다니.」
「우리는 특별히 봐준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주변에서는 그렇게 보이겠지. 그리고 힘으로 누르면 반발도 강해진다. 나한테 향한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그 정도로 배짱 있는 놈은 없을 테고.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
알고 있다. 갈 곳 없는 마이너스 감정은 약한 곳으로 흐른다는 것을. 힘으로 누른다면, 더욱 강하게.
「미안하지만 내 한계다. 정말이지, 이래선 사가미도 함부로 혼내지 못하겠군.」
「……!」
히라츠카 선생님이라도……무리인 건가. 그렇다면 손쓸 방도는 없다. 이 비와 같이 언제 걷힐지 모르는 의혹을 그는 앞으로도 계속 잊혀질 때까지 품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진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인데도 선생님의 다음 말은 확실히 전해졌다.
「하지만 히키가야에게 위안이 될 일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가라앉는 내 감정에 손을 뻗어 주는 듯 강하게, 확신에 찬 듯이 선생님이 말했다.
「……설 수 있을까?」
[newpage]
히라츠카 선생님은 백의를 내게 입힌 뒤, 일단 젖은 옷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말하고서는 체육관 샤워실로 데려갔다. 그 동안 나는 아무 말도 않은 채, 히라츠카 선생님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흠뻑 젖은 교복이 백의를 조금씩 젖게 하고 있었지만 그 미약한 온기가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탈의실에 들어간 히라츠카 선생님이 옷을 벗었다.
「너도 빨리 벗거라.」
「……아, 저는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요.」
「괜찮다. 갈아입을 옷이라면 지금 준비하마. 이럴 때를 대비해 학년마다 학교 측에서 예비 체육복이 몇 벌씩 비치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아, 나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육체노동용 옷이라면 몇 벌인가 갖고 있으니.」
「……이런 시추에이션, 그렇게 자주 일어날 리 없는데도 잘도 준비하셨네요.」
「유비무환이다. 아, 잊을 뻔했군. 오늘 생리 중인가? 혹시 그렇다면 그것도 준비하마.」
「……아니,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갈아입는 데 필요한 것이 없는지 한바탕 묻고는 히라츠카 선생님은 내가 두르고 있는 백의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흠뻑 젖은 교복과 속옷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선생님이 말한 바로는 몸을 닦을 수건도 이쪽에 있을 거라고 했기에 먼저 샤워실로 들어갔다. 곧바로 히라츠카 선생님도 들어와 내 옆에서 샤워하기 시작했다.
「들리나?」
벽 너머에서 히라츠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샤워 소리가 울리는 데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린다.
「아직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일단은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해둬야겠다.」
제일 처음 선생님이 꺼낸 것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경우 문화제 건을 시작으로, 히키가야 하치만에 대한 소문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히라츠카 선생님은 우선 그 부분을 확실히 한 뒤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싫어질 만한 부분도 있겠지만 사가미를 너무 나쁘지 말하지 말아라. 그녀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학생이지만 이번 일이 결국 좋은 약이 되었을 것이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지금과 다른 대처를 할 거라고 믿는다.」
「………그래도 사가미 미나미는」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번 문화제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잘못했지만, 그들은 아직 성장 중이다. 실수 하나 없이 성장하는 녀석이 있을 리 없으니까 말이지. 우리 성인이 똑똑히 봐주는 동안에는 그들도, 그리고 너도, 마음껏 잘못해도 된다.」
「……그래도 과오를 회고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지금은 말이지. 그렇지만 아직 너무 비관적으로 볼 수준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미스를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어떤 인간이라도 인생에서 분명 두 번 이상, 대부분 같은 미스를 범하기 마련이지. 그때 아 그렇게 할 걸 하는 시추에이션이 반복되어도. 사가미에게는 그 첫 번째가 지금 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그건 너희 학생이 아닌 나와 아츠키 선생이 짊어져야 하겠지. 추궁해야 할 건 사가미도, 히키가야도, 실행위원들도, 하루노도 아니다. 문실을 감독해야 할 입장에 서있으면서도 유키노시타가 쓰러질 때까지 상황을 방치한 내 감독책임이다. 나는 하루노를 말리는 일도, 위원회에 오지 않았던 무리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실로 탓해야 할 건 바로 이 나다.」
「선생님, 그건.」
「그게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자의 입장이다. 지나친 간섭이라고 하든 말든 참견을 했어야 했었지. 그렇게 했다면 불만과 불화가 조금이라도 우리 교사를 향했을 거다. 그러지 못했던 나는 교사로서도 최고 지도자로서도 부족한 존재다.」
……최고 지도자.
하루노 선배는 적의 개념을 그렇게 표현했지만 나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삐줍이로 있어줬으면 했다.
「비겁한 남자네요.」
「그렇구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빼는 주제에 내가 할 일을 다 뺏어갔다. 장래에는 훌륭한 사축이 되겠지. 취직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교사가 사축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 않나요?」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미래상이다…….
「그럼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지. 너는 히키가야를 조사하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갑자기 주제를 바꾼 까닭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내 생각 그대로를 말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진심으로 최악이라고 생각했어요. 소문이 소문이니만큼 뻔한 악역이라고 여겼어요. 하지만 저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모두 어째서 인지 애증을 갖고 있더라고요. 문화제 자료를 조사하는 동안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서……」
그래도 뭔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조사를 계속했다. 그 결과 소문대로 입이 거칠고 초 자기중심적인 데다가 교만하고 삐딱하기만 한 쓰레기는 절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유키노시타가 그런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대화를 나누면서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결국 나는 쓸데없는 걸 쓸데없이 알았을 뿐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걸로 됐다.」
자기혐오에 빠질 찰나에 내 생각을 읽은 듯이 히라츠카 선생님이 대답했다.
「히키가야는 그런 남자라 솔직히 장점다운 장점을 찾기 힘들다. 무척이나 삐뚤어져 있으니까 똑바로 쳐다보면 하나도 보이지 않지. 그래도 알고 싶다고 한다면 자기 단점을 드러내놓고 다가가야 할 거다.
히키가야 만큼이나 스스로의 용기와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상대는 내가 알기론 없거든.」
생각과 달리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아서 놀랐다.
용기와 본질이란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상대가 한 명 있었다.
「……하루노 선배보다 말인가요.」
「하루노보다 더 성가시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히라츠카 선생님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 같은 녀석들이 있지.」
「……이해자인가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비슷하지.」
그건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관계보다도, 유키노시타가 얼버무렸던 관계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하나 묻고 싶다. 너는 히키가야와 문화제에 대해 조사했겠지. 이런 결과가 되었지만 후회는 없는 걸까?」
「후회 말인가요.」
「그래.」
「……없다, 라고는 못하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말고는요.」
이 또한 무슨 행동을 한들 내 자기만족으로 끝날 것이다.
누구도 원치 않는 행동이니까.
히라츠카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기색도 없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선생님 쪽에서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닌 채, 샤워를 계속 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나는 머리를 감기로 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해두었던 메이크업이 조금 망가져 있어 얼굴도 정성스레 닦았다.
