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그 여간부, 노브라
2화. 그 여간부, 성희롱
후기
1화 그 여간부, 노브라 (5)
그 한마디를 던지고 무마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헛소리가 더 이어져야 했는지는 안 봐도 .avi다만. 뭐 이런 한심한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유은은 호란을 잘만 따른다.
유은은 숙제였던 수채화를 정리하고 이제 석고를 그리는 중이다. 아직 아그리파 같은 인물 석고상은 아니고 삼각뿔이나 원통 같은 기본 모양의 석고 수준이지만 진지하다.
수채가 벌써 다양한 물건을 같이 그리는 정도인데 석고만은 진도가 한참 느리다. 수채야 어디까지나 입시 자체가 아닌 그림에 흥미를 갖도록 정해준 과제일 뿐이라 호란이 지도를 빡세게 하지 않고 있어서다.
하지만 호란은 유은이 고등학교 입시까지 기본기를 아주 철저히 갖추도록 계획을 잡았다. 수채와 석고를 병행하되 우선 석고를 몸에 완전히 익히게 한 뒤, 수채 역시 본격적인 진도가 나가도록.
딱히 호란의 교육철학 때문은 아니고 가능한 유은이와 오래도록 같이 있을 핑계를 찾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선이 섬세한 건 좋아. 하지만 석고는 단순히 모양만을 따라 그리는 게 아니라 그 양감을 표현하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해. 손.”
호란은 유은의 뒤에 서서 그림을 보다 유은의 손을 쓱 잡고 캔버스에 이리저리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림보다는 유은의 손의 부드러운 질감과 가벼운 무게를 또 따스한 온기를 느끼려는 일에 더 노력하긴 했지만 여긴 이렇고 저긴 저렇다고 선을 그어주니 그림이 나아진다.
자신이 미대를 졸업했다는 것에 이리도 깊이 감사한 적이 있던가.
물론 없었다.
뭐. 이렇게 과외 선생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는 호란이지만 딱히 유은에게 마수를 뻗칠 생각도 없다. 28살인 자신의 딱 절반인 14살인 유은과는 나이 차도 있고. 주변의 시선도 있으니까.
그냥 좋아하기만 할 뿐이다. 길을 가다 산책하는 강아지를 만나 쓰다듬어주고 놀아주듯이.
그런 류의 생각을 하던 호란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유은의 세일러복 칼라 사이로 쇄골과 그 아래쪽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란은 이제 손을 움직여 그림을 고칠 뿐만 아니라 유은의 등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기대기까지 했다.
아.
말캉한 감촉.
가슴이 밀착된 것 같은데.
유은이가 무거워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빨리 쇄골 아래만 보고 떨어지자.
조금…
조금만 더…
살색 아래…
“왈! 왈왈!”
“흐갹?”
가벼운 희롱의 범주에서 벗어나 진지하게 법적 문제를 따질 영역에 이르기 직전 호란은 그만 발이 엉켜 넘어지고 말았다.
“왈! 왈!”
짧은 털로도 감춰지지 않는 두꺼운 지방의 감촉.
유은이 기르는 강아지인 아부부가 발밑으로 덤벼들었던 것이다.
아부부는 퍼그인 것치고도 다리가 짧고 퍼그인 것치고도 뚱뚱하며 퍼그인 것치고도 코가 뭉개지듯 올라가 못생김에 못생김을 제곱한 얼굴이다. 게다가 묘할 정도로 호란과 사이가 좋지 않다.
“아으…괜찮으세요, 선생님?”
“아, 엄마야. 유은이 너야말로 다치지 않았니?”
뭉클.
얼굴에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호란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넘어지면서 계속 기대고 있던 유은마저 넘어뜨린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으…전 괜찮아요.”
호란은 그제야 유은이의 다리를 껴안은 듯이 넘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서로 바닥에 뒤엉킨 상황에서 호란과 유은은 어색하게 서로에게 웃어 보였다.
“어…엄마야…!”
작은 탄식.
호란의 눈에 방금 얼굴에 부딪혔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유은이는 위를 보는 상태로 쓰러져 있고. 반면에 나는 아래를 보는 상태로 쓰러져 있으니까. 이건.
유은의 벨트 버클에 형광등 조명이 눈부시게 반사된다.
뇌 속에 판데모니엄이 펼쳐진다.
호란은 이 황당하게 당황스러운 순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운 머리로 고민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호란의 결론은.
그러네. 식사시간인 거네.
이 세상의 모든 식재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잘 먹겠습니다.
부르르르르르―
이제까지의 다짐은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사라지고 유은의 정조가 절체절명의 위협에 처한 바로 이 순간 호란의 주머니 안 휴대전화가 거세게 진동했다.
“에이, 한참 좋은 순간에…아니. 잠깐.”
호란은 방해받지 않게 휴대전화를 아예 꺼버릴 생각으로 화면을 끄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전장 18m 거대미미인형이 도심에서 폭주 중. 변태수의 조정 단계에서 실험 오류가 있었음. 급히 출격 요망』
아니나 다를까.
