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그리고 만남 (5)
등받이와 같은 검은색의 천.. 이라기 보다는 고무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무언가가 내 몸을 서서히 덮어가고 있었다. 손으로 건들어볼까 했지만 어느새 손까지 서서히 덮혀지고.. 조금 답답하게까지 느껴질때 쯤, 말을 걸어보았다.
-"이거, 뭔가 너무 답답한데요!"
화면 너머의 윤이 누나는 뭔가 엄청 바빠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등만 보이고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모습이 평소 체육시간때하고는 엄청나게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안심해, 한 5분정도는 답답하겠지만 그 뒤엔 괜찮아질거야"
5분이라.. 조금 이러고 있으면 괜찮아진다는건가.. 자꾸 몸의 곳곳을 꾹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과 서서히 풀리는 감각이 반복되어 느껴졌다. 잠이 올 것만 같던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조금 긴장까지 된다. 손도 멋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수혁아! 그거 정식으로 테스트해보는거니까 부담갖지 마라!"
정식.. 테스트? 나도 모르게 "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듣고 할아버지는 그저 "하하하"웃기만 하신다. 또 불안해지는 이유는 왜일까.. '생일 선물'이라는 걸 인식하고 나서부터인가.
-"수혁아! 손가락 움직이지말고 가만히 좀 있어!"
손가락만 어떻게 좀 움직여보려고 했던 게 윤이 누나한테 들켰다. 뭔가 다 확인하는 방법이 있는건가? 왠지 손가락을 더 움직였다간 눈앞에 나타나 손가락을 묶어버리지나 않을까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에.."
안 움직일게요.. 5분에서 몇분이나 더 지났을까 생각해봤지만 잘 모르겠어서, 주위를 한번 슥 둘러보았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건 바깥의 모습을 보여주는 스크린이었다. 대체 카메라가 어디에 달린걸까 싶지만.. 중요한 의문은 아닌 것 같으니 패스하고. 다만 그 스크린이 꽤나 넓게 퍼져있다는 게.. 직접 움직여보기 전까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눈에 들어오진 않을 것 같다.
시험삼아 고개를 이리 흔들어보고 저리 흔들어봤다. 안 움직인다. 어느새 머리까지 고정된 모양이다.
눈알만 굴릴 수 밖에 없나. 강제로 눈운동을 하게 만드는 아주 좋은 기능이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확실히 안이 밝아졌다. 뭘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초기화 작업이라는게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제 됬어. 손 움직여도 돼!"
그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아까까지 느껴졌던 고무같은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그냥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조종복.. 슈츠라고 했던가. 여튼 옷은 옷인가보다. 오히려 다른 옷보다 편한 것 같기도 하고.. 입고 한번 뛰어보고 싶어졌지만.. 공교롭게도 뛸만한 공간은 없어보인다.
-"이니셜라이즈 완료를 확인. 유저와의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프로필 넘버 001..."
윤이 누나가 뭐라뭐라 하는게 막 들려오는데 001 이후로 들려오는 게 내가 아는 언어가 아닌 것 같은 소리가 막 들려온다. 중간중간 아는 말이 들리긴 하지만.. 저건 영어가 맞을까. 영어가 맞겠지.. 동시에 윤이 누나의 목소리도 아닌 게 안에서 울려퍼지듯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싱크로나이즈 익스큐트'
아.. 뭔 말인지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가 막 들려오니까.. 일단 윤이 누나 모습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와서 말을 걸어보았다. 음.. 질문은.. 어디 보자.. 그래.
-"선생님! 언제쯤 움직일 수 있어요?"
-"아, 수혁아. 기다리기 힘들면.. 그 커넥트 보드는 당분간 쓸 일이 없으니까 그거 갖고 놀아."
지금 윤이 누나 얼굴이 떠있는 이걸 '커넥트 보드'라고 부르는건가.. 그런데 도저히 갖고 놀 방법이 생각나지 않기에 그저 누나가 열심히 뭔가 하는걸 가만히 바라만 봤다. 분명 정체모를 기계를 이리저리 만지작대는 것 뿐인데 어떻게 저렇게나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되는걸까..
-"뭐 재밌는 거라도 찾았어? 웃는 걸 보니 나도 즐겁네."
아.
그대로 보이고 있던건가.
-"아 그러니까.. 어.. 이 큰걸 제가 움직인다는 걸 말이죠.. 음.. 생각해보니까 재밌어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황해서 말이 막 헛나오고 버벅댄다. 어. 으어어.. 아 빨리 뭐라고 할지 더 생각해내라. 이 멍청한 머리야!
