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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시리즈


원작 |

5화. 유키노의 가정부로 일하는 건 좋지만……


유키노네 집에 얹혀살며 가정부 일을 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
갑작스럽게 변한 생활환경과 2배로 늘어난 일의 양에 처음 며칠은 허덕였던 나였으나……
이제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파악이 끝난 상태. 겉멋으로 주부의 프로를 자칭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그런 내게도 고역인 일이 하나 있었으니…….

유이: 아앗! 힛키, 이거 내 팬티 아니라고!

유키노: 하치만, 옷장에 또 내게 아닌 속옷들이 섞여 있던데. 대체 언제까지 이런 실수를 저지를 셈이니?

하치만: ……

하지만: 아니, 그거 솔직히 무리라고. 어느 게 누구 속옷인지 내가 대체 어떻게 아냐고……

유이: 그런 것치고는 브래지어는 틀리지 않고 제대로 구분해놓네?

하치만: ……우연일 뿐이다.

시즈카의 속옷이야 오랫동안 봐와서 알고 있고, 브래지어도 유키노와 유이의 사이즈가 확연히 다르다 보니 구분하기 쉽지만……
사이즈도 똑같은 팬티를 대체 무슨 수로 구분하냐고…… 브래지어와 팬티가 세트일 때는 대충 알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정말 답이 없다.
처음에는 대충 빗치스러운 속옷을 유이 걸로, 청순해 보이는 속옷을 유키노 걸로 보면 되나 했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고.
그 유키노시타 유키노가 그런 섹시한 팬티를 입고 있었을 거라곤 솔직히 생각도 못 했다……
그건 그렇고…….

하치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희 속옷까지 빠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유키노: 어머, 주부의 프로를 자칭했으면서 벌써 힘든 소리를 하는 걸까?

하치만: 아니, 별로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나한테 속옷을 보이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는 거다.

유이: 응? 별로. 혹시 힛키는 부끄러웠어?

하치만: 그야 부끄럽지. 아무리 친구라지만 아내도 아닌 여자의 속옷을 빨면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겠냐? 난 오히려 너희가 어떻게 그렇게 무덤덤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만.  

유이: 헤에~ 힛키는 우리 속옷이 많이 신경 쓰였구나~

유키노: 하치만, 세탁하라고 맡긴 걸 욕정 해서 더럽히는 건 곤란한데.

하치만: 아니아니, 그런 짓 안 하거든? 

유이: 힛키, 정 못참겠으면 말해. 힛키의 부탁이라면 팬티 한장 정도는 줄 수도 있으니까.

유키노: 그러네. 하치만이 세탁한 팬티를 입었다가 임신해버려도 곤란하니까, 안전을 생각하면 차라리 따로 먹이를 주는 게 낫겠네.

하치만: …… 

정말 세월이 흐르긴 흘렀구나…… 그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에게 성희롱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하치만: 그러니까 그런 짓 안 한다고. 그렇게 걱정이면 역시 속옷 정도는 너희가 빨아라.

유키노: 그래선 가정부로 쓰는 의미가 없잖니?

하치만: 그럼 빨래는 계속 할 테니까 다 마른 속옷 정도는 직접 찾아가라. 거실에 개어놓아 둘 테니까.

유키노: 하치만, 너는 매번 속옷을 거실에 늘어놓을 생각이니? 시즈카 선생님과 둘이 살 때도 그랬어?

하치만: 둘이 살 때에야 안 그랬지만……

유이: 그래, 힛키! 속옷을 거실에 늘어놓다니 보기에도 안 좋고! 부끄럽고! 

하치만: 남자인 내게 속옷을 빨개하고 옷장 속을 보이는 건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거실에 놔두는 건 부끄러운 거냐…… 니들 부끄러움의 기준이 좀 이상한 거 아니냐?

유이: 그렇지만 힛키는 힛키고.

유키노: 아니면 하치만은 우리가 너를 이성으로 의식해줬으면 하는 걸까?

하치만: 그건 아니지만……

유키노: 그럼 문제없겠네. 하치만이 어느 게 누구의 속옷인지를 빨리 기억하면 될 일이야.

하치만: 하아…… 그럼 적어도 세탁 바구니 정도는 따로따로 써줘. 

친구에게 엄한 생각은 하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그렇지 않나? 하지만 쟤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고……
하아…… 나만 괜히 혼자 의식하는 걸까…….


