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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변조종기 엑사베리온


투고 | alphase

그 전까지의 일상 (3)


 "할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대충 내팽개치고, 2층에 위치한 내 방으로 바쁘게 달려갔다. 점심시간에 아준이 녀석이랑 했던 승부가 떠오른다. 무려 30분이나 진행됬던 긴 대결.. 도저히 쉬는 시간에 마음 잡고 한번에 다 볼 수 있는 분량은 아니었기에, 정규 수업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의 일과가 모두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마자 재빨리 가방을 들쳐메고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교실을 뛰쳐나왔다. "수고하셨슴다!" 를 외치는 건 물론 잊지 않았지.

 아마 담임이 꽤나 당황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오늘은 담임 멘탈이 조각날만한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가는 중에 어디선가 "야 수혁아 너.." 라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그런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으니까 그냥 교실을 뛰쳐나갔다.으.. 빨리.. 빨리 보고싶다! 이 생각 하나만으로 도저히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방문을 열기 전에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 나니 주변이 맑아보인다. 아.. 용케도 안넘어지고 저런 계단을 달려왔구만.
 
 "후아아아..."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야 정신이 맑아지는 게,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복기이다. 복기란 무엇이냐 하면.. 요즘도 규모는 꽤나 줄어들었지만 확실히 존재한다고 하는 '바둑'이라고 하는.. 몇 천년 전부터 전해져 오는 보드게임에서 선수들이 하는 '다시 두기'를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실수를 알아채고, 드러난 약점을 숨기거나.. 혹은 강점을 강화하여 선수들은 더욱 강해져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전투를 다시 할 수 있는건 아니고, 단순히 보는 것만 가능하다. 그러나 보는 것 만으로도 그 경기를 어떻게 이겼는지, 어떻게 졌는지, 무엇이 패배요인인지 알 수 있다. 그만큼 오래 플레이했다는거지. 더 잘하고 싶은거고. 5교시가 끝나고 난 쉬는 시간에 총 전투시간만 확인하고 바로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려놨었다. 그러니까 그 광경을 확인하는 건 점심시간 이후로는 처음이라는 거지..

 "크로스.. 울티메이트!"

 말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전율이 느껴진다. 그 광경.. 결판이 났을 때 교실 전체에 울려퍼진 함성.. 그리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던 채팅창의 반응.

 '처음 봤다' '이걸 실시간으로 보게 되다니' '서비스 시작할때부터 드라이버인 난 왜..' 등 기쁨, 한탄, 놀라움을 표현하는 수많은 드라이버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화제가 바로 나와 아준이의 대결. 거기서 일어났던 기적적인 현상, 크로스 울티메이트. 두 드라이버의 실력이 거의 호각이어야만 가능하기도 했고, 거의 동시에 상대를 향해 궁극기 커맨드를 입력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버그와도 같은 현상..
 
 그리고, 일어난 뒤에는 그 결투의 승패가 갈린다는 것.

 다시보기 메뉴로 들어가, 재생을 눌렀다.
 로딩화면이 지나고 나서, 양 플레이어의 명칭과 메카닉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초반에 거리를 벌려두려는 녀석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그래서 일단 도망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녀석이 날아가는 그 앞에다가 가지고 있는 섬광탄을 2분 간격으로 발사했다. 그 중 3번째로 쏜 섬광탄 덕분에 녀석과 거리를 급하게 좁힐 수 있었고.. 일단 가볍게 랜스를 질러서 깔끔하게 적중.
 역시 상성도 맥스의 무기는 다르다. 딱 9대만 더 찌르면 이길 수 있을것 같았기에 나는 급격하게 거리를 좁히기 위해 가능한 한 장애물에 걸리지 않고 계속 이동했지만..

 녀석은 원거리전 특화 메카.. 역시, 섬광탄이 다 떨어지고 나서는 거리를 좁히는게 불가능했다. 5번째 섬광탄이 적중하고 2히트를 집어넣어서 반을 까내려고 했지만 두번째 공격은 빗나가, 결과적으로는 20%정도의 체력을 깎아낸 것이다. 그리고는 10분이 지나고 녀석이 관통탄을 장비한 연사용 원거리 무기, '개틀링 타입3'를 들고서 나한테 난사해댔다. 탄 두발정도 맞고 나서야 정신차린 내가 '실드 타입3'를 장착했지. 같은 타입이니만큼 타입에 따른 데미지 증감은 일어나지 않았지.

 이변을 눈치챈 것은 재생한 지 25분쯤 지나서였다. 크로스 울티메이트가 일어나게 된 원인이기도 한 그것은..
 
 "설마 내가 말을 걸었던 그때였냐."

 계속 관통탄을 장착하고 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당황한 모습에 내가 속은건가. 아니면 임기응변으로 한건가.. 주변에서는 내가 불리한 것 같다니 뭐니 시끄러웠고, 혹시 녀석도 그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휘말리지 않을까 해서 말을 걸어봤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녀석의 시점으로 돌려보니.. 내가 말을 걸었던 때라고 추정되는 그 시간에 탄창을 바꿔끼웠다. 내 시야로는 당연히 '엠페러'로부터 날아오는 탄환의 폭발 효과에 상대가 뭘 하는지는 보이지 않고 추측만 가능했으니까.