외계난민협회로부터의 연락이다.
그런데 진짜로 미미인형 변태수를 만들기로 했단 말야?
나 회의에서 나가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야, 이 인간 및 이 외계인 종자들이?
호란은 이런 연락 따위 호쾌히 무시하고 휴대전화를 던져버리려 했으나 부르르―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
『변태수의 진행 루트로 보아 과외 학생이 있는 아파트로 갈지도 모름』
이.
천하에 도움 안 되는 것들.
호란은 어떻게든 표정에서 애통함을 감추려고 노력하며 유은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옷을 조금 피고. 입술도 피고.
호란은 어른스럽게 미소 지으며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갓 벗어난 제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유은아. 미안한데…선생님 직장에서 급한 일이 생겼나 봐. 그러니까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자.”
“어…많이 급하세요?”
“왈!”
유은은 호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아부부가 짖는 것은 무시하면서. 아부부는 아부부대로 장난감 막대를 물고 와선 유은의 눈치를 끌려 애쓴다.
음. 5분만 있다 갈까.
머리만 살짝 입에 물었다 갈까.
아니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유은이 착한 아이지? 미안하지만 선생님을 직장 사람들에게 잠시만 양보해줄 수 있지?”
“그야…”
마지못하다는 유은의 풀죽은 얼굴에 호란은 유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 유은아.”
“아녜요, 선생님.”
호란은 웃으면서 옷이 든 쇼핑백과 짐이 든 가방을 챙겨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몽블랑을 못 먹어서 어쩌지? 이따 일만 끝나면 다시 올 테니까 저녁까지 선생님 먹을 거 남겨줘야 돼?”
“네!”
다시 오겠다는 호란의 약속에 유은의 표정이 밝아진다. 호란 역시 유은에게 웃어준 뒤 서둘러 문을 나섰다. 도대체 이 인간들과 이 외계인들이 호란 없는 사이 무슨 난리를 피워놓았을지 모르니 말이다.
쾅.
문이 닫히고 잠시의 여운 속에 유은은 호란이 떠난 자리를 지켜보았다. 아마 호란이 돌아올 때까지 이렇게 문앞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왕자님! 왕자님! 박 박사로부터 급한 연락입니다!”
그러니까. 이 강아지의 닦달만 아니면.
“아부젤라. 무슨 일이에요?”
방금까지 왈왈 짖어대던 강아지, 아부부는 어느새 인간의 말을 하며 유은을 보챈다.
“거리에 커다란 미미인형이 나타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합니다! 미미인형이 뭔지는 몰라도 흉물스러운 괴물인 듯합니다! 노스트라다가 출진해야 합니다!”
“고마워요. 선생님이 일찍 가셔서 다행이었네요.”
유은은 한숨을 쉰 뒤 아부부, 아니 아부젤라가 물고 온 장난감 막대기를 손에 들었다.
호란이 자세히 보았다면 까무러쳤을지도 모르는 디자인의 장난감 막대기를.
“왕자님…인간 따위 하등종족입니다. 그 호란이라는 천한 것을 가까이하시면 왕자님의 격이 떨어질지 모릅니다.”
“아부젤라. 인간들과 선생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우주를 방황하던 우리를 받아준 분들인데.”
“흥, 다 노스트라다를 노리는 속셈 검은 악당뿐입니다.”
“호란 선생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박 박사님도.”
유은은 콧방귀를 뀌는 아부젤라의 머리를 토닥여준 뒤에 이 강아지가 물고 온 장난감 막대기를 들었다.
아니. 장난감 막대기가 아니다.
마법의 지팡이다.
유은은 한숨을 쉬는 모습을 들키지 않게 주의하면서. 갓 무대에 오른 어린 마에스트로가 오케스트라를 향해 지휘봉을 휘두르듯 마법의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팡이로부터 형형색색의 눈 부신 빛이 피어오른다.
“아제르바이 노스트란. 엘라세지니움 기동을 명한다.”
시동주문의 영창이 끝나자.
그곳에 유은은 없었다.
그저 유윈 라디밀 아제르바이 노스트란 15세.
약칭 유윈 공주가 예의 그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서는 결연한 표정으로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왕자님! 출격입니다!”
“아부젤라. 지금 난 변신했으니까 유윈 공주예요.”
“앗차! 죄송합니다. 공주님, 출격입니다!”
“그래요…”
유은은 유은이 아니다.
호란이 악의 단체 수장으로 삶을 위장하듯.
우주 너머로부터 온 유윈 공주―아니 유윈 왕자가 평범한 학생으로 위장한 모습일 뿐이다.
물론 호란과 유윈 둘은 서로의 정체를 모른다.
적과의 동침이라고나 할까.
뭐.
연인을 숙적처럼 만나고 숙적을 연인처럼 대하는 경우가 어디 이 둘 뿐은 아니니까.
<꼐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