×         ×         ×


유키노네 집에 신세를 지게 된 이후론 늘 넷이서 보낸 주말이다만.

유이: 흐읏…… 흐으으읏……

유키노와 시즈카가 볼일을 보러 나가, 오늘은 이 넓은 집안에 유이와 나 둘 뿐.

유이: 흐으으읍……  

고요한 거실에 유이의 야릇한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유이: 흐읏…… 후우우……

상기된 얼굴로 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문뜩 젊은 날의 그녀가 떠올랐다.

하치만: ……

유키노시타 유키노와 유이가하마 유이를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석양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유키노를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아련하게 웃던 유이의 모습에 가슴이 뛰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희미해진 그리운 학창 시절, 나는 그녀들을 이성으로서 의식하고 있었다.
흑역사투성이인 인생이지만, 그녀들과 함께한 그 청춘 시절만큼은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하치만: 뭐,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하치만: 내 기억 속의 순수하고 수줍음 많던 유이가마하는 분명 추억보정이 걸린 거겠지……

하치만: 그렇다고 해도 시간이란 참 잔혹하구나…… 그 유이가하마가 지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러고 있으니……

유이: 힛키, 아까부터 뭘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하치만: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부탁이니까 넌 제발 옷 좀 제대로 걸쳐 입어라. 

유이: 나 지금 요가하는 중이니까.

하치만: 아니, 그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요가복은 노출이 너무 심하잖아…… 겨울이기도 하니까 추리닝 같은 걸 입고 하라고……

유이: 그러면 요가복을 산 의미가 없잖아! 

하치만: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니들 날 너무 편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 나도 일단은 남자거든? 이러다가 등 좀 밀어달라는 소리까지 나올 것 같아서 저 솔직히 좀 무서운데요.

유이: 힛키, 저질! 진짜 징그러!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잖아!

하치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유이: 히, 힛키가 밀어달라고 부탁하면 밀어줄 수는 있지만……

하치만: ……

유이: 그것보다 힛키, 힛키도 같이 요가 하지 않을래?

하치만: 됐어. 난 그만 방에 들어갈 거니까 너 혼자서 해라.

유이: 그런가. 같이하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말해~

하치만: 요가 같은 거 앞으로도 할 생각 없거든?   콰앙

하치만: ……

정말 내가 이상한 거냐? 쟤들 나를 너무 편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고……
나를 의식한 나머지 불편하게 지내는 것보다야 낫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미 친구라기보다는 가족이라는 느낌인데요? 거의 코마치 수준.
그만큼 나를 신뢰하는 거로 생각하면 기쁘긴 하지만 이쪽은 아직 그 영역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좀 더 배려해줬으면 좋겠다만…….

하치만: 그나저나…… 

하치만: 새삼스럽지만, 가슴이 진짜 크긴 크구나……

하치만: ……

안되지 안돼. 유이는 내 친구다. 날 믿고 있는 친구에게 음흉한 생각을 품을 순 없지. 하물며 난 아내가 있는 몸.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토츠카를 세자.
토츠카가 하나, 토츠카가 둘, 토츠카가 셋, 토츠카가 넷, 토츠카가 다섯…….

하치만: 앗……


×         ×         ×


시즈카: 다녀왔습니다……

하치만: 아, 어서 와 시즈카. 

시즈카: 어……

하치만: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시즈카: 아니, 별일 없었다.

하치만: 별일 없었던 표정이 아닌데. 무슨 일인데 그래?

시즈카: ……돌아오는 길에 어떤 어린아이가 내 눈앞에서 넘어지길래 일으켜 세워졌더니……

하치만: 어, 세워줬더니?

시즈카: ……할머니 고맙습니다. 라는 소리를 했다……

하치만: ……

시즈카: 후후후…… 난 벌써 할머니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되어버린 거군…… 50대가 되었다는 게 솔직히 실감이 안 갔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실감이 확 나더군……

하치만: 아이가 한 소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인생은 50부터라는 말도 있고.

시즈카: 전혀 위로가 안 된다만……

하치만: 게다가 시즈카는 동안이니까. 아직 40대 중반으로 밖에 안 보인다고.

시즈카: 그, 그래…?

하치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내 눈에는 지금도 시즈카는 젊고 예쁘다고.  쓰윽 슥

시즈카: 하, 하치만…!

뭐, 솔직히 립서비스지만.

