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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변조종기 엑사베리온


투고 | alphase

라보 퀘시에[Labo Quesie] (3)


 "시훈. 곰돌이 인형을 괴롭히면 못 씁니다."

 애써 당당한 척 하는 시훈이 형을 향해, 분홍 머리의 단발 소녀(아줌마) 레지에 씨가 등을 탁탁 두드리며 호호호 하고 웃는 소리가 시뮬레이션 룸에 울려퍼졌다.
 시뮬레이션이 완전히 종료되었는지, 영상이 사라지고 남은 공간은 내가 알고 있던 전체적으로 하얀 색으로 칠해진 바로 그 시뮬레이션 룸의 모습이었다.

 결판은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단궁이 타점을 제대로 잡았는지 두 발이 교차되어 발사되는 순간, 하나의 화살이 곰돌이 쪽에 맞는 가 싶었으나.. 어느새 화살은 빗나가고, 오른쪽 어깨에 놓인 곰돌이의 팔이 시훈이 형의 허리를 가볍게 스쳐지나가면서 작은 타격을 입혔다.

 그 순간에 배경이 흩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둘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아. 단 한대만 맞아도 지는 거였나. 그나저나 대체 그럼 그 한대를 맞추기 위해 족히 두시간은 날아다녔다는 거 아닌가. 이 인간들은.

 사람 맞나.

 그렇게 배경이 서서히 흩어지는 느낌이 그저 느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난 뒤에는 모든 게 내가 알고있던 그 공간의 모습으로 돌아와버렸다는 것이다.

 신나게 호호호 웃는 그녀의 모습에 대비되어. 어쩐지 축 처진듯한 느낌을 주는 시훈이 형의 모습이 오히려 더 멋져보였다. 나도 모르게 양 손바닥을 마주하려던 찰나.

 "... 쬐그만 게 요리조리 잘도 피해다니기는."

 저기요, 진 시훈씨. 저 아줌마가 웃는 소리가 더 커서 그렇지 저한텐 똑똑히 들렸습니다만. 멋있기는 개뿔.. 주먹을 꽉 쥐고 중얼대며 걸어오는 걸 보니 박수를 쳐주려던 생각은 싹 가셨다.

 "아, 라이아나! 돌아와 있었던겁니까!"

 아줌마는 또 아줌마대로.. 가지가지 한다. 대체 몇번이나 불렀는지 알기는 하는 겁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만 하고 가만히 바라보니, 레지에 씨는 기쁜 듯이 팔을 활짝 벌리고 라이아나 씨한테 쫄래쫄래 달려가고 있었다. 영락없는 어린애가 엄마한테 자기 자랑하러 가는 꼴인데..
 여튼 아줌마는 자기 나이를 잊고 라이아나 씨에게 다가가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나이가 32라는 걸 몰랐다면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로 귀여운 행동이나 하고..

 "레지에.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에요?"
 "시훈이 또 날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어른의 힘을 보여준 겁니다!"

 자기는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할 셈인데. 그 원인이 되는 제가 여기 있으니 그 말에는 전혀 동의를 못하겠습니다만..

 "아, 수혁. 라이아나하고 같이 온건가. 그럼 인사는 끝났겠군."
 "시훈이 형. 예.. 뭐 그런 셈이죠."

 반대쪽에서 "어른은 그런 짓 하지 않아요!" 라는 말과 "시훈이 잘못한거다!" 하고 떼를 쓰는 듯한 라이아나 씨와 레지에 씨의 대화가 들려온다.. 그냥 영락없이 엄마랑 딸인데. 저거. 생긴거만 조금 닮았다면 말이다.

 나는 또 나대로.. 일단 자유로워졌으니 시훈이 형한테 한방 바로 먹이고 싶었으나 왠지 겉모습만 어린애한테 농락당한 청년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느껴진다. 그래.. 다음으로 미루자. 여러가지 물어봐야 할 것도 많으니까 말이다. 무슨 답을 들을지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하니까 일단 저 광경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영락없는.. 엄마와 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종종 보게 될거다. 익숙해져라."

 예. 암요. 물어본 제가 잘못했습니다.

 "자. 약속대로 오늘은 시훈이 식사 담당입니다."

 어느새 라이아나 씨의 품에서 멀어진 레지에 아줌마가 팔을 쭉 뻗어 시훈이 형을 가리키면서 '식사 담당'이라고 말했다. 잠깐만. 승부 결과로 식사 담당이 정해지는겁니까. 뭐 이런..

 "설마 식사 담당을 누가 할지 정하기 위해서 이렇게 긴 시간동안.."
 "생각보다 엉뚱한 면이 있는 꼬맹아. 식사보다 더 중요한걸 한번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라."

 ... 딱히 이 상황에서 더 중요한걸 말하라고 해도 말이지. 그런 질문을 한 쪽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까 긴 시간 그대로 묶여있던 쪽이 오히려 더 잘못한 것 처럼 느껴지잖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들이 잘못한 거 아니야?