대충 닦고 나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있다가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newpage]
샤워실에서 나가자 정말로 체육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지고 온 건 양호 선생님이었는데, 온화한 눈빛으로 나와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젖은 교복과 속옷 세탁과 건조는 양호 선생님에게 맡기고 나와 히라츠카 선생님은 체육관을 떠났다.
「쌀쌀하네요…….」
「미안하다. 아무리 그래도 속옷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뭐, 넌 공식적으로는 양호실에서 쉬고 있는 걸로 해두었으니까 6교시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 체육복이라 잘 모를 거라 해도 속옷도 안 입히고 수업을 받게 할 수 는 없으니까.」
「서, 선생님도 같은 처지시잖아요. 소, 속옷 없이 어떻게 하시려고요, 수업?」
「상관없다. 5교시는 그렇다 쳐도 6교시는 따로 할 일이 있다. 그것보다 자, 다 왔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안내한 곳은 특별동에 있는 한 교실이었다. 간판에는 아무 것도 없다……아니 정확히는 귀여운 스티커가 몇 개정도 붙어있지만 부실 이름은 쓰여지지 않은 간판이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열쇠로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간다.
「이 곳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빈 교실이었다.
긴 테이블이 교실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의자가 삼각으로 늘어서 있다. 교실 안에는 책상과 의자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어 얼핏 보기에는 창고 같았다. 하지만 창가 근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티포트가 이곳은 일상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교실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혹시 여기는……」
용도불명의 교실, 긴 테이블이 늘어서 있고, 삼각으로 배치되어 있는 의자, 히라츠카 선생님이 열쇠를 갖고 있다는 사실, 티포트, 간판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스티커……이것들을 통해 연상되는 단어는 하나.
「직원실에 다녀오마. 금방 돌아오니까 적당히 앉아서 기다리도록. 춥다면 난방을 켜도 좋다.」
그 말을 남기고는 히라츠카 선생님은 교실을 떠났다. 아니, 저 사람 노브라 노팬티로 직원실 가는 거냐고……혹시 누가 눈치 채면 어쩔 생각인 건데. 히라츠카 선생님이 치녀라는 소문이 퍼지지는 않겠지만 조금 걱정이 되잖아.
뭐, 나도 노브라 노팬티으로 돌아다니고 있지만 서도.
「……여기, 인가」
다시 한 번 교실을 바라본다. 그렇게 지저분하지 않을 정도로 청소도 되어 있다. 쌓여있는 책상 근처에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지만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부장 성격을 생각하면 깨끗한 것도 납득이 된다.
여긴 봉사부실이겠지.
아아, 그렇네. 확실히 이 부실은 유키노시타가 말한 대로 누군가의 안내가 없으면 발을 들여놓기 힘든 부실이구나. 딱 봐서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빈 창고고, 간판 스티커를 봐도 여기가 부실이라고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이 그와 그녀와 그녀의 부실. 딱히 색다른 분위기가 나는 장소는 아니다. 의외로 산뜻한 분위기다. 이렇다 할 설비도 없고, 서가라도 놓으면 문예부실로 써도 될 정도다.
난 삼각으로 놓여있는 의자 제일 왼쪽 자리에 앉았다. 제일 가까운 데 있어 자연스레 앉았지만 이건 누구의 자리일까.
「……」
뭐, 상관없나.
하지만 나, 체육복을 입고 있다고는 해도 노브라 노팬티인데 앉아도 괜찮은 걸까……?
여기가 만약 히키가야 하치만의 자리라고 하면……아니, 무슨 생각하는 건데, 난! 유이가하마 유이든 유키노시타든 어느 쪽이라도 실례잖아! ……우우, 어, 어차피 안 들킬 테니까 상관없을 거야…….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심호흡을 하니 조금 춥다는 느낌이 들어 난방을 켰다. 잠시 앉아 있자 히라츠카 선생님이 노트북과 종이봉투를 손에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기다리게 했구나.」
「아니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그거, 뭔가요?」
「아, 이거 말인가. 봉사부의 새로운 활동이다.」
「봉사부의……?」
「그렇다. 상담 메일을 접수해서 봉사부가 답장을 한다. 이름은 『치바현 횡단 고민상담메일』. 이후 봉사부 활동의 일부로 추가할 계획이다. 지금 있는 셋이라면 협력해서 각자 분발해 주겠지.」
「헤에……」
「그러니까 우선 지금 내가 할 건 실내에 무선 네트워크 환경을 구축하는 거다. 뭐, 한 시간쯤이면 끝나겠지. 그 동안 너는 이걸 보도록.」
「이거?」
히라츠카 선생님이 종이봉투에서 CD 한 장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평범한 CD다.
「이건 문화제 영상자료다. 체육관에서 상영한 게 기록되어 있지.」
「엣」
역시 영상자료가 있었던 건가. 그렇구나. 영상과 사진을 각자 교사와 학생회에서 관리하고 있었구나. 흠, 확실히 다시 생각해 보면 체육관 스테이지에는 여러 학생 단체와 외부 단체도 있었으니까 분배하는 것이 교사 측에서 관리하는 편이 쉬웠겠지. 기록잡무일이기도 했고
「무슨 영상인가요?」
「보면 알 거다. 그리고 스피커 연결해라. 이건 큰 소리로 트는 게 나으니까.」
종이봉투에서 이번엔 작은 스피커와 라우터 박스를 꺼내 다시 책상 위에 놓았다. 아무래도 이 종이봉투는 내 점심도시락하고 같은 4차원 수납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들은 대로, 전원이 켜진 노트북에 CD를 세트 한다. 잠시 위이이잉 하는 기동음이 울리더니 자동재생이 시작됐다.
[newpage]
「……이건」
「그래, 우리 스테이지다.」
찍힌 건 한 라이브 영상이었다.
소부고 문화제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순한 시간 때우는 역할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훌륭하고 매력적인 라이브 영상이 흘러 나온다.
한가운데 서있는 게 유이가하마 유이. 그 오른쪽에 유키노시타 자매, 오른쪽에 히라츠카 선생님과 메구리 선배.
재생은 그녀들이 라이브를 시작하기 전, 하야마 하야토 일행이 철수한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유키노시타의 라이브 같은 건 예정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체육관에 모인 학생들은 이제 축제 끝난다고 밝히고 마무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술렁술렁 각자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공연장을 감싸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유키노시타의 등장으로 단숨에 바뀐다.
유키노시타는 야무진 표정으로 공연장을 바라 본다. 카메라도 서둘러 유키노시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유키노시타에 이어 유이가하마 유이, 하루노 선배, 히라츠카 선생님, 메구리 선배가 나왔다.
공연장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들이 한 명, 또 한 명씩 나올 때마다 「엣?」하고 놀란 목소리가 카메라 근처에서 들린다. 아마 촬영자의 목소리겠지. 역시 이 전개는 예상 외였던 모양으로, 카메라가 향하는 쪽으로부터 「프로그램에 없었지?」하는 대화가 맴돌고 있다.
