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름, 새로운 생활 (2)
뭔가 복잡하게 이것저것 얽혀있는 것만 같은 벽면에서, 서서히 푸른 느낌을 주는 벽으로 변해갔다. 무언가가 딱 들어맞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붕 뜨는 느낌은 멈췄다.
일단 레모네이드랑 블루베리 에이드만 뽑아가기로 했다. 내 몫도 하나 더. 그런데 어디선가 "왜 아직도 안 온거야! 꼬맹이!"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기분 탓이겠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행히 슈츠가 분해되었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그리고 나서야 내가 여태 잠옷을 입고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분명 대충 옷을 던져두고 나왔었지.
에이드 세 잔을 뽑아서 201호로 갔다. 레지에 누나가 체리를 한바구니 가득 채워서 들고 있는게 아닌가.. 음. 방금 누나라고 생각했나?.. .. 뭐 상관없나.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결혼도 안했고. 누나라고 부르는게 여러모로 낫겠지.
"미스토 꼬맹이! 빨리 이거 받아!"
"뭡니까 그게. 게다가 뒤에 꼬맹이는.."
"미슬토라 부르려니 이상해. 그냥 편하게 부를거야."
"누나가 지어준 거잖아요.."
아. 무심코 누나라고 말해버렸다. 그 말을 들은걸까..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체리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들었습니까? 들었습니까 라이아나! 나도 드디어 누나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스토 꼬맹이! 다시 한번 말해봐!"
"레지에!"
라이아나 누나가 레지에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로 상처를 입혔다.
"진짜 어른이라면 그런 말 들었다고 기뻐하지 않아요."
레지에 누나가 시무룩해서 돌아와서는 괜히 나한테 체리바구니를 내밀면서 외쳤다.
"미스토 꼬맹이, 빨리 이거나 바꿔와!"
"예. 예. 레지에 누나."
"미스토 미스토 시끄럽다. 미슬토면 미슬토지 미스토는 뭐냐."
한참 늦은 타이밍에 저걸 지적하는 시훈이 형.. 밥 잘 먹다가 왜..
"아 시훈. 내가 부르기 힘들어서 멋대로 줄여부르는 겁니다"
마침 체리바구니를 들고 시훈이 형 옆을 지나는데, "겉모습도 꼬맹이 아닐까봐 하는 짓도 꼬맹이군" 하는 소리가 들린다..
와. 뒤끝 장난 아니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엑사베리온의 재료칸에 체리를 집어넣으러 자리를 떴다. 이정도 양이면 몇잔이나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레지에 누나가 질려서 다른 걸 찾을 만큼은 되겠지? 뭐, 나도 가끔씩 먹어도 상관없겠고..
확실히 에이드랑 같이 먹으니 더 맛있긴 했다. 그렇게까지 강조하는 이유가 있긴 했네.. 라이아나 누나는 모두가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즐거워 하는게 눈에 보일 정도로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어제 저녁과는 조금 다른 따뜻함이 날 감싸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뒷정리가 끝나고, 냅킨으로 입을 훔치며 겉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14살 이상으로 봐줄 수 없는 '레지에 누나'가 배려가 느껴지는 한마디를 했다.
"그런 고로, 오늘은 여기 전체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정리하도록 해. 미스토 꼬맹이."
"레지에! 쉬러 가지 말고 일해요!"
"네" 하고 시무룩하면서 지나가는 레지에 누나가 왠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어 한가한 라이아나 누나가 라보 퀘시에를 안내해주기로 했다. 원래 혼자서 탐험이나 할 생각이었지만.. 앞으로 살아야 할 곳을 무턱대고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그것도 나름대로 곤란하니까..
잠깐.. 레지에의 수수께끼 연구소니까..
"이 연구소의.. 가장 맨 위에 있는 사람이 레지에 누나인건가요?"
"음? 그런 셈이 되지~"
대단하다.. 엄청난 사람이었네.