 라고 말은 못하겠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있자, 날 향해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꼬맹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는지 깨달았겠지?"

 아니요. 전혀.. 당신이 얼마나 못됬는지 잘 깨달았는데요..
 어느새 즐거운 듯이 방방 뛰면서 "식사~ 식사~ 오늘은 뭘 해줄거죠 시훈" 하고 달라붙는 꼴을 보니 영락없는 어린애.. 레지에 아줌마는 자기 나이가 서른 둘인걸 자각하기는 하는걸까?
 생각해보니 결혼도 안한 여자를 아줌마라고 생각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아니.. 뭐 생각하는 것 뿐이니 상관없나? 근데 이렇게 생각하다가 무심코 말로 튀어나올 것 같으니 호칭에는 주의해야하지 않을까. 
 어쩌다가 툭 튀어나오면 분명 그 박력넘치는 불타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면서 '뭐 라 고 요' 라고 외치는 상황.. 생각하는것 만으로도 저절로 아찔해진다.

 또각 또각 하는 라이아나 씨의 발걸음 소리, 거의 걷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시훈이 형의 움직임. 그리고 방방 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들떠있는 레지에 씨.. 그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가능한 한 이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눈에 익혀두기로 했다. 이유라면.. 뭐. 간단하다. 레지에 씨가 했던 "시간이 남는다면" 이라는 말 때문이지.

 진짜 안 남을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인간들처럼 살았다간. 특히나 무슨 식사 담당을 정하는 데에 2시간을 넘게 싸워대다니 제정신이 아니어도 한참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난 절대 저 인간들처럼은 되지 않겠어.

 다짐하고 또 굳게 다짐했다.

 "그나저나 레지에, 수혁 군에게.. 음, 일단 편의상 수혁 군이라고 부를게. 괜찮지?"
 
 레지에 씨를 부르다 말고 갑자기.. 복도를 보다말고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했다. 그러자 이어서,

 "길 안내는 제대로 해줘야죠, 레지에!"
 "꼬맹이는 꼬맹이답게 어른을 얌전히 따라오면 되는.."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흔들거리며 대꾸하는 ​어​린​애​(​겉​보​기​만​)​를​ 라이아나 씨가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라이아나 씨가 레지에 씨에게 손을 댈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라이아나 씨가 레지에 씨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다는 작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저렇게 꼼짝을 못하잖아.

 그러면, 라이아나 씨랑 시훈이 형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호기심이 인다.


 시훈이 형은 201호에 도착하자 안쪽으로 들어가 요리를 하는 모양이었고., 자연스럽게 테이블에는 나와, 라이아나 씨와, 레지에 아줌.. 레지에 씨 이렇게 셋이 앉아서 보게 되었다. 레지에 씨는 몸집이 작은 탓에 테이블이 맞지 않았는데, 위잉 위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테이블 위로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레지에 씨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 테이블 세팅을 다 마친 라이아나 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소개는 안했네.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난 라이아나라고 하는 액세스 네임을 가지고 있어.수혁 군보다는 4년 정도 더 살았고.."

 .. 뭐. 20? 고작 스물?.. 솔직히 서른 남짓 되는 줄 알았다.
 정말이지 여기 와서 놀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놀랐지만 내심 태연한 척 하고 다시 집중했다. 중간 중간 생각하느라 제대로 못들었지만 말이다.

 ".. 호칭도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면 될 것 같아.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 신 수혁 군. 조금 놀란 모양이네."
 "아,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라이아나 누나."
 "자, 그럼 네쪽에서도 정식으로 소개를 좀 해줄래?"

 아, 그렇지 참.. 일방적으로 듣기만 해서는.. 잠깐만, 역시 이름은 듣지 못했는데.. 뭐 상관없나.

 "신 수혁이라고 합니다. 어찌어찌 엑사베리온에 타게 되어 오라드까지 맞고 죽을 위기를 넘겨.. 어찌어찌 여기까지 잡혀오게 됬네요. 잡혀왔는데 같이 살게 된 것도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이아나 누나"

 라이아나 누나가 웃는다. 웃으니까 수수해보이는 외모도 좀 더 예뻐보이네.

 "어찌어찌.. 라는게 신경쓰이긴 하지만, 앞으로 알게 될테니까 크게 신경은 쓰지 않을게."

 더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솔직히 그 지옥같은 회전을 떠올리기는 싫었으니까. 그렇게 서로 인사가 마치고 나자, 자리에 앉아있던
 
 "꼬맹이. 나에게도 누나라고 부르는 걸 허용한다."

 아니요. 당신은 누나라고 부를 수가 없어. 겉모습은 누가 봐도 어린애니까 '레지에!' 라고 부르게 해준다면 몰라도 말이지. 누나라고는 절대 부를 수가 없겠다.