그녀들은 그런 공연장에는 눈도 주지 않고 튜닝을 시작했다. 카메라에서 들리는 건 하루노 선배가 치는 드럼 소리와 히라츠카 선생님이 조율하는 베이스 소리뿐. 유이가하마 유이는 유키노시타와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유이가하마 유이와 유키노시타의 셔츠가 같은 것은 조명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영상으로 보니 분명히 커플복이었다.
「정말 사이가 좋구나……」
그 후, 하루노 선배가 유키노시타 앞에 있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소개를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내가 학생회실에서 들은 목소리와 똑같았지만 사람들의 텐션을 올리는 재주를 터득한 말투였다. 하루노 선배가 한마디 한마디 말할 때마다 체육관의 열기가 올라간다.
『이번에 드럼을 치는 유키노시타 하루노입니다!』
『……기타를 치는 유키노시타 유키노입니다.』
『저의 귀여운 여동생이랍니다!』
『언니, 자중해. ……다음에는 너야, 유이가하마.』
『에, 나, 나? 앗! 노, 노래하게 될 유이가하마 유이입니다!』
살짝 귀엽게 허둥지둥거리는 게 관객에게 전해졌는지, 공연장이 크게 달아오른다. 유이가하마 유이는 부끄러운 듯이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마이크를 넘기고는 다시 유키노시타에게 무슨 말인가 들었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번에 또 베이스를 치게 된 히라츠카 시즈카입니다. 3학년은 한 번 봤을 테지만 이번에도 즐겨주길.』
『네~! 이번에 키보드를 맡게 된 시로메구리 메구리입니다! 다들 갑자기 나와 놀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신나게 즐겨주세요! 준비됐나요~!』
됐습니다~!
하고 공연장이 장단에 맞춰 대답 한다. 이런 자리를 불타오르게 하는 테크닉은 역시 메구리 선배답다고나 할까.
메구리 선배가 유이가하마 유이에게 마이크를 돌려주고 나서, 다섯 명이 각자 자리에 위치한다.
마치 폭풍 전 고요함과 같이, 큰 파도 앞의 썰물과 같이, 폭발직전의 화약고와 같은 긴장감과 고요함이 체육관을 감싼다.
공연장이 거의 침묵한 그 때, 유이가하마 유이와 유키노시타의 눈이 맞았다.
둘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신호로 공연장의 정숙을 유이가하마의 힘찬 목소리가 깬다.
『자, 모두, 갈게요~! 1, 2, 1 2 3 4!』
이 순간, 모든 소리가 폭발했다.
선봉에 선 건 유키노시타의 기타. 더없이 정확한 음이 한 순간에 리듬을 만든다.
그에 이어 하루노 선배의 드럼과 히라츠카 선생님의 베이스가 어울려 전체 음악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구리 선배의 키보드가 곡에 양념을 더한다.
관객이 음악을 묻어버릴 정도 큰 환성을 높여 열광하고,
유이가하마 유이의 노랫소리로 전부 완성된다.
각각 연주하는 멜로디가 저마다 교차해 이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공연장도, 그녀들도, 모두가 하나의 음이 되어 내 귀를 두드린다.
순간,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그 정도로 아주 몰입하고 말았다. 빨려 들고 말았다.
그녀들이 연주하는 곡은 나도 알고 있다. 부르고자 한다면 이 자리에서 부를 수도 있는 유명한 곡이다.
「저 곡은 하루노가 재학 중일 때 했던 곡이다. 그러니까 나도 하루노도 시로메구리도 곧바로 연주할 수 있었지.」
하고, 라우터를 설치하러 갔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말했다.
「유키노시타는?」
「하루노가 할 수 있는 것을 유키노시타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것도 그러네요.」
라이브는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첫 번째 곡이 끝났다. 공연장은 폭풍같이 앵콜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라이브의 진정한 목적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앵콜에 답하는 건 분명 불가능할 터이다.
아마 이 연주 사이에 사가미 미나미를 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고 생각했지만 스테이지에서 그녀들이 떠날 기미가 전혀 없다. 유이가하마 유이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보였다.
그러나.
『알겠습니다. 한 곡 더 부르겠습니다.』
하고 어째서 인지 유키노시타 스스로가 앵콜에 응하겠다고 선언 했던 것이다.
유이가하마 유이, 하루노 선배, 히라츠카 선생님, 메구리 선배는 전원 놀란 표정으로 유키노시타를 봤다. 유키노시타는 돌아서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다시 한 번 유키노시타가 공연장 쪽으로 돌아서자 4인 모두 의욕이 가득 찬 표정으로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연주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하루노 선배가 선봉에 섰다. 공연장은 한층 더 불타올랐고, 무수한 라이트가 어둠 속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다.
아까 곡과 가장 다른 건 유키노시타가 보컬에 끼어 완전히 음에 녹아 들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곡도 유키노시타가 중간중간 부르긴 했지만 두 번째 곡은 유이가하마 유이와 절묘한 호흡으로 듀엣으로 불렀기에 공연장이 더욱 더 달아올랐다. 유이가하마 유이와 유키노시타의 대조적인 음색이 곡과 하나가 되어 뭐라고 할까--- 계속 듣고 싶어진다.
이 곡도 또한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러브송이다.
하지만 이 가사는---.
[newpage]
라이브 영상이 끝나고, 엄청난 현장감에 압도된 난 잠시 멍하니 있었다.
굉장한 걸 봤다.
이런 라이브,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또 하나, 너에게 보여줘야 하는 게 있다.」
스피커에서 나오던 음이 끝난 것을 안 히라츠카 선생님이 작업을 일단 멈추고, 종이봉투에서 B5 사이즈의 봉투를 꺼냈다. ……더는 놀라지 않는다. 나도 비슷한 아이템을 갖고 있다.
「이 봉투는 뭔가요?」
「하루노에게 부탁해뒀던 물건이 도착해서 말이다. 제일 잘 나온 걸 뽑았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어디선가 꺼낸 가위 (어디에 있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로 봉투 윗부분을 잘랐다.
나온 것은----
「사실 부활 때 개봉해서 건네줄 계획이었지만……예외다. 너에게는 모든 걸 알 권리가 있다.」
---사진 몇 장.
그걸 히라츠카 선생님은 한 장, 한 장, 무척이나 그리운 추억을 보는 듯, 마치 어머니와 같은 시선으로 사진을 훑어본다.
「……내가 말했을 거다. 히키가야에게 위안이 될 일이 없다고 단정하지 말라고.」
「……네.」
「이 사진을 보아라. 이게 히키가야 하치만이라고 하는 남자다.」
그렇게 말한 히라츠카 선생님은 나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사진관에서 프린트한 것보다 조금 큰 사진이다. 뒤집어 받은 것을 앞쪽으로 다시 뒤집는다.
그러자 거기에는.
「……이건……」
사진의 주인공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이 늠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동급생 여자는 화려하게 핀 꽃 같이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는 천진난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로 피스 사인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음험하다고 말한 언니는 생긋 웃으며 카메라 시선에서 여동생 옆에 서 있다.