2층부터 4층까지가 관리자 전용 공간이라고 해서.. 라이아나 누나, 레지에 누나, 시훈이 형. 나, 그리고 몇명의 유저들이 더 있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총 1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을 관리자라고 부른다고.. 아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2층부터 4층에 놓인 어느 시설이든 접근하려고 시도하면 방위 기능이 작동한다는 모양이다.
내가 오늘 받은 Accessible Registered Card. 총칭 'Arc'.. 그 안에 Access Level이 또 따로 존재한다는 모양이다. 물론 난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뭐하러 저렇게 구분을 또 해놓았을까?
"Mistletoe.. 제 새로운 이름이라고 했는데, 이런건 뭐라고 칭하나요?"
"AC. 액세스 코드.. 혹은 AN, 액세스 네임이라고 불러. 원래는 코드라고 부르는 게 맞지만.. 사실상 이름처럼 쓰고 있어서, 제 2의 이름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가.. 대충 내가 이해한 대로 생각해보면 그냥 제 2의 이름.. 정도네. 편하게 부른다고 해서 미슬토에서 미스토.. 그래. 미스토가 내 새로운 이름이라는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3층에 도착했다. 각 층마다 휴게실이 두 개씩 있어서, 거기에서 잠깐씩 쉴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3층에는 휴게실이 하나만 있었다. 대신 몇몇 공간엔 따로 쉴 수 있는 공간이 붙어있다고 한다.
"아직 사람들이 출근할 시간이 안됬으니까 5층부터는 못 보여주고.. 3층에 컨트롤 유닛.. 조종기를 밖에서 차근차근 들여올 수 있는 곳이 있어."
흠.. 밖에서 본 적은 없으니까 잘 모르겠다. 들어오기까지의 기억이 없어서.. 질문이나 해보기로 했다.
"라이아나 누나는 여기서 얼마나 있었어요?"
"글쎄~ 딱히 신경쓰진 않았는데.. 4년 쯤 됬을까?"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4년.. 인가. 역시 저런 강인함은 오랜 시간 끝에 얻어지는 거였나..
"아, 주스 제조기 말인데.. 조만간 레지에가 만들어 낼거야. 그때까지는 잘 부탁할게."
"... 진짜요?"
거짓말이 아니었네. 정말로 엑사베리온을 주스 제조기로 써먹을 셈인가. 조만간 레지에 누나가 만들어 낼거라는 말 보다도.. 엑사베리온이 주스 제조기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혹시나, 만약 혹시나이긴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거나, 혹은 빠르게라도 실전 연습에 들어가게 되면 레지에 커스텀 시리즈를 빌려줄거야.. 음. 어쩌면 새로 만들어줄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게 그렇게 뚝딱뚝딱 나오는건가요."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비슷한 느낌이야."
그야말로 수수께끼라는 이름이 그야말로 걸맞는 그런 연구소가 아닌가. 뚝딱뚝딱 하면 나온다고?.. 엑사베리온을 처음 봤을 때가 갑자기 떠오른다.
"그러고보니 액세스 네임도 얻었겠다.. 레지에는 미슬토라고 부르는 것보다 미스토라고 부를 모양이고.. 그러니까 나도 미스토라고 부를게~ 부르는 데에 혼란이 생기면 좀 그렇잖아?"
"아, 네. 라이아나 누나."
누나는 아크를 꺼내 무언가를 건드리더니, 그저 줄만 죽 그어져 있던 벽에 숫자가 나타났다.. 9 59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아, 현재 시간을 보여주는 거구나.
일단 누나가 벽을 슬쩍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길래 나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슬슬 10시니까, 사람들이 하나 둘 출근할거야. 구경할래?"
"그나저나 아까 그거 어떻게 한거에요?"
"아. 가면서 알려줄게."
대체 왜 몇층이나 있을까 했었는데, 연구소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라이아나 누나는 일단 그들과 다 아는 듯, 반갑게 인사한다. 멍하니 가만히 서 있다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길래 가만히 따라갔다.
