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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변조종기 엑사베리온


투고 | alphase

라보 퀘시에[Labo Quesie] (2)


 "아무도 없습니까! 이봐요! 적어도 움직일 수 있게는 해줘야죠!"

 그냥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기로 했다. 고개를 돌려 아래쪽을 보고나서 여기가 순간 초원인가 싶었지만. 바닥이 녹색인 이유는 그저 .. 바닥이 거대한 스크린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있는 이 곳이 시뮬레이션 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누워서 보는게 아니었다면 깜빡 속을 뻔할 정도로 풀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모든 연구소가 다 이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봐 온 연구소들은 다 이런 형태다. 왜 이렇게 번거롭게 지어놨을까?

 벽을 바라보니 벽 너머로도 풀같은게 날아다니는게 보인다. 역시나 정면에서 봤다면 정말로 깜빡 속을뻔할 정도. 실내라는걸 인식하지 않았다면 햇빛까지 비치는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천장에서 비치는 등불이 너무 밝다.. 그렇다고 눈을 감으면 이 영문 모를 곳에서 잠이 들 것 같으니 눈을 감지는 못하겠고..
 아까 내 시야를 가려주던 분홍색 머리칼이 커튼 역할을 했었던 걸까.


 가만히 방을 둘러만 본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렇게 계속 눕혀놓지야 않겠지만, 이제 이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해진다. 아직 시훈이 형을 용서해줄 생각은 없다. 그 긴 시간 날 속여왔다고 볼 수 있는거고.. 어쨌든 지금은 나름 '안전'한 장소로 도착하게 되어 같이 살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내 기필코 한방 먹이고 나서 속이 풀리고 나면.. 그 뒤는 글쎄.

 "이봐요! 누구 없습니까! 좀 풀어주시죠!"

 저렇게 생각날 때 마다 반 건성으로 '풀어달라'를 강조하면서 외치고 있었지만 그저 메아리만 계속 울려퍼지는 건 이미 익숙해졌다. 그것보다도 대체 시뮬레이션 룸에 간 두 인간은 언제까지 있다가 오려는건지.. 서른 두살의 어린애와 스물 둘의 청년이 싸우는 그림이라.. 도저히 연상이 되질 않는데. 전적으로 스물 둘의 청년이 우세하지 않을까. 7:3 정도로 말이지. 애초에, 시뮬레이션 룸에서 싸우는 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던 도중,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 이제야 돌아왔나..
 
 "이봐요, 거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었던겁니까?"

 반쯤 짜증 섞인 목소리로 가능한 한 얼굴을 최대한 찌푸려서 보란듯이 화를 냈지만, 전혀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네가 우리가 싣고 온 조종기에 타고 있던 애구나?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어리네~" 

 또각또각 하는 걸음소리가 점점 커져온다. 묘한 불안감이 들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홱 돌아봤다. 그 곳에는 그렇게 예쁘게는 생기지 않은 수수한 외모의 한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만.. 키는 꽤 큰 편인것 같다. 시훈이 형하고도 맞먹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음. 네 이름이.. 신 수혁이었던가?"

 멍하니 관찰하고 있는 날 무시하고 몇마디 혼자 중얼중얼거리는 걸 보니 이 연구소 사람들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풀려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6살.. 이렇게 어린 애가? 용케도 살아있네.. "같은 내가 살아남은 이유를 굳이 또 중얼거리면서 생각하려고 들기에, 끼어들었다.

 "아.. 예. 제가 신 수혁이고.. 엑사베리온의 조종자.. 유저입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 지.."
 "어휴 얘도 참. 초면에 다짜고짜 이름부터 묻는 게 어딨니?"

 이 여자가 뭐라는거지. 그럼 초면에 이름 안묻고 뭘 물어보라는거야. "여기서는 말이야." 라고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카드인가? 위쪽이 푸른색, 아래쪽이 회색을 띈 그 카드에는 'Riana'라고 적혀있었다. 이제 저정도는 대충 읽을 수 있다.

 "리아나. 라고 읽는겁니까?"
 "그렇게 부르는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라이아나라고 불러주겠니?"
 "그게 이름이군요."
 
 누워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들더니 "어휴, 초면에 다짜고짜 이름을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니까. 당연히 알려주지도 않을거야." 란다. 그게 대체 뭔 소리인가 멍해져서 바라보는 내 시선과 마주쳤다..