중앙에는 천사 같은 소녀 같은 그녀---아니 그와, 안경을 쓴 꽤나 덩치 큰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천사는 손을 흔들고 있고, 덩치 큰 남자는 팔짱을 끼고 있다.
그 두 사람 안쪽에는 주변 여성진보다 조금 작은 여자애에게 왼팔을 붙들린 눈이 썩은 남자가 서 있었다.
「……단체, 사진……」
히키가야 하치만을 중심으로 한 단체사진이었다.
[newpage]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 유이가 옆에 있고, 그의 왼팔에는 그와 조금 닮은 여자애가 있고, 토츠카와 본 적 없는 남자가 있고, 히라츠카 선생님이, 하루노 선배가 있어, 전원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히키가야 하치만만은 웃지 않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어쩐지 기쁜 듯했다.
「너는 이미 알았겠지. 히키가야가 정말로 보답 받지 못하는 소년인지 아닌지.」
그렇다.
여기 있는 전원---두 사람 정도 모르는 얼굴이 있지만, 여기 있는 건 전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토츠카는 말할 필요도 없고.
아, 그러고 보니 자이뭐시기라는 사람이 친구라고 했는데, 이 남자가 자이뭐시기란 사람인 건가. 그렇군.
그럼 이 두 사람은 친구라고 하고.
하루노 선배는 어쨌든 자기 마음에 들었다고 하고.
유이가하마 유이와 유키노시타는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지만 두 사람 다 양쪽에 있는 이상 호의적일 게 분명하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히키가야 하치만을 바르게 평가하고 있고.
이 팔짱을 끼고 있는 애는 누군지 모르지만, 아마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만큼, 그녀도 그를 좋아하는 거겠지.
분명히 그 또한 그와 그녀들을 좋아할 것이다.
「어때? 이래도 아직 뭐라고 할 수 있을까?」
「………」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있다. 그의 행동의 의미를, 마음을 이해해주는 이해자가 7 명이나 있다.
「……그러네요.」
가령 그가 온당하게 보답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낸다 하더라도 이렇게나 많은 동료가 그의 곁에 있다.
그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 아닐까.
이 사진 한 장을 보고 나서도 그에게 위안이 될 일도, 보답 받지도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라이브를 봐도 괜찮을까요?」
「보고 싶은 만큼 봐도 좋다.」
그렇게 말하고는 히라츠카 선생님은 다시 작업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라이브 영상을 본다. 처음 조율부터, 그녀들이 퇴장할 때를 확실히 보기 위해.
본다, 인가…….
그러고 보니 그도 이 환상의 스테이지를 어디선가 보지 않았을까
옥상에 박혀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부르는 곡은, 적어도 그녀들이 부르는 곡만은 그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어떤 내막이 있었다고 해도, 멀리 있었다고 해도, 가사와 노랫소리에 담긴 마음만큼은 전해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추리는 틀렸다.
하지만, 어떨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 또한, 그리고 그도, 그와 그녀와 그녀가 좋은 것이 아닐까.
연애적인 의미가 아닌, 우정도 아닌.
인연이라는 한마디로 말하면 간단하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말했다.
연애감정이라고 가볍게 판단하기는 아주 쉽다. 평범한 커플이 속삭이는 사랑보다 그들의 관계가 좀 더 친밀하고, 더 가깝다.
이 둘, 아니 셋은---.
아아.
그러고 보니 그와 그녀와 그녀의 관계를 단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가 있었던가
봉사부.
이 셋의 관계를 말하는 데는 이 한 단어면 충분하다. 이 이상은 사족이고, 이 이하의 표현으로는 이미 관계 따위 없는 것과 같다.
유키노시타는 히키가야 하치만을 친구조차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로 그건 옳은 표현이겠지.
이 둘이 얼마나 나아간 관계인가, 혹은 나아가지 않은 관계인가. 어느 쪽이든 친구는 아니다. 이건 확실하다. 확정이다.
「알고 싶은 건 이걸로 다 일까?」
「……네, 많이도 틀리고, 부정당했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다시 한 번 라이브를 들어도 될까요?」
「괜찮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들어도 된다. 그리고……교사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너에게 말하고 싶다.
---히키가야를 찾아줘서, 고맙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 없이 작업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라이브 영상을 계속해서 보았다.
이걸로 히키가야 하치만의, 그리고 나의, 수많은 잘못으로 넘쳐난 문화제의 모든 것이----종결되었다.
허가해주신 작가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해당작품 본편은 회색빛잔영님, 2side님, 일각여삼추님, PsnPd님, BlueT님, 우드락님, Jemes님이 각기 번역해 주셨고,
번역 감수 및 외전은 저 아이시스가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의 협력 정말 감사합니다.
Chapter 23 아무 것도 아니게 된 그녀는 전설의 순간에 그저 통곡한다.
일어설 기운이 정말로 없다.
무슨 엄살을 피고 있냐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일어설 수 없다.
그야 그렇지 않겠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낸 추리가 그저 억측에 지나지 않았던 데다 더 구제불능, 아니 손조차 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의기소침하겠지.
히키가야 하치만도 옥상에 안 오고.
그도 그럴 것이 오지 않도록 한 게 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5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이번 시간은 뭐였지, 아아, 선택이과이었나. 그럼 이동교실이네. 그렇다는 건 교실에 돌아가도 아무도 없다는 뜻인가…….
그 애 정도는 찾으러 와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결국 오지 않았고. 박정해라…….
어쩜.
그걸로 됐어. 날 찾으러 일부러 이런 곳까지 찾아올 필요 따위 없는걸.
수업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착실히 수업에 가야지. 이런 곳에서 젖어있는 나한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렇게 생각한 때였다.
닫혀있던 옥상 문이 열린 것은.
「여기 있었나?」
하고 침입자가 말했다.
찾지 않아도 될 나를 찾고 있었기라도 한 말투였다. 그 목소리는 내가 정확히 한 시간 전에 들었던 목소리.
4교시 때 유감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나에게 주의를 준 목소리.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쭉 뻗은 장신의 미인이 서 있었다.
「……히라츠카 선생님」
“또 만났네요.” 라고 평소라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 속에서 얼핏 떠올랐다 사라져 갈 뿐.
흠뻑 젖은 나의 이름을 부른 히라츠카 선생님은 트레이드마크인 백의를 벗어 돗자리 위에 던졌다. 선생님은 그다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온다.
「……감기 들어요, 히라츠카 선생님.」
겨우 짜낸 한 마디에 선생님은 무척 따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공교롭게도 나는 교사가 된 이래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다. 흠뻑 젖은 네가 말해도 설득력도 없고 말이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건가요. 선생님, 5교시 수업은 어떻게 하고요.」
「그런 건 보이콧이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히라츠카 선생님이 단언했다.
……여전히 여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호쾌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 멋진 모습은 몰래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금방 비에 젖는다.
