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그리고 만남 (4)
계단을 살금 살금 내려가, 겨우 문 앞에 도착했다. 내려가는 중에도 몇번이나 놀랐기에 플래시 기능을 켜둔 스키넥을 떨어뜨릴 뻔 했다. 이 계단에서 한번이라도 잘못 떨궜다간 플래시 기능이고 뭐고.. 혹시라도 길을 잃을 때를 대비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무것도 없다.
서둘렀다간 혹시라도 집에서 주무시고 계실지 모를 할아버지한테 들키기 십상이다.. 들키면 뭐라 변명할 거리를 떠올려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들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러니까, 들키지 않고 가는게 최선이라는거지.
그러니까 답답함을 참고서라도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간신히 문 같은게 보이기 시작해서, 혹시라도 울려퍼질까 더욱 더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쉬고 앞을 바라봤다. 지난번에 본 기억이 있는 바로 그 문.. 살짝 잡아당겨서.. 역시 소리가 안나도록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문 너머로 넘어간 다음, 문을 닫았다.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길을 잃어 모든 문을 다 열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문에 표기된 숫자를 잘 기억해두기로 했다. 'EXIT'.. 뭐라고 읽는걸까. 난 모르겠다. 엑스잇?.. 그 밑에는 무슨 녹색 인간이 그려져 있는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소연이한테 물어봐야 할 게 하나 더 생겼다.
자, 그건 뭐 일단 미뤄두기로 하고..
반대쪽으로 돌아 스키넥을 들어서 빛을 비추고, 지난번에 왔던 기억을 되살려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확실히 일단 끝까지 가서 꺾고..
생각해보니 일방통행이었다. 헤맬 이유가 없었잖아?
오히려 EXIT이라고 적힌 쪽에서 반쯤 돌아보니 길이 하나 더 있었다. 저쪽으로 나아가볼까?
아니야. 일단 오늘 목적은 그 기둥들을 다시 한번 보러 온거니까. 지난번엔 제대로 보지도 못했잖아?
침착해라 신수혁. 이제는 천천히 걸을 필요도 없고, 자연스럽게 하교 시간 조금 넘어서 방으로 들어가면 되는거고.. 아까 윤이 누나때문에 시간을 좀 많이 뺏기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걸어서 오는 것보단 훨씬 빨리 집에 온거잖아.
걸으면서 드는 생각은 오로지 '자연스럽게 방으로 돌아가는 방법'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EXIT'라는 영어 단어.. 몇번이나 깨닫는 거지만 소연이한테 영어를 좀 배워둬야 할 것만 같다. 생각보다 너무 불편하잖아. 잘 모르니까..
눈 앞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그래. 이제 다 왔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문을 힘껏 밀었다.
그런데, 빛이 확 퍼져야 할 공간에서 오히려 빛이 새어 들어왔다. 왜 불이 켜져있는거지? 일단 주위가 밝아진 것 빼고는 그 교차해있는 거대한 기둥들이..
없다. 기둥은 온데간데 없었고. 오히려 탑 같은게 놓여있다. 신경이 쓰여서 가까이 다가가봤지만 역시 X자로 교차된 기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뭐야, 그럼 그 중간에 볼록 튀어나온 조종석으로 추정되는 것도 없어졌나? 일단 지난번보다 올라가기는 훨씬 쉬워져서, 한쪽 끄트머리를 타고 올라갔다.
올라가고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크진 않았다. 플래시로 비춰보는거랑 등불같은 게 비추어서 보이는거랑은 확실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 다음 지난번의 교차점으로 추정되는 곳까지 올라갔다. 도착해서 주위를 바라보니까, 탑처럼 생긴 녀석은 그 교차점에서 다른 한 기둥이 또 튀어나온 형태였고, 그걸 멀리서 보면 말 그대로 '탑'이었다.
감탄해서 이리저리 건들어보고 만지고 하느라, 바로 뒤에까지 사람이 오는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들릴 리가 없는 아주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는 그대로 학교로 돌아갔어야 할 그 사람의 목소리가.
에이. 환청이겠지.
하고서 뒤를 바라보고 나서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윤이.. 선생님? 어째서 여기에?"
그 뒤에서는 역시 익숙한 모습의.. 하얀 가운을 입으시고, 곳곳에 흰머리가 보이는 우리 할아버지가.. 그 곳에 있었다.
"봐라 유니스! 내 이녀석 여기 또 올거라 했지! 하하하. 잘 왔다 수혁아!"
"어휴.. 들어가 쉬라고 했잖아, 이 녀석아! 그리고 마이스.. 아니, 프로페서! 그 반응은 아니죠. 자기 손자가 학교에서 쓰러졌었다는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니, 아마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하다. 어째서? 그것보다도.. 당황스러웠다.