 "쉽게 말하자면.. 닉네임? 그렇게 생각하는게 편할거야."
 "닉네임이라.."

 스키넥에서 '프렌드 닉네임'이라는게 있었던 게 기억났다. 뭐.. 일단 이해하기 쉽도록 말해준 것 뿐이겠지. 더 깊게 파고들지는 말도록 하자.. 나중에 시훈이 형한테라도 물어보든가 하지 뭐.
 상대는 닉네임만을 알려주고. 나는 본명을 들켰다. 조금 손해를 본 느낌이 들지만.. 뭐. 이정도는 감수하자.

 "예.. 라이아나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여기서 살게 된 신 수혁이라고 합니다."

 누워서 이렇게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말이다. 움직일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그러니까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일단 부탁을 할 수밖에 없다. 난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누가 봐도 불쌍해보이는 듯한 표정으로..

 "저기.. 죄송합니다만 이것 좀 어떻게.. 풀어주실 수 없으신가요."




 꽤나 긴 시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탓인지, 분명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확실하지만 내 몸이 내 몸같지가 않다. 앞으로 고꾸라질뻔한 걸, 라이아나 씨가 붙들어 준 덕분에, 간신히 땅을 밟고 섰다.
 분명, 땅을 밟고 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풀과 인사를 하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이런.. 아직 적응을 못했나보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하긴, 이런 환경에 오자마자 적응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라고는 날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초면에 누워서 인사하고, 기껏 풀어줬더니 비틀거리다 쓰러지기나 하고.. 내가 할 말은 딱히 없었다.

 "미안해요. 라이아나 씨.. 제가 체력 빼면 남는게 없는데."
 "아아, 신경쓰지 말아."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더니. 이제 걸어보라고 해서 한번 발을 내딛어봤다... 아까와는 달랐다.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있었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어때?"
 ".. 어. 움직일 수 있네요. 그런데 저 안에서는 왜.."

 "음, 쉽게 말하자면.. 여기와는 환경이 전혀 달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해야 할까? 특정한 액세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설을 이용하는 게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어."

 저기요. 뭐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내 표정에 하고싶은 말이 그대로 드러났는지는 몰라도. 라이아나 씨는 웃으면서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이어서 말했다.

 "미안해, 오랜만의 손님이니까 말이야.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 그래도 곧 알게 될거야."

 아무 생각 없이 그녀가 가는 대로 따라 갔다. 곧 '307'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밑에는.. 가장 보기 싫은 단어가. ​'​S​i​m​u​l​a​t​i​o​n​ Room' 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 두 사람, 실루엣이.. 확실히, 시뮬레이션 룸으로 가는 것 같았었지.

 "손님 대접이 엉망이네. 정말이지 레지에는 겉보기랑 하는 짓이 똑같다니까."
 
 그러고는 문을 살짝 열고 "레지에!" 하고 외치는 게 들린다.. 열린 틈을 통해 문을 마저 열고 들어가보자, 거기에는.. 말도 안되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홍색 앞머리를 휘날리며 날아다니는 한 명의 꼬마와, 푸른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다니는 스물은 넘어보이는 청년.. 아. 그 인간들이다. '레지에 카첸나'와 '진 시훈'..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이게 시뮬레이션 룸에서 일어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아.. 놀라는 것도 당연하겠네. 이 방에서 전투 훈련까지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대단하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 "보통은 분리해두지만 말이지. 참 악취미라니까~" 하는 말에.. 그 생각이 싹 날아갔다. 
 라이아나 씨는 양 손을 모아 입에 갖다대고 "레지에!" 하고 부르고 있었지만 그 대상은 전혀 응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안 들리는건지도 모른다..
 궁금한게 생겨서 라이아나 씨한테 말을 건넸다.