하치만: 시즈카, 저녁 거의 다 돼가는데 어떻게 할래? 기다렸다가 밥부터 먹을래, 아니면 목욕부터 할래?

시즈카: 음…… 그, 그럼 하치만부터 하는 걸로……

하치만: 네?

시즈카: 하, 하치만부터…… ///

하치만: ……

하치만: 식을 줄을 모르는 애정이 기쁘긴 하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솔직히 좀 깨는군……

시즈카: 조, 조금 전이랑 말이 다르잖아!!

하치만: 농담이야. 뽀뽀면 되겠어?

시즈카: 으, 응!   두근두근

하치만: 그래, 오늘 하루도 수고했……  삑삑삑삑 

시즈카 & 하치만: !?     깜짝             삐비빅  철컹

유이: 다녀왔습니다! 

시즈카: 어, 어서 와라.

하치만: 어서 와 유이. 오늘도 수고했어.

유이: 아, 시즈카 선생님도 와계셨네. 지금 오신 건가요?

시즈카: 그래. 나도 지금 막 온 참이다.

하치만: 유이, 저녁 안 먹고 왔지?

유이: 응! 힛키, 오늘 저녁은 뭐야?

하치만: 돼지고기랑 마늘쫑 볶음, 줄기콩 깨무침에 단호박니모노, 그리고 된장국이다. 

시즈카: 음, 하치만의 된장국은 맛있지.

유이: 그렇구나. 오늘은 완전히 일식이네.

하치만: 어제는 네 희망대로 카레 만들어 줬잖아? 골고루 먹어야 몸에 좋은 거라고.

유이: 벼, 별로 반찬 투정하는 거 아니고……

하치만: 오늘은 안 좋아하는 반찬이라고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

유이: 아하하, 그런가……

하치만: 이따가 유키노도 돌아오면 네가 좋아하는 피넛 버터 초콜릿 파이 디저트로 줄 테니까.

유이: 어!? 정말? 힛키가 사온 거야?

하치만: 그래.

유이: 힛키, 고마워! 아, 시즈카 선생님, 씻는 건 어떻게 하실 거에요? 먼저 씻으실 건가요?

시즈카: 어? 아 아니다. 네가 먼저 쓰렴.

유이: 그럼 먼저 씻고 올게요―   후다닥

하치만: 나 참, 완전 애 엄마가 된 기분이군…… 

시즈카: 아빠가 아니라 엄마인가.

하치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주부는 어머니란 이미지가 강하니까 말이지.

시즈카: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하치만.

하치만: 응? 왜 그래?

시즈카: 그…… 그게 아직 이다만…… 

하치만: 어? 아아, 뽀뽀 말이야? 

시즈카: 그, 그래. 좀 전엔 유이가 와서 못 받았으니까.

하치만: 나 참, 애가 여기 또 있었군. 그것도 13살이나 연상의 애가. 

시즈카: 나, 나이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잖아!

하치만: 미안미안. 자―

시즈카: 으, 응……   두근두근

유이: 아, 맞다! 힛키 나 물어볼 거 있었는데―

하치만 & 시즈카: !?   깜짝



하치만: 맛은 어때? 네 입맛엔 맞는 거 같아?

유키노: 그래, 괜찮아.

하치만: 그렇다니 다행이네. 근데 내가 식탁에 같이 앉아있을 필요성이 있는 거냐?

유키노: 그래야 요리가 마음에 안 들었을 때 바로바로 가정부에게 지적할 수 있으니까.

하치만: 그것 참 엄격하네.

유키노: 그래? 하치만에 대해선 오히려 무르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무른 거면 직장에선 대체 얼마나 엄격한 거냐고…….

하치만: 야 유키노, 근데 너 매번 이렇게 늦게 먹어도 괜찮은 거냐? 배고플 텐데 그냥 밖에서 먹고 들어오지 그러냐? 

유키노: 어머, 하치만은 저녁을 두 번씩 차리는 게 귀찮아진 걸까?

하치만: 아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고.

유키노: 후후, 농담이야. 나야말로 매번 저녁을 따로 차리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하치만이 차려주는 요리가 먹고 싶었으니까.   

하치만: 미안하긴, 가정부로 고용된 몸으로서 그 정도는 당연하지.

유키노: 그러네. 하치만을 가정부로 들이길 정말 잘한 것 같아.   싱긋

하치만: 그, 그러냐……   긁적긁적

유키노: 잘 먹었어. 오늘도 고마워.