 사실, 탄 이펙트가 조금 달라 내가 자만심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금방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결과, 28분에 아슬아슬한 체력으로 분노 게이지의 스택 82를 쌓은 나의 궁극기, 금빛 돌격을 준비하는 동시에, 녀석도 기다렸다는 듯 그 사이에 '엠페러 쇼크'를 입력했고. 그 자만심에 의한 미스에 의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패배하는 '크로스 울티메이트'가 일어난 것이었다.
 
 "아.. 아깝다!"

 29분 32초. 양쪽의 궁극기가 맞닿는 그 순간.. 체력 게이지가 빠지는 게 내가 더 빨랐다! 딱 5%만큼 차이가 나서 패배하게 되어버린 것. 다섯번째 섬광탄으로 만들어 낸 두번째 근접 공격 찬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졌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아니, 그걸 떠나서 내가 체력 관리를 제대로 못한거였겠지.
 
 -"얌마, 너 조만간 랭킹에 오르겠다?"

 난 순수하게 아준이 녀석을 축하해주기로 하고 먼저 전화를 걸었다. 자식. 운이 여간 좋은게 아니더라니!

 -"그걸로 치면 너야말로 새로운 장비가 상성도 맥스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거냐, 거 진짜 당황했다니까?"

 사실 그게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고 하면 이놈은 수준급의 연기를 자유자재로 선보이는 능력자가 틀림없다.

 -"너 이 자식 연기까지 잘하는구만?"

 그 이후, 한 30분간 녀석과 메카 드라이브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내 쪽에서 언성이 높아졌는지 할아버지가 "조용히 못하겠냐!" 라고 호통을 치셔서,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메카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즐거웠던 적은 처음이야. 상성도 맥스끼리의 전투.. 하지만, 다음에 하게 된다면 다른 무기를 들어야겠지. 이 전술은 이미 다 파악됬을테니까.. 이런 전투라면 또 하고 싶다.

 그야말로 정말로 내가 드라이버가 된 기분이었다. 아아. 저 안에 탑승해서 움직여보고 싶다. 어떤 느낌일까. 생각만으로도 두근거려 잠이 오질 않는다.. 눈은 감겨왔지만.





 누가 날 부르고 있다. 으음.. 자다 일어난 기분은 아니고. 뭔가 머리가 살짝 아파오는게 말이야..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모양이다.
 
 "수혁아! 정신 차려!"

 게다가 무언가가 내 양 어깨를 붙잡고 계속 흔들고 있다. 몸이 너무 흔들려서 눈을 감고 있는데도 어지러움이 느껴질 정도다. 덤으로 어깨가 아프기까지 한데, 대체 누굴까? 이런 완력의 소유자는.

 "신수혁! 엄살 부리지 마!"

 서서히 눈을 뜨자, 눈 앞에 사람이 두 명.. 일단은 둘 다 아는 사람인 것 같고. 눈앞에 보이는 건 긴 흑발. 긴 흑발의 여성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있다. 너무 심하게 흔드는 거 아니냐.. 그나저나 저 머리카락은 보기엔 참 아름답지만.. 너무 길어서 우연히라도 내 눈을 찌를 것 같아.. 두렵다. 그리고 포니테일을 한 여성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무슨 복싱선수처럼 현란한 스텝을 밟으면서.. 왼쪽, 오른쪽.. 전투 준비라도 하는건가?

 나보고 정신을 차리라며 몸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소연이일까. 아니면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의.. 긴 흑발을 나부끼면서 뭇 남학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미인 체육선생일까? 뭐,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긴 흑발, 눈앞에 살짝 살짝 엿보이는 두 개의 아름다운 곡선이 그리는 타원.. 살짝 살짝 닿을때 마다 느껴지는 이 부드러움.. 절대 소연이는 아니다.

 혹시 내가 지금 꿈을 꾸는건가? 아. 꿈이라면 정말 저 슬쩍 슬쩍 보이는 아름다운 타원에 몸을 맡기고 싶다..

 그러니까 대충 정리하자면 이거다.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하는 쪽이 바로 내 소꿉친구인 안 소연. 나와 동갑인 16살의.. 가련하지 않은 소녀같지 않은 소녀. 소녀라는 말이 어울리는가? 라고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냥 소연이는 소녀가 아니라 소연이니까 소연이라고 정의하자.

 "수혁아, 정신좀 차려봐!"

 그러다 울겠어요. 선생님. 그 아름다운 눈망울에 눈물을 맺히게 하고 싶진 않아요.. 제가 진짜로 정신을 잃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흔들어대지 말아주세요.. 잘 보니까 소연이가 현란한 스텝을 하고 이쪽으로 걸어오는게 아니라.. 내가 흔들려서 그렇게 보이는거였다.