「이야기는 다 유키노시타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하루노---유키노시타의 언니는 알고 있으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가요.」
역시 그 사람, 내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던 건가. 정말이지, 자매 둘 다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교사로서 이렇게 말하는 건 조금 어떨까 생각한다만--- 넌 잘했다. 방법이 조금 지나친 면도 있었지만 수사로는 만점을 주고 싶다. 이렇게까지 히키가야에 대해 조사해준 인간이 있는데다가 확실하게 오해 없이 진실에 다다른 게 무엇보다 훌륭하다. ……그 쇼크는 컸던 모양이지만 말이지.」
「……히라츠카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신가요?」
「뭐가.」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이래선 하나도 보답 받지 못하잖아요!
우리는 결국 「한 명은 모두를 위해」로 끝이라고요!
단 한 명에게 상처를 주고 진실을 감추는 희생양으로 삼고, 곤란한 건 축제의 소란이 어떻게든 해주겠거니 넘어가기나 하고,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돌만 던지고! 그걸 이야깃거리로 삼는 우리들이 못난이잖아요! 이런 아무런 구원도 없는 결말 따위 괴롭기만 해요!」
「진정해라. 네가 난리 쳐도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선생님이라면 알잖아요! 전 무리라도 선생님이라면 분명 그 소문을 어떻게든」
「할 수 없다. 히키가야가 아무런 잘못 없이 지금 같은 취급을 당하면 몰라도 교육자로서 본 히키가야의 행동은 도저히 칭찬할만한 게 아니야. 소문이 직원회의에서 거론되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다.」
「그럼 지금 나돌고 있는 소문이 거짓이라고 말해주세요! 일이 일어난 다음이라면 늦는다고요!」
「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전파된 소문을 막을 재주는 없다. 처음 퍼트린 사람을 밝혀서 주의 주는 게 고작이겠지. 분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도 어떤 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손을 댈 수가 없다.」
「……우리란 건 다른 선생님들도 아신다는 말인가요.」
「아니, 알고 있는 건 나와 교사 중 일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소식을 접해도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아.」
「……그러고도 교사인 거냐고.」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돌고 있는 소문은 좀 그렇지만 학생들끼리의 커뮤니티 내에서 처리해야 할 범주를 넘지 않아. 너도 조사했다면 알겠지. 히키가야의 이름도 반도 모르는 녀석들이 히키가야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아요! 방치하는 게 해결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선생이라면 히키가야 하치만이 반에서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잖아요! 그럼 뭐라도 하라고요!」
「역효과다. 만약 내가 움직여봤자 수면 아래로 숨어들 뿐이다. 히키가야가 자기 위치를 걸고 만들어낸 결과를 내가 부술 수는 없는 거다. 교사로서, 한 학생만 특별히 봐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특별히 봐준다니.」
「우리는 특별히 봐준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주변에서는 그렇게 보이겠지. 그리고 힘으로 누르면 반발도 강해진다. 나한테 향한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그 정도로 배짱 있는 놈은 없을 테고.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
알고 있다. 갈 곳 없는 마이너스 감정은 약한 곳으로 흐른다는 것을. 힘으로 누른다면, 더욱 강하게.
「미안하지만 내 한계다. 정말이지, 이래선 사가미도 함부로 혼내지 못하겠군.」
「……!」
히라츠카 선생님이라도……무리인 건가. 그렇다면 손쓸 방도는 없다. 이 비와 같이 언제 걷힐지 모르는 의혹을 그는 앞으로도 계속 잊혀질 때까지 품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진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인데도 선생님의 다음 말은 확실히 전해졌다.
「하지만 히키가야에게 위안이 될 일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가라앉는 내 감정에 손을 뻗어 주는 듯 강하게, 확신에 찬 듯이 선생님이 말했다.
「……설 수 있을까?」
[newpage]
히라츠카 선생님은 백의를 내게 입힌 뒤, 일단 젖은 옷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말하고서는 체육관 샤워실로 데려갔다. 그 동안 나는 아무 말도 않은 채, 히라츠카 선생님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흠뻑 젖은 교복이 백의를 조금씩 젖게 하고 있었지만 그 미약한 온기가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탈의실에 들어간 히라츠카 선생님이 옷을 벗었다.
「너도 빨리 벗거라.」
「……아, 저는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요.」
「괜찮다. 갈아입을 옷이라면 지금 준비하마. 이럴 때를 대비해 학년마다 학교 측에서 예비 체육복이 몇 벌씩 비치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아, 나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육체노동용 옷이라면 몇 벌인가 갖고 있으니.」
「……이런 시추에이션, 그렇게 자주 일어날 리 없는데도 잘도 준비하셨네요.」
「유비무환이다. 아, 잊을 뻔했군. 오늘 생리 중인가? 혹시 그렇다면 그것도 준비하마.」
「……아니,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갈아입는 데 필요한 것이 없는지 한바탕 묻고는 히라츠카 선생님은 내가 두르고 있는 백의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흠뻑 젖은 교복과 속옷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선생님이 말한 바로는 몸을 닦을 수건도 이쪽에 있을 거라고 했기에 먼저 샤워실로 들어갔다. 곧바로 히라츠카 선생님도 들어와 내 옆에서 샤워하기 시작했다.
「들리나?」
벽 너머에서 히라츠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샤워 소리가 울리는 데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린다.
「아직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일단은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해둬야겠다.」
제일 처음 선생님이 꺼낸 것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경우 문화제 건을 시작으로, 히키가야 하치만에 대한 소문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히라츠카 선생님은 우선 그 부분을 확실히 한 뒤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싫어질 만한 부분도 있겠지만 사가미를 너무 나쁘지 말하지 말아라. 그녀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학생이지만 이번 일이 결국 좋은 약이 되었을 것이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지금과 다른 대처를 할 거라고 믿는다.」
「………그래도 사가미 미나미는」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번 문화제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잘못했지만, 그들은 아직 성장 중이다. 실수 하나 없이 성장하는 녀석이 있을 리 없으니까 말이지. 우리 성인이 똑똑히 봐주는 동안에는 그들도, 그리고 너도, 마음껏 잘못해도 된다.」
「……그래도 과오를 회고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지금은 말이지. 그렇지만 아직 너무 비관적으로 볼 수준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미스를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어떤 인간이라도 인생에서 분명 두 번 이상, 대부분 같은 미스를 범하기 마련이지. 그때 아 그렇게 할 걸 하는 시추에이션이 반복되어도. 사가미에게는 그 첫 번째가 지금 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그건 너희 학생이 아닌 나와 아츠키 선생이 짊어져야 하겠지. 추궁해야 할 건 사가미도, 히키가야도, 실행위원들도, 하루노도 아니다. 문실을 감독해야 할 입장에 서있으면서도 유키노시타가 쓰러질 때까지 상황을 방치한 내 감독책임이다. 나는 하루노를 말리는 일도, 위원회에 오지 않았던 무리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실로 탓해야 할 건 바로 이 나다.」
「선생님, 그건.」
「그게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자의 입장이다. 지나친 간섭이라고 하든 말든 참견을 했어야 했었지. 그렇게 했다면 불만과 불화가 조금이라도 우리 교사를 향했을 거다. 그러지 못했던 나는 교사로서도 최고 지도자로서도 부족한 존재다.」
……최고 지도자.