유이: 아, 유키농 저녁 다 먹었어? 그럼 우리 빨리 초콜릿 파이 먹자!

유키노: 초콜릿 파이?

하치만: 아, 아까 낮에 장 보면서 사왔어. 너오면 같이 먹자고 했더니 2시간 넘게 저렇게 동동거리더라.

유키노: 미안해 유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지 그랬니.

유이: 어? 아냐, 유키농을 빼놓고 먹을 순 없는걸. 기왕이면 다 같이 먹는 게 더 맛있고! 나야말로 유키농이랑 같이 저녁 먹지 못해서 미안해.   

하치만: 네네, 됐으니까 유이는 테이블에 늘어놓은 거나 치워라. 시즈카―!!

시즈카: 음? 무슨 일이냐?   탈칵

하치만: 시즈카도 나와서 같이 초콜릿 파이 먹어.

시즈카: 아, 아까 말한 그건가.

유이: 시즈카 선생님은 피넛 버터 초콜릿 파이 드셔 보셨나요?

시즈카: 아니, 먹어본 적 없다. 파이는 정말 이따금 씩 먹는 정도니까.

유이: 전에 몇 번 먹어봤는데 되게 맛있어요~ 선생님도 분명 마음에 드실 거에요. 그렇지 유키농?

유키노: 그러네. 시즈카 선생님의 취향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맛있었어요.

시즈카: 호오― 그건 기대되는군.

유이: 힛키, 아직 멀었어―?

하치만: 야야, 뭐가 그렇게 급하냐? 지금 같이 마실 밀크티 타는 중이니까 좀만 더 기다려라.

유이: 네―

유키노: 후후후……

유이: 응? 왜 그래?

유키노: 예전엔 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싫었었는데,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어져……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로 믿겨지지 않아……

유이: 유키농……

시즈카: 유키노……

유키노: 이런 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이: 응, 그러네……

시즈카: ……



유이: 음― 역시 맛있어!

시즈카: 그렇구나. 초콜릿 파이라길래 엄청나게 달 줄 알았는데 적당히 달콤한게 괜찮은 맛이었다.

유키노: 이런 늦은 시간에 이렇게 열량이 높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을지 조금 걱정이지만요.

하치만: 어쩌다 한번 그러는 건데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게다가 니들 이제 몸무게 1, 2kg 늘어난 거로 신경 쓸 나이도 아니잖냐?

유이: 실례야! 여자가 몸무게에 신경 쓰는 건 나이랑 상관없다고!

유키노: 하치만은 여성에게 몸무게와 나이에 대한 얘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걸까?

하치만: 그래, 미안하다. 근데 진짜로 신경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너희 둘 다 굉장히 날씬하니까.

시즈카 (어라…? 둘……?) 

유이: 그러네. 응,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

하치만: 그러고 보니 유키노도 운동 같은 거 하고 있는 거냐?

유키노: 산책이라면 곧잘 했었지만 유이처럼 꾸준히 운동을 한 건 아냐.

하치만: 그런데도 잘도 그런 몸매를 유지하는구나. 먹어도 살 안 찌는 체질이라는 건가?

유이: 응, 유키농 정말 부럽다니까. 나는 많이 먹으면 쪄버리니까.

하치만: 아니, 그게 보통이거든?

유키노: 꼭 그런 건 아냐. 하치만이 가정부로 와주기 전에는 식사를 거를 때도 잦았으니까……

하치만: 야야, 제대로 안 챙겨먹으면 몸 나빠진다고. 일이 그렇게 바쁘냐?

유키노: 그런 건 아니야. 식욕이 없었을 뿐.

하치만: 그래도 앞으론 거르지 말라고. 일찍 나가게 되더라도 아침은 꼭 먹고 가라. 새벽에 일어나서라도 차려줄 테니까.

유키노: 후후, 그래.

유이: 그러고 보니 시즈카 선생님은 운동 같은 거 하시나요? 

시즈카: 어? 아, 아니 특별히 운동은 안 하고 있다만.

유이: 헤에― 시즈카 선생님도 살 안 찌는 체질이신가 봐요? 술도 자주 드시는데 여전히 날씬하시고. 