정리해보자.
할아버지는 윤이 누나를 알고 있었다. 윤이 누나는 내가 쓰러졌던 걸 할아버지한테 말했다. 할아버지의 방문은 잠겨있었다. 그리고 난 윤이 누나가 돌아갔다고만 생각했지 실제로 돌아가는 걸 본 적은 없다..
인가.
뭔가 이상하잖아. 학교 선생님이 학교에 왜 안 돌아가는건데? 그것보다도.. 할아버지는 누나를 향해 '유니스'라고 불렀다. 유니스? 뭐야 그게. 그리고 윤이 누나는 할아버지를 프로페서라고 불렀다.
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일단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떠올려봤다. 어 그러니까 보자. 일단 나는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오겠다는 생각으로 창고 문을 열때까지.. 심지어 그 다음에 계단을 내려갈 때 까지 숨을 죽이며 천천히 걸어오고 문을 열었고.. 그리고 기억하는 대로 길을 나아가서 그 끝에 목적지라고 생각하는 곳의 문을 열어보니. 저번에 봤던 모양과는 다르게 무슨.. 탑 같은게 놓여있었고. 거기까지 도달해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서 들어보니까 어. 윤이 누나. 어. 할아버지.
그러니까 일단 할아버지가 여기 있다는 건 내가 숨죽이고 여기까지 온게
아 무 런 의 미 도 없 는 짓
이었다는 거구나.
"으아아아아아!! 할아버지가 왜 여기 있어요!"
"놀라는게 늦다 이놈아! 내가 준건 잘 챙겨왔냐!"
"어? 네? 뭐요?"
뭐라고 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오늘 낮에 아준이 녀석이랑 '할아버지가 준 선물'에 대해 대화를 나눴던 게 떠올랐다.
'야, 이게 뭐같냐?'
아준이 녀석은 내 손에 올려진 투명한 터치패드를 보고 멍하게 바라보고는 잠시 스키넥으로 뭔가를 검색하더니,
'몰라. 전혀 본 적도 없는 물건인데. 그나저나 그거 카드랑 닮지 않았냐? 혹시 긁으면 무슨 데이터라도 뜨는거 아니야?'
솔깃했지만, 할아버지가 메카 드라이버에 대해 알리가 없잖아? 하고는 대충 넘겨버렸다.
'야야, 됬다. 너도 모르면 누가 알겠냐.. 그냥 드라이브나 하자.'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수혁이까지 왔으니까.. 유니스! 가동 준비를 부탁하지!"
"프로페서! 일 대충대충 처리하는 버릇 좀 그만 고치시라고 했죠!"
한번도 볼 수 없었던.. 할아버지가 당황하는 모습을 봤다.
"수혁아! 거기서 빈둥대지 말고! 유니스한테 다 들었으니까 그거 꺼내서 네가 저번에 손 댔던 곳 기억하냐! 거기에다가 그걸 집어넣어봐라!"
할아버지가 저 멀리서 소리지르는데 귀로는 이해가 되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작은게 뭐라고요.."
"잔말말고 해, 이 녀석아!"
일단.. 뭐. 그래. 할아버지가 해보래잖아.
그냥 아무 생각없이 주머니에서 '논란의 물건'을 꺼내서 그대로 그때 그 위치로 추정되는 홍에 갖다댔다.
그러자, 갑자기 눈 앞에 보이는 기둥에 줄무늬같은 것들이 마구 나타났다. 동시에 무슨 귀를 찌르는 소음이 들려왔다. 삑, 삑삑 하고..
"악! 이게 뭐야! 뭐가 잘못된거 아니에요 할아버지!"
매년 생일때마다 겪었던 고생이 되살아나서 무심코 할아버지를 향해 화를 냈다.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지만.. 그러자 할아버지가 호통치듯이 소리를 지르신다..
"발을 더 움직여라 수혁아! 그래,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봐!"
여전히 소음이 멈추질 않아서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이 할아버지가 설마 나 놀래키려고 이런 걸 만들었나 싶어서 이번엔 윤이 누나쪽을 바라봤다.
"수혁아! 몸을 조금만 숙여볼래!"
"이렇.."
게요?
그 뒤의 말은 전해지지 않은 것 같다. 갑자기 땅이 뒤집히는 느낌이 드는데. 아니. 내가 서있는 곳이 땅이 아니구나.. 어. 이게 바로 공중에서 한바퀴 회전한다는건가?
이상하다. 앞을 바라보니 그대로인데 뒤를 바라보니 점점 어두워져갔다.
하늘이 핑 도는 느낌.. 아니, 느낌이 아니라 진짜 도는 것 같은데. 무서워서 손도 못 떼겠고..
으어어어어어어어
"으어어어 뭐야 이거 으아아아아아"
"..아, 들려?"