화면 너머로 윤이 누나가 입에 손을 갖다대고 웃고 있다. 아..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미소가..
-"음, 그래. 네 또래 남자애들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 확실히.."
-"네, 그 그런거죠 뭐. 하하하"
멋쩍게 웃고는 대충 웃어넘겼지만, 마음 속 한 구석은 놀람과 즐거움으로 두근두근대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윤이 누나는 가만히 웃고 있다가, 갑자기 아! 하고는
-"그러고보니 아까 차 안에서 메카 드라이브라는거 한다고 했었지? 그건 그 스키넥이라는거 가지고 직접 조종하는거야?"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메카 드라이브는 내 최대의 관심사였으므로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술술 대답이 나왔다.
-"아니 그거는 그냥.. 버튼만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는거라.. 아, 설정만 바꾸면 기기를 들고 움직이는걸로 조종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건 진짜 고수들만 하는거라 보통은 안써요. 물론 저도 안쓰고."
내가 신나게 말하는 걸 듣는지 마는지, 윤이 누나는 화면 너머에서 싱긋 웃고 있었다.
-"프라이머리 시퀀스 기동"
-"유니스, 스티터스 상태는?"
-"노멀 20, 어브노멀 0. 구동 가능합니다."
-"괴리현상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화면 너머로 뭐라뭐라 말하고 있는데 난 저게 뭐라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까도 이 느낌이었나.. 소외된 기분이다. 아. 영어를 익혀야겠어. 정말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할아버지와 윤이 누나.. 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고 재촉이나 하자.
-"아직이에요?"
-"몇번이나 불렀는데 이 녀석이 이제야 응답해!"
답하자마자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셨다. 자. 잘못했어요! 뒤이어 윤이 누나가 '화면에 뜬 알파벳.. 읽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라고 말 끝을 흐린다..
-"못.. 아 아니에요. 알려드릴게요.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큰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 뭔가 나타나있다. 'Move type : auto'.. 무브.. 움직이다.. 오토.. 자동.. 타..타입.. 취향? 그럴리는 없잖아. '움직이는 취향 : 자동'.. 이라는 뜻이 되는데 그게 말이 될리가.. 없잖아. 그럼 대체 저게 무슨 뜻이지? 일단은 선생님이니까 물어보면 알려주겠지 싶어서 물어보았다.
-"저기.. 타입이 뭐에요?"
그 말을 들은 윤이누나가 갑자기 얼굴을 홱 붉혔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음.. 이 화면, 화질이 상당히 좋은데?..
이게 아니지. 갑자기 왜 저러는거지?
-"응? 내 타입? 갑자기 그런건 왜 물어?"
뭔가 오해가 있었나보다.
-"아, 아뇨, t y p e"
난 취향이라는 뜻 밖에 몰라서.. 그것도 친구녀석들이랑 이야기할때 튀어나온 내용 정도다.
윤이 누나가 갑자기 머리를 싸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 아아아' 하면서 소리를 내고 있다.. 왜 저러는거지? 그나저나 흔들 때 마다 검은 머리가 찰랑이는게.. 아름답다. 고민하는 것 마저 아름다워.. 예쁘다..
-"그.. 형식, 형식이라는 뜻이야. 그래 거기에 뭐라고 적혀있어?"
어느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무브 타입 땡땡 오토 라고 적혀있어요" 라고 말해주니까 또 싱긋 웃는다. 아니. 웃음을 참는건가?.. 그냥 예쁘다.
-"그건, 콜론이라고 부르는거야.. 아 아니지. 그래.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볼래?"
잠깐 있자, 화면에 보이는 게 조금씩 달라보인다. 그리고 몸 전체에 느껴지는 붕 뜨는 감각.. 드디어 움직이는건가? 그런데 이 느낌은 내가 생각한 그게 아니라, 그저 붕 떠서 움직이는 거였다.. 조금 실망했다. 엄청 흥분했지만, 직접 걷는게 아니라서 조금은 실망했다.
'프로페서, 오토 페이즈 확인했습니다' 라는 윤이 누나의 말에 할아버지가 'OK 유니스, 이제 매뉴얼로 간다' 라고 말하는 게 들린다. 뭐라는 건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매뉴얼은 내가 알기로 공략이라는 뜻인데.
-"신수혁 임마! 정신 차리고 이녀석아! 큰 화면 아래에 버튼들 막 놓여있지!"