"자, 메카닉 팀 여러분들. 미스토가 레지에 커스텀을 쓰게 되면 자주 보게 될거야. 아, 여기는 미스토. 새로 들어온 유저에요. 일단은 레지에 커스텀을 타게 될 예정이지만.. 전용기가 따로 있어요."
"이야, 이런 꼬마가 벌써 전용기가 있다고? 장난 아니게 실력이 좋은가본데? 레지에 그 꼬맹이도 꽤 하는구만?"
라이아나 누나는 그 말에 아무 말도 못한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용기가 있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되어야 한다는 걸까..
이어서 오른쪽에 있던 뒤로 묶은 머리를 한 여성이 얇은 목소리로 답했다. 머리 묶은걸 보니 뭔가 소연이랑 비슷해 보이네. 다만 차이점이라면 금발 정도인가..
"뭐, 대충 레지에한테서 연락은 들었어."
"레지나! 염색이 다 풀린 거 같은데?"
"아, 라이아나. 매번 씻기 귀찮아서 그러긴 했는데.. 별 소용이 없더라고. 어차피 금발이니까. 그냥 귀찮더라도 머리만은 매일 감기로.."
... 갑자기 자기들끼리의 세계로 들어가버렸다.. 멍한 나에게 누군가가 굵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이, 꼬맹이! 이름이 뭐냐?"
메카닉 팀은 총 7명, 그 중에서 가장 날렵해보이는 흑발의 사내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랑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아서 순간 엄청나게 당황했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마.
"아, 아.. 스.. 미스토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액세스 네임을 쓰라고 했었지.. 하마터면 수혁이라고 본명을 말할 뻔 했군.
"하하, 뭘 그리 놀라고 그러냐. 나이도 말해줘야지 이 녀석아."
"아, 아아. 열 여섯입니다."
"뭐야, 16년밖에 안 산 녀석이 벌써 전용기가? 시훈이 녀석 급의 마이스터 같은거냐?"
? 마이스터?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윤이 누나가 했던 말..
'마이.. 아니, 프로페서!..'
발음이 뭔가 비슷한 감이 있어서 착각했나.
"이봐, 하젠.. 마이스터는 그런 뜻으로 쓰진 않잖아."
"아아, 그렇지. 유리.. 그래. 그러니까 말이지, 잘 모를 것 같으니 말해주자면 마이스터라는 건.. 컨트롤과 메인터넌스를 동시에 해내는.. 그래, 우리같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괴물같은 녀석이야."
마이스터에 대해 딴지를 거는 검은 장발의 여성이 유리..
시훈이 형.. 생각한 것 이상으로 굉장한 인간이네. '이겨내려면 강해져야 한다' 니 뭐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는 건가..
"뭐 너도 꽤나 실력있는 유저라는 거겠지. 가루가 되어서 들고 오지만 않으면 수리해 줄테니까 안심하라고!"
말도 안되는 오해를 해 버린 것 같다. 하.. 하하..
"여.. 열심히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맡겨만 두라고! 혹시라도 원하는 장비가 있으면 말이지..."
.. 말만 하면 다 만들어 줄 것 같긴 하지만.. 저쪽 관련 해서 뭐 정보라도 알아두지 않으면 부탁도 못하겠고.. 이 사람들은 날 완전히 실력자로 알고 있네..
"오늘은 수고했어. 그럼 내일은 시훈 씨가 비니까.. 뭐. 일단 자고. 또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오늘 준 옷 잘 개어놓고.. 내일부터 그거 입어. 방 안에 건조기까지 다 있으니까.. 괜히 방 안에 어질러놓고 그러면 안 돼."
어, 그러고보니 내가 벗어둔 잠옷이.. 두리번 거리는 날 향해 라이아나 누나가 침대 위를 가리키며 "저기 있어." 라고.. 진짜다.
"어.. 고마워요 누나."