하루노 선배는 적의 개념을 그렇게 표현했지만 나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삐줍이로 있어줬으면 했다.
「비겁한 남자네요.」
「그렇구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빼는 주제에 내가 할 일을 다 뺏어갔다. 장래에는 훌륭한 사축이 되겠지. 취직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교사가 사축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 않나요?」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미래상이다…….
「그럼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지. 너는 히키가야를 조사하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갑자기 주제를 바꾼 까닭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내 생각 그대로를 말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진심으로 최악이라고 생각했어요. 소문이 소문이니만큼 뻔한 악역이라고 여겼어요. 하지만 저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모두 어째서 인지 애증을 갖고 있더라고요. 문화제 자료를 조사하는 동안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서……」
그래도 뭔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조사를 계속했다. 그 결과 소문대로 입이 거칠고 초 자기중심적인 데다가 교만하고 삐딱하기만 한 쓰레기는 절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유키노시타가 그런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대화를 나누면서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결국 나는 쓸데없는 걸 쓸데없이 알았을 뿐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걸로 됐다.」
자기혐오에 빠질 찰나에 내 생각을 읽은 듯이 히라츠카 선생님이 대답했다.
「히키가야는 그런 남자라 솔직히 장점다운 장점을 찾기 힘들다. 무척이나 삐뚤어져 있으니까 똑바로 쳐다보면 하나도 보이지 않지. 그래도 알고 싶다고 한다면 자기 단점을 드러내놓고 다가가야 할 거다.
히키가야 만큼이나 스스로의 용기와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상대는 내가 알기론 없거든.」
생각과 달리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아서 놀랐다.
용기와 본질이란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상대가 한 명 있었다.
「……하루노 선배보다 말인가요.」
「하루노보다 더 성가시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히라츠카 선생님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 같은 녀석들이 있지.」
「……이해자인가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비슷하지.」
그건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관계보다도, 유키노시타가 얼버무렸던 관계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하나 묻고 싶다. 너는 히키가야와 문화제에 대해 조사했겠지. 이런 결과가 되었지만 후회는 없는 걸까?」
「후회 말인가요.」
「그래.」
「……없다, 라고는 못하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말고는요.」
이 또한 무슨 행동을 한들 내 자기만족으로 끝날 것이다.
누구도 원치 않는 행동이니까.
히라츠카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기색도 없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선생님 쪽에서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닌 채, 샤워를 계속 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나는 머리를 감기로 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해두었던 메이크업이 조금 망가져 있어 얼굴도 정성스레 닦았다.
대충 닦고 나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있다가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newpage]
샤워실에서 나가자 정말로 체육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지고 온 건 양호 선생님이었는데, 온화한 눈빛으로 나와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젖은 교복과 속옷 세탁과 건조는 양호 선생님에게 맡기고 나와 히라츠카 선생님은 체육관을 떠났다.
「쌀쌀하네요…….」
「미안하다. 아무리 그래도 속옷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뭐, 넌 공식적으로는 양호실에서 쉬고 있는 걸로 해두었으니까 6교시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 체육복이라 잘 모를 거라 해도 속옷도 안 입히고 수업을 받게 할 수 는 없으니까.」
「서, 선생님도 같은 처지시잖아요. 소, 속옷 없이 어떻게 하시려고요, 수업?」
「상관없다. 5교시는 그렇다 쳐도 6교시는 따로 할 일이 있다. 그것보다 자, 다 왔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안내한 곳은 특별동에 있는 한 교실이었다. 간판에는 아무 것도 없다……아니 정확히는 귀여운 스티커가 몇 개정도 붙어있지만 부실 이름은 쓰여지지 않은 간판이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열쇠로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간다.
「이 곳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빈 교실이었다.
긴 테이블이 교실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의자가 삼각으로 늘어서 있다. 교실 안에는 책상과 의자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어 얼핏 보기에는 창고 같았다. 하지만 창가 근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티포트가 이곳은 일상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교실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혹시 여기는……」
용도불명의 교실, 긴 테이블이 늘어서 있고, 삼각으로 배치되어 있는 의자, 히라츠카 선생님이 열쇠를 갖고 있다는 사실, 티포트, 간판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스티커……이것들을 통해 연상되는 단어는 하나.
「직원실에 다녀오마. 금방 돌아오니까 적당히 앉아서 기다리도록. 춥다면 난방을 켜도 좋다.」
그 말을 남기고는 히라츠카 선생님은 교실을 떠났다. 아니, 저 사람 노브라 노팬티로 직원실 가는 거냐고……혹시 누가 눈치 채면 어쩔 생각인 건데. 히라츠카 선생님이 치녀라는 소문이 퍼지지는 않겠지만 조금 걱정이 되잖아.
뭐, 나도 노브라 노팬티으로 돌아다니고 있지만 서도.
「……여기, 인가」
다시 한 번 교실을 바라본다. 그렇게 지저분하지 않을 정도로 청소도 되어 있다. 쌓여있는 책상 근처에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지만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부장 성격을 생각하면 깨끗한 것도 납득이 된다.
여긴 봉사부실이겠지.
아아, 그렇네. 확실히 이 부실은 유키노시타가 말한 대로 누군가의 안내가 없으면 발을 들여놓기 힘든 부실이구나. 딱 봐서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빈 창고고, 간판 스티커를 봐도 여기가 부실이라고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이 그와 그녀와 그녀의 부실. 딱히 색다른 분위기가 나는 장소는 아니다. 의외로 산뜻한 분위기다. 이렇다 할 설비도 없고, 서가라도 놓으면 문예부실로 써도 될 정도다.
난 삼각으로 놓여있는 의자 제일 왼쪽 자리에 앉았다. 제일 가까운 데 있어 자연스레 앉았지만 이건 누구의 자리일까.
「……」
뭐, 상관없나.
하지만 나, 체육복을 입고 있다고는 해도 노브라 노팬티인데 앉아도 괜찮은 걸까……?
여기가 만약 히키가야 하치만의 자리라고 하면……아니, 무슨 생각하는 건데, 난! 유이가하마 유이든 유키노시타든 어느 쪽이라도 실례잖아! ……우우, 어, 어차피 안 들킬 테니까 상관없을 거야…….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심호흡을 하니 조금 춥다는 느낌이 들어 난방을 켰다. 잠시 앉아 있자 히라츠카 선생님이 노트북과 종이봉투를 손에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기다리게 했구나.」
「아니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그거, 뭔가요?」
「아, 이거 말인가. 봉사부의 새로운 활동이다.」
「봉사부의……?」
「그렇다. 상담 메일을 접수해서 봉사부가 답장을 한다. 이름은 『치바현 횡단 고민상담메일』. 이후 봉사부 활동의 일부로 추가할 계획이다. 지금 있는 셋이라면 협력해서 각자 분발해 주겠지.」
「헤에……」
「그러니까 우선 지금 내가 할 건 실내에 무선 네트워크 환경을 구축하는 거다. 뭐, 한 시간쯤이면 끝나겠지. 그 동안 너는 이걸 보도록.」
「이거?」
히라츠카 선생님이 종이봉투에서 CD 한 장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평범한 CD다.