확인하고 대답하자, 무슨 원 콤마 투 같은 말을 하시다가 다시 왼쪽 버튼을 누르라고 하신다. 하라니까 해야지. 난 뭔지 모르겠으니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아마 차차 알아가게 되겠지? 일단 버튼을 누르고 Manual이라고 표시되는 걸로 바뀐 걸 말해주자, 이것 저것 눌러보라고 해서 따라 눌렀다.
붕 뜬다. 그런데 너무 뜬다. 어. 너무 뜬다. 너무.. 으어어! 화면에 갑자기 무슨 숫자같은것도 막 보이고. 어.. 어지러워! 뭐야 이거, 으어어!
-'Emergency stop'
-"안되겠다. 시뮬레이션부터 하자!"
신기하게도 엑사베리온이 멈추고 밖으로 나오자 슈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아.. 자랑하려고 했는데. 아쉽다.. 가만히 있자 저절로 나가는 문이 열렸고.. 떨어지지 않게 걸어서 나왔는데,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셨다.
"굳이 그걸 또 걸어나오냐! 하하 정말이지 답답하고 궁금한 걸 못참는 녀석이구만. 역시 내 손자야!"
편하게 내려오는 법이라도 있었나요? 라고 되물으려다가 말았다. 더 말했다간 나만 손해볼 것 같아서..
"일단 오늘은 이정도만 하고, 수혁아 너도 다음부터는 이 할애비랑 같이 움직여야할거다. 아직 할게 많아요."
"수혁아, 고생했어."
그리고는 윤이 누나가 어깨를 가볍게..... 무거워! 뭐야 이거. 방금 뼈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어! 나는 애써 아픈 걸 참고, 최대한 웃으며.. "네, 선생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어라. 저쪽은 출구가 아닌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내가 들어온 방향과 정 반대 방향으로 나갔다. 아니 뭐.. 나가는 길만 같으면 되는거지 생각하고 돌아서 가려는데..
"따라와라 이녀석아! 또 멀리 돌아서 갈 생각 말고!"
그 소리를 듣고 멈춰서서 곧장 할아버지를 따라가자 무슨 엘레베이터 같은 게 놓여있는게 아닌가. 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베이터 안에 들어와서 보니 정말로 여러가지 버튼이 있었다. R1. R2. K. L .. 뭐야 이게 다. 무슨 게임기에서나 볼만한 약칭인데... 그나저나, 정말로 이제는 우리 집에 없는 걸 찾는게 더 쉬울 것 같다.
"수혁이는 오늘 일찍 자고, 유니스는 다음에 올때 수혁이랑 같이 와라. 이제부터 슬슬 바빠질거같으니까"
할아버지가 자라는 말을 하기에 주머니에서 스키넥을 꺼내서 화면을 켜봤지만, 고작 오후 7시밖에 되지 않았다. 이해가 안가는데..
"프로페서, 일단 저도 오늘은 여기서 머물게요. 초기 시퀀스 오작동은 제 잘못도 있으니까.."
"그래? 그럼 일단 밥부터 먹지."
윤이 누나랑 밥을 먹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혹시 앞으로 이럴 기회가 많아지는게 아닐까? 부엌에 가자마자 윤이 누나가 찬장을 열어보더니 '손자한테 제대로 된 것좀 먹여요!' 라고 할아버지를 혼내는게 꽤나 볼만했다. 친누나가 생긴 기분이다.
윤이 누나가 만들어준 음식들은 정말 다양했다.. 이런 재료가 집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우걱우걱 먹으면서 할아버지와 요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윤이 누나 요리 진짜 잘하네요. 몰랐는데.. 그나저나 할아버지, 우리집에 이런 거 있었어요?"
"아니. 유니스가 사온거야."
이거.. 원래 윤이 누나의 저녁 찬거리가 아니었을까? 조금.. 양심이 찔린다. 몇일 분의 찬거리인거 같은데.. 이걸 한번에 다 요리했다. 확실히 혼자 먹을 양은 아니지..
"체할라. 천천히 먹어 수혁아. 프로페서! 그 버릇 안고칠래요!"
"어차피 몸에 들어가면 소화액이 알아서 돌아서 다.."
"프로페서!"
천하의 신우현 박사님께서 윤이 누나 말에 꼼짝을 못하는 걸 보니 속이 정말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크크.. 프로페서! 프로페서! 한마디 할때마다 완전히 주눅드는게 보인다. 아.. 잠깐만, 그 악력에 당했다면 주눅들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랫동안 알아왔으니까 그만큼 더 무서움을 잘 아는걸지도..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 말을 국어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건 찔리면 아픈 가시수준이 아니라 뾰족뾰족 아픈 바늘 수준이야.
쉴 새 없이 혼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는 저녁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