"아무데나 옷을 벗어두지 마."
으.. 음.. 뭐 여기 들어올 때 짐 같은 건 들고 오지 않았지만 뭔가 조금 신경쓰이긴 하네.. 대충 내가 레지에 누나한테 한대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때 쯤이었던건가.
"나도 뭐, 남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즐거워. 앞으로 잘 지내보자. 미스토"
"네, 라이아나 누나."
"일어나라. 수.. 아니, 미스토."
수혁이라는 이름이 조금 더 익숙한지, 귀에 익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말하는 건 아닌것 같고.. 머리맡에서 나는 소리인데..
으.. 으으..
대충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자, 작은 카드.. 아크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가.
"통신기능이 있다고는 말 안했잖아.."
한숨을 한번 쉬고, 슬슬 일어나기로 했다. 라이아나 누나가 또 방을 확인할 지도 모르니.. 말한대로 잘 개놓고, 빨래는 잘 널어놓고.. 아크의 회색 마크를 3초 정도 꾹 누르고.. 시간이 나타나면 밑의 'Vision Mode'라는 항목을 확인해보고 그걸 On으로 하면.. 오오. 벽을 향해 아크에 숫자가 나타난다. '7 30'..
어제도 한번 해 봤지만 정말 신기한 기능이다.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비춰보는데 나도 모르게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어이, 미스토. 들어간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아크를 문쪽으로 향했다. 사람쪽에 닿아도 숫자가 나타나는구나.. 그 곳에는, 시훈이 형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신기해도 사람한테는 쏘지 마라.."
"아, 시훈이 형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하"
자연스럽게 201호로 향하는 발걸음. 나도 어지간히 배가 고팠나보다.
"수혁, 아니 미.. 미스토. 아침을 먹지 않으면 훈련을 버티기 힘들테니 일단 아침부터 먹도록 하지.".
저 인간 답지 않게 왜 말을 버벅이는지 모르겠다만.. 설마, 비젼 기능때문인가? ..엄청나게 굴릴 생각인가?..
그러고보니 어제는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간 감이 들지만, 모두들 시훈이 형이라고 하던데.. 지금이 질문하기엔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되었다.
"시훈이 형, 형은 왜 모든 사람에게 '시훈'이라고 불려요?"
"그게 내 액세스 네임이기 때문이다."
의외다. 어, 그럼 '진 시훈'이 본명이 아니라는 건가..
"뭐, 다들 너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참고로 메카닉 팀과 리서치 팀 이외에는 액세스 네임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모르지. 그러니까 넌 앞으로 수.. 미스토라는 이름을 잘 새겨두는게 좋다."
"네.. 적응은 잘 안되지만요."
"수혁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나면.. 어쩌면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위장.. 같은 느낌인가. 이 형도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어제 레지에 누나가 했던 '넌 운 좋은 녀석이야' 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앞으로도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뭐, 매일 들어오던 말이잖아요. 저도 앞으로 강해질 생각입니다."
옆을 슬쩍 바라보자, 그 무뚝뚝한 시훈이 형이 미소를 띠고 있다. 혹시라도 비웃는 건 아닐까..?
부엌에 도착하자 레지에 누나가 그 작은 손으로 이것저것 만들.. 고 있었는데, 결과물은 프라이드 에그밖에 없다. 실망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레지에 누나가 눈썹을 들썩이며 소리쳤다.
"난 이것밖에 못한다!"
"네.. 네."
의외라든가 뭐.. 그런 생각은 안든다.. 오히려 요리를 잘했으면 더 이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확실히 매치가 안되잖아 매치가.
"뭐하고 있어! 가져가 미스토 꼬맹이!"
"네.. 네."
모양도 뒤죽박죽인데.. 뭐, 맛만 있으면 되겠지? 옆을 보니 이미 라이아나 누나랑 시훈이 형은 자기 몫의 프라이드 에그를 들고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시뮬레이션 룸으로 가겠지.. 엄청나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