「이건 문화제 영상자료다. 체육관에서 상영한 게 기록되어 있지.」
「엣」
역시 영상자료가 있었던 건가. 그렇구나. 영상과 사진을 각자 교사와 학생회에서 관리하고 있었구나. 흠, 확실히 다시 생각해 보면 체육관 스테이지에는 여러 학생 단체와 외부 단체도 있었으니까 분배하는 것이 교사 측에서 관리하는 편이 쉬웠겠지. 기록잡무일이기도 했고
「무슨 영상인가요?」
「보면 알 거다. 그리고 스피커 연결해라. 이건 큰 소리로 트는 게 나으니까.」
종이봉투에서 이번엔 작은 스피커와 라우터 박스를 꺼내 다시 책상 위에 놓았다. 아무래도 이 종이봉투는 내 점심도시락하고 같은 4차원 수납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들은 대로, 전원이 켜진 노트북에 CD를 세트 한다. 잠시 위이이잉 하는 기동음이 울리더니 자동재생이 시작됐다.
[newpage]
「……이건」
「그래, 우리 스테이지다.」
찍힌 건 한 라이브 영상이었다.
소부고 문화제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순한 시간 때우는 역할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훌륭하고 매력적인 라이브 영상이 흘러 나온다.
한가운데 서있는 게 유이가하마 유이. 그 오른쪽에 유키노시타 자매, 오른쪽에 히라츠카 선생님과 메구리 선배.
재생은 그녀들이 라이브를 시작하기 전, 하야마 하야토 일행이 철수한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유키노시타의 라이브 같은 건 예정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체육관에 모인 학생들은 이제 축제 끝난다고 밝히고 마무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술렁술렁 각자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공연장을 감싸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유키노시타의 등장으로 단숨에 바뀐다.
유키노시타는 야무진 표정으로 공연장을 바라 본다. 카메라도 서둘러 유키노시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유키노시타에 이어 유이가하마 유이, 하루노 선배, 히라츠카 선생님, 메구리 선배가 나왔다.
공연장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들이 한 명, 또 한 명씩 나올 때마다 「엣?」하고 놀란 목소리가 카메라 근처에서 들린다. 아마 촬영자의 목소리겠지. 역시 이 전개는 예상 외였던 모양으로, 카메라가 향하는 쪽으로부터 「프로그램에 없었지?」하는 대화가 맴돌고 있다.
그녀들은 그런 공연장에는 눈도 주지 않고 튜닝을 시작했다. 카메라에서 들리는 건 하루노 선배가 치는 드럼 소리와 히라츠카 선생님이 조율하는 베이스 소리뿐. 유이가하마 유이는 유키노시타와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유이가하마 유이와 유키노시타의 셔츠가 같은 것은 조명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영상으로 보니 분명히 커플복이었다.
「정말 사이가 좋구나……」
그 후, 하루노 선배가 유키노시타 앞에 있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소개를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내가 학생회실에서 들은 목소리와 똑같았지만 사람들의 텐션을 올리는 재주를 터득한 말투였다. 하루노 선배가 한마디 한마디 말할 때마다 체육관의 열기가 올라간다.
『이번에 드럼을 치는 유키노시타 하루노입니다!』
『……기타를 치는 유키노시타 유키노입니다.』
『저의 귀여운 여동생이랍니다!』
『언니, 자중해. ……다음에는 너야, 유이가하마.』
『에, 나, 나? 앗! 노, 노래하게 될 유이가하마 유이입니다!』
살짝 귀엽게 허둥지둥거리는 게 관객에게 전해졌는지, 공연장이 크게 달아오른다. 유이가하마 유이는 부끄러운 듯이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마이크를 넘기고는 다시 유키노시타에게 무슨 말인가 들었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번에 또 베이스를 치게 된 히라츠카 시즈카입니다. 3학년은 한 번 봤을 테지만 이번에도 즐겨주길.』
『네~! 이번에 키보드를 맡게 된 시로메구리 메구리입니다! 다들 갑자기 나와 놀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신나게 즐겨주세요! 준비됐나요~!』
됐습니다~!
하고 공연장이 장단에 맞춰 대답 한다. 이런 자리를 불타오르게 하는 테크닉은 역시 메구리 선배답다고나 할까.
메구리 선배가 유이가하마 유이에게 마이크를 돌려주고 나서, 다섯 명이 각자 자리에 위치한다.
마치 폭풍 전 고요함과 같이, 큰 파도 앞의 썰물과 같이, 폭발직전의 화약고와 같은 긴장감과 고요함이 체육관을 감싼다.
공연장이 거의 침묵한 그 때, 유이가하마 유이와 유키노시타의 눈이 맞았다.
둘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신호로 공연장의 정숙을 유이가하마의 힘찬 목소리가 깬다.
『자, 모두, 갈게요~! 1, 2, 1 2 3 4!』
이 순간, 모든 소리가 폭발했다.
선봉에 선 건 유키노시타의 기타. 더없이 정확한 음이 한 순간에 리듬을 만든다.
그에 이어 하루노 선배의 드럼과 히라츠카 선생님의 베이스가 어울려 전체 음악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구리 선배의 키보드가 곡에 양념을 더한다.
관객이 음악을 묻어버릴 정도 큰 환성을 높여 열광하고,
유이가하마 유이의 노랫소리로 전부 완성된다.
각각 연주하는 멜로디가 저마다 교차해 이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공연장도, 그녀들도, 모두가 하나의 음이 되어 내 귀를 두드린다.
순간,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그 정도로 아주 몰입하고 말았다. 빨려 들고 말았다.
그녀들이 연주하는 곡은 나도 알고 있다. 부르고자 한다면 이 자리에서 부를 수도 있는 유명한 곡이다.
「저 곡은 하루노가 재학 중일 때 했던 곡이다. 그러니까 나도 하루노도 시로메구리도 곧바로 연주할 수 있었지.」
하고, 라우터를 설치하러 갔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말했다.
「유키노시타는?」
「하루노가 할 수 있는 것을 유키노시타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것도 그러네요.」
라이브는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첫 번째 곡이 끝났다. 공연장은 폭풍같이 앵콜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라이브의 진정한 목적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앵콜에 답하는 건 분명 불가능할 터이다.
아마 이 연주 사이에 사가미 미나미를 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고 생각했지만 스테이지에서 그녀들이 떠날 기미가 전혀 없다. 유이가하마 유이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보였다.
그러나.
『알겠습니다. 한 곡 더 부르겠습니다.』
하고 어째서 인지 유키노시타 스스로가 앵콜에 응하겠다고 선언 했던 것이다.