시즈카: 아하하, 뭐, 뭐 그렇지……

하치만: 훗……

시즈카 (크윽…… 그 쓴웃음은 뭐냐 하치만…… 그야 요즘은 예전보다 뱃살이 좀 나오긴 했지만……)

시즈카: 뭐, 뭐 그렇긴 하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앞으론 운동도 좀 해야겠군.

유이: 아, 그러면 저랑 같이 요가 하실래요?

시즈카: 요가인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만……

유이: 괜찮아요.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유키농도 주말에 같이 하자―

유키노: 아냐, 나는 요가 교실 같은 곳은 좀……
 
유이: 괜찮아! 이 집 거실 넓으니까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하치만: 야야, 설마 주말마다 집에서 그 짓거리를 하려는 거냐?

유이: 힛키도 같이 할래?

하치만: 안 한다고 했잖아. 집에서 요가를 하든 레슬링을 하든 상관없지만, 할거면 좀 더 점잖은 복장으로 해라.

유이: 힛키, 혹시 내가 요가복 입은 모습이 신경 쓰였어?

시즈카: 어?

하치만: 바보냐? 전혀 그런 거 아니거든? 아무리 친해도 코마치처럼 가족인 건 아니니까 최소한의 신경은 쓰라는 거다.

유키노: 그러네. 요가를 하다가 하치만에게 임신공격 당하면 곤란하니까, 안전을 생각하면 점잖은 옷을 입는 게 낫겠네.

시즈카: ……   

하치만: …… 

하치만: 유키노…… 부탁이니까 그런 농담은 최소한 아내가 없는 데서 해라……

유키노: 어머, 죄송해요 시즈카 선생님. 깊은 뜻은 없었어요. 

시즈카: 아, 아냐, 괜찮다……

위이이이이이이잉

유이: 응? 이 시간에 누구지? 아……

유키노: 왜 그러니?

유이: 아, 아무것도 아냐― 나 잠깐 전화통화 좀 하고 올게.   후다닥

하치만: 묘하게 표정이 안 좋았는데……

시즈카: 그러게 말이다.

유이: 그러니까 할 생각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제 와서 어쩌라고!

유키노: …… 

하치만: ……

시즈카: ……

유이: 뭐!?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유키노: …… 

하치만: ……

시즈카: ……

유이: 나도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라고! 뭐? 이젠 됐어! 의절이든 뭐든 마음대로 해!!

유키노: …… 

하치만: ……

시즈카: ……

유이: 어?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유키노: 유이, 무슨 일이니?

유이: 어? 뭐가?

하치만: 아니, 네가 화내는 소리 여기까지 다 들렸다만……

유이: ……

유이: 아하하…… 너무 큰소리를 내버렸나 보네…… 부끄럽게……

하치만: 누구한테서 온 전화길래 그래? 네가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유이: 그냥 부모님이랑 통화한 것뿐이야…… 

시즈카: ……

유이: 대체 언제 결혼할 거냐고, 결혼할 생각이 있긴 한 거냐고 화를 내더라고. 예전에는 결혼하지 말고 계속 같이 살자느니 뭐니 했었으면서 정말 너무하지 않아?

유키노: ……

하치만: ……

시즈카: ……그 심정 나도 안다. 나도 하치만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가족 친척들에게 계속 그런 잔소리를 들었으니까.
      
유이: 네, 정말 지긋지긋해요. 

시즈카: 그럴 때는 그냥 혼활 중이라고 적당히 둘러대는 게 정신건강에 더 좋을 거다. 그런 잔소리를 일일이 신경 써봐야 너만 스트레스니까.

유이: 그렇죠…… 지금까지는 그렇게 했었는데…… 설마 의절하겠다는 말까지 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하치만: 뭐…? 의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유이: 사지 멀쩡하면서 계속 이렇게 결혼도 안 하고 궁상떨고 있으면 의절하겠대……

하치만: 아니, 그야 부모님의 심정도 이해는 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의절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시즈카: 네 부모님도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닐 거다. 아마도 의절이란 극단적인 소리를 하면 혼활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딸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신 거겠지.

유키노: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유이: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의절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정말 너무해……

하치만: 우리 또래의 부모님들은 이미 황혼기 시니까 말이지. 이제는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죽기 전에 하다못해 하나밖에 없는 딸이 결혼하는 모습 정도는 보고 싶으신 거겠지.