 "저기.. 저 분홍색 머리 하신 분은 '레지에' 라고 불리던데, 그건 이름이잖아요?"
 "레지에는 굳이 네임을 쓸 필요가 없어."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질문할 건 더 없었으니 고개를 돌려 그들이 전투 훈련을 하는 걸 구경해봤다. 시훈이 형한테 몇 개월동안 이리저리 굴려졌던 게 헛되진 않았던 모양인지, 대략적인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푸른 머리와 분홍 머리로 간신히 구별이 가능할 정도로.. 둘은 아까 방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아줌마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연녹색 슈츠를 입고 어깨에 곰돌이 같은걸 달고 날아다니고 있었고, 품에는 작은 토끼인형을 꽉 쥐고.. 에엑. 뭐하는 짓이야 저거.
 반면, 시훈이 형은 주황색 슈츠를 입고..  으엑. 안 어울려.
 평소 입던 붉은색에 줄무늬 그려져있던 그게 훨씬 나아보이는데.. 한 손에 단궁, 칼로베리프의 그것과 같은 모양을 한 것을 쥐고 반대쪽 손에는 몽둥이 같이 생긴, 역시나 칼로베리프가 들고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을 한 푸른 막대기를 들고 있다. 그냥 몽둥이라 생각하자.
 확실히 지금 하고 있는 게 전투 훈련이 맞긴 한가보다. 뭔가 쏘고.. 휘두르고. 그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으니까.
 
 레지에 아줌마..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영락없이 어린애인데. 저게 어딜 봐서.. 여튼 아줌마가 쥐고 있는 토끼 인형에서는 토끼 귀 같이 생긴 분홍색.. 아줌마도 센스가 참.. 분홍색의 무언가가 시훈이 형을 향해 계속 쏘아지고 있었고, 어깨에 올려진 곰돌이 인형의 팔이 길어지는 것 처럼 보인다. 아마 착각이겠지. 그냥 어깨에 장식해둔 걸거야. 신경쓰지 말자.

 시훈이 형은 날아다니면서 한쪽 손에 든 단궁을 들어서 재빠르게 화살을 쏘고 다시 내리고, 다시 재빠르게 들어서 쏘고 다시 내리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분명, 내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시훈이 형의 시선에는 아줌마가 타점에 들어왔기에 타이밍을 잡아서 쏘고 있는게 확실한데. 그걸 또 용케 다 피하는 아줌마..

 처음 보는 사람을 갖다놓고 바라보라고 하면 움직임조차 파악하기 힘들어서 그냥 입을 쩍 벌리고만 바라보고 있을만한 광경이었다. 아니. 아동 학대 현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저 분홍색 머리를 한 여자의 나이를 모른다면 말이지.
 
 대체 어떤 식으로 하늘을 붕 붕 날아다니고 가속과 감속을 마음대로 조절하는지가 궁금하긴 하다. 그나저나 저게 승부라고 한다면, 승리 조건이 정해져 있는게 분명할텐데..
 들어오고 나서 쭉 바라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한 발을 맞추거나 맞는 꼴이 보이지가 않는다. 말 그대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승부다.

 저것들은 나랑 같은 인간이 맞나.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안그래도 지쳐있는데 저런 걸 보고 있자니.. 어쩌면 저 둘중 하나랑 저 짓거리를 해야 하는게 아닐까?

 "아마.. 익숙해져야 할 거야."

 그런 나를 보고 라이아나 씨가 나직히 읊조린 그 말이.. 앞으로 엄청 고생해야 할 거라는 걸로 들린 건, 기분 탓일까.. 아마 앞을 내다보고 한 말일게 분명하다. 

 이쪽을 향해서도 푸른 화살이니, 분홍색의 토끼 귀.. 같이 생긴 같은것들이 날아오고 그러지만.. 신기하게도 닿자마자 그냥 흩어진다. 분명, 겉모습만 놓고 보면 한명은 인형 매니아, 한명은 전투 복장인데.. 맞서는 동작 하나 하나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울 정도다. 어째서 호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도 의문일 정도.

 들어오고 나서 보였던 상황은 분명 시훈이 형이 아줌마를 쫓는 형태였던 것 같은데, 어느 새 상황이 역전된 것 같다. 시훈이 형이 장전하는 틈을 노려 한 발씩 토끼 귀를 쏘고 근접해서.. 곰돌이 팔이 길어지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근접했다 싶으니 곰돌이 팔로 자꾸 치려고 시도하는게 보인다. 일일이 그 팔을 또 오른손에 쥔 몽둥이를 들고 쳐내면서 지나치는 시훈이 형도 대단하지만.. 그와 동시에 반격을 시도하지만 또 그게 빗나간다. 

 저 아줌마, 무서운 게 박력 뿐만이 아니었네.

 그나저나..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 족히 30분은 지난 것 같은데 말이지.

 언제 끝나는거야? 저 인간들은 지치지도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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