유이가하마 유이, 하루노 선배, 히라츠카 선생님, 메구리 선배는 전원 놀란 표정으로 유키노시타를 봤다. 유키노시타는 돌아서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다시 한 번 유키노시타가 공연장 쪽으로 돌아서자 4인 모두 의욕이 가득 찬 표정으로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연주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하루노 선배가 선봉에 섰다. 공연장은 한층 더 불타올랐고, 무수한 라이트가 어둠 속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다.
아까 곡과 가장 다른 건 유키노시타가 보컬에 끼어 완전히 음에 녹아 들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곡도 유키노시타가 중간중간 부르긴 했지만 두 번째 곡은 유이가하마 유이와 절묘한 호흡으로 듀엣으로 불렀기에 공연장이 더욱 더 달아올랐다. 유이가하마 유이와 유키노시타의 대조적인 음색이 곡과 하나가 되어 뭐라고 할까--- 계속 듣고 싶어진다.
이 곡도 또한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러브송이다.
하지만 이 가사는---.
[newpage]
라이브 영상이 끝나고, 엄청난 현장감에 압도된 난 잠시 멍하니 있었다.
굉장한 걸 봤다.
이런 라이브,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또 하나, 너에게 보여줘야 하는 게 있다.」
스피커에서 나오던 음이 끝난 것을 안 히라츠카 선생님이 작업을 일단 멈추고, 종이봉투에서 B5 사이즈의 봉투를 꺼냈다. ……더는 놀라지 않는다. 나도 비슷한 아이템을 갖고 있다.
「이 봉투는 뭔가요?」
「하루노에게 부탁해뒀던 물건이 도착해서 말이다. 제일 잘 나온 걸 뽑았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어디선가 꺼낸 가위 (어디에 있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로 봉투 윗부분을 잘랐다.
나온 것은----
「사실 부활 때 개봉해서 건네줄 계획이었지만……예외다. 너에게는 모든 걸 알 권리가 있다.」
---사진 몇 장.
그걸 히라츠카 선생님은 한 장, 한 장, 무척이나 그리운 추억을 보는 듯, 마치 어머니와 같은 시선으로 사진을 훑어본다.
「……내가 말했을 거다. 히키가야에게 위안이 될 일이 없다고 단정하지 말라고.」
「……네.」
「이 사진을 보아라. 이게 히키가야 하치만이라고 하는 남자다.」
그렇게 말한 히라츠카 선생님은 나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사진관에서 프린트한 것보다 조금 큰 사진이다. 뒤집어 받은 것을 앞쪽으로 다시 뒤집는다.
그러자 거기에는.
「……이건……」
사진의 주인공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이 늠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동급생 여자는 화려하게 핀 꽃 같이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는 천진난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로 피스 사인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음험하다고 말한 언니는 생긋 웃으며 카메라 시선에서 여동생 옆에 서 있다.
중앙에는 천사 같은 소녀 같은 그녀---아니 그와, 안경을 쓴 꽤나 덩치 큰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천사는 손을 흔들고 있고, 덩치 큰 남자는 팔짱을 끼고 있다.
그 두 사람 안쪽에는 주변 여성진보다 조금 작은 여자애에게 왼팔을 붙들린 눈이 썩은 남자가 서 있었다.
「……단체, 사진……」
히키가야 하치만을 중심으로 한 단체사진이었다.
[newpage]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 유이가 옆에 있고, 그의 왼팔에는 그와 조금 닮은 여자애가 있고, 토츠카와 본 적 없는 남자가 있고, 히라츠카 선생님이, 하루노 선배가 있어, 전원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히키가야 하치만만은 웃지 않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어쩐지 기쁜 듯했다.
「너는 이미 알았겠지. 히키가야가 정말로 보답 받지 못하는 소년인지 아닌지.」
그렇다.
여기 있는 전원---두 사람 정도 모르는 얼굴이 있지만, 여기 있는 건 전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토츠카는 말할 필요도 없고.
아, 그러고 보니 자이뭐시기라는 사람이 친구라고 했는데, 이 남자가 자이뭐시기란 사람인 건가. 그렇군.
그럼 이 두 사람은 친구라고 하고.
하루노 선배는 어쨌든 자기 마음에 들었다고 하고.
유이가하마 유이와 유키노시타는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지만 두 사람 다 양쪽에 있는 이상 호의적일 게 분명하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히키가야 하치만을 바르게 평가하고 있고.
이 팔짱을 끼고 있는 애는 누군지 모르지만, 아마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만큼, 그녀도 그를 좋아하는 거겠지.
분명히 그 또한 그와 그녀들을 좋아할 것이다.
「어때? 이래도 아직 뭐라고 할 수 있을까?」
「………」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있다. 그의 행동의 의미를, 마음을 이해해주는 이해자가 7 명이나 있다.
「……그러네요.」
가령 그가 온당하게 보답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낸다 하더라도 이렇게나 많은 동료가 그의 곁에 있다.
그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 아닐까.
이 사진 한 장을 보고 나서도 그에게 위안이 될 일도, 보답 받지도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라이브를 봐도 괜찮을까요?」
「보고 싶은 만큼 봐도 좋다.」
그렇게 말하고는 히라츠카 선생님은 다시 작업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라이브 영상을 본다. 처음 조율부터, 그녀들이 퇴장할 때를 확실히 보기 위해.
본다, 인가…….
그러고 보니 그도 이 환상의 스테이지를 어디선가 보지 않았을까
옥상에 박혀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부르는 곡은, 적어도 그녀들이 부르는 곡만은 그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어떤 내막이 있었다고 해도, 멀리 있었다고 해도, 가사와 노랫소리에 담긴 마음만큼은 전해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추리는 틀렸다.
하지만, 어떨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 또한, 그리고 그도, 그와 그녀와 그녀가 좋은 것이 아닐까.
연애적인 의미가 아닌, 우정도 아닌.
인연이라는 한마디로 말하면 간단하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말했다.
연애감정이라고 가볍게 판단하기는 아주 쉽다. 평범한 커플이 속삭이는 사랑보다 그들의 관계가 좀 더 친밀하고, 더 가깝다.
이 둘, 아니 셋은---.
아아.
그러고 보니 그와 그녀와 그녀의 관계를 단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가 있었던가
봉사부.
이 셋의 관계를 말하는 데는 이 한 단어면 충분하다. 이 이상은 사족이고, 이 이하의 표현으로는 이미 관계 따위 없는 것과 같다.
유키노시타는 히키가야 하치만을 친구조차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로 그건 옳은 표현이겠지.
이 둘이 얼마나 나아간 관계인가, 혹은 나아가지 않은 관계인가. 어느 쪽이든 친구는 아니다. 이건 확실하다. 확정이다.
「알고 싶은 건 이걸로 다 일까?」
「……네, 많이도 틀리고, 부정당했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다시 한 번 라이브를 들어도 될까요?」
「괜찮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들어도 된다. 그리고……교사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너에게 말하고 싶다.
---히키가야를 찾아줘서, 고맙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 없이 작업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라이브 영상을 계속해서 보았다.
이걸로 히키가야 하치만의, 그리고 나의, 수많은 잘못으로 넘쳐난 문화제의 모든 것이----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