유이: ……

유이: 그런 소리를 해도…… 무리인걸……

유키노: ……

하치만: ……

시즈카: 나의 경우는 혼활은 열심히 했었으니까 말이지…… 당장 어떻게 결혼하지 않더라도, 결혼할 생각이 있다는 것만 보여드리면 어느 정도는 안심하실 거라고 본다만.

하치만: 그렇군. 결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드려도 의절하겠다는 소리는 안 나올지도 모르겠네. 

유이: 아하하…… 그럴 마음도, 그럴 상대도 없지만……

하치만: 그럼 가짜 애인을 만드는 건 어때?

유키노: 가짜 애인? 유이의 부모님을 속이겠다는 거니?

하치만: 그래.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처럼 가짜 애인을 부모님께 소개하는 거지. 뭐, 뒤로 미뤄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당장은 부모님도 안심하실 테고, 결혼하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다는 걸 아시게 되면 의절 같은 극단적인 소리도 더는 안 하시겠지. 

시즈카: 그야말로 임시방편이구나.

하치만: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이대로 부모님과의 사이가 틀어져 버리는 것보단 낫겠지. 유이, 하루만 애인행세를 해달라고 부탁할만한 사람 없어?

유이: 그런 걸 부탁할 만한 상대 없는걸…… 

하치만: 넌 아는 사람 많잖아? 학교 동료라든가, 어디 다니면서 친해진 사람이라든가, 부탁할만한 사람 정말 하나도 없는 거냐?

유이: ……학교 선생님 중에 계속 나한테 들이대는 이혼남이 하나 있긴 하지만……

하치만: 이혼남인가…… 어차피 가짜니까 괜찮지 않겠냐?

유이: 그 사람 점잖은 척하면서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계속 들이댄다고…… 내가 노처녀라고 만만히 보는 걸 거야. 진심 기분 나빠…… 그런 인간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간 그냥은 안 끝날 거라고……

하치만: 그렇겠군……

유키노: 그러면 하치만이 애인행세를 하는 건 어떨까?

시즈카: !?

유키노: 유이, 너희 부모님은 하치만을 지금도 기억하고 계시니?

유이: 어, 어? 아빠는 본 적 없으시고, 엄마도 학생 때 몇 번 본 게 전부니까 지금은 아마 기억 못 하실 거로 생각하는데……

하치만: 야야, 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유부남이라고.

유키노: 진짜로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니. 게다가 얘기를 꺼낸 건 하치만이잖아?

하치만: 그건 그렇지만……

유키노: 시즈카 선생님, 유이에게 하루만 하치만을 빌려주실 순 없을까요?

시즈카: ……

유이: 어!? 아, 아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난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잠깐 뒤로 미루는 거에 불과하고…… 정말로 의절하게 되더라도…… 괜찮으니까……
      
하치만: 유이……

시즈카: 하치만, 난 괜찮다. 유이의 맘고생을 나는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도 궁지에 빠진 제자를 못 본 척 할 수는 없으니까. 하치만을 빌려주는 걸로 부모님과 의절하는 걸 막을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빌려주마.

유이: 시, 시즈카 선생님……!

유키노: 저도 감사드릴게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치만, 시즈카 선생님도 허락하셨으니 괜찮지?

하치만: 시즈카가 괜찮다면 나야 뭐 상관없지만.  긁적긁적

유이: 응, 고마워 힛키. 잘 부탁할게.

시즈카: 그런데 부모님께는 하치만을 뭐라고 소개할 생각이냐? 전업주부를 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치만: 아……

유이: 그, 그러네요. 대충 회사원이라고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요?

유키노: 그거라면 내 비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 되지 않겠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니까.

하치만: 뭐, 어쩔 수 없군. 



해서, 나는 유이가하마 유이의 애인행세를 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유이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유부남의 몸으로 친구의 부모님을 속이는 건 솔직히 껄끄럽지만, 달리 마땅한 상대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직접 도와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하치만: …………

그런데 유이는 왜 결혼을 안 하는 걸까?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외모도 성격도 좋은 유이다. 가만히 있어도 다가오는 남자는 많았을 테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거다.
무성애자인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유이가하마 유이가 무성애자일 리가 없다.
그랬다면 오래전 그녀가 내게 고백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왜 유이는 꽃 한 번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길을 택한 것인가?
한가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가능성을 부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무려 15년이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나를………….

하치만: …………

그럴 리가 없지. 도끼병에도 정도가 있다. 역시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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