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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변조종기 엑사베리온


투고 | alphase

새로운 이름, 새로운 생활 (1)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이아나 누나가 어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좀 귀찮아 질 거거든?'

 .. 모르겠다. 뭐라고 했었는지 그 앞부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문 옆에 버튼 하나 있을거야. 그거 누르고 나와도 돼.'

 대충 잠옷을 개놓고나서 생각해보니.. 옷이 없었다. 저건 이제 빨아야 하는데.. 결국 잠옷을 다시 입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문 앞까지 가자, 라이아나 누나 말대로 버튼이 하나 있었다. 그걸 누르자 멜로디가 흘러나오면서 문이 열렸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 라고 생각해보니 시뮬레이션 룸이었다. 307호였던가.. 하루라도 빨리 강해질거다. 강해져서.. 강해져서 아준이 녀석과 할아버지를 찾으러.. 내 엑사베리온을 노리는 놈들을 다 물리쳐버리고..

 3층에 도착해서, 곧장 307호로 향했다.

 "어이, 꼬맹이. 이런데서 뭐 하는거냐?"

 발을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자, 눈 앞에 작은 꼬마애가 있었다. 군데군데 녹색이 얼룩진 핑크색 머리.. 적당히 흰 가운을 걸친 여자애가.. 레지에 씨다.

 "시뮬레이션 룸으로 갈 겁니다." 하고는 그대로 307호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 나의 팔을 무언가가 붙잡았다.

 "머리를 식혀라 꼬맹아. 자고 일어나면 더 나아질 줄 알았더만 오히려 어제보다 더 심해졌잖아? 하."

 그저 웃고 있는 거겠지만, 그 손동작.. 웃음 하나 하나가 날 비웃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방해하지 말라고. 난 저기에 들어가서 강해져야 한단 말이다..
 갑자기 세상이 한바퀴를 돌았다. 등이 아파왔다.

 "어이, 꼬맹아.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 리는 없고. 뭐. 악몽이라도 꾼 거냐?"

 악몽이라면 꿨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 때의 감각을. 녀석을 보내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찾아 온 다른 놈들때문에 학교가 엉망진창이 되었던 그 때까지 ​떠​올​라​버​렸​으​니​까​.​.​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싸웠던 그 때를... 그런 것들을.. 당신이 알 리가 없잖아. 소중한 게 있었는데, 하루 하루가 즐거웠는데. 그게, 서서히. 서서히 사라지면서 모두 잃어버리고 난 뒤의 내 마음 따위 당신이 알리가 없잖아.

 "강해질 겁니다."
 
 하,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겉으로 봐선 영락 없는 꼬맹이는 그쪽인데. 오히려 날 향해 '꼬맹이'라고 부르며 웃고 있다. 화가 났다. 내가 왜 여기에 드러누워서 말을 하고 있는걸까.. 아니. 저딴 말을 하는 꼬맹이에게 한대 먹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강해지겠다는데 비웃는 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느려터져서 강해질 거다? 이봐. 겉으론 이래보여도 나이를 헛으로 먹은게 아니라고. 니 녀석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됬는지 나는 모른다."

 다시 한번, 세상이 뒤집혔다. 온 몸이 아프다. 화가 났다. 더이상 힘이 없어서 반문을 했다.

 "그래도 말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은 놈을 기껏 받아들여줬더만.. 곧장 주먹을 질러대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

 뭐야. 난 이런 꼬맹이 하나 이기지 못하는 건가? 젠장.. 이렇게나 약해빠진 거였나?

 "왜 막는겁니까? 전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서.. 친구를.. 할아버지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쓰러져 있을 수는.."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 곳곳이 아파왔다. 어째서일까.

 "이제 일어날 힘도 없을걸? 제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강해지겠다'면서 훈련같은 걸 하려는 멍청이는 말이야.. 강해지려고 하다가 죽는다고!"

 푸른 눈동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본 것과는 다른.. 붉은 빛이 전혀 돌지 않는 눈이다. 이어서 레지에 씨가 한 말이 나를 완전히 화나게 했다.

 "꼬맹이. 넌 지금, 살려고 하는 놈의 눈이 아니야. 죽으려고 하는 놈의 눈이지. 강해져서, 강해지고 난 다음 뭘 할거냐? 강해진 다음 그대로 죽어버리기라도 할 거냐?"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당장에라도 저 건방진 말을 지껄이는 꼬맹이를 때리고 싶다. 하지만.. 팔이 전혀 나가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저런 꼬맹이 하나 제압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강해져야 한다.