 "아니지. 일단 라이아나보다 더 어른이니까, 누님이라고 불러도 흔쾌히 허용한다."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또 호호호 하고 웃는데 도저히 서른 두살 먹은 여자가 할만한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니.. 윤이 누나가 너무 어른스러웠던걸까. 그에 비해서 생각해도 라이아나 씨가 오히려 내 기억에 스쳐가는 윤이 누나보다 더 어른스러운데 말이지.. 그러니까..

 결론은 저 아줌마는 레지에 씨라고 부르기로 하자.

 "아, 레지에 씨도 잘 부탁드립니다."

 난 최대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지만, 뭔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칫 하고 입으로 소리낸 레지에 씨는.. 말을 이어갔다.

 ".. 뭐 됬어. 어쨌든. '레지에의 수수께끼 실험실'에 살게 된 걸 정식으로 환영하지."
 
 라보 퀘시에(Labo ​Q​u​e​s​i​e​)​라​는​게​.​.​  그런 의미였나. 적어도 시훈이 형한테 간간히 들었던 영어에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앞으로 호칭..은 바꾸도록 노력하게 만들 거야.."

 내 소꿉친구인 소연이.. 보다도 더 유치한 행동을 하는 저 무서운 여자를 누나라고 부를 생각.. 솔직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소연이는 오히려 레지에 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라이아나 누나처럼 행동했으니까.
 레지에씨를 조금이나마 동정하게 된다.

 하지만, 절대 누나라고는 안 부를거다. 

 절대 안 부를거다.

 


 얇은 크레이프 반죽 사이에 이것저것 넣어서 먹을 수 있게 끔 차려져 있는데, 안에 넣을만한 것들이 꽤나 다양했다. 가장 눈에 띄고 익숙한 것이 다양한 잼들.. 얇게 썰려있는 구운 햄, 으깬 감자, 으깬 고구마.. 초콜릿 슬라이스. 양상추? 인가. 그리고 각종 채소들. 거기에 크림.. 은 냉장고에서 꺼낸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냉기가 퍼져나오고 있고.. 무슨 보라색을 띄는 채소도 놓여있고.. 생각보다 호화로웠다.

 "레지에, 골고루 먹으라고 했죠!"
 "이런 것들은 머리 굴리는데는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레지에 씨가 초콜릿 슬라이스만 집어서 돌돌 마는걸 보고, 라이아나 씨가 호통을 쳤다. .. 진짜로, 엄마와 딸 아니야? 이 사람들 그냥 나 속여먹으려고 나이 다 속이고 그러는거 아니야? 저 여자는 진짜 한 10살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말이야.. 
 우물우물 먹으면서 그 둘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훈이 형 역시 편식을 하는 레지에 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뭐라 말을 했다.

 "역시 이렇게 되나. 예상대로다."

 아아. 마음에 들지 않기는 커녕 당연한 상황이었습니까. 
 옆에서는 라이아나 씨가 "다양하게 집어 넣으라구요. 자! 이렇게 먹어요!" 하고 레지에 씨에게 다 접은 크레이프를 건네지만 레지에 씨는 "안 먹을거다! 나 좋아하는 거만 골라서 집어넣을거다!" 라면서 성의를 완전히 무시한다. 영락없이 하는 짓이 어린애다. 아니. 요즘 어린 애들도 저정도는 아닐거야.

 그래도.. 혼자 먹는 것 보단 훨씬 낫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걸 듣고는 레지에 씨가 도와달라는 듯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불만을 표출했다.  

 "꼬맹이! 이게 뭐가 재밌나!"
 "골고루 먹어야죠. 어른이랬잖아요?"
 "편식의 자유 또한 어른이기에 할 수 있는 거다 꼬맹이!"
 "레지에! 골고루 먹지 못해요?"

 시훈이 형도 어느새 미소를 지으면서 묵묵히 크레이프에 이것저것 넣고 있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레지에 씨를 향해 크레이프를 갖다댔다. 분명 레지에씨가 기피한 것들만 골라서 집어넣었는데.. 정말이지 하는 짓이.. 레지에 씨의 눈에는 두 사람이 악마로 보이지 않을까.

 "레지에. 먹어라."
 "싫습니다! 뭘 넣는지 똑똑히 봤습니다! 시훈이나 먹어요!"
 "레지에!"

 앞으로 여기 살게 되면.. 자주 보게 될 광경이랬던가. 
 그렇다면 나도 동참하기로 할까..

 "꼬맹이! 너마저 뭐하는 짓이지?"
 "편식은 좋지 않다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했었거든요."

 악마 한 명 추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즐거운 식사시간이었다.

 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겠네.

 오늘 힘든 만큼, 내일은 즐겁게.. 할아버지가 항상 해준 말을 다시 한번 속으로 되뇌어보았다.

 오늘 즐거웠던 만큼 내일은 힘들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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