 "괘.. 괜찮으.. 니까.. 윤이 누나.. 아.. 서.. 선생님"

 지금 자기 힘을 모르고 학생을 격하게 다루는.. 아니 아끼고 있는 이 여성의 이름은 최윤이. 올해 스물 다섯으로.. 긴 흑발이 매력 포인트인 정말로 아름다운 분이시다. 이런 분이 왜 이런 학교에서 체육교사를 하고 있는지 솔직히 의문인데.. 그 의문을 해소할 방법이 있을 리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여기에 있는걸 순전히 기뻐하면 되는 것 뿐이다. 무의식중에 마음속으로 정해둔 호칭을 읊어버렸지만. 못 들었겠지?

 "그래 선생님이야. 수혁아.. 그러니까 정, 신, 차, 려어어어"

 계속 흔든다. 잔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하. 그러니까 괜찮다니까요. 계속 이렇게 흔드시다간 도리어 안 괜찮아질거 같아요.

 "소연이 너도 그러고만 있지 말고!" 라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저 녀석 나한테 오려던 모양이었구만. 아. 엄살피우지 말라고 한게 너였구나. 으으으..

 "어휴, 이런 녀석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게 보인다. 뭘 하려는거냐. 설마,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조금은 기대하고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고.. 아니 오히려 니가 그러면 더 무섭고.. '비켜요'라니.. 너 뭘 하려고? 그런데 뭔가 손에 들고 있는 걸 보니 내가 기대하는 뭐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고... 공? 저건 공이 아닌가. 아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피구를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주변에 있던 애들이 보였다.. 남자 둘에 여자 셋. 금 바깥에 있는 사람이 둘.. 음. 내가 쓰러뜨린건가? 역시나 이 몸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군.

 그렇게 내심 현 상황을 서서히 떠올리고 있는 와중에.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충격 요법이 최고라구요!"

 그 말과 함께 내 배에.. 엄청난. 충격이.. 소리도 못 지르겠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윤이 누나의 손길이 필요..

 "수혁아!!"

 ... 아니에요. 그렇게 흔들지 말라니까요. 누나 얼굴이 여러개로 보여요.. 아 제발. 그만. 그리고 무언가가 같이 흔들리고 있어.. 아.. 아름답다. 마치 한여름의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헤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헤.. 헤헤.. 잔상도 보인다. 머리도 어지럽다. 헤헤. 몸도 흔들리고 그 아름다운 것도 흔들리고..

 "괜찮.. 으니까.."

 이대로 더 있어줘요 누나..
 
 그런데 소연이의 행동이 이상하다. 저 멀리 튕겨나간 공을 향해 재빨리 달려나가.. 흙먼지가 튀잖아. 야. 뭐하는 짓이야. 방금 니가 던진걸 맞아서 아파 죽겠는데 이젠 감각까지 둔화시키려고 하네.

 먼지가 일으킨 안개 너머로 공을 들려고 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 보였다. 저런걸 또 맞으면.. 아니 만에 하나라도 조금 아래로 날아와서 잘못 맞기라도 하면. 잠깐만.. 저 녀석이라면 일부러 잘못 맞출 것 같은 매우 안 좋은 예감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선생님. 저 이제 괜찮습니다."

 저 강력한 스파이크를 그.. 아래에 맞았다간 정말로 내 앞으로의 인생에 크나큰 지장이 생길 것 같다. 가능한 한 괜찮은 척을 해야겠다.

 "수혁아. 응. 그래.. 괜찮다니까 다행이다. 보건실에 눕혀야 하나. 했었어.. 체육시간엔 정신이 말짱한 애가.."

 정말로 여리다. 비록 학생을 대하는 선생의 태도라고는 하더라도.. 아. 이런 여자가 날 보살펴준다면.. 아파도 괜찮을 것 같다.. 누워있는 나를 열심히 간호해주고.. 지쳐서 내 팔에 쓰러져 누운 아름다운 긴 생머리의 숙녀의 모습이.. 곧 들려오는 말소리가 내 환상을 와장창 부숴버렸다.

 "너, 맞았으니까 금 밖으로 나가."

 묘하게 쌀쌀맞다. 너때문에 골로 갈뻔했는데.. 그나저나. 뭐라는 거지 소연이는.. 누워있는 사람을 향해 맞춰놓고, 공을 맞았으니까 금 밖으로 나가라고?

 "순 억지잖아 야!"

 누워있는 사람을 향해 던져놓고 억지를 부리는거냐?
 잠깐만. 그런데 내가 왜 정신을 잃고 있었더라?

 "내가 던진 걸 못 잡아냈으니까 당연히 아웃이지!"

 그것도 네 짓이었냐, 안 소연!!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맨날 싸울 수 밖에 없는거라고! 이 여자는 '신수혁의 소꿉친구'라는 타이틀 뒤에 '웬수'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게 틀림없다! 난폭한 여자 같으니!

 그래도 승부는 공정해야 하는 법. 터덜터덜거리며 금 밖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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