 그런 내 뺨에, 무언가가 강하게 맞닿았다. 아프다. 아프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흐려보인다. 아파서 그런걸까. 답답해서 그런걸까.. 그녀의 눈은 내 시선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아까와는 달랐다. 흐려보이는 레지에 씨의 얼굴은.. 아까보다는 조금 온화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강해지고 싶다면 말이지.. 일단 살아라. 살아남고 나서 생각 해. 뭘 겪었든. 무슨 일이 있었든.. 그런건 전혀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주위를 잘 둘러 봐라.. 넌 꽤나 운이 좋은 녀석이야.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걸 즐기고, 살아야겠다는 목적이 생기고 나서 강해지든 말든.. 그건 상관 없어. 하지만 죽지는 마라. 어떤 이유로든 여기에 같이 살게 된 이상.. 그런 놈을 죽게 놔둘 생각은 없으니까."
 
 말하는 게 이상했다. '살아남고 나서, 살아남고 나서 강해지든 말든 상관 없으니까. 하지만 죽지 마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흐릿해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마자 겉모습은 어린 꼬맹이가 내 얼굴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날 보고 화를 냈다. 뺨도 때렸다. 그리고 울어준다. 왜.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난.. 확실히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알게 된 녀석들이 어떤 경유로든 사라지는 걸.. 난 원치 않아. 그러기 위해서 강해지겠다면 상관 없어.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지겠다면."

 그리고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줬다.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 쥔 카드를 들어보았다. 거기에는 ​'​M​i​s​t​l​e​t​o​e​'​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 봤던 기억이 있는, 줄무늬가 그려진 작은 카드. 잠깐 숨을 삼키더니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살아남아. 일단 살아남고 나면 강해질 시간은 충분히 있어. 나이도 어린 자식이.. 멋대로 죽으려고 하는 눈을 하고 강해지겠다니 그런 헛소리 지껄이지 마."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남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은 보통.. 그만큼 상냥하니까. 윤이 누나도 그랬으니까.. 살아남으라고. 살아서 꼭 보자고.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으로부터 살아남았는 지.. 대강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이용해. 죽기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지 마. 살기 위해서라면.. 여길 이용해도 괜찮아. 꼬맹이."

 레지에 씨는 작은 손을 내밀었다. 겉으로 보기엔 열두살 남짓한 소녀의 손.. 그러나 내면은 서른 둘. 충분히 어른이고도 남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겪은 것 이상의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온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뮬레이션 룸에 가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식사부터 하자구 꼬맹아."
 "네."

 촉촉한 눈가를 애써 소매로 훔쳐내며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를.. 난 조용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생각이 싹 바뀌었으니까.

 "M i s t l e t o e 가 뭐죠?"
 "겨우살이라는 식물이지. 그리고, 앞으로 네가 여기서 쓰게 될 새로운 이름이다."

 짧게,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모른다.


 부엌에 도착하자, 라이아나 씨가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수혁 군? 일어나면 곧장 여기로 오라고 했잖아요. 멋대로 밖으로 나갔나 한참 찾아헤맸는데, 레지에가 찾았다고 알려주지 않았으면.."
 "아.. 네. 그랬었나요."
 "시훈은 어디로 갔습니까?"

 말하자 마자, 201호의 문을 열고서 시훈이 형이 들어왔다.

 "뭐, 대충 다 모인 것 같으니..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일단 꼬맹이. 오늘 하루는 푹 쉬어라. 그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레지에, 수혁 군에게 아크는 넘겨줬어요?"
 "아크?"
 "액세서블 레지스터드 카드. 줄여서 'Arc', 아크. 설마 이런것도 안 알려준건 아니겠죠 레지에?"
 "아.. 아아, 깜빡했습니다. 일단 아크는 넘겨줬습니다."
 "레지에? 무슨 일이에요, 울기라도 했었나요?"

 그야.. 한눈에 봐도 울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눈가가 촉촉했으니까. 

 "그나저나 수혁 군은 눈이 왜 빨간가요? 울기라도 했나요. 밤새 괴로워 하는 것 같던데.."

 .. 나 또한 알기 쉬울 정도로.. 밤새?

 "아.. 악몽을 꿨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게 있으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요."
 "네. 라이아나 누나."