흑발의 여성이 낼 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선명하게..
-"수혁아! 들리면 그 손에 쥐고 있는거에 'S P E A K E R' 이라고 있을거야. 그거 건들어볼래!"
손에 뭘.. 쥐고 있길래 저러는거지. 일단 눈을 서서히 뜨고 주위를 확인했다. 주위가 어두운 가운데 내 손에서 작은 빛이 나고 있었다. 아니! 손이 빛나고 있는건가! 깜짝 놀라서 그 손을 들어보니 역시 그럴린 없었고. 아까 전에 그 홈같은 거에 끼웠던 그 물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SP.. E..A..K..E..R? 이건가. 친절하게도 괄호가 여러개 연결되어있는 형태의 그림이 그려져 있기에,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자. 눌렀으니..
"눌렀어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뭐야. 이 안에서 하는 말이 들릴리가 없는데.
-"그래, 그럼 지금부터 이니셜라이즈.. 아니, 초기화 작업에 들어갈게!"
내가 놀랄 틈조차 주지 않고 뭔가 바쁘게 지시를 내리는 익숙한 목소리..는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이 작은 판에서 나고 있었다.
"이니.. 뭐라구요?"
"그 전에 말이야.. 그 스피커.. 아니 아까 눌렀던 것좀 다시 눌러볼래? 그러면 그거 꾹 누르고 숫자가 3이 되도록 좀 맞춰봐."
음량 조절 기능인가.. 굳이 설명 안해줘도 이런 것 쯤은 스키넥에도 있는 기능이라구요. 선생님..
어디 보자. 꾹 눌러서 음량 조절 기능이 활성화되면 아래로 쭉 내려서...
왜 위로 올라가. 왜 20까지 올라가는건데. 당황하지 말고 다시 반대쪽으로 쭉 올려서.. 3을 겨우 맞췄다.
"할아버지! 이거 좀 고쳐줘요! 쓰기 불편하다구요!"
듣고는 계신거겠죠. 할아버지?
-"수혁아. 이제 그 판에 손바닥을 좀 갖다대볼래?"
화면이 또 이상한 걸로 바뀌고, 알수없는 영어가 적혀있다. 'Please put on your hand' ..대충. 손을.. 위에.. 놓아.. 너의.. 뭐.
아. 진짜로 영어좀 익혀야겠다..
-"3초만 그러고 있어!"
-"자, 이제 손 떼도 돼!"
손을 떼자, 'E X A - Beli on' 이라는 단어? 문장? 난생 처음 보는 알파벳 조합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 푸른 글씨로.. 'Initialization Complete' 라고.. 역시 모르는 조합에 읽지 못하는 '단어'들 뿐이다.
뭐라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일단 엄청 재밌다.
그와 동시에 내가 있는 공간 전체에서 빛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 무언가가 켜지더니 아래에 사람 둘이 보인다.. 그런건가! 이제 바깥을 볼 수 있다는 거였나!
그렇다면.. 이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걸까?
판에 알수없는 영어들 말고도, 'Touch this'라는 작은 글씨가 나열되어 있기에, 손가락이 까딱까딱 흔들리는 듯한 그림에 눈이 이끌려 호기심에 건들어보았다. 역시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생일 축하한다. 수혁아!"
우왁. 놀랐잖아.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안이 밝아진 덕분에 내가 있는 곳이 의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까진 서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이 목소리는.. 할아버지 목소리다. 어느새 할아버지의 화상이 오른쪽 끝에 나와있다.
"놀랐잖아요! 할아버지!"
-"대 성공이구만!"
정말이지 사람 놀려먹는 걸 엄청 즐기는 분이시라니까..
-"수혁아, 잠깐 의자에 등을 대어볼래?"
그 와중에 또 윤이 누나가 지시를 내린다. 음. 들어줘야지 물론. 등받이에 등을 대어보니, 꽤나 푹신푹신해서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만 같다.. 마치 빨려드는 것 같은.. 너무 푹 들어가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옮겨보았다. 상체와 하체에 무언가가 덮혀지고 있었다.
"이건 뭐에요?"
이상하다는 느낌보다는 궁금함이 먼저 앞섰다. 몸이 푹 들어가는 것 같더니.. 이런게 몸에 덮혀지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난생 처음 겪는 것들 뿐이다. 즐겁지 않을 리 없잖아 이게!
-"네 전용 슈츠.. 조종복이라고 부르는 게 이해하기 쉽겠구나. 그래. 그걸 입히는거야."
"머.. 멋지다! 젠장! 뭐야 이거! 할아버지 대단해요!"
엄지를 척 들어보이며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욘석아 그걸 이제 알았냐! 하하하하!"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정말이지, 이런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예상도 못했다구요.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