 "음, 알았으면 됬어요." 하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라이아나 누나는 꽤나 다양한 요리들을 해 왔다.
 "때로는 먹는 것도 즐거울 수 있어요. 물 밖에 없는 건 좀 아쉽지만요."
 
 음료수라?

 "라이아나 누나. 혹시 음료가, ​'​B​e​v​e​r​a​g​e​'​인​가​요​?​"​
 "혹시 챙겨온 거라도 있니?"
 "음료라면, 수혁이 제공할 수 있다."
 "시훈? 어째서 말하지 않은 겁니까? 그러면 어제 저녁에도.."
 "아무도 묻지 않았으니까."

 아. 그래. 아무도 묻지 않았고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그저 조용히 먹기만 했었다.
 
 "엑사베리온에.. 내장되어 있어요. 간단한 음식이랑.. 음료 정도는 먹을 수 있도록.. 재료만 있다면요."

 시훈이 형을 제외하고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야, 놀랄 만 하지.

 "전투.. 형.. 조종기가 아니니 그거?"
 "어.. 일단은 맞는데요. 편의 기능이 꽤나 잘 갖춰져 있어서.."
 "시훈, 뭐합니까! 빨리 안내하세요!"
 "귀찮게 구는 군. 음료따위 없어도.."

 그 말에 두 여자의 눈에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필요해요!" "필요하다구요!" 
 
 
 엘레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까지 내려가자, 거기에 메카닉 보관소가 있었다.

 "자, 꼬맹이. 어서 음료를.. 혹시 체리에이드는 있습니까?"
 "난 레모네이드가 좋아 수혁 군."
 "그렇다면 난 블루베리 에이드다."

 귀찮아 하면서도 다 시켜먹네. 이 인간들.

 "아직이냐" "아직이야!" "아직이냐." 하는 세 종류의 재촉하는 목소리에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거, 시간이 좀 걸린다니까.

 "아직, 아직이에요! 앞으로 4분은 더 있어야 한다구요."

 어제, 강제로 내려졌던 것 치고는 의외로 깔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분해한다 뭐다 했지만 전혀 손도 안 건들었구나. 엑사베리온에 탄 시점에서 무장을 하지 않은 그들을 그대로 밀치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냥 관두기로 했다. 받아들여 주고, 잘 대해주고, 조금 거칠지만 살아달라고 말해 준 사람들이니까.

 "자, 여기 있습니다!"
 
 레지에 씨는 조금 불만인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재료칸에 체리가 없으니까 체리에이드는 못 만든다고 나와있었거든. 그래서 라이아나 씨와 같은 레몬에이드를 줬다.

 "난 레몬이 싫습니다. 시큼하니까.." 하면서도 홀짝 홀짝 잘도 들이키는 걸 보니, 어지간히 음료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레지에, 편식하면 못써요." "음. 여전히 맛있군."

 나도 대충 블루베리 에이드를 뽑았기에 마시면서 말했다. 뭐.. 난 물이라도 딱히 상관은 없었는데. 그래도 이 청량감..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맛. 당장 어제 아침에도 먹었던 거지만 말이다. 맛있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당장 2층으로 올라가도록 하죠. 자.. 조금 큰 방이 어디였죠?"
 "212호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거다. 거기는 지금 아무도 쓰지 않지."
 
 뭔가 이상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 사람들. 이상한 걸 눈치챌때 쯤, 라이아나씨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이제부터 212호를, '주스 제조실'로 부르도록 하죠. 그럼.. 수혁 군은 에이드 한잔씩 더 들고 부엌으로 오렴."
 "부엌에는 체리가 있으니까 체리에이드를 만들 수 있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겁니까.

 "알았나 수혁. 블루베리 에이드 한 잔을 더 뽑아서 201호로 오도록."
 "시훈. 이기적이군요. 꼬맹이! 체리에이드 먹고 싶으니까 201호로 곧장 달려와! 체리라면 줄테니까!"
 "레모네이드가 좋아.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하는거냐.. 그런데 서서히 멀어지는 것 같이 작아져보인다.
 이거 움직인 적 없는데.. 
 어? 왜 갑자기 벽이 움직이는 거고.. 

 대체 왜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 그런데 멀어지면서도 그 수신호는 뭐야. 뭘 마시는 듯한 손동작은 뭐냐고. 그리고 시훈이 형은 왜 엄지를 치켜드는건데.

 "엑사베리온은 주스 제조기가 아니야!!"

 아무도 듣지 않을 포효가 그저 조종실에